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Rok marines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marineset
2023. 5. 26. 07:13
장개석 총통 진해 방문
[1]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
이승만-장제스 회담
초창기 해군은 외교 업무까지 담당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나라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한 경우 해군을 정상회담 경호·경비와 영접에 해군을 동원했던 것이다.
특별한 경우란 바로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타이완) 총통과 이대통령의 진해회담이었다. 자유중국 국부였던 장 총통은 1949년 당시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 국민당 총재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총통이라 불렀고, 이대통령도 그렇게 예우하기를 원했다.
초창기 해군 외교 업무까지 담당
장 총통 자신이 국빈대우를 꺼려 서울을 사양해 회담장소가 진해로 결정된 것이 해군에 경호·경비와 영접 업무가 맡겨진 배경이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회담장소에 대해서는 양국 간에 오랜 사전 협의가 있었다.
이대통령은 당연히 회담장소로 서울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중국 측은 “당 총재 자격으로 가는 것이니 서울은 피하고 싶다”는 장 총통 뜻을 전하면서 제주도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이 제주도를 반대했다고 한다.
제주도를 반대한 이유는 회담이 있었던 49년 8월은 아직 4·3사건이 수습되지 못해 국빈 경호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장 총통이 비행기나 군함으로 올 텐데, 제주도에는 아직 그만한 공항과 항만시설이 없었다.
그 대안으로 이대통령이 제안한 장소가 진해였다. 진해는 당시 기준으로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도시였다. 비행장도 항만 시설도 그런대로 쓸 만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즐겨 찾는 별장이 있어 회담장소 문제까지 해결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해군의 본거지여서 경호와 영접 문제까지 안심할 수 있었다.
장소 문제가 결정되자 이대통령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경무대로 불렀다. 회담일정을 알려주면서 회담장을 잘 준비해 놓고 경호업무까지 해군이 맡아 달라고 지시했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여 달라는 당부와 함께.
손제독은 진해에 내려오는 즉시 김일병 통제 부사령관·김영철 해군사관학교장·권태춘 조함창장을 불러 회담준비에 실수가 없도록 당부했다. 그때 나는 잠시 통제부 근무를 하고 있어서 준비업무에 동원됐다. 손제독은 거의 진해에 머무르다시피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군항부두·해군공관·대통령 별장 등을 돌아보며 준비상황을 체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맞는 국빈행사여서 아무 경험도 없는 해군이 행사를 망치면 나라망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 총통은 이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이 있고, 국민들도 한국의 독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라고 좋은 감정을 가졌던 세계적 정치인이었다.
정부수립 후 첫 국빈행사 성공적
49년 8월 6일은 무더웠다. 진해 해안 백사장에 면한 비행장에는 장 총통 비행기 도착 예정시간 1시간 전인 오후 1시쯤부터 이범석 국무총리를 비롯한 20여 명의 정부 고위인사가 도열하고 있었다. 미리 진해에 와 있던 이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공항에 도착하자 장 총통이 탄 비행기 메이링(美齡) 호가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장 총통은 신문이나 뉴스·영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 엷은 카키색 중산복(中山服) 차림이었다. 짧은 머리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60대 정객은 트랩을 내려서자마자 마중 나온 이대통령과 반갑게 해후했다. 해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양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중국어가 유창한 이총리의 통역으로 출영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그 뒤는 사열식이었다. 이대통령 안내로 해군 의장대를 사열하면서 장 총통은 흡족해하는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 해군의 ‘첫 시험’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
[2] 김성은 사령관 회고록 44. 정부수립과 해병대 창설(7)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군가 제정으로 인한 정신무장과 본격적인 훈련 등으로 해병의 면모는 다듬어져 갔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복 장과 무기였다. 당시 해병대가 보유하고 있던 무기는 일본식 99식 소총이 고작이었고, 이 무?l들로 미군이 일 본군을 무장 해제시 긴 후 보관하고 있던 무기라 그 동안 손질도 안 돼 총구에 녹이 쓸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탄약이 없어 사격 연습조차 할 수 없었다.
기관총, 박격포는 물론 없었고 무전기도 없었다. 중화기 라고 할 것도 없지만 굳이 개인화기와 다른 무기로는 37미리 대전차포 15 문 정도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여순 반란사건 때 해군 소해정에 장착하고 남은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훈련을 하던 어느 날, 우리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귀빈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장개석 총통의 방한이었다. 본토에서 쫓겨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 진해로 날아 왔는데, 아마 6월인가로기억된다.
