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Rok marines
해병 월남전에 가다 (제1진 참전수기)
marineset
2023. 5. 26. 07:16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 최우식(해간 33기)
1. 출발에 앞서
월남 파병부대로 포항 제1사단 제2연대가 결정된 후 196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을 대비한 훈련은 연일 계속 되었다. 전투의 가장 기본 훈련인 각개 전투가 4시간, 그리고 나머지 4시간은 월남의 기후, 풍토, 지리 그리고 게릴라 전법에 관한 것이었다. 소대장들은 각자 교안을 짜랴, 훈련을 시키랴, 보충병들을 받아드리랴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한여름의 더위도 잊은 듯 했다.
8월 하고도 중순에 접어들자 날씨는 폭염 그대로 찌는 한낮의 더위가 병사들의 군복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월남에 가면 땀께나 흘린다는데 땀 흘리는 훈련도 겸하는 듯싶을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다. 그러나 파월준비 병사들에게는 강도 높은 한여름의 훈련이 계속 되더니 15일 간의 해양훈련을 겸한 휴식이 주어졌다. 포항 해병 제1상륙사단 동쪽 문밖 ‘몰개올’마을 앞 바다에 분대 천막이 줄지어 처진 병사들의 여름 해양훈련지의 밤은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영롱한 별빛과 더불어 목청이 터지라고 불러 대는 병사들의 군가 소리로 밤이 지새는 줄 몰랐다.
파월부대의 즐거웠던 휴식을 겸한 해양훈련도 끝나고 계속 이어지는 야전 게릴라 훈련은 1965년 9월 5일 막바지에 이르렀다. 야간에는 게릴라들의 기습을 격퇴하고 낮에는 소탕전, 전투정찰, 호 작업, 피아간의 공방전 등이 계속 되었다. 중대장의 명령을 받으면 3개 소대장들은 서로 서로 자기들의 할 임무를 의논해서 각자가 분담하여 척척 처리하여 나감으로써 중대장 장순규 대위는 항상 마음을 든든히 갖는 바였다.
월남 파병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이 될 야전기동훈련은 6중대가 게릴라 본부를 공격 점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3박 4일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야간 행군의 행렬은 길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계속 퍼부어 댔다. 긴 행군 대열은 빗속에 우의를 덮어쓴 채 부대 막사를 향하여 계속 전진 했다. 때마침 내일이 추석이라 집집마다 풍기는 음식 냄새는 가뜩이나 배가 출출한 병사들의 발걸음을 늦추어 놓는 듯 했다. 부대 입구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비를 맞으며 웅성대고 있는 가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혹 어떤 사람은 행군을 따라오며 아는 병사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기도 했다. 모두가 내일이 추석 이라 월남 가지전에 집에서 마련한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나 행군 대열은 묵묵히 질퍽거리는 군화 소라만을 내며 무겁게 부대 안으로 계속 들어 가 버렸다.
부대로 돌아온 병사들은 흠뻑 젖은 군복들을 갈아입자 몸이 훈훈해 지며 한결 기분이 좋았다. 저녁 순검 때 내일은 추석이라 휴무이며 대대에서 막걸리와 돼지고기가 나온다고 전하자 병사들은 막사가 떠나갈 듯이 좋아라고 함성을 질렀다.
월남 출전을 앞둔 훈련은 이번에 실시 한 야전기동훈련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출발 일정만 기다리며 배구며, 축구 등의 운동으로 소일 하게끔 일과가 짜여 졌고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언제 출발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막연히 9월 말경에 출발 하리라는 뜬소문만이 부대 내에 감돌고 있었다.
