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Rok marines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marineset
2023. 5. 26. 07:23
역사추적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버림받은 역사, 버림받은 사람들 “흥남철수는 기념! 베트남은 외면?”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18-08-29 17:00:01
2018년 09월 호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 월남 패망 교민 354명 구출… 최초·최대 교민 보호 작전
● 외교 갈등 우려 ‘군사기밀’ 분류…軍史에서도 묻혀
● 1973년 3월 23일까지만 파병 인정… 유공자 지정 못 받아
● 국회 ‘참전 인정’ 법률개정안 발의는 했지만…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장진호전투 기념비였다. 이에 앞서 흥남철수 때 활약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그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피난민 중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다”며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공산 치하에 남겨졌을 1만4000여 명의 민간인을 자유민주주의 품으로 이끈 흥남철수작전은 세계 전사(戰史)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 작전으로 불린다.
그로부터 25년 후 대한민국 국민을 구한 또 하나의 대규모 철수 작전이 있었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며 공산 치하에 들어가게 됐을 때, 우리 해군이 교민 354명을 포함해 총 1902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십자성구출작전’이 그것이다. ‘베트남판 흥남철수작전’이라 할 만하다.
현지 교민을 철수시켜라
1973년 1월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파리평화협정을 맺는다. 이 협정에 의해 남베트남을 돕던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했지만, 남베트남 지역에서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의한 국지적 도발이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1975년 1월 프윽롱성을 함락한 데 이어 4월 2일부터 사이공 함락을 위한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포기하고 자국민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1973년부터 교포들에게 철수를 권유했지만 삶의 터전을 이곳으로 옮긴 1000여 명이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남베트남 패망이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외무부는 주월 한국대사관에 철수를 지시했다. 일반 기업체 직원과 공무원 및 일부 교민들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고, 항공편을 이용해 출국할 수 없는 교민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계획에 들어갔다. 마침 남베트남 정부에서 구호물자와 베트남 피난민을 위한 수송 지원을 요청해왔다. 이에 정부는 4월 5일 인도적 고려에 의한 구호물자 지원과 피난민 구호를 표면에 내세우면서 실제적으로는 교민 철수를 지원하기로 하고, 해군 LST선 2척과 해군(해병대 포함) 269명을 파견했다.
4월 7일 부산을 출발한 북한함과 덕봉함이 붕따우항에 도착한 21일, 남베트남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구호물자를 붕따우항에 하역하고 이곳에 있던 베트남 난민을 실어 푸꾸옥섬에 철수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해군은 사이공 뉴포트항에서 구호물자 전달식을 하고 구호물자를 내려놓겠다고 버텼다. 대사관을 통해 교민들을 사이공 뉴포트항에 모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22일 붕따우항을 출발해 뉴포트항에 입항한 해군은 구호물자 전달식을 거행하고, 25일까지 물자를 하역한 후 26일 이곳에 있던 베트남 피난민과 우리 교민을 승선시킬 수 있었다. 이미 메콩강 일대가 북베트남군에게 장악된 상태였기 때문에 적이 배 밑에 폭발물을 설치할 가능성이 있어 낮에는 잠수부를 동원해 순찰하고 밤에는 수류탄을 터뜨려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함을 보호했다. 당초 27일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인근에 북베트남군이 배치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6일 밤에 출항을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외국 군함
뉴포트항에서 붕따우항까지 50마일은 협수로가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폭이 좁아 밤에 항해하는 건 극히 위험했다. 그나마 먼저 출발한 배는 남베트남 피난민을 수송한다는 명목으로 불을 밝히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출발한 배는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물 빛깔의 차이로 강줄기를 확인하며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27일 아침 뉴포트항에 남아 있던 미 용역선 LST선 2척이 피격됐다는 UPI 보도가 나왔다. 북베트남군이 우리 해군 LST선으로 오인해 공격한 것이다.
29일 푸꾸옥항에 입항한 해군은 일부 피난민과 물자를 하역했다. 그런데 다음 날인 4월 30일 아침 10시, 북베트남군의 총공세에 남베트남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남베트남 소속이던 해군 7척이 북베트남기로 국기를 바꿔 달더니 우리 해군 LST선으로 접근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드럼통 500여 개를 폭탄인 것처럼 투하하며 접근을 막고 외해로 탈출했다. 우리 정부와 군이 시행한 최초, 최대의 해외 난민구호 및 교민철수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우리 해군 LST선 2척은 남베트남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외국 군함이었다. 이 배에 타지 못한 교포들은 미군이 헬기로 탈출시킨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몇 년간 공산 치하에서 지내다 추방돼 겨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 교민 354명을 포함해 총 1902명의 피난민을 태운 해군 LST선이 부산에 도착한 1975년 5월 13일, 동아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목숨을 건 결사적 항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이 작전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십자성구출작전은 이후 군사(軍史)에서조차 지워졌다. 1981년 해군이 발행한 ‘해군사’에만 관련 기록이 있을 뿐,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자료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군에서 십자성구출작전을 내세우지 못한 것은 구출작전 이후의 외교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탈출하지 못한 공관원 3명이 ‘반혁명’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었고, 나머지 교민들도 1981년 5월 30일까지 억류돼 있었다. 정부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이 작전을 비밀에 부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비전투소개작전
베트남을 빠져나온 교포와 피난민들이 해군 LST선 갑판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제공]
베트남을 빠져나온 교포와 피난민들이 해군 LST선 갑판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제공]
십자성구출작전이 다시 알려진 것은 2006년 비공개문서로 분류되어 있던 외교문서가 공개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였다. 이를 계기로 십자성구출작전에 참가한 장병들이 자신들도 참전유공자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1994년 1월 1일부터 발효된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참전유공자법)’에 의해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자에 대해 그 공로를 인정하고 예우해오고 있다. 그런데 법에서 베트남전쟁 기간을 첫 파병이 이뤄진 1964년 9월부터 한국군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1973년 3월 26일까지로 규정하고 있다. 1975년 이뤄진 십자성구출작전은 이 기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2014년 19대 국회에서 김성찬 자유한국당 의원이 십자성구출작전을 베트남전 참전 기간으로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참전유공자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논의가 진척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0대 국회 들어 김 의원이 다시 발의해놓은 상태.
십자성구출작전을 베트남 참전 기간에 포함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 의견은 엇갈린다. 19대 국회 당시 작성된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엔 2가지 이유를 들어 부정적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 및 전투행위가 없었다’는 점과, ‘참전 기간을 확대할 경우 파리 평화협정을 위반하게 돼 해당국과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도 “십자성작전은 남베트남 패망 당시 한국 정부가 인도주의 차원에서 실시한 교민 구출 및 해외난민구호활동으로, 전투가 아닌 인원과 물자 수송이기 때문에 참전이라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은 “십자성작전은 비전투소개작전으로, 군인이 국가의 명령을 받고 수행한 작전”이라고 항변했다. 비전투소개작전은 외무부가 군대의 도움을 받아 자연적 재해 또는 인위적 재해(내전, 테러, 전쟁과 같은 상황)로 인해 해외에서 위험에 처한 자국인, 제3국인, 자국에 우호적인 현지인 등 비전투요원을 철수시키는 활동을 말한다.
조동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참전유공자법의 입법 의도를 보면 국회의 동의를 받은 파병인지 여부, 전투 행위를 전제한 파병인지 여부 등에 상관없이 현역 군인이 베트남에서 근무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십자성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도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지위가 부여된다고 본다”며 “미국이 비전투소개작전들을 베트남전 주요 사건으로 기억하고 평가하듯 십자성계획도 적정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십자성구출작전을 세상에 알리는 데 노력해온 장정옥 충남동부보훈지청 이동보훈팀장은 “통상 전쟁에서 실제 교전행위가 없었다 하더라도 군수물자수송, 의료지원업무를 비롯한 육상경비, 해상경비, 공중경비작전 등에 참전한 자도 참전자로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6·25전쟁 참전유공자 대상에는 군인, 경찰뿐 아니라 종군예술단원, 종군기자까지 폭넓게 인정하고 있고,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대상에도 이동외과병원진, 태권도교관단 등도 포함되어 있다. 교전행위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도적, 비전투 행위라 할지라도 군인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가서 목숨을 무릅쓰고 작전을 수행한다. 미국은 4월 29일부터 4월 30일까지 헬기를 활용해 2098명을 해상으로 피신시키는 것을 비롯해 베트남전쟁 막바지에 이뤄진 비전투소개작전을 당연히 참전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십자성구출작전을 수행한 병사들의 군 경력증명서(해군참모총장 발행)엔 1975년 4월 7일부터 5월 16일까지 특수지원부대로 베트남에 파견되었다고 기재돼 있다. 또한 정부는 십자성작전을 이끈 영관급 간부 5명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했다. 보국훈장은 국가 안전 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인도주의적 공로를 세운 이에게 주는 훈장과는 수여 기준 자체가 다르다.