그때 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경 국방장관 이범석, 외무장관 임병직, 교통무장관 허정 기타 정무요인 및 손원일 해군총참모장 등 군, 정계의 고위인사들이 장개석을 맞이하기 위해 진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 숙박 시설이 없어 이 대통령은 진해 해군 통제부 사령관 공관에, 나머지 정무요인은 20여 관사에 두 세명씩 나누어 묵계 되었다.
장개석 총통의 내한은 정무 수립 후 외국 국가원수 방문으로는 처음이었는데, 이때는 해병대가 창설된 지 겨우 두 달 뒤였다. 해 병대에서 의장대를 담당하라는 해군참모총장의 명령이 있었지만 정말 답답했다. 그 이유는 해병대가 창설된지 겨우 두달 정도라 의장대를 해 본적도 없었고 복장도 없었으며, 절차 등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손원일 제독은 ”일단 부대 내에서 기가 크고 용모 괜찮은 대원 약 1개 중대 정도를 골라라.” 라고 했다.
그리고 맨 오른쪽은 군악대(진해 통제부 해군 군악대), 그 다음에는 중대병력이 순서로 횡대로 세우고” 가운데는 양국 국기(태국 기와 청천백일기)를 든 사람과 그를 호위하는사람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즉 국기 든 사람 두 명. 그 두 사람 양쪽을 호위하는 두명
등 총 네명이 앞에 서고, 그 뒤로 또 네명이 정렬해 국기에만 총 여덟명이 호위하여 선다.
그리고 양국 국가 원수가 만난 다음 단상에 오르면 '받들어 총' 을 호령하고, 이어 중국 국가가 먼저 물려 머지고 끝나면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21발을 예포를 쏜다는 것이다. 양국 국가가 끝날 때 예포 21발도 동시에 끝나야 했기에 이 시간에 맞추기 위하 연습을 많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포였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37일리 철갑탄 포 뿐인데다 공포탄도 없어서 실틴 용할 수 밖에 없었다.
37일리 대전차포는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관통하는 철갑탄이다. 그래서 연병장 한쪽에 있는 40미터 고지로 포문을 향하게 움푹 패인 곳을 항해 쏘는 사전 연습도 다졌다. 200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 사격을 하니까 소리도 쾅쾅 나면서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당시 예포 지휘관은 만주군 포병학교 출신 김 동하 소령이었다.
하지만 의장대라고 서 있는 대원들을 보니 시퍼런 물을 들인 광목 복장, 일본군 냄비 모양 철모, 각반까지 차고 서 있어 세상에서 이런 허술한 의장대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의장대 가운데 가장 허술하고 빈약한 의장대라는 생각에 나는 지금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을 금할 길 없다.
어쨌든 역사적인 그 날은 다가왔다. 잔뜩 긴장하고 정렬하여 서 있는데 C46 쌍발 수송기가 바다에서 나타나더니 저공으로 머리를 돌아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이어 똑 같은 비행기가 와서 활주로에 앉았는데, 비행기 표면에 뚜렷하게 '미령'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장개석 총통 부인인 송미령 여사의 이름을 딴 비행기로 장 총통은 그 비행기에서 내렸다. 송 여사는 오지 않았는데, 그 '미령호'라는 비행기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비록 대륙을 잃고 섬인 대만으로 쫓겨 갔지만 장 총통은 역시 대인다웠다. 그는 우리의 빈약한 의장대 사열을 하면서 연방 "하오(好)” 하면서 미소를 띠며 만족을 표시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장 총통은 60이 넘어 보이는 반백의 신사로 멋진 콧수염과 군복과 군모, 그리고 엿있는 망토를 쓰고 있었다. 일제 때 일본 장개석, 루스벨트, 처칠 등을 마귀같이 그려서 형편없이 생긴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장개석은 기도 크고 용모도 훌륭하였다.
비록 중국 대륙은 잃았지만 한때 손문 선생을 도와 청 왕조를 무너뜨린 주인공, 그리고 그는 근대화 중국을 위해 개혁하고 싸운 무사였으며, 인품이 훌륭하고 인물도 출중한 사람이었다.
장 총통은 그 후 진해에 3, 4일을 더 머물렀다. 이때 해병은 1개 중대 병력으로 국빈 숙소 주변을 경비했고, 비록 빈약한 복장이었지만 국빈을 맞이하는 예의로서 의장대 역할까지 훌륭히 치루었다.
