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Rok marines
天子峰" 驅步
marineset
2023. 5. 26. 06:52
海兵隊의 發祥地 "德山"
"天子峰" 驅步"
鎭海의 동천에 우뚝 솟아 있는 天子峰(해발 620m)은 모든 해병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訓鍊道場으로서 한없는 친근감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인 것같이 해병이라면 잊을 수 없는 유서 깊은 靈峰이다. 그 곳은 모든 해병들의 훈련장이었고 또한 목표이기도 했다.
鎭海市를 동북쪽에서 애워싸고 있는 長福山(일명 長壁山)줄기의 동녁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이 天子峰은 아득한 옛날부터 한 두가지의 전설을 지녀오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咸鏡道에 사는 李씨라는 분이 자기 선대의 장지를 구하러 八道를 두루 편력하다가 우연히 한 산봉우리에 올라 앉아 쉬다가 병풍같은 산줄기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萬丈臺(屛山이라고도 함)에서 그쳐 바다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岩穴들이 눈에 띄어 下人을 데리고 현지를 답사하니 그 첫째 穴은 왕후가 나고 둘째 혈은 천자가 난 명당인지라 李씨는 下人 朱씨를 시켜 자기 아버지를, 둘째 穴에 장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朱씨는 비록 下人이긴 했으나 자기도 야심이 없지 않아 자기 아버지를 둘째 穴에 묻고 李씨 아버지를 첫째 穴에 묻게 됨으로써 李씨 門中에서 李成桂가 나고 朱씨 門中에서 朱元璋이가 나서 李씨는 朝鮮朝의 王이 되고 朱씨는 明나라의 天子가 되었다는 것인데, 현재 熊川북방 일대에 살고 있는 朱씨들이 바로 그 後孫들이라 傳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고장에서 말하는 이같은 傳說을 지니고 있는 天子峰과 우리 해병들에 의해서 인식되고 있는 天子峰은 비록 같은 연봉이긴 하나 同一한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훈련 시에 오르내린 天子峰은 산상에 높이 80척, 둘레 40척 가량되는 '시루'모양을 하고 있기에 '시루봉'이라고도 부르는 바로 그 봉우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傳說 속의 그 天子峰은 '시루봉' 뒷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봉우리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眞否와는 상관 없이 해병들에 의해 天子峰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그 '시루봉'은 口傳에 의하면 아득한 古昔에는 바닷물이 그 바위 밑까지 차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 '시루봉'은 마치 하늘에서 큰 집채만한 '시루'모양의 바위 덩어리를 산상에다 떨어뜨려 놓은 듯한 그런 신기한 인상을 주는 봉우리로서 특히 아침해가 그 봉우리의 어깨 너머로 솟아날 때의 장관이란 그야말로 심비스런 황홀감을 느끼게까지 한다.



그런데 이 天子峰이 해병들과 깊은 인연이 맺어지게 된 것은 해병 1기생들의 훈련을 다 끝마친 후 사령관 이하 전 장병이 해병 1기생들의 수료를 기념함과 동시에 평소 그 어떤 신비감과 畏敬心을 가지고 대해 왔던 그 영봉에 올라 마음껏 浩然之氣를 기르고 또 비록 말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한 가족으로 굳게 결속된 해병대의 무한한 내일에의 전진을 다짐키 위해 처녀 등반을 시도한데서 비롯 되었다.

天子峰 상투바위 앞의 사관후보생들(해간 22기생 1955년 앞줄중앙, 이근식 소령, 중대장)