‘파리 평화협정 위반 우려’는 기우
베트남에서 교민을 구한 십자성구출작전 참여 해군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십자성구출작전 동지회 제공]
베트남에서 교민을 구한 십자성구출작전 참여 해군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십자성구출작전 동지회 제공]
‘파리 평화협정 위반 우려’ 지적에 대해서도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은 “미국,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파리 평화협정 이후에 활동한 군인들을 참전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베트남 공산 정권에서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미국은 자국민을 마지막까지 피신시키는 작전을 수행한 1975년 5월 7일까지를, 호주는 1975년 4월 29일까지를, 뉴질랜드는 1975년 4월에 베트남에서 철수한 시기까지를 베트남전쟁 기간으로 규정하고 이 기간에 참전한 군인들을 참전용사로 인정해 보상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기간 규정과 관련해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참전유공자법은 처음 제정됐을 땐 6·25전쟁 참전 인정 시기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로 규정했지만, 이후 2003년과 2005년 개정을 통해 ‘남북한 국지전이 있었던 1948년 8월 15일부터 공비토벌작전이 종료된 1955년 6월 30일까지’로 확대했다.
이와 관련해 국제보훈학자인 유영옥 경기대 명예교수는 “참전유공자법을 제정하던 1993년엔 십자성구출작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외교 관련 문서도 2006년에야 비밀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됐기에 참전유공자법 입법 과정에서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알았더라면 당연히 누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유가 발생하면 개정해야 한다. 십자성구출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걸고 국민의 생명을 구한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개정법안을 발의한 김성찬 의원은 “해군 출신(해군참모총장 역임)이기 때문에 현역 시절부터 십자성구출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고, 당연히 참전유공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 개정법안을 발의했다”며 “비록 지금 소관 상임위에 있지는 않지만 보훈처 등 정부가 법 개정에 동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주영 국회부의장도 “장병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온당한 대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상정된 법안을 관심을 갖고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interview |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
“‘국가와 국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인정받고 싶을 뿐”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오른쪽)과 회원 지혁 씨.
장성수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사무총장(오른쪽)과 회원 지혁 씨.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 장성수(64) 사무총장과 지혁(77) 씨는 손에 십자성작전 관련 자료를 가득 쥐고 있었다. 장씨는 통신사(하사관, 현 부사관)로, 지씨는 해병대 인사 겸 작전참모(소령)로 작전에 참여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한 가지, 참전용사로 인정받는 것이다.
-작전에 투입될 때 처음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나.
“사전에 전혀 듣지 못했다. 그냥 훈련을 가는 줄만 알았다. 당시 참모총장도 사복을 입은 채 와서 우릴 배웅했다. 제주도를 지날 때에야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베트남 현지에서 긴박했던 상황은.
“들어갈 때부터 탈출할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뱀처럼 심하게 구불구불하고 수역이 좁은 메콩강을 한밤중에 불빛 없이 빠져나올 때도 초긴장 상태였고, 푸꾸옥항에서 월맹함정을 따돌리고 탈출할 때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다. 군 통신은 무조건 암호화해서 전송하게 돼 있다. 그런데 워낙 급박한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까 암호를 조립할 시간이 없어 평문으로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십자성구출작전동지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전부터 우리도 월남에 갔다왔는데,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2006년 우리가 한 십자성구출작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참전용사들이 모였다. 현재 46명이 참여해 참전법 개정 운동을 하고 있다. 국방부에 269명 대원 전체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줄 수 없다고 하더라. 장정옥 충남동부보훈지청 이동보훈팀장이 큰 힘이 돼주고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건 보상금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걸고 일했다는 걸 인정받고 싶다. 우리가 인정을 못 받는다면 앞으로 어느 군인이 목숨 걸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려 하겠는가. 참전용사법 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서 꼭 통과되길 바랄 뿐이다.”
신동아 2018년 9월 호
祕錄
1975년 ‘십자성 작전’ 참여 함장의 증언 (上)
월남 敗亡 직전 LST 두 척으로 교민·난민 1326명 구출
글 : 박인석 해군 예비역 대령
[편집자 주]
1975년 4월 30일 월남 자유민주주의 정권은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에 패망했다. 이에 앞서 73년 3월 23일 월남에 주둔했던 주월사령부가 월남에서 철수했다. 당시 군인과 민간인 대부분이 철수했지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대사관 직원과 교민 수백 명이 사이공 일대에 남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월남에 5년 동안 억류됐다가, 나중에 귀국한 이대용 공사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사이공에서 탈출하지 못한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을 극비리에 안전하게 귀환시키라”고 해군에 명령했다. 이른바 교민 구출 작전인 ‘십자성 작전’이다.
LST(전차 상륙용 함정) 2척(계봉함과 북한함)으로 구성된 ‘십자성 작전’ 수송 분대는 국방부 훈령과 해군 작전지시를 받고 75년 4월 6일 부산을 떠나 다낭으로 향했다. 수송 분대는 다낭으로 향하던 중 다낭이 함락되면서, 사이공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4월 22일 사이공 북쪽 뉴포트항에 접안한 수송 분대는 4월 26일 베트콩 해군의 함포 사격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교민과 월남 난민 1326명을 무사히 수송해 5월 13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 수기는 당시 구출작전에 참가한 두 함정 가운데 계봉함 함장이었던 박인석 예비역 대령(해사 14기)이 당시의 메모와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작전 수행 38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박인석 대령은 “십자성 작전은 주월사령부가 철수한 이후 벌인 유일한 작전이며, 최대의 민간인 구출작전이었는데도 우리 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령은 현재 ‘십자성 구출작전 동지회’(jworldbank@hanmail.net 장성수)를 조직해, 월남전에 대한 교훈과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의 업적을 사회에 알리고 있다.
《월간조선》은 박 대령의 수기를 두 번에 걸쳐 연재한다. 《월간조선》 독자들과 십자성 작전, 월남전에 참전했던 많은 분들의 관심과 제보를 바란다.
⊙ 주월사령부가 철수 후 벌인 유일한 작전이자, 최대의 민간인 구출작전
⊙ 구호물품 전달 명목으로 월남行, 다낭·나트랑 잇달아 함락되면서 사이공으로 목적지 변경
⊙ 월남 인부들, 고의로 하역 작업 늦춰
⊙ 이대용 공사, “아직 할 일 있다”며 항공권 흔들어 보여
⊙ 월남 해군, “공격하겠다”며 나포 시도
朴麟錫
⊙ 78세. 해군사관학교 14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 미 유학 함포장교과정 이수, 해군사관학교 포술교수, 함대 제1해역사 작전참모, 해군본부 정보처장,
대한해운(주) 선장.
⊙ 화랑무공훈장(충무함 간첩선 격침), 보국훈장 삼일장(파월철수구출작전유공).
⊙ 저서: 《바다는 태양을 띄운다》 《수평선너머 해원》.
1975년 4월 월남 패망 직전, 주월교포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봉함이 월남을 향해 출항하고 있다.
1973년 3월 23일 월남의 호찌민(胡志明)은 파리협정을 체결하면서 월남반도에서 모든 외국군을 축출했고, 동양식 병법계략으로 월남공화국을 섬멸하여 2년 만인 1975년 4월 30일 월남을 적화했다. 당시 한반도는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제2의 6·25 전쟁을 꾀하던 때라 정세가 극히 불안했다. 이에 우리 국민들은 안보시위를 벌이고 손가락을 자르면서 김일성을 규탄했다. 파리협정 체결이 있은 73년 3월 23일, 주월사령부 철수로 모든 군사 활동은 중지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우리 교포와 대사관 공관원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함대 제2전단(상륙함전단) 계봉함(LST 810함) 함장으로 제주도 함덕 해안의 암초폭파 지원을 위해 UDT요원과 함께 제주항에 주둔 중에 있었다. 75년 4월 3일 접안 작전 중인데 오후에 우선순위 초 긴급 전문이 도착하였다.
“귀함은 본전 수령 즉시 전속으로 진해 입항, 함대 작전상황실에 집결 해군참모총장 지시를 받으라.”
나는 즉시 제주항을 출항하여 진해 모항에 전속으로 항진, 4월 4일 08시 함대사령부에 출석했다. 국방부훈령과 해군작전지시를 받아 극비 파월 구출작전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이 임무가 바로 ‘십자성 작전’이다. 이 작전은 초 긴급, 완벽한 극비사항으로 진행해야 했다.