출처; 전 국방장관, 예비역 해병중장 김성은 제4대 해병대 사령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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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
이승만-장제스 회담
초창기 해군은 외교 업무까지 담당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나라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한 경우 해군을 정상회담 경호·경비와 영접에 해군을 동원했던 것이다.
특별한 경우란 바로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타이완) 총통과 이대통령의 진해회담이었다. 자유중국 국부였던 장 총통은 1949년 당시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 국민당 총재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총통이라 불렀고, 이대통령도 그렇게 예우하기를 원했다.
초창기 해군 외교 업무까지 담당
장 총통 자신이 국빈대우를 꺼려 서울을 사양해 회담장소가 진해로 결정된 것이 해군에 경호·경비와 영접 업무가 맡겨진 배경이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회담장소에 대해서는 양국 간에 오랜 사전 협의가 있었다.
이대통령은 당연히 회담장소로 서울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중국 측은 “당 총재 자격으로 가는 것이니 서울은 피하고 싶다”는 장 총통 뜻을 전하면서 제주도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이 제주도를 반대했다고 한다.
제주도를 반대한 이유는 회담이 있었던 49년 8월은 아직 4·3사건이 수습되지 못해 국빈 경호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장 총통이 비행기나 군함으로 올 텐데, 제주도에는 아직 그만한 공항과 항만시설이 없었다.
그 대안으로 이대통령이 제안한 장소가 진해였다. 진해는 당시 기준으로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도시였다. 비행장도 항만 시설도 그런대로 쓸 만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즐겨 찾는 별장이 있어 회담장소 문제까지 해결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해군의 본거지여서 경호와 영접 문제까지 안심할 수 있었다.
장소 문제가 결정되자 이대통령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경무대로 불렀다. 회담일정을 알려주면서 회담장을 잘 준비해 놓고 경호업무까지 해군이 맡아 달라고 지시했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여 달라는 당부와 함께.
손제독은 진해에 내려오는 즉시 김일병 통제 부사령관·김영철 해군사관학교장·권태춘 조함창장을 불러 회담준비에 실수가 없도록 당부했다. 그때 나는 잠시 통제부 근무를 하고 있어서 준비업무에 동원됐다. 손제독은 거의 진해에 머무르다시피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군항부두·해군공관·대통령 별장 등을 돌아보며 준비상황을 체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맞는 국빈행사여서 아무 경험도 없는 해군이 행사를 망치면 나라망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 총통은 이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이 있고, 국민들도 한국의 독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라고 좋은 감정을 가졌던 세계적 정치인이었다.
정부수립 후 첫 국빈행사 성공적
49년 8월 6일은 무더웠다. 진해 해안 백사장에 면한 비행장에는 장 총통 비행기 도착 예정시간 1시간 전인 오후 1시쯤부터 이범석 국무총리를 비롯한 20여 명의 정부 고위인사가 도열하고 있었다. 미리 진해에 와 있던 이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공항에 도착하자 장 총통이 탄 비행기 메이링(美齡) 호가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장 총통은 신문이나 뉴스·영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 엷은 카키색 중산복(中山服) 차림이었다. 짧은 머리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60대 정객은 트랩을 내려서자마자 마중 나온 이대통령과 반갑게 해후했다. 해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양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중국어가 유창한 이총리의 통역으로 출영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그 뒤는 사열식이었다. 이대통령 안내로 해군 의장대를 사열하면서 장 총통은 흡족해하는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 해군의 ‘첫 시험’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
[2] 김성은 사령관 회고록 44. 정부수립과 해병대 창설(7)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군가 제정으로 인한 정신무장과 본격적인 훈련 등으로 해병의 면모는 다듬어져 갔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복 장과 무기였다. 당시 해병대가 보유하고 있던 무기는 일본식 99식 소총이 고작이었고, 이 무?l들로 미군이 일 본군을 무장 해제시 긴 후 보관하고 있던 무기라 그 동안 손질도 안 돼 총구에 녹이 쓸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탄약이 없어 사격 연습조차 할 수 없었다.
기관총, 박격포는 물론 없었고 무전기도 없었다. 중화기 라고 할 것도 없지만 굳이 개인화기와 다른 무기로는 37미리 대전차포 15 문 정도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여순 반란사건 때 해군 소해정에 장착하고 남은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훈련을 하던 어느 날, 우리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귀빈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장개석 총통의 방한이었다. 본토에서 쫓겨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 진해로 날아 왔는데, 아마 6월인가로기억된다.