다음날인 추석날 부대는 잔치 기분에 흥청거렸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비록 양제기 잔에 막걸리를 따라 놓은 조촐한 파티를 연 좌석이지만 부대원들은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곧 흥을 돋우어 가며 책상이며 양재기 밥그릇이 쭈그러질 정도로 숟가락으로 두들기면서 노래에 장단을 맞추었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아래 편지를 띄우고----”
“인천에 성냥공장—아가씨---”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아직 가시지 낳은 마지막 여름 햇살이라 한 낮에는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더웠다. 부대 안에서의 흥겨운 추석 파티와는 달리 부대 입구에는 많은 면회객들이 모여 위병소 헌병에게 면회를 시켜 달라고 졸랐다.
‘면회는 내일부터’라는 게시문이 붙어 있었지만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졸라댔다.
면회 온 사람들 손에는 음식들을 싼 보따리들을 들고 있었고 서울에서 온 사람, 부산, 제주 등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철조망 밖에서 부대 안을 드려다 보다가 혹시라도 멀리서나마 지나기는 모습이라도 보려는 안타까운 마음 들이었다. 면회가 될 줄 알고 왔다가 면회가 미루어지자 여비가 부족하게 됐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모여든 면회객들로 제6중대 연병장은 저자를 이루었다. 대대에서 가설해 놓은 분대 천막으로 만든 면회실만 해도 다섯 군데나 되었지만 그것도 모자랐다. 계속되는 면회객은 9월 20일 청룡부대 결단식이 있던 날 더욱 많아져 면회실 천막을 더 늘려야 했으며 안내 장교는 안내를 하느라 바빴고 면회실에는 떡, 사이다, 통닭 등 가지각색의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는 자식 ,친지, 형제,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들 했다. 훌쩍 훌쩍 흐느끼는 여인네들도 많았다. 모두가 떠나는 마음, 보내는 마음들이 엇갈리는 가운데 면회실 안팎은 분주 했다.
해병 제2여단 천룡부대 결단식이 있은 후 파월부대는 빨간 모자와 희색 런닝셔츠 그리고 빨간 반바지를 입고는 배구나 축구 등으로 소일 하면서 각자 관품을 의낭에 정돈하여 미리 월남으로 탁송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9월 26일에는 여단 장병들의 관품을 실은 LST 2척이 선발대를 태우고 구룡포항을 출항하여 월남으로 향 하였다. 짐을 다 싣고 가 버리자 부대 안은 텅 비었다. 마치 이사 간 집 모양 같았다.
1965년 10월2일 07:00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부산했던 새벽이 개이고 완전무장을 한 청룡부대 장병들은 연병장에 정렬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전쟁터 월남으로 떠나는 이들에게는 긴장감이 쌓여 있었다. 초가을 아침, 맑게 개인 파란 하늘이 더한층 그들이 입고 있는 새 작업복을 더욱 말쑥하게 해 주는 듯 했고, 얼룩무늬 덮개를 씌운 철모를 쓴 모습들이 모두가 믿음직스러웠다. 사단장에게 출국신고를 마치고 GMC트럭에 분승한 장병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목청이 터지라고 군가를 불러댔다. 해병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포항 시내 쪽으로 줄지어 달리는 도로 연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전송을 해 주고 있었다.
지나가는 트럭을 향하여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보였고, 군인 가족인 듯한 젊은 아낙네들의 눈물짓는 모습도 보였다.포항여고 학생들의 이별의 노래를 들으며 장병들을 실은 기차는 서서히 포항 역 플랫트홈을 벗어나 일로 부산을 향하여 달렸다. 수많은 군인 가족 그리고 포항 시민들의 인파가 가물가물 해 지며 형산강 물줄기에 반사되는 햇살이 기차 창문에 비춰들었다.
최우식 소위는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대원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썬글라스를 썼다. 그리고는 어금니를 짓누르며 껌을 씹어 댔다. 그래야만 솟구치는 눈물을 억제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무슨 슬프다거나 서럽다거나 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다. 그저 이유 없이 눈물방울이 맺혀 졌던 것이다.
기차가 경주, 울산 등지를 지나칠 때마다 들에서나 철로 변 동리에서나 기차를 보는 사람이면 양손을 흔들며 장병들의 필승과 무운을 빌어 주었다.