4월 5일은 진해 벚꽃장이 개장한다. 온 국민이 들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도 오랜만에 초등학생인 세 아이들을 데리고 벚꽃장 구경 가기로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하지만 4월 6일 일요일 우리는 진해 제1부두를 출항하여 부산 제3부두로 떠나야 했다.
곤히 자는 세 딸을 두고 월남으로
4월 6일 05시 곤히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내에게 “새로운 작전이 떨어졌어. 부산으로 가서 화물을 적재하고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할 거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와 본 함에 귀함했다. 4월 25일은 큰 딸아이의 생일인데, 혹시 나의 제삿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용한 아침 8시, 서너 명의 자매함장들이 진해 제1부두로 나와 환송해 주었다.
13시 부산 제3부두에 접안, 전국에서 밀려오는 농산물, 의료품, 공산품, 식품과 의류 구호품 등을 탑재한 대형 트럭들이 속속 들이닥쳤다. 우리는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물을 탑재한 후, 4월 9일 08시 진해에서 환송나온 자매함 함장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3부두를 떠나 남진했다. 세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지만, 부산항은 무심하게도 고요한 적막 속에서 여느 때처럼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다만 우리만이 장엄한 행렬의 진군나팔을 불면서 고국 항을 떠나고 있었다.
어느덧 현해탄으로 진입, 나는 함교에서 우리 승조장병들에게 그간 비밀로 숨겼던 본 함의 작전계획을 방송으로 알려야 했다.
“함 내에 알린다! 본 함은 부산을 출항하여 패망 직전에 있는 월남공화국에 인도적인 지원을 위하여 비군사적인 구호물자를 적재하고 다낭으로 출전 항해를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이 월남을 지원하는 마지막 작전이 될지도 모른다. 다낭 도착 예정은 19일이며 도착 즉시 하역 작업과 난민 수송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대사관 철수와 공관원 및 교포 구출작전을 수행한다. 모두 알다시피 지금 월남은 전쟁 중이다. 우리에게도 적 월맹이나 게릴라의 기습 공격 혹은 테러가 예상된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우리는 일심단결하여 완벽한 방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이 바다를 통해 부산항으로 개선 귀국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 때까지 승조장병들의 승리와 무운을 기원한다. 이상 함장.”
“필승 계봉함!”
월남으로 향하는 계봉함 함상에 서 있는 필자.
함 내는 일순 침묵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내 승조장병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침묵을 깨며 바다를 뒤흔들었다. “계봉함 만세! 대한민국 만세! 필승 계봉함!”
나는 장병들의 환호에 필승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십자성 작전’ 수송 분대는 LST 2척. 계봉함과 북한함으로 구성되었다. 북한함(815함)이 수송 분대의 기함으로 수송 분대 사령관과 참모진이 탑승하였다. 계봉함(810함)의 함장인 내가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면 권상호 사령관과 정홍석 참모장, 북한함의 이윤도 함장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베테랑들이었다.
나는 1960~70년대 동서남해 해상에 침투하는 간첩선을 색출하는 대간첩작전 시기에 함포포술장 과정으로 도미유학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포술학을 가르쳤다. 이후 충무함(구축함 DD-911) 포술장으로 긴급 부임하여 24개월간 특수근무를 하다 보니 파월 등 해외 근무할 기회가 없었다. 메콩강을 항해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1960년 평화스럽던 월남 사이공에 생도 원양실습차 방문했던 경험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한 월남을 그것도 구출작전 함장으로 출전한다는 임무는 나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우리는 하루에 약 240마일(384km)씩 항해하며 월남에 다가갔다. 북태평양의 일본령 도리시마 근해에 이르니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임석하는 해군사관학교 29기 졸업식 행사가 라디오로 중계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전파가 약해지더니 어느덧 우리는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망망대해 위에 들어서 있었다. 남지나(南支那)에도 봄은 오는지 대양으로 들어서자 바다는 잔잔하고 밤에는 적막감까지 감돌았다.
南支那의 바다
월남으로 향하는 도중 스콜이 오면 장병들은 샤워를 하며 더위를 달랬다.
하룻밤을 지나 북위 30도선 근해에 이르자 4월의 벚꽃 피는 봄 날씨도 사라지고 초여름의 무더위가 함 내 온도를 올렸다. 장병들은 갑판에서 과업을 하고 휴식시간에 그늘을 찾아 얼음물로 열기를 식혔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라 선풍기가 24시간 돌아가도 실내는 찜통이었다. 차라리 열을 푹푹 뿜어내는 기관실이 그래도 수면 아래라고 시원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남쪽 바다에는 스콜이 있었다. 스콜이 쏟아지면 장병들은 옷을 벗고 자연 샤워를 하면서 열대의 날씨에 조금씩 적응했다.
도리시마를 지나 남지나해로 들어갈 때에 부장을 불렀다.
“전 승조원은 하절기 복장으로 갈아입고 앞으로 10여 일간의 항해기간 동안 전투 대비 태세 훈련을 실시한다.”
본 함은 한국 연안에 있을 때에도 아침, 저녁으로 전투 배치 훈련을 실시했다. 아침이나 저녁에 실시하는 이유는 세계대전 때 항공기의 함정 공격이 주로 일출과 일몰 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는 훈련과 함포의 정비 그리고 만재한 각종 화물의 안전관리가 주 업무였다. 2000여 톤에 달하는 화물이 파도에 흔들려 한쪽으로 쏠리면 선박에 횡경사가 생기고 그러면 롤링 때에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이 닥칠 수 있다. 만일 화물로 인해 함의 기동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전쟁터에 가보기도 전에 패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는 24시간 화물창에 당직자를 배치시켜 이상 유무를 보고하게 했다. 항해에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군함의 기본이며 항해의 필수 요건이기도 했다.
겨울의 남지나해는 거칠기로 이름난 곳이다. 오죽하면 해군 속담에 “바다의 사나이는 남지나해의 겨울 파도를 타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 높은 바다이다. 1960년 1월 해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원양 항해 당시 나도 남지나해의 파도에 며칠을 굶고 기진했다. 주변의 동기생들은 소위 똥물까지 토했고 그때의 고통이 많은 졸업생을 바다가 아닌 상륙군으로 전과시켜 버리기도 했다. 당시 실습함이 사이공에 입항하자 동기들이 비실비실 몸을 일으켜 상륙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생도가 내 고향 사람이오?”
1960년 1월. 사이공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항(美港)이었다. 열대의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원하게 거리를 질주했다.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짙은 열대 향수를 뿜으면서 스쳐가면 젊은 생도들의 마음은 더없이 설렜다. 상륙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부두에 하얀 아오자이의 아가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기생들이 무슨 재주가 그렇게 좋은지 그새 월남 아가씨들을 꾀 데이트를 시작한 거였다. 도대체 멀미로 바닥을 기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지고 생생하게 살아나 빛나는 얼굴로 기다리던 아가씨들과 짝을 지어 부두를 떠나는 생도들을 나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멀미는 병이 아니다. 바다에서 생긴 병은 땅을 밟으면 낫는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 같았다. 거리에서 만난 월남인들은 친절하고 온순하며 자유분방해 보였다. 나는 동기생들과 달리 매번 아가씨 한 명 꾀지 못하고 외출에서 먼저 돌아와 침실을 뒹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기생 한 명이 나를 불렀다.
“현문에 한번 나가 봐. 누가 사람을 찾는데 아마 너를 찾는 거 같아.”
나는 튕기듯 일어났다. 나를 찾는 사람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동기가 나를 놀리는 게 아닐까. 마음이 부풀어 후다닥 옷을 챙겨입고 현문으로 나갔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둘러봐도 하얀 아오자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열대의 더위가 작열하는 갑판 한쪽에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중년 사내 한 사람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생도가 내 고향 사람이오?”
그는 이틀간 고향 사람을 찾는 중이라 했다. 나는 허전해지는 마음을 수습하고 그를 휴게실로 안내하여 음료수를 권했다. 음료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천천히 붉은 기가 떠올랐다.
“젊은이, 조금만 일찍 오시지”
“한국 배가 들어왔다기에 혹시 고향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이리 찾아왔다오. 내 고향은 옛날에 배가 들어왔던 강진의 성전이라는 곳이오. 나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가 불란서로 유학 가는 도중에 유학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오.
한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다시 불란서로 유학을 가던 중에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바람에 이곳 월남에 주저앉게 되었지요. 지금은 이곳 사이공에서 사업을 하고 있소. 전쟁 중 침몰한 선박이나 고철을 수집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자리를 잡아 살 만하지요.
전남 해남군 계곡면 ‘구배미’라는 마을에 가면 박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외가 친척이라오. 내가 사이공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줄 수 있겠소? 어머니야 이젠 돌아가셨겠지만 고향에 내 소식을 꼭 전하고 싶소.”
