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州道와 女軍
김상헌 남사록에 성안에서 보초서던 여정(女丁) 기록
데스크승인 2016.01.25 좌동철 기자 | roots@jejunews.com
조선시대에 제주어로 ‘예청’이라 불리던 여자병사인 여정(女丁)이 있었다.
1601년 제주에서 발생한 모반사건으로 처벌될까 두려워하던 제주도민을 달래기 위해 안무어사(安撫御使·지방에 파견된 특사)로 온 조선 중기 문신 김상헌(1570~1652)이 쓴 기행문인 남사록(南?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김상헌은 “내가 알아보니 제주의 성안에 남성(男丁)은 500명이고, 여정(女丁)은 800명이다. 남성이 적어서 만약 사변이 발생해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에서 건강한 부녀자를 골라 성 위에 세웠다”고 했다.
힘이 센 여자들을 선발, 남자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남사록에는 여정은 적의 공격 목표인 성 맨 앞 돌출부인 ‘살받이터’에 세웠다고 기록했다.
국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제주는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맨 몸으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제주 여성들의 강인함은 후대에 이어졌다.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의 회고록에는 1950년 8월 31일 입대한 제주 출신 여성 해병(4기) 126명을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으로 인정했다.
그는 여성 군인의 역사는 1948년 간호장교 후보생 교육으로 시작됐지만 실제 최초의 여군은 여성 해병이라고 회고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 여성 해병은 여성 의용군(육군)보다 6일 빨리 입대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제주 여성 126명이 '해병'으로 참전했던 사실이 있다. 그들은 해병훈련을 마친 뒤 행정과 간호, 통신병으로 전투를 지원했다. 잊힌 한국전쟁의 영웅들을 기자가 만났다. 흑백사진 속, 군복을 입고 총을 멘 앳된 여성들.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1950년 8월, 해병대 4기로 자원 입대한 제주 여성 126명이다. 83살 안보아 할머니도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대했다. 경남 진해 해군통제부에서 해병대 신병훈련을 받은 뒤, 부상병 간호업무에 투입됐다. 안보아(83살(해병대 4기)할머니는 "불쌍한 생각만 해. 그 사람 막 피 흘리고 침대에 끌고 와서 간호하니까, 주사 놓고 그 사람들 돌봐주는 거니까." 할아버지도 한국전쟁 참전용사지만 자신보다 아내가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허순오(85살/안보아 할머니 남편)은 "아무나 갔다올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참 영광이지." 여성전우회 회장인 고순덕 할머니도 열다섯 나이에 같이 입대했다. 고순덕(81살/해병대 4기)할머니도 "총도 제대로 쏴봤고, 수기는 저 배에서 이배에 연락하는 걸 배웠고." 여성해병 126명은 남성 신병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은 뒤 짧게는 3달, 길게는 4년을 행정과 통신, 간호, 보급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현재 살아있는 6.25 참전 여성 해병은 52명. 세월이 흘렀지만 애국혼은 한결 같다. 그들은 "우리는 할 일을 한 것이고, 조금 젊었으면 또다시 가고 싶을 정도야."라고 입을 모았다. |
*** 6·25참전 소녀병들을 아시나요
제주여성 126명 입대…”조국 위했던 정신 배워야” (제주일보. 2008년 06월 25일)