기차는 하번도 쉬지 않고 부산에 도착 했다. 부산항 제3부두에는 헌병들의 삼엄한 경계가 처져 있었고 철조망 가에는 가족들이 떠나는 장병들의 마지막 모습을 좀 더 보려고 몰려 있었다. 가족들이 불러대는 소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기치는 부두 안으로 들어 가 멈추었다.
부두에는 각 군 고급 장교들이 전송을 하려고 나와 있었고 정부의 고관들도 나와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기차에서 내린 장병들은 완전무장에 의낭을 한 개씩 걸머지고는 곧바로 부두에 정박해 있는 선상으로 승선했다. 일렬로 줄지어선 장병들에게 육군 여군들은 식빵과 따끈한 보리차 한잔씩을 나누어 주었다.
파월 되는 청룡부대 장병들과 여군들과 주고받는 말 속에는 서로의 정을 쏟아 낼 듯 다정했다.
“이기고 돌아오세요.”
“감사합니다.”
그저 무뚝뚝한 말씨였으나 싱글벙글거리는 장병들의 사기 높은 모습들이었다.
장병들이 오르고 있는 배는 초급장교들로서는 처음 타 보는 큰 배였다.
‘엘틴저(ELTINGER)’라는 페인트 글씨가 이 배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2차 대전 중 미군 수송선으로 활약 했었고 전쟁 후에는 반관 반빈 수송선으로 화물 수송을 하다가 월남전이 개시 되자 군 수송을 담당 하게 됐다고 한다.
소대장들에게 할당된 장교 침실은 말이 장교 침실이지 최하급 소위들이라 그랬는지 침실에는 창문이 없어 낮인지 밤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고 침실 안에 있는 수세식 변기에서는 악취가 몹시 났다.
중갑판 303호실에는 6중대 소대장들과 5중대 소대장 등 8명이 배치되었다. 각자 배낭과 의낭을 정돈 하고 나니 침실 안은 몹시도 좁았다. 소대장들은 침실 정돈을 마치고 아래층에 내려가 각자 소대원들의 침실을 정돈해 주고 난 다음에 중대장에게 배치 완료 보고를 끝내고 나서야 갑판에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칠 줄 모르게 배에 오르던 장병들의 대열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승선이 모두 끝났다.
부산시내 대신동을 안고 넘어갈듯 태양은 서산마루에서 머뭇거리며 서녘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고 있었고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통통선들이 오가고 있었다. 서녘하늘은 점차 붉어지더니 부산 앞 바다를 온통 붉게 물 드려 놓았고 영도섬도 황혼에 젖어 붉디붉게 보였다. 이태리계의 자그마한 노인이 실로폰을 두드리며 식사시간을 알리자 배에서의 첫 식사인지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식당으로 몰렸다.
장교 식당에는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고 식탁 위에는 온갖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양식에서 풍기는 냄새와 함선의 디젤기름 냄새 등이 범벅이 되어 비위를 틀어 놓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식탁 위에는 많은 음식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장교는
“이정도 양식이면 한국 식당에 가면 꽤나 비쌀 걸”이라고 했다.
소대장들은 식사시간에도 바쁘다. 빨리 식사를 마치고는 소대원들의 식사를 보살펴 주어 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 9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대충 저녁식사가 끝이 났고 장병들은 갑판에 나와 옹기종기 모여 전등불빛이 반짝거리는 부산 시가지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밤 10시 경 장교들만의 환송식이 있어 장교들은 하선을 하여 각자 육군 여군들이 걸어주는 화환을 목에 걸었다.
김성은 국방부 장관 등 정부 각료와 각 군 고급 장성들과 아수교환으로 간단한 환송식이 끝나자 배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땅을 딛고 있으니 부산 시내에 나가 한바탕 놀다가 들어오고 싶은 시전 이었다.
부산 제3부두에는 밤늦게 까지 3군 전송부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으며 잠도 오지 않는 첫 밤을 맞은 장병들은 갑판에 나와 밤을 보내고 있었다.