자신의 이름을 김상율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마음이 찡해지고 코끝이 시려 왔다. 어떻게 청을 거절할 것인가. 반드시 소식을 전해 드리겠다며 위로했다. 그는 눈물을 닦았다. 침실에 돌아와서도 마치 나를 고국의 그리운 얼굴로 착각하는 듯하던 시선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월 말. 원양실습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졸업 휴가를 받아 ‘구배미’라는 마을을 찾아갔다. 교통이 불편한 때여서 꼬박 반나절을 외진 시골 길을 걸어야 했다. 마을 가운데 부농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 할아버지가 바로 김씨가 찾던 외사촌 형이었다. 김씨의 소식을 전하자 할아버지는 목놓아 울며 눈물을 쏟았다.
“젊은이…. 조금만 일찍 오시지. 숙모님이 살아생전 얼마나 애타게 소식을 기다렸는데… 아이고 세상에.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다니.”
노인의 통곡 속에 없는 시간을 쪼개 먼길을 찾아 낯선 시골 길을 더듬어 온 피로가 사라졌다. 학교로 돌아와 곧바로 사이공의 그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후 그들 가족은 많은 소식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김상율씨는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상 근무를 할 때에도 간간이 서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월남전 당시 나는 한 번도 파병되지 않아 금번 월남 철수 작전에 동원될 때까지 그와 상봉할 기회는 다시 생기지 않았다. 부산항을 떠나올 때도 촉박하게 출항 준비를 하느라 그분의 주소나 연락처를 챙기지 못했다.
기관 고장
월남으로 향하는 도중 기관 고장이 발생했으나 기관병들의 10여시간에 걸친 노력 끝에 수리할 수 있었다.
1975년 4월 17일 밤. ‘십자성 작전’을 위해 월남으로 향하는 우리 배는 타이완을 지나고 있었다. 이날 한밤중에 내 방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김상율 사장과의 추억에 잠겨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속에서 기관 소리가 들려왔다.
“함장님. 심각한 상황입니다.”
기관장의 더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얘기해 봐.”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야밤의 전화가 좋은 일일 리가 없을 터였다.
“좌현 기관이 고장 났습니다.”
현창 밖에서 파도가 우르릉거리며 소리를 키웠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부터 배의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체 능력으로 수리가 불가능한 대형사고입니다. 진해의 공장으로 돌아가야 가능한 수리입니다.”
그도 왜 모르겠는가. 지금 상태로 회항할 수 없다는 것을. 그건 곧 작전의 실패를 의미하는 일이었다.
“기관장. 진해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일단 최단시간 내에 기관을 수리하도록 하라. 나도 곧 기관실로 내려가겠다.”
기관실로 내려가니 기관장과 부원들이 벌써 기름 범벅이 되어 펼쳐놓은 공구들 사이에서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배의 속력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배는 기관이 2개여서 비상시 한쪽만 가동되고 그러면 배의 항진 속도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첫 번째 수난이었다. 떠나오기 전 그토록 점검을 하고 준비를 철저히 했건만 이런 일은 일어난다. 기관병들이 배 밑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긴급사고와 앞으로 다가올 사태에 대한 궁리로 밤을 꼬박 새웠다. 인간의 영역 밖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일 앞에서 나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무력(無力)한가.
기어이 현창 밖이 훤하게 밝아온다. 수리시간은 벌써 10시간을 넘어섰고 120마일(약 192km)을 달려야 할 배는 6노트(약 11km)로 항진해 겨우 60마일(약 96km)을 전진했다. 아침 7시. 식사도 거르고 버티는데 벨이 울렸다. 기관장이었다.
“함장님. 기관 수리, 성공했습니다.”
“정말 수고했네, 기관장. 이젠 대원들과 푹 쉬게.”
가져온 성경책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고 신에 감사드렸다. 이런 일들은 분명 인간의 노력만으론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기관의 정상 가동으로 안정을 되찾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군본부에서 전보가 들어왔다.
폭발사고
“목적지 다낭, 베트콩에 함락. 나트랑으로 입항지 변경.”
목적지가 가까워지는데 입항지가 바뀌다니. 월남의 전세가 빠르게 기울고 있다는 증거였다. 떠나오기 전부터 수없이 봐온 월남 지도를 들여다보며 나트랑에 붉은 원을 그렸다. 항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진로를 나트랑으로 바꿨다. 19일. 나트랑이 가까워지자 배 안은 한층 더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전에 입항 준비를 마치고 오후에 운항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전원에게 처음으로 휴식시간을 주었다.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일몰시간. 포신이 뻥 뚫린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사격 완료 태세에 들어간 장병들이 제자리에서 명령을 기다린다. 나는 언제나처럼 함교의 LNG포 옆에 서 있다. 대테러 훈련이다.
그런데 갑자기 펑 하는 폭발음이 귀청을 찢는다. 군함이 요동치고 갑판이 엄청난 충격으로 와르르 떨린다. 파편이 튀고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장병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스쳐간다. 포연 속에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사수가 피투성이가 되어 갑판을 뒹굴고 화약 냄새가 폐 속으로 확 밀려들어 온다.
거꾸러진 장병들 사이로 부장과 군의관이 희뿌연 포연을 뚫고 달려온다. 갑판 아래쪽에서 위생병 둘이 들것을 들고 뛰어온다. 창졸간(倉卒間)에 당한 일에 어안이 벙벙한데 사수의 처절한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든다.
“빨리 의무실로!” 군의관이 소리친다. 위생병이 몸을 뒤트는 부상병을 들것에 싣고 의무실로 후송한다. 군의관도 환자를 붙들고 같이 달린다. 내 몸에도 피가 낭자한데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고 내 몸을 살필 계제도 아니다. 적의 침공은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직도 열을 내뿜고 있는 뜨거운 포신이 눈에 들어온다. 장병들이 모여든다.
“함장님. 우선 의무실로 가시지요! 이곳 상황은 제가 조사해 보고하겠습니다!”
부장이 내 옷에 번진 피를 보고 재촉한다.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이다. 참모들과 확인한 결과 사고는 실탄이 포신의 약실에서 자체 폭발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불완전한 무기가 생목숨을 잡을 뻔했다. 평소 장비 점검을 철저히 해도 종종 이런 사고가 생기곤 했다. 내 몸을 검사하는 군의관에게 사수의 상태를 물었다.
“지금 응급처치를 해두었습니다. 환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고환에 파편이 박혀 수술을 해야 합니다.”
“뭐라고? 고환에? 그거 큰일 아닌가!”
“파편만 제거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필 부위가 급소여서 이동 중인 배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합니다. 사이공에 입항하여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나트랑도 함락
그나마 다른 곳에 큰 부상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 했다. 군의관이 나를 샅샅이 살폈으나 신기하게 내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옆에 있던 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지에 들어가면서 함장이 부상을 입으면 부장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내 군복에 묻은 피는 가까이 있던 사수의 피가 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번 작전에 필승 개선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트랑 도착 전에 또다시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전문이 날아왔다. 이번엔 목적지가 사이공으로 바뀌었다. 전세가 숨가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월남 땅에 입항도 못해 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려됐다. 그래선 결코 안 될 일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표면적으론 월남에 인도적인 물자 지원이지만 속셈은 물품 지원을 빙자해 우리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었다.
대사관 직원을 적지에 방치한다는 것은 나라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민들 역시 잘살아 보려고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사업을 일으킨 경제 일꾼이자 경제적 선각자였다. 그런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과 땀을 정부가 모른 척하고 공산화된 적지에 내버려둔다는 것은 주권 국가가 할 짓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막대한 화물을 월남 땅에 퍼주고 우리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을 구출해야 했다. 그게 국가의 의무이자 해군의 의무이고 동시에 지금의 내 임무였다. 나는 월남 지도에서 다시 사이공을 찾았다. 항만 정보도 제대로 없고 항로표지도 해도와 차이가 많아 믿을 수 없는 뱃길을.
21일. 남국의 어둠이 내려앉는 18시경. 드디어 메콩강 입구에 도착했다. 물빛은 탁하고 남방의 무더운 대기가 식으면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12일간 쉬지 않고 달려온 기관을 정지하고 닻을 놓자 검푸른 강물이 쇠로 된 닻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혼탁한 강물에서 역겨운 비린내가 풍겨 올라왔다. 전쟁기간에 사망한 270만여 명(월남인 150만명, 캄보디아인 70만명, 라오스인 50만명)의 피가 이 강물로 흘러들어 왔을까? 메콩강 주변의 그 무성하던 정글도 전쟁에 시달려서 볼품없이 메말라 있었다. 사람살이가 편치 않으면 자연도 같이 황폐해지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었다.