그때 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경 국방장관 이범석, 외무장관 임병직, 교통무장관 허정 기타 정무요인 및 손원일 해군총참모장 등 군, 정계의 고위인사들이 장개석을 맞이하기 위해 진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 숙박 시설이 없어 이 대통령은 진해 해군 통제부 사령관 공관에, 나머지 정무요인은 20여 관사에 두 세명씩 나누어 묵계 되었다.
장개석 총통의 내한은 정무 수립 후 외국 국가원수 방문으로는 처음이었는데, 이때는 해병대가 창설된 지 겨우 두 달 뒤였다. 해 병대에서 의장대를 담당하라는 해군참모총장의 명령이 있었지만 정말 답답했다. 그 이유는 해병대가 창설된지 겨우 두달 정도라 의장대를 해 본적도 없었고 복장도 없었으며, 절차 등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손원일 제독은 ”일단 부대 내에서 기가 크고 용모 괜찮은 대원 약 1개 중대 정도를 골라라.” 라고 했다.
그리고 맨 오른쪽은 군악대(진해 통제부 해군 군악대), 그 다음에는 중대병력이 순서로 횡대로 세우고” 가운데는 양국 국기(태국 기와 청천백일기)를 든 사람과 그를 호위하는사람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즉 국기 든 사람 두 명. 그 두 사람 양쪽을 호위하는 두명
등 총 네명이 앞에 서고, 그 뒤로 또 네명이 정렬해 국기에만 총 여덟명이 호위하여 선다.
그리고 양국 국가 원수가 만난 다음 단상에 오르면 '받들어 총' 을 호령하고, 이어 중국 국가가 먼저 물려 머지고 끝나면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21발을 예포를 쏜다는 것이다. 양국 국가가 끝날 때 예포 21발도 동시에 끝나야 했기에 이 시간에 맞추기 위하 연습을 많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포였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37일리 철갑탄 포 뿐인데다 공포탄도 없어서 실틴 용할 수 밖에 없었다.
37일리 대전차포는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관통하는 철갑탄이다. 그래서 연병장 한쪽에 있는 40미터 고지로 포문을 향하게 움푹 패인 곳을 항해 쏘는 사전 연습도 다졌다. 200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 사격을 하니까 소리도 쾅쾅 나면서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당시 예포 지휘관은 만주군 포병학교 출신 김 동하 소령이었다.
하지만 의장대라고 서 있는 대원들을 보니 시퍼런 물을 들인 광목 복장, 일본군 냄비 모양 철모, 각반까지 차고 서 있어 세상에서 이런 허술한 의장대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의장대 가운데 가장 허술하고 빈약한 의장대라는 생각에 나는 지금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을 금할 길 없다.
어쨌든 역사적인 그 날은 다가왔다. 잔뜩 긴장하고 정렬하여 서 있는데 C46 쌍발 수송기가 바다에서 나타나더니 저공으로 머리를 돌아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이어 똑 같은 비행기가 와서 활주로에 앉았는데, 비행기 표면에 뚜렷하게 '미령'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장개석 총통 부인인 송미령 여사의 이름을 딴 비행기로 장 총통은 그 비행기에서 내렸다. 송 여사는 오지 않았는데, 그 '미령호'라는 비행기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비록 대륙을 잃고 섬인 대만으로 쫓겨 갔지만 장 총통은 역시 대인다웠다. 그는 우리의 빈약한 의장대 사열을 하면서 연방 "하오(好)” 하면서 미소를 띠며 만족을 표시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장 총통은 60이 넘어 보이는 반백의 신사로 멋진 콧수염과 군복과 군모, 그리고 엿있는 망토를 쓰고 있었다. 일제 때 일본 장개석, 루스벨트, 처칠 등을 마귀같이 그려서 형편없이 생긴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장개석은 기도 크고 용모도 훌륭하였다.
비록 중국 대륙은 잃았지만 한때 손문 선생을 도와 청 왕조를 무너뜨린 주인공, 그리고 그는 근대화 중국을 위해 개혁하고 싸운 무사였으며, 인품이 훌륭하고 인물도 출중한 사람이었다.
장 총통은 그 후 진해에 3, 4일을 더 머물렀다. 이때 해병은 1개 중대 병력으로 국빈 숙소 주변을 경비했고, 비록 빈약한 복장이었지만 국빈을 맞이하는 예의로서 의장대 역할까지 훌륭히 치루었다.
출처; 전 국방장관, 예비역 해병중장 김성은 제4대 해병대 사령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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