全文파일vietnam.hwp
1. 출발에 앞서
월남 파병부대로 포항 제1사단 제2연대가 결정된 후 196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을 대비한 훈련은 연일 계속 되었다. 전투의 가장 기본 훈련인 각개 전투가 4시간, 그리고 나머지 4시간은 월남의 기후, 풍토, 지리 그리고 게릴라 전법에 관한 것이었다. 소대장들은 각자 교안을 짜랴, 훈련을 시키랴, 보충병들을 받아드리랴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한여름의 더위도 잊은 듯 했다.
8월 하고도 중순에 접어들자 날씨는 폭염 그대로 찌는 한낮의 더위가 병사들의 군복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월남에 가면 땀께나 흘린다는데 땀 흘리는 훈련도 겸하는 듯싶을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다. 그러나 파월준비 병사들에게는 강도 높은 한여름의 훈련이 계속 되더니 15일 간의 해양훈련을 겸한 휴식이 주어졌다. 포항 해병 제1상륙사단 동쪽 문밖 ‘몰개올’마을 앞 바다에 분대 천막이 줄지어 처진 병사들의 여름 해양훈련지의 밤은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영롱한 별빛과 더불어 목청이 터지라고 불러 대는 병사들의 군가 소리로 밤이 지새는 줄 몰랐다.
파월부대의 즐거웠던 휴식을 겸한 해양훈련도 끝나고 계속 이어지는 야전 게릴라 훈련은 1965년 9월 5일 막바지에 이르렀다. 야간에는 게릴라들의 기습을 격퇴하고 낮에는 소탕전, 전투정찰, 호 작업, 피아간의 공방전 등이 계속 되었다. 중대장의 명령을 받으면 3개 소대장들은 서로 서로 자기들의 할 임무를 의논해서 각자가 분담하여 척척 처리하여 나감으로써 중대장 장순규 대위는 항상 마음을 든든히 갖는 바였다.
월남 파병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이 될 야전기동훈련은 6중대가 게릴라 본부를 공격 점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3박 4일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야간 행군의 행렬은 길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계속 퍼부어 댔다. 긴 행군 대열은 빗속에 우의를 덮어쓴 채 부대 막사를 향하여 계속 전진 했다. 때마침 내일이 추석이라 집집마다 풍기는 음식 냄새는 가뜩이나 배가 출출한 병사들의 발걸음을 늦추어 놓는 듯 했다. 부대 입구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비를 맞으며 웅성대고 있는 가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혹 어떤 사람은 행군을 따라오며 아는 병사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기도 했다. 모두가 내일이 추석 이라 월남 가지전에 집에서 마련한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나 행군 대열은 묵묵히 질퍽거리는 군화 소라만을 내며 무겁게 부대 안으로 계속 들어 가 버렸다.
부대로 돌아온 병사들은 흠뻑 젖은 군복들을 갈아입자 몸이 훈훈해 지며 한결 기분이 좋았다. 저녁 순검 때 내일은 추석이라 휴무이며 대대에서 막걸리와 돼지고기가 나온다고 전하자 병사들은 막사가 떠나갈 듯이 좋아라고 함성을 질렀다.
월남 출전을 앞둔 훈련은 이번에 실시 한 야전기동훈련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출발 일정만 기다리며 배구며, 축구 등의 운동으로 소일 하게끔 일과가 짜여 졌고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언제 출발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막연히 9월 말경에 출발 하리라는 뜬소문만이 부대 내에 감돌고 있었다.
다음날인 추석날 부대는 잔치 기분에 흥청거렸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비록 양제기 잔에 막걸리를 따라 놓은 조촐한 파티를 연 좌석이지만 부대원들은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곧 흥을 돋우어 가며 책상이며 양재기 밥그릇이 쭈그러질 정도로 숟가락으로 두들기면서 노래에 장단을 맞추었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아래 편지를 띄우고----”
“인천에 성냥공장—아가씨---”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아직 가시지 낳은 마지막 여름 햇살이라 한 낮에는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더웠다. 부대 안에서의 흥겨운 추석 파티와는 달리 부대 입구에는 많은 면회객들이 모여 위병소 헌병에게 면회를 시켜 달라고 졸랐다.