1960년 원양실습 때 메콩강 주변은 그야말로 완전한 정글이었다. 고깔모자를 쓴 여인들이 수로 변을 한가하게 오가던 그림 같은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아름답던 사이공은 어디로 갔는가. 행여나 하던 기대가 무너지자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에 마음마저 쓸쓸해졌다.
수송 분대가 닻을 놓았다는 연락을 받은 대사관에서 해군 연락장교 일행과 월남 해군 연락장교가 와 함께 배에 올랐다. 가무잡잡하고 왜소한 월남 군인의 이름은 트롱 반 중위라 했다. 나는 첫인상부터 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척 이곳저곳을 살피는 눈초리, 우리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태도 등. 한국에서도 나는 오랫동안 대간첩 작전을 수행해 온 터였다. 전시엔 곳곳에 스파이가 득실거리는 법. 나는 이 자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직감하는데 그가 들려주는 사이공의 근황이 더욱 미심쩍었다.
“메콩강 수로는 공산 게릴라의 준동으로 위험한 상태다. 강 유역에 기뢰가 부설되어 있고 강변의 정글에 베트콩이 매복하여 불시에 기습당할 수 있다.”
마지막 훈장 수여
사이공 뉴포트에서 구호물자 전달식이 끝난 후, 월남정부는 우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하나같이 불길한 정보였다. 그렇다고 임무를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22일 06시 사이공의 뉴포트항으로 출발했다. “전 대원 전투태세!”
본 함은 완전무장한 상태로 메콩강 50마일을 조심조심 거슬러 올라갔다. 전쟁으로 인해 정확한 해도, 조석표, 최신 항해 정보 등 제반 정보가 없는데다 물속엔 기뢰까지 다닌다고 했다. 이제 본 함 밖은 모두 위험지대이자 경계구역이 되었다. 탁한 메콩강의 강물이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남국의 정취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트롱 반 중위의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메마른 정글은 음험한 베트콩의 매복지로 변했고 전투태세에 들어간 장병들의 눈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메콩강의 혼탁한 강물에서 풍기는 특유의 월남 냄새도 숨어 있는 게릴라의 냄새 같기만 했다. 군함의 속력이 6노트로 떨어졌다.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표적물이 되기 좋은 속도였다. 기관 고장의 악몽도 되살아났다. 긴장된 6시간의 항해 끝에 사이공의 외곽이 드러났다. ‘쾅! 쾅!’ 포성이 연달아 터지고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전쟁터에 들어왔다고 장병들이 실감할 사이도 없이 배는 12시 사이공 북쪽, 뉴포트항에 접안했다. 주변 부두는 아수라장이었다. 정박 중인 외국 상선에 피란민들이 서로 승선하려 아귀다툼을 벌이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22일 16시. 사령관이 있는 815함에서 구호품 전달식을 거행한다는 연락이 왔다. 부장과 함께 815함으로 건너갔다. 주월 김영관 대사 일행과 월남 보사부 차관을 비롯 고위층 인사와 월남 보도진 10여 명이 815함에 승함했다. 구호품 전달식이 끝난 후 파월 수송 분대 6명에게 월남 훈장을 수여하는 수여식이 있었다. 나도 대상이었다. 월남공화국이 수여하는 마지막 역사적인 훈장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인데 이런 행사 자체가 형식적으로 보였다. 북월남의 진주 또는 반(反) 티우 대통령 세력에 의한 정부 전복 가능성으로 정국이 혼미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사이공은 꽤 심각해 보였다. 부두에는 피란민을 가득 태운 크고 작은 상선들이 연방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미처 떠나지 못한 피란민들이 우왕좌왕 이 배 저 배로 몰려다니고 정박한 배의 숫자는 자꾸만 줄어 부두는 점점 비고 있었다.
하역 작전
김영관 주월 대사가 수송 분대 장병들에게 환영연설을 하고 있다.
그런 급박한 와중에도 김영관 대사는 위험한 항해를 감행해 온 고국의 수송 분대 지휘관들에게 조촐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는 “사이공에 억류 중인 한국 국민과 교포를 구출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 옛날 사이공에서 만난 사업가 김상율씨가 떠올랐다. 그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친(親) 한국계 월남 피란민을 그다음으로 수송해야 합니다.”
김영관 대사 얘기로는 월남전에 참전한 후 월남에 남아 가정을 꾸린 한국인이 많다고 했다. 대사관의 철수도 시간문제였다. 대사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탄손루트 공항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울리고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더운 열기 속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폐부를 들쑤셨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하역 작업과 교민 승선에 관한 지휘부 회의를 시작했다.
부두는 화물을 실어 내려는 화물차와 인부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인부들은 남월남 보사부에서 파견된 노무자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베트콩의 첩자일 게 분명했다. 부장을 불렀다.
“하역 인부들의 휴대품과 몸수색을 철저히 하라. 그리고 완벽하게 출입통제해야 한다. 인부들 중에 누가 베트콩의 첩자인지 알 수가 없어.”
무장한 경계병이 LST 화물창과 함 주변에 배치되었다. 장병들의 삼엄한 경계에 술렁이던 월남 인부들이 긴장하며 질서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초라한 월남제 트럭들이 화물창에 들어와 구호품을 실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역 작업은 3~4일 정도 소요될 것 같았다. 우리는 하역 작업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 않기를 바랐다. 김영관 대사와 교민 승선 일자를 4월 26일자로 잡아두었기 때문인데, 월남 노무자들의 작업 속도는 너무 느려 정반대의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하루가 지나도 하역량은 겨우 10%에 지나지 않았다.
인부들의 怠業
사이공 뉴포트항에서의 하역 작업은 월남 인부들의 고의적인 태업으로 계속 지체되었다.
병사들의 감시에도 인부들은 이상하리만치 느렸다. 어떤 인부는 손에 생긴 작은 찰과상을 치료해 달라고 생떼를 썼고 그러면 다른 인부들은 일손을 놓고 그 장면을 구경했다. 전시의 국민들이라 생각하기 힘든 행동에, 작전관은 ‘인부들이 의도적으로 하역을 지연시키는 거 같다’고 했다. 나는 지지부진한 작업 속도와 인부들의 의도적인 태만에 화가 치밀어 우리 대원을 하역 작업에 동원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느린 하역은 계획적인 것이었다. 작업을 지연시켜 우리를 부두에 묶어 나포하려던 속셈이었던 것이다. 순간순간의 정보 분석과 상황 판단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도착 3일이 지났는데 화물의 절반도 반출이 안 되었다. 한번은 구호물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탐문했더니 모(某) 시장으로 간다고 했다. 트럭에 만재하여 출발하는 라면 차량이 곧바로 암시장으로 흘러들어 가다니. 순간적으로 ‘우리의 노동이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대사관과 교민의 철수, 구출인 것.
하역 못지않게 급한 것은 함 내의 식수와 유류 수급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월남 해군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러더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보급 지원이 불가하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설마 하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식수와 유류가 없다면 우리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갈수록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물과 기름을 수급받지 못하면 구호품도 하역할 수 없다!”
게릴라 침투 막으려 수중에 수류탄 투척
월남 해군에 으름장을 놓고 참모들과 궁리를 했다. 그들의 반응만 기다릴 형편이 아니었다. 사실 월남 해군에선 행정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담당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잔꾀를 쓰기로 했다. 화물 담당 장병이 적재한 구호품 가운데 라면 박스를 꺼내 월남 해군에게 넉넉하게 건넸다.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그렇게 지지부진 끌던 식수가 육상으로부터 공급되고 유류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식수의 질이 좋지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패망을 앞둔 국가에서 수질은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23일. 기름과 식수를 받으면서 기동타격대를 함 내외에 배치하고 해군 UDT 팀장에게 수중 탐색을 지시했다. 함수 포대에 함포 사격 요원을 배치하여 대테러 작전으로 전환 가동하였다.
24일. 하역 인부를 추가로 투입했다. 전세가 불리해 빠르게 하역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09시30분. 함승조원 160명과 교포 40명을 하역에 투입했다. 북월맹 전투병이 사이공 시내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해군 상륙정이 기습 공격할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소형 선박을 이용하거나 몰래 수영을 하여 폭탄이나 수류탄을 투척하는 방법이 예상되었다. 베트콩들이 수중 잠수 침투를 잘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북월맹 전투병의 수중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야간 경계를 강화하고 보초에게 호각을 지참시켰다. UDT요원이 물 밑에서 경계하고 밤에는 5분마다 수류탄을 함미 양쪽에 정기적으로 투척했다. 수류탄을 수중에 투척하는 전술은 내가 본국에서 연구 개발하여 폭음용 수류탄으로 주문, 적재한 것이었다. 월남에서 처음 사용한 것인데 폭음으로 수중 침투자의 고막을 터뜨리는 전법이었다. 종전에 들어본 적 없는 무기로 적들에게 혼란과 지레 겁을 주는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받을 경우에 대비해, 터그보트를 준비하고 30분 내 출항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참모총장으로부터 날아온 긴급電文
26일 05시25분. 참모총장에게서 긴급전문이 날아왔다.
