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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월남전에 가다 (제1진 참전수기)

해병 월남전에 가다 (제1진 참전수기)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 최우식(해간 33기) 1. 출발에 앞서 월남 파병부대로 포항 제1사단 제2연대가 결정된 후 196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을 대비한 훈련은 연일 계속 되었다. 전투의 가장 기본 훈련인 각개 전투가 4시간, 그리고 나머지 4시간은 월남의 기후, 풍토, 지리 그리고 게릴라 전법에 관한 것이었다. 소대장들은 각자 교안을 짜랴, 훈련을 시키랴, 보충병들을 받아드리랴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한여름의 더위도 잊은 듯 했다. 8월 하고도 중순에 접어들자 날씨는 폭염 그대로 찌는 한낮의 더위가 병사들의 군복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월남에 가면 땀께나 흘린다는데 땀 흘리는 훈련도 겸하는 듯싶을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다. 그러나 파월준비 병사들에게..

濟州道와 女軍

濟州道와 女軍 조선시대 제주에 女軍이 있었다 김상헌 남사록에 성안에서 보초서던 여정(女丁) 기록 데스크승인 2016.01.25 좌동철 기자 | roots@jejunews.com 조선시대에 제주어로 ‘예청’이라 불리던 여자병사인 여정(女丁)이 있었다. 1601년 제주에서 발생한 모반사건으로 처벌될까 두려워하던 제주도민을 달래기 위해 안무어사(安撫御使·지방에 파견된 특사)로 온 조선 중기 문신 김상헌(1570~1652)이 쓴 기행문인 남사록(南?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김상헌은 “내가 알아보니 제주의 성안에 남성(男丁)은 500명이고, 여정(女丁)은 800명이다. 남성이 적어서 만약 사변이 발생해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에서 건강한 부녀자를 골라 성 위에 세웠다”고 했다. 힘이 센 여자들을 선발, 남자들..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美해병대 박물관에 선다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美해병대 박물관에 선다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美해병대 박물관에 선다 정성택기자 입력 2015-07-24 03:00:00 수정 2015-07-24 03:00:00 중공군 포위 뚫고 ‘흥남철수’ 이끌어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시의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세워질 장진호전투 기념비 디자인. 국가보훈처 제공 6·25전쟁 당시 ‘기적의 흥남철수’로 유명한 장진호전투 기념비가 미국에 세워진다. 23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미 버지니아 주 콴티코 시에 있는 해병대 국립박물관에서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62주년인 27일 장진호전투 기념비 기공식이 열린다. 기념비는 약 2m 높이의 8각 모양으로 맨 위에는 장진호전투가 벌어졌던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 지역을 기념해 ‘고토리의 별’ 장식이 ..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장개석 총통 진해 방문 [1]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 이승만-장제스 회담 초창기 해군은 외교 업무까지 담당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나라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한 경우 해군을 정상회담 경호·경비와 영접에 해군을 동원했던 것이다. 특별한 경우란 바로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타이완) 총통과 이대통령의 진해회담이었다. 자유중국 국부였던 장 총통은 1949년 당시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 국민당 총재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총통이라 불렀고, 이대통령도 그렇게 예우하기를 원했다. 초창기 해군 외교 업무까지 담당 장 총통 자신이 국빈대우를 꺼려 서울을 사양해 회담장..

[월남참전50주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월남전 참전의 빛과 그림자

한국군파병 PDF약사 [월남참전50주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월남전 참전의 빛과 그림자"내 손으로 묻은 전우들"…아직도 생생한 전장의 기억'한강의 기적', 한국 경제성장 발판 베트남전쟁 특수'폐지' 줍는 '국가 유공자'...국가는 우릴 버렸다등록: 2015-08-23 07:00 수정: 2015-08-23 08:29(서울=포커스 뉴스)올해로 월남전 참전 50주년을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베트남전쟁에 전투병력이 투입된 지 50년이 지났다.우리군의 첫 파병은 51년 전인 1964년 9월이었지만 이들은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으로 구성된 140명의 소규모 의료지원단이었다.다음해인 1965년 3월 베트남 지안(Di An)에 도착한 2000여명의 ‘비둘기부대’도 역시 공병부대로 도로와 교량을 ..

海兵隊의創設과草創期 役割

海兵隊의創設과草創期 役割 1. 海兵隊의創設과草創期 役割 가. 창설배경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 연대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 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로당 프락치들에 의해 주도된 반란 •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 지역에서 군• 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 래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대한민국의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 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