‘면회는 내일부터’라는 게시문이 붙어 있었지만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졸라댔다.
면회 온 사람들 손에는 음식들을 싼 보따리들을 들고 있었고 서울에서 온 사람, 부산, 제주 등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철조망 밖에서 부대 안을 드려다 보다가 혹시라도 멀리서나마 지나기는 모습이라도 보려는 안타까운 마음 들이었다. 면회가 될 줄 알고 왔다가 면회가 미루어지자 여비가 부족하게 됐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모여든 면회객들로 제6중대 연병장은 저자를 이루었다. 대대에서 가설해 놓은 분대 천막으로 만든 면회실만 해도 다섯 군데나 되었지만 그것도 모자랐다. 계속되는 면회객은 9월 20일 청룡부대 결단식이 있던 날 더욱 많아져 면회실 천막을 더 늘려야 했으며 안내 장교는 안내를 하느라 바빴고 면회실에는 떡, 사이다, 통닭 등 가지각색의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는 자식 ,친지, 형제,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들 했다. 훌쩍 훌쩍 흐느끼는 여인네들도 많았다. 모두가 떠나는 마음, 보내는 마음들이 엇갈리는 가운데 면회실 안팎은 분주 했다.
해병 제2여단 천룡부대 결단식이 있은 후 파월부대는 빨간 모자와 희색 런닝셔츠 그리고 빨간 반바지를 입고는 배구나 축구 등으로 소일 하면서 각자 관품을 의낭에 정돈하여 미리 월남으로 탁송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9월 26일에는 여단 장병들의 관품을 실은 LST 2척이 선발대를 태우고 구룡포항을 출항하여 월남으로 향 하였다. 짐을 다 싣고 가 버리자 부대 안은 텅 비었다. 마치 이사 간 집 모양 같았다.
1965년 10월2일 07:00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부산했던 새벽이 개이고 완전무장을 한 청룡부대 장병들은 연병장에 정렬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전쟁터 월남으로 떠나는 이들에게는 긴장감이 쌓여 있었다. 초가을 아침, 맑게 개인 파란 하늘이 더한층 그들이 입고 있는 새 작업복을 더욱 말쑥하게 해 주는 듯 했고, 얼룩무늬 덮개를 씌운 철모를 쓴 모습들이 모두가 믿음직스러웠다. 사단장에게 출국신고를 마치고 GMC트럭에 분승한 장병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목청이 터지라고 군가를 불러댔다. 해병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포항 시내 쪽으로 줄지어 달리는 도로 연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전송을 해 주고 있었다.
지나가는 트럭을 향하여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보였고, 군인 가족인 듯한 젊은 아낙네들의 눈물짓는 모습도 보였다.포항여고 학생들의 이별의 노래를 들으며 장병들을 실은 기차는 서서히 포항 역 플랫트홈을 벗어나 일로 부산을 향하여 달렸다. 수많은 군인 가족 그리고 포항 시민들의 인파가 가물가물 해 지며 형산강 물줄기에 반사되는 햇살이 기차 창문에 비춰들었다.
최우식 소위는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대원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썬글라스를 썼다. 그리고는 어금니를 짓누르며 껌을 씹어 댔다. 그래야만 솟구치는 눈물을 억제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무슨 슬프다거나 서럽다거나 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다. 그저 이유 없이 눈물방울이 맺혀 졌던 것이다.
기차가 경주, 울산 등지를 지나칠 때마다 들에서나 철로 변 동리에서나 기차를 보는 사람이면 양손을 흔들며 장병들의 필승과 무운을 빌어 주었다.