1)국방부장관 지시를 아래 같이 하달함.
가. 여하한 경우라도 교전에 말려들거나 사이공항에 상륙, 고립되지 않도록 할 것.
나. 모든 것에 우선해서 대사관 직원 재산 및 교포 철수에 있어 이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월남정부 지원.
다. 현지 대사와 긴밀한 협조 연락을 유지하여야 하는 상황에 대치한 행동의 결정을 사령관이 결심할 것을 강조함.
2) 상기 1항 의거 아래와 같이 행동 지시함.
810(계봉함), 815함은 구호물자 하역 즉시 (위급시는 하역 중단) 철수할 것.
김영관 대사는 우리 교민을 푸콕 섬으로 철수시킬 생각이었다. 월남 고위층은 한국 교민 철수에 호의적이지만, 이미 정부의 행정력이 마비 상태여서 실무진에서는 협조가 되지 않았다. 김 대사는 단시일에 정상적인 출국 수속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 출국 수속을 밟지 않는 해상으로 동포들을 실어나를 생각이었다. 이에 월남 부수상은 한국교민을 수송할 때 월남인 400명 정도를 같이 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계봉함은 월남 피란민 537명을 태우고 18시에 출항할 계획이었으나 예정보다 4시간 늦게 승함이 시작되어 27일 오전으로 출항이 변경됐다. 기함에는 김영관 대사와 분대사령관도 직접 나와서 승함을 지휘했다. 26일. 참모총장으로부터 긴급전문이 또 날아왔다.
“본전 수령 즉시 구호물자 하역을 중지하고 교포 탑승(대사관 직원 및 연락장교, 통신원 포함) 귀국하라.”
난민 승선
분대사령관은 교민 철수를 위해 27일 출항하겠다는 의사를 본국에 보냈다. 하역이 종료되는 즉시 LST-815함에 교민과 친한계 월남 피란민을 승선시켜 26일 정오에 출항토록 할 예정이고 계봉함(LST-810함)은 월남 피란민 및 물자가 적재되는 대로 27일 아침에 출항하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붕타우에는 자유중국 LST가 먼저 들어와 있었으나 빈 배여서 사이공 입항을 거부당했고 우리는 구호품 전달을 빌미로 사이공에 입항하여 교민을 태울 수 있었다.
26일. 월남정부가 요청한 중국계 월남 난민 1000여 명을 배에 탑승시키는 데 시간이 자꾸 지연되었다. 월남 피란민들의 승함이 시작되면서 우리 배의 갑판은 야시장을 방불케 했다. 중부 월남에서 온, 월남정부에서 가장 싫어한다는 중국계 난민들은 자식들을 업고 끼고 멘 채 짐 보따리를 끌고 이고 배에 올랐다. 그들의 재산은 다양했다. 오토바이, 돼지, 식량, 트럭, 이불, 솥단지, 자전거, 리어카 등. 남월남정부가 수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용도가 무언지 알 수 없는 빈 드럼통 800개도 실렸다. 거기에 대사관 차와 짐까지 실게 되니 배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피란민은 철저하게 대사관에서 발급한 비표를 받은 사람들만 승선시켰다. 비표라 해봐야 대사관에서 임시방편으로 커튼을 잘라 대사관 도장을 쾅쾅 찍은 천 쪼가리였다. 그 천조각 한 장을 구하지 못해 탈출하는 배에 오르지 못하는 피란민의 몸짓은 절박했다. 무장한 위병에게 돈을 건네며 승선을 간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무기를 소지했다가 강제 하선당하자 끌려 내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내도 있었다. 승선이 생명이고 하선이 죽음인 갈림길에서 무너지는 나라의 국민은 비참했다.
우리 장병들은 질서 유지를 위해 흔들리지 않았다. 월남 피란민과 화물 적재 중 ‘본전 수령 즉시 긴급 출항’ 명령이 본국에서 또 날아왔다. 하지만 이 상태로 승함을 중단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혼란을 자초할 지름길이 될 것이었다. 이때, 멀리 탄손루트 공항 쪽에서 폭탄이 터지고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오전 10시경. 백주에 함수 제1포대 경계 당직자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함장님 방금 부두 100m 전방에서 총격으로 한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나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작전관을 대동하여 현장으로 나갔다. 그 사이 시신이 치워져 현장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두에 위치한 PX에 들렀다. 입항한 날 저녁 몇 가지 일용품을 구입한 적이 있던 PX였다.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누런 군복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살며시 문을 닫고 발소리를 죽여 몸을 돌렸다. 그 사이에 월맹군이 이곳까지 침투해 있었다. PX 주인은 보이지 않고 후질그레한 군복의 월맹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잠들어 있었다. 사태가 긴박했다. 오늘 밤이라도 야간 출항을 해야겠다고 순간 결심했다.
남은 사람들
분대사령관이 탄 기함은 메콩강 수로와 만나는 나베에서 우리 함을 기다리기로 하고 먼저 떠나갔다. 친한파 난민들과 교민 일부가 815함에 탑승하여 떠나자 내 입술과 목은 타는 듯 말라붙었다. 이제는 빈 부두에서 오직 혼자 상황을 판단하고 결심해야 했다. 그 많던 상선들은 간밤에 모두 떠나 버려 부두도 거의 비었다.
옛날부터 배에 위험이 닥치면 쥐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탈출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뱃사람들은 예부터 배에서 쥐를 보고도 죽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휑한 부두에는 미군 용역선 두 척이 탈출하지 못한 쥐처럼 우리 배와 함께 남아 있었다. 간밤에 그 LST 용역선의 선장이 나를 찾아 왔었다. 선장은 한국인 이(李)씨였다. 그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이 선장. 상황이 위험합니다. 빨리 떠나야지요. 언제 출항합니까?”
“이틀 후에 출항할 겁니다. 설마 그때까진 괜찮겠지요?”
그가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도 이 혼란한 와중에 고국의 군함이 옆에 있어 위안이 되는지 또 다른 우리나라 사업가도 배에 찾아왔다.
“나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오가며 해운업을 한답니다. 어렵게 이룬 사업이 이제 한창 성업 중인 셈이지요.”
가방에 가득 담긴 돈뭉치까지 보여주던 젊은 사장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번들거렸다. “지금 상황이 심상찮다. 그만 사업을 철수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벌여놓은 사업 때문에 미적거리는 그가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나는 어서 떠나라고 재촉했다. 이들이 아니어도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열대의 나라에서 피땀으로 이룬 사업에 대한 미련으로 미적거리고 있을까. 안타깝고 답답했다.
상황이 급박한데 우리 교민과 가족 156명이 뉴포트에 뒤늦게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도 허겁지겁 배에 태웠다. 해군본부로부터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본전 수령 즉시 출항하라는 엄명이 또 벼락 치듯 날아왔다. 월남 피란민 1500명을 다 태울 시간이 부족했다. 나도 이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조속히 부두를 떠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함장님!”
정신없이 탑재 현장을 지휘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우리 배에 파견 온 헌무사 기관병이 초조한 얼굴로 재촉했다.
“우리는 언제 출항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른 기관 사병들에게서 빨리 출항하자는 호소와 항의를 들어온 참이었다. 만일 우리 배가 나포될 경우 기관 사병들이 먼저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함마저 떠나고 없는 이 단독 작전의 속 타는 지휘관 심정을 누가 알랴. 서둘러 난민을 싣고 귀국할 대사관 화물까지 탑재하니 어느덧 오후 6시를 넘고 있었다.
이대용 公使
월남 패망 시 탈출하지 못하고 5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이대용 주월공사.
부두에는 화물 탑재를 종료하고 앞 램프를 닫는 모습을 환송 나온 이대용 공사와 대사관의 이문학 연락장교 등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 공사님. 함께 떠납시다. 상황이 너무 급합니다.”
다시 한 번 이대용 공사를 설득했다. 그는 “아직 할 일이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항공표를 내보였다. 단단하고 야무진 체격의 이 공사와 옆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흔들렸다. 고국의 마지막 수송함을 떠나 보내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안전하게 잘 가라고 환송하는 그들을 남겨두고 부두를 빠져나오는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제 한 몸의 안위를 거부하고 기꺼이 적지에 남는 사람들. 떠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남은 자들의 처연한 모습에 숙연해졌다.