▲ 6.25전쟁에 참전했던 여성 해병 4기 김예순씨가 당시 앨범과 회원 명부 등을 놓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6·25전쟁 58주년을 맞아 제주출신 여성 해병 4기들의 활약이 널리 알려지면서 최근 정부가 소녀병(少女兵)들에 대한 병적과 전사(戰史)를 기록하기로 하면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히 제주출신 여성 해병 4기는 대한민국 최초 여군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인정 여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에 주둔한 해병대사령부는 3, 4기 해병 3000명을 선발했는데 4기생 가운데 126명은 여성으로 대부분 여교사와 여학생으로 모집됐다.
이들 여성 해병은 1950년 9월 해군수송함에 몸을 실어 진해에 도착, 한 달 가까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여성해병전우회장을 맡았던 김예순씨(74)는 “한림중 2학년인 나는 당시 16살이었지만 키가 커서 입대를 할 수 있었는데 산지항에서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진해훈련소에서 헐렁한 미군 군복을 입고 처음엔 일본군 99식 소총에서 칼빈, 이어 M1을 지급받았고, M1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어린 여학생들은 달리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다”고 회고 했다.
한 달 간 사격과 총검술, 제식훈련을 마쳤으나 여성 해병들은 특별대로 분류,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녀들은 해군본부와 진해통제부(훈련소)에서 사무·보급·간호 등 후방업무를 지원했다.

김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이 호전되자 여성 해병 모집 취지와 달리 후방에 남게 했고 점차 전역을 시켰다”며 “특히 14∼17세 어린 나이에 징집된 여학생들은 1차 전역대상이 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어 “당시 전장에 가면 살아오지 못한다는 얘기가 파다한 가운데도 제주의 여학생들은 자원입대를 하는 등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쳤다”며 “부모들의 반대에도 어린 나이에 태극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전쟁터에 나간 여성 해병을 지금 세대들은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당국의 무관심으로 제주여성해병전우회도 1994년에야 조직됐는데 서울은 물론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재 회원은 63명만 확인됐다.
이 가운데 30명은 타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강인한 제주여성의 기개를 널리 떨친 여성 해병들이 점차 도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것.
김씨는 끝으로 “그나마 내가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 해병들의 병적기록과 훈련소 사진을 수집한 것이 여성 해병의 전사(戰史)를 후대에 알릴 수 있는 자료로 남게 됐다”며 고 말했다.
<좌동철 기자>

***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는거야"
[제53주년 현충일 특집]16세 나이에 첫 여성 해병대 참전 강춘자씨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꿈인가 싶기도 해" (서귀포 인터넷신문. 2008.6.5)
한애리 기자 <U>arhan@seogwipo.co.kr</U>

▲ 6.26전쟁 당시 제주여성 126명은 학생, 교사의 신분으로 자원입대했었다.
강춘자씨 역시 16세 나이에 구국일념 하나로 참전했다.
“공부를 더해서 뭘해? 나라가 없어질 판국이었는데...”
남편과 반평생 서귀포시에서 밀가루와 설탕, 마가린 등 제과재료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강춘자씨(76)는 제53회 현충일을 이틀 앞 둔 4일, 아스라한 58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강씨는 6.25 전쟁 초기 나라의 운명이 낙동강 방어선에 걸려있을 그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제주도의 최초 여성해병대 출신이다.
지금이야 지난 일이라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시 철모른 16살의 여중생이었다.
“뭘 알았겠어.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나라를 잃으면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강씨는 4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자원입대를 했단다. 강씨와 같은 굳은 심지로 자원입대를 한 여학생과 교사는 126명.
1950년 8월 30일 제주북초등학교에 모인 이들은 다음날인 9월 1일 산지항에서 출항해 다음날 진해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진해경화초등학교에서 일주일간 기초훈련을 받고 진해 통제부로 장소를 옮겨 약 40여일 훈련을 받았다.
“얼마나 훈련이 고된지 말도 못했어. 열 여섯, 열 일곱 살난 여학생들이 철조망 밑을 포복하다보면 피 나는 건 예사일이고 사격연습 할 때 울리는 총포는 왜 그리 무섭도록 크던지 집에 가고 싶다고 돌아올 수나 있나...”