기차는 하번도 쉬지 않고 부산에 도착 했다. 부산항 제3부두에는 헌병들의 삼엄한 경계가 처져 있었고 철조망 가에는 가족들이 떠나는 장병들의 마지막 모습을 좀 더 보려고 몰려 있었다. 가족들이 불러대는 소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기치는 부두 안으로 들어 가 멈추었다.
부두에는 각 군 고급 장교들이 전송을 하려고 나와 있었고 정부의 고관들도 나와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기차에서 내린 장병들은 완전무장에 의낭을 한 개씩 걸머지고는 곧바로 부두에 정박해 있는 선상으로 승선했다. 일렬로 줄지어선 장병들에게 육군 여군들은 식빵과 따끈한 보리차 한잔씩을 나누어 주었다.
파월 되는 청룡부대 장병들과 여군들과 주고받는 말 속에는 서로의 정을 쏟아 낼 듯 다정했다.
“이기고 돌아오세요.”
“감사합니다.”
그저 무뚝뚝한 말씨였으나 싱글벙글거리는 장병들의 사기 높은 모습들이었다.
장병들이 오르고 있는 배는 초급장교들로서는 처음 타 보는 큰 배였다.
‘엘틴저(ELTINGER)’라는 페인트 글씨가 이 배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2차 대전 중 미군 수송선으로 활약 했었고 전쟁 후에는 반관 반빈 수송선으로 화물 수송을 하다가 월남전이 개시 되자 군 수송을 담당 하게 됐다고 한다.
소대장들에게 할당된 장교 침실은 말이 장교 침실이지 최하급 소위들이라 그랬는지 침실에는 창문이 없어 낮인지 밤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고 침실 안에 있는 수세식 변기에서는 악취가 몹시 났다.
중갑판 303호실에는 6중대 소대장들과 5중대 소대장 등 8명이 배치되었다. 각자 배낭과 의낭을 정돈 하고 나니 침실 안은 몹시도 좁았다. 소대장들은 침실 정돈을 마치고 아래층에 내려가 각자 소대원들의 침실을 정돈해 주고 난 다음에 중대장에게 배치 완료 보고를 끝내고 나서야 갑판에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칠 줄 모르게 배에 오르던 장병들의 대열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승선이 모두 끝났다.
부산시내 대신동을 안고 넘어갈듯 태양은 서산마루에서 머뭇거리며 서녘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고 있었고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통통선들이 오가고 있었다. 서녘하늘은 점차 붉어지더니 부산 앞 바다를 온통 붉게 물 드려 놓았고 영도섬도 황혼에 젖어 붉디붉게 보였다. 이태리계의 자그마한 노인이 실로폰을 두드리며 식사시간을 알리자 배에서의 첫 식사인지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식당으로 몰렸다.
장교 식당에는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고 식탁 위에는 온갖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양식에서 풍기는 냄새와 함선의 디젤기름 냄새 등이 범벅이 되어 비위를 틀어 놓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식탁 위에는 많은 음식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장교는
“이정도 양식이면 한국 식당에 가면 꽤나 비쌀 걸”이라고 했다.
소대장들은 식사시간에도 바쁘다. 빨리 식사를 마치고는 소대원들의 식사를 보살펴 주어 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 9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대충 저녁식사가 끝이 났고 장병들은 갑판에 나와 옹기종기 모여 전등불빛이 반짝거리는 부산 시가지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밤 10시 경 장교들만의 환송식이 있어 장교들은 하선을 하여 각자 육군 여군들이 걸어주는 화환을 목에 걸었다.
김성은 국방부 장관 등 정부 각료와 각 군 고급 장성들과 아수교환으로 간단한 환송식이 끝나자 배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땅을 딛고 있으니 부산 시내에 나가 한바탕 놀다가 들어오고 싶은 시전 이었다.
부산 제3부두에는 밤늦게 까지 3군 전송부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으며 잠도 오지 않는 첫 밤을 맞은 장병들은 갑판에 나와 밤을 보내고 있었다.
全文파일vietnam.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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