그 후 이 공사와 남은 공관원은 결국 적지에서의 탈출에 실패했다. 월맹군의 오랜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며 죽음을 넘어선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끝내 조국을 배반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대사관의 명예를 지키다 4~5년 만에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이 글을 통해 그분들께 깊은 위로와 존경을 보낸다.
사이공 탈출
1975년 4월 26일. 일몰 후 부두를 벗어나 전속력으로 강을 빠져나왔다. 조류가 거세고 강은 어찌나 꾸불꾸불한지 배를 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고 과감한 조함을 시도했다. 등대나 항로 표지가 다 파손되는 바람에 장애물이나 이동 선박이 나타나면 서치라이트를 일일이 비춰 물표를 확인해야 했다. 드디어 사이공 항로로 진입했을 때에는 열대의 어둠이 짙어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뉴포트 부두를 간신히 돌아 나와 사이공강을 따라 전속 항진하는데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적들의 바다, 이 배에 운명을 건 천여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 당장 철수하라던 상부의 득달같은 명령. 공산 치하에 남아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려는 이 공사 일행과 목숨 걸고 사업을 번창시키려는 동포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가기도 했다. 그때였다. 함교 VHF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한국 LST-810함(계봉함)은 즉시 출항 중지하라. 만일 불복하면 공격하겠다!”
월남 해군의 강경한 통보였다. 통신장이 두려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임전무퇴의 단호한 어조로 지시했다.
“일절 응답하지 마! 침묵으로 일관하는 거야.”
등골이 서늘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나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조금만 지체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함은 완전 전투 배치 상태로 전속 항진했다. 캄캄한 시야에 등대는 없고 물살은 세고 수로는 꾸불꾸불하였다. 자칫하면 엉뚱한 수로로 진입하거나 강둑에 부딪혀 좌초할 판이었다. 나는 오랜 해상 근무로 조함술에는 누구 못지않은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 경력이 소용없었다. 온 몸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쥐어짜듯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땀으로 끈적해진 속옷이 척척하게 피부를 휘감았다.
선수에서 견시를 맡은 초병들도 초긴장 상태였다. 사소한 물체를 피하려다 더 위험한 충돌을 당할 수 있으므로 진로의 방해물은 그냥 뚫고 나간다고 지시했다. 온 몸이 타는 것 같은 긴장으로 견시병들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월남 해군에서는 계속 나포하겠다는 협박이 날아왔다.⊙
조회 : 12669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祕錄] 1975년 ‘십자성 작전’ 참여 함장의 증언 (下)
월남 방송, “영해에 잔류하면 즉각 항공기의 공격을 받을 것”
글 : 박인석 해군 예비역 대령
⊙ 캄보디아 인근 푸콕섬에서 월남 피란민 등 567명 하선시킨 뒤 1326명 한국으로 데려와
⊙ 旗艦의 主통신기 고장, 주통신기 이전하라는 명령 거부
⊙ 4월 30일 월남 敗亡 직후 월남 해군 군함 7척이 공격 시도, 빈 드럼통 바다에 띄워 격퇴
朴麟錫
⊙ 78세. 해군사관학교 14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 미 유학 함포장교과정 이수, 해군사관학교 포술교수, 함대 제1해역사 작전참모, 해군본부 정보처장,
대한해운(주) 선장.
⊙ 화랑무공훈장(충무함 간첩선 격침), 보국훈장 삼일장(파월철수구출작전유공).
⊙ 저서: 《바다는 태양을 띄운다》 《수평선너머 해원》.
월남 패망 후인 1975년 5월 13일 부산항에 입항하는 810함 함상의 월남 난민촌.“항해 중 야간등을 켜라.”
기함(旗艦, LST 815함·북한함)에서도 급한 명령문이 날아왔다.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통신병이 가지고 온 지시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적지(敵地)를 탈출하면서 항해등을 밝히고 배에 불을 켠다는 것은 스스로 적의 과녁이 되겠다는 행위가 아닌가. 나는 그 말을 이행할 수 없었다.
“함장님. 저기 불빛이 보입니다!”
메콩강을 3분의 2 이상 빠져나왔을까. 견시병(見視兵)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작전관(作戰官)과 함께 재빨리 윙브리지로 뛰쳐나갔다. 정말이었다. 칠흑 같은 강 가운데 하얀 불빛이 떠 있었다. 구원의 빛이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기함을 보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전관에게 확인했다.
“얼마나 달려온 건가?”
“3분의 2쯤 달려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 본 함(LST 810함·계봉함)을 기함 옆에 댄다.”
이제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함은 천천히 속력을 떨어뜨리며 기함 옆으로 접근했다. 닻을 놓으려고 갑판부 사병들이 앵커 쪽으로 달려나갔다. 무거운 앵커 체인이 풀려나가는 쇳소리가 더 없이 시원하고 사랑스럽게 들렸다. 기함에서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배의 일부는 더 큰 어둠에 잠기고, 크르르르… 엔진이 기분 좋은 트림 소리를 내며 전진 후진을 거듭한 끝에 닻이 드디어 강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뭔가 예감이 이상했다.
“함장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또 다른 견시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 속에서 나를 찾았다.
“뭔가?”
황급히 되물을 때 나도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기함의 분위기가 묘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환영하는 기미가 일절 없고 갑판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드러나는 함교의 대만기. 그건 우리 기함이 아니라 대만 LST였다. 나는 허겁지겁 닻을 거두어들였다. 왔던 길로 소리 없이 빠져나오는 초조한 침묵이 어둠을 휘저었다. 그 대만 해군 LST는 장례식장처럼 음산하고 조용했다.
피똥을 싸다
메콩강 50마일(약 80km)은 무척이나 길었다. 사력을 다하여 사지(死地)를 빠져나오는 동안 세 번이나 속옷을 갈아입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는데 이(李) 선장과 해운업을 한다던 젊은 사업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제의 혈맹(血盟)이 우리를 뒤쫓는 와중에 남아 있던 미(美) 용역선 두 척이 걱정스러웠다.
배는 붕타우에 이르렀다. 멀리서 군함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기함이 보입니다!”
견시병이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부장(副長)이 윙브리지로 나갔다. 나는 그제야 함교(艦橋)의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았다.
“기함입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 부장이 돌아와 보고했다. 나는 지시했다.
“적당한 거리에 닻을 놓는다.”
양묘기(揚錨機·배의 닻을 감아 올리고 풀어 내리는 장치를 한 기계)가 닻줄을 풀어 닻이 바닥에 완전히 박히는 진동을 몸으로 확인하고 출항 후 처음으로 화장실로 내려갔다. 혈변이 쏟아졌다. 아랫배의 통증에 몸이 뒤틀렸다. 말로만 들어온 바로 그 피똥이었다. “사람이 위기를 당하면 피똥을 싼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 일을 겪은 것이다. 그래도 통증은 견딜 만했다.
그보다 더한 감정, 어떤 벅찬 감정이 회오리처럼 나를 휘감았다. 안도감이었다. 아니 희열이었다. 이 많은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 타는 듯한 긴장 끝의 희열, 신(神)에 감사를 드렸다. 나는 특정한 종교의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브리지 창으로 달이 보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밤,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 신의 도움으로 지나가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旗艦에서는 신분증 파기 명령
810함에 승선하는 월남 난민들. 월남 정부는 이들을 푸콕섬까지 피란시켜 주는 조건으로 한국 교민들의 이송을 허가해 주었다. / 박인석 예비역 해군 대령 제공
우리 함이 사이공강을 빠져나올 동안, 메콩강 수로(水路)를 먼저 빠져나간 기함에서는 사령관이 모든 승조원에게 계급장을 떼고 신분증을 파기하라고 명령했다. 적과 교전(交戰) 후 포로가 되었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낮에 사이공을 빠져나온 기함은 게릴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월남 피란민을 실은 것처럼 위장하려고 갑판에 난민 천막을 설치하고 어두워지자 메콩강 하구에 이르러 배의 모든 등(燈)을 환하게 켜고 정박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함 내 등불을 껐다. 배의 불빛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수로의 등대도 파괴되어 어둠 속에 항해해야 하는 이런 수로에서는 레이더도 소용없었다. 강 굽이를 돌 때마다 각도를 측정해 수로 가운데로 운항하여 사이공을 빠져나왔다. 통상 5~6시간 걸리는 항해가 9시간이나 걸렸다.
메콩강 하구에 닻을 놓자 잠시 눈을 붙이고 악몽 같은 며칠을 잠재웠다. 이제 2~3일이 소요되는 푸콕까지의 항해 일정이 남아 있었다. 만일 푸콕마저 공산군에게 점령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적의 입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 있었다. 1000여 명이 넘는 인명과 갖가지 재산을 안전하게 수송해 푸콕에 하선(下船)시키는 것이 나의 남은 임무였다.