天子峰 상투바위 앞의 해병들
그때 天子峰을 처음 등반했던 해병들은 하나같이 정복자연한 통쾌감을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이 天上의 天子같은 착각마저 느끼는 가운데 한 폭의 그림처럼 조감되는 長福山 남족 기슭 일대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鎭海시가지 일대와 멀리 하늘 자락에 잇닿인 鎭海灣의 푸른 물결과 또 그 물결 속에 점점히 박혀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감회 깊게 조망하면서 패기 만만한 장부들의 기개를 드높였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이 嚆矢(효시)가 되어 6.25 動亂期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그 期를 이어온 그 수많은 新兵들과 副士官, 그리고 士官候補生들은 天子峰 驅步라는 필수과목을 철저히 이행해 왔고, 그러는 가운데 영봉 천자의 의연한 기개와 늠름한 패기를 내 것으로 이양받아 상승에 빛나는 海兵隊의 그 찬란한 傳統을 세워 오늘에까지 계승해 나온 것이었으니 天子峰을 가르켜 하늘이 인연 맺게 해 준 無敵海兵의 精神道場이라 일컫는 것도 결코 외람된 말은 아니리라.
그러나 오늘날의 해병들은 이 先輩海兵, 無敵海兵들의 精神道場이었던 天子峰을 정복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어 대용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더욱 분발하여 해병대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데 부족함이 없게 더욱 정진하게 되기를 선배해병으로서, 또 老海兵으로서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鎭海市의 동쪽 天子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海兵隊의 發祥地인 德山은 소죽도와 대죽도가 있는 행암만(진해항) 동쪽 연안 일대의 조그마한 마을로서 이 마을 안(행암만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日帝時代에 건설된 약 20만평의 비행장 부지가 곧 해병대의 창설 당시의 해병들의 요람지로 제공되었던 그 유서 깊은 터전이었다.
이 德山은 영기어린 天子峰의 서쪽 기슭 마을일 뿐아니라 특히 天子峰 일대에서 어떤 大將軍이 나서 백만군을 육성할 때 그 訓兵들의 말에 물을 먹였다고 하는 傳說을 지니고 있는 將川洞을 바로 이웃(남쪽)에 두고 있는 마을이란 점에서 이 마을에서의 해병대의 발상은 우연인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닌 그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1949년 해병대가 창설될 그 당시 이 德山에는 정확한 통계 숫자는 알아 볼 길이 없으나 다만 德山洞의 원주민인 권수상 씨(61세 1980년)의 말에 의하면 현 가구수 및 동민의 절반 가량인 300세대의 가구수에 약 1,500명 정도의 동민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德山洞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官舍村, 즉 일본 해군 장병들과 군속 및 노무자들을 위해 건립한 관사촌에는 대부분이 외국에서 귀환한 귀환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海兵隊가 주둔하고 있던 그 德山 비행장은 일제시대에는 일본 해군의 항공대가 점유하고 있었고 8.15 광복 후에는 미군이, 그리고 1947년도 경에는 한 동안 한국 육군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해병대가 창설된 그 당시의 녹슨 비행장 기지내에는 갈대와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그 기지내는 그대로 야외훈련장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海兵隊의 發祥塔
해병대의 發祥地인 경남 진해시 德山洞에 위치하고 있는 德山비행장(사진 중앙에 비행장 활주로가 남북으로 보이고 있으며 활주로 주변은 Golf장(9 Holes)으로 되어 있음) 사진의 북쪽이 진해시이며 오른쪽 방향에 天子峰이 위치하고 있으며 왼쪽에 행암만이 검게 보이고 있음. 發祥塔은 사진의 중앙 위쪽에 보이는 동산에 위치하고 있음.
특히 基地의 서북쪽의 오늘날 海兵隊 發祥塔이 세워져 있는 그 43고지(동내산)는 해병 1, 2기생들이 너무나 자주, 빈번이 오르내려서 그들의 영원한 꿈 속의 훈련장으로까지 느끼게끔 하게 하였다.
이 發祥地에서 심신 공히 성장하고 있던 해병들은 또한 고요한 행암만의 물결을 헤치며 해병으로서 마땅히 익혀야 했던 戰鬪水泳의 연습을 하기도 했고, 점심시간에는 흔하기만 했던 점복을 따서 반찬으로 해먹기도 하고 또한 때로는 오락회의 안주거리로 삼기도 했었는데 그들의 숙소변에는 다정한 자장가와도 같은 행암만의 파도소리가 언제나 쉴새 없이 찰싹이고 있었다.
創設된 후 약 9개월 간 주둔했던 그 德山비행장, 해병대가 그 유서 깊은 德山땅을 떠난지도 31년(1980년) 전의 옛일, 그 사이 세월은 많은 것을 변모케 하여 오늘날의 德山과 將川 일대는 크고 작은 공장들과 그것들에 부수된 주택촌 등으로 31년 전의 옛모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 사실이고 또 앞으로 어떻게 더 변해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나 확실한 것은 海兵隊의 發祥地란 그 뿌리 깊은 인연만은 鎭海의 동천에 우뚝 솟아 있는 그 의연한 天子峰의 모습과 함께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이다.
지난 1964년 해병대에서는 창설 15주년을 맞이하여 비행장 기지내에 있는 그 동내산(43m고지) 위에 [해병대 처음 세운 곳]이라고 새긴 發祥塔을 세움으로써 海兵史의 淵源을 이루는 그 영영한 인연을 記念하고 있다.
오늘의 해병들은 이런 선배들의 낭망적이고 또 고귀한 피와 땀의 흔적들을 잊지말고 그들이 못다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문헌: '덕산에서 월남까지'(전채호 저 예)해병 중령, 정훈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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