전쟁터에서 직접 총을 쏘며 혈전을 벌이지는 않았어도 긴급 투입될 것을 대비해 남성들과 똑같이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강씨는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떨군다.
UN군의 지원으로 상황이 호전되자 다행히 강씨 등 50여 명은 1950년 10월 13일 1차 전역을 하게 된다.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냐며 공부하러 다니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반가워 하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공부를 마치고 살다보니 이렇게 살고 있네.”
전역한 강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귀포시 예래초등학교에서 3년 정도 교사생활을 하고 난 후 세관으로 활동하다가 교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참 꿈만 같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게... 진짜 그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 줄만 알았지. 나도 죽었구나만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오히려 그 때가 꿈만 같다는 강씨.
“해병대 전우가 운영하는 택시를 타면 나도 해병대 출신이라고 말도 하고 지금은 그래요. 그때 여성해병대가 있었냐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고, 대단하다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 그 상황이라면 누구든 그러지 않았을까?”
자원입대가 자랑할 일도 아니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했을 거라는 그는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만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나라가 있어야 우리 가족도 있고, 나도 있는 거예요.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좀 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출처: 서귀포 인터넷신문 (<U>http://www.seogwipo.co.kr/news/main.php</U>)
참고: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님의 회고중에서 여해병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32- 여자 의용군 (국방일보. 2007.11.28)

50년 8월 31일 제주시 동국민학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단 여자 의용군 126명의 입대식이 거행됐다. 육군의 여자군인이 같은 해 9월 5일 탄생했으니 해군·해병대가 6일 빠른 셈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제주도 주둔 해병대 부대로부터 여러 차례 여자의용군 지원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그 지역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일부 여교사들이 지원입대하고 싶다고 조른다는 것이었다.
여학생·교사도 지원입대
그러나 신사령관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의 위기를 앉아서만 볼 수 없다는 뜻은 갸륵하지만 여자가 어떻게 그 험한 훈련을 받을 수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잘 달래서 돌려 보내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뒤 또 같은 보고가 올라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행정이나 서무 같은 후방지원 임무였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모르는 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8월 27, 28일 이틀 동안 지원을 받아 31일 입대식을 가진 것이다.입대식을 마친 이들은 다음날 아침 제주항 산지부두에서 가족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해군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이 없는 길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달려갈 각오였던 그녀들은 살아 돌아올 보장이 없다고 느꼈는지 울고 또 울었다. 작별은 슬프게 마련인데 기약도 없는 길을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들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9월 2일 진해항에 도착한 이들은 경화국민학교에서 신병 기초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원일 참모총장이 제정한 표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제창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9월 20일까지 계속된 기초훈련은 간호장교 2명이 담당했다. M1 소총과 카빈 소총을 휴대한 단독무장으로 제식훈련 총검술·사격·포복 등등 남자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관이 너무 무서워 고되고 억울해도 눈물을 흘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9월 20일 기초훈련이 끝난 뒤 그녀들은 해군 신병훈련소 특별 분대에 편입됐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해군·해병대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더 고달픈 훈련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들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좁데다게.”교관이 남자로 바뀌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몸은 고달파도 조그만 실수는 눈감아 주는 남자교관의 너그러움이 좋았다는 것이리라. 아무리 범 같은 교관이나 조교라도 누이동생 같은 여자 신병을 남자처럼이야 다루겠는가.
부대 배치후 근무분위기 바꿔
40일 간의 훈련이 끝나고 그녀들에게 계급장과 보직이 주어졌다. 계급은 소위 2명, 병조장(원사) 4명, 1등병조(상사) 6명, 2등병조(중사) 6명, 3등병조(하사) 15명, 상병 93명이었다. 똑같이 훈련을 받고도 계급이 다 다른 것은 학력차이 때문이었다.
여중(중·고교 통합학교) 재학생부터 전문학교 대학 출신에 이르기까지 학력이 다 다르고, 같은 학생이라도 학년이 달라 계급에 차등을 뒀던 것이다.이들은 부산 해군본부, 진해 통제부와 해군병원에 보직을 받아 사무실 분위기를 크게 바꿔 놓았다. 그러다가 51년 말까지 전원 제대했다.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