짧은 휴식 후, 작전관과 대책회의를 가졌다. 푸콕 항만에 대한 정보 분석, 정박 방법과 하역 방안, 난민 사보타주와 대(對)테러대책, 그리고 푸콕 현지가 공산군에게 점령당했을 경우의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월남 정부로부터 월남 피란민을 푸콕에 있는 난민수용소까지 실어다 준다는 조건으로 우리 교민(僑民)과 월남 감옥에 있던 한국인들을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주월(駐越) 한국대사관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월남 정부의 항의
푸콕으로 변침(變針)하여 항해하고 있는데, 라디오를 청취하던 탈출교민회장이 긴급소식을 전했다. 4월 26일, UPI가 “사이공에 정박 중인 한국 LST 2척이 포격을 받았다”는 뉴스를 전(全) 세계에 타전(打電)했다는 것이다.
내가 밤에 탈출한 것을 모르던 월남 해군이 LST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정박 중이던 미 용역선 2척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 선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이 앞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내에서는 한국 LST가 포격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간 후 가족과 국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국방부 장관이 “현재 한국 함대는 사이공을 벗어나 안전하게 항해 중”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5일은 20일 전에 곤히 잠들어 있어 안아 보지도 못하고 이별했던 사랑하는 딸의 생일이다. 몇 시간만 사이공을 늦게 떠났어도 부두에서 포격을 받아 어린 딸의 열 번째 생일이 내 제삿날이 될 뻔했다. 가족과 집이 생각날 때면 나는 고국에서 가지고 온 영문(英文) 성경책을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을 잤다. 신앙을 갖지 않았을 때였지만, 집에서 가져온 한 권의 성경책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나에게 가족처럼 위로가 되었다.
4월 27일, 월남 정부가 강력한 항의전화를 걸어왔다.
“당신들은 법을 어겼소! 한국 교민을 불법 승선시켰고, 월남 피란민을 방치했소. 한국대사관의 물품 반출도 불법이오!”
월남의 난민 담당 부수상 판 꽝 단이 조목조목 따지며 소리쳤다. 요점은 그들이 요구한 피란민을 전부 다 태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세가 급변하는 와중, 패색(敗色)이 짙은 월남 정부의 말을 정확히 지킬 수는 없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 한국 LST를 나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때 본국에서도 해군참모총장의 전문(電文)이 날아왔다.
해군본부의 명령 거부
국내에서 상륙훈련을 할 때 810함에서 동료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필자.
“월남 피란민을 푸콕까지 수송하는 계획을 허락할 수 없다. 붕타우에서 피란민을 하선한 후 즉시 귀국하라.”
현지 사정을 모르는 본국의 명령이었다. 지휘관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결정, 해군본부에 답신을 보냈다.
첫째, 붕타우는 치안부재(不在) 상태이다. 월남 패잔병(敗殘兵)과 일부 피란민이 피란민 선박에 대해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 패잔병이 피란민에게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하선, 하역(荷役)을 강행하면 한국군이 월남군과 교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월남군과 교전에 휘말리지 말라는 지휘부의 사전(事前) 엄명이 있었다.
둘째, 붕타우의 함락이 임박했다. 사이공과 붕타우 중간 지점이 4월 26일 밤, 월맹군에 점령당했다. 붕타우항에 접안(接岸)하여 구호품과 월남 피란민을 하선시키는 도중 월맹군에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다.
양쪽 함은 폭주하는 전문을 접수하고 보내느라 각종 통신기기가 몸살을 앓았다. 통신실은 달구어진 통신 기자재가 뿜어내는 열로 한증막으로 변했다.
수송분대는 해군본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월남 피란민을 푸콕까지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기함이 먼저 붕타우 외항(外港) 나베를 떠났다. 우리도 월남 남부 해안을 따라 푸콕을 향해 출항했다.
18시경. 해가 지고 있었다. 출항 준비에 바빠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난민들에게 음료수와 통조림 등으로 식사를 대신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는 정상적인 식사를 제공했다. 갑자기 늘어난 식구 때문에 취사병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고국을 잃고 유랑하는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주월 대사관의 마지막 電文
자신들이 푸콕에 있는 난민수용소에 수용될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난민들은 전장(戰場)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었다. 처음 타보는 한국 군함이 신기한 듯, 항해를 즐기는 분위기까지 연출됐다. 자신들이 푸콕에서 하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난민들이 알게 되면 선상(船上)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란민을 속여야 하는 내 마음은 아프고 불편하기만 했다. 무정부, 통치 불능의 상황에서 1000여 명이 넘는 난민을 싣고 푸콕으로 항해하는 이틀 동안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월남은 이제 붕괴 직전입니다.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한 뒤 민 장군이 정권을 이었다가 헝 부통령이 정부를 인수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교민대표가 전해준 말이었다.
4월 28일. 붕타우를 떠나 푸콕으로 항해하는 도중 통신실에서 긴급보고가 올라왔다.
“대사관 전원 철수! 비상파괴! 무운(武運)기원!”
사이공 함락 직전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주월 대사관에서 보낸 마지막 무전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침내 사이공이 완전히 함락되는 것인가. 김영관 대사와 이문학(해군사관학교 동기생) 연락장교, 이대용 공사와 남은 직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탈출했을까.’
떠나기 직전 사이공 부두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던 대사관 직원들의 처연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동안 주월 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전문이 유일한 작전정보였는데, 이제는 월남 라디오에 의지해 수시로 변하는 상황을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급조한 함상 마을
LST에 1000여 명의 난민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갑판 위에 천막촌을 조성하여 교민대표를 선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50여 명씩 20개 구획을 지어 반장을 선출하라고 부장에게 지시했다. 이른바 함상 마을이 조성된 것이었다. 교민대표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즉각 나를 찾아오고, 반장을 통해 민원을 접수하고 함장의 지휘를 받을 수 있도록 조직했다. 모포와 의류, 음료수 등의 배급품도 반장을 통해 전달했다.
많은 대원이 1000여 명의 하루 세 끼 식사 준비에 매달려야 했고, 잠시 쉴 틈도 없이 식사 배식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끼니의 취사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하루에 소비되는 식수와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이 쏟아내는 배설물의 양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청소할 사이도 없이 화장실은 늘 초만원 상태였다.
2000여 톤인 함의 갑판에 들어찬 군용(軍用)천막의 행렬을 보며 메러디스빅토리호(號)를 연상했다. 한국전쟁 당시, 메러디스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혹한의 겨울철에 한 척의 LST에 1만4000명이 넘는 인원을 태우고 함흥에서 철수했다. 고작 7607톤의 배에 1만4000여 명을 수용했으니 그 어려움이 어떠했을까.
후일 라루 선장은 “그것은 기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의 ‘기적’이 라루 선장의 여생을 바꿨다. 그는 후일 신부가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라루 선장이 들어간 수도원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함흥 철수 피란민들이 보은(報恩)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루 선장이 속한 수도원을 도왔다.
공산주의가 싫어 중부 월남에서 사이공으로, 또다시 푸콕이라는 수용소로 이송되는 망국(亡國)의 국민들이 안쓰러워 잘 대해주고 싶었다. 장병들은 그야말로 난민봉사단 역할까지 해야 했다.
함상 마을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장병들에게 새롭고 생소한 임무였다. 그렇지 않아도 붕타우항에서 월남 패잔병들이 피란민을 약탈, 강간, 폭행한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우선 인명 사고가 나지 않도록 관리하고 선상 난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 파악하라고 엄명했다.
김상율씨 유족과 만나다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교민대표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김상율씨라고 아십니까? 연세는 60대시고 15년 전에 고철 관련 사업을 한다고 하시던데….”
김상율씨는 15년 전 원양(遠洋) 실습 때에 만났던 재월(在越)교포였다(《월간조선》 2013년 4월호).
내 물음에 교민대표가 깜짝 놀랐다.
“아니, 함장님. 어떻게 그분을 아세요? 알다마다요. 교민사회에서 유명한 분입니다. 교민회장을 하시다가 작년에 별세하셨어요.”
안타까웠다. 사이공에서는 그분을 찾을 경황이 없어 혹시나 하여 교민대표에게 탐문한 것이었다.
“그럼 혹시 그 가족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습니까?”
교민회장은 “당장 알아보겠다”며 함장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김상율씨의 며느리와 손자·손녀를 데리고 왔다. 그녀와 함장실에서 차와 식사를 함께하며 그간의 내력을 들었다. 며느리인 레디 닌 씨는 월남 왕실의 피를 이은 여성이었다. 그는 “남편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사이공에 남아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부산에 도착한 후 한국에서 외국어대 월남어과 강사로 있다가 나중에 남편을 만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김상율씨의 아들은 후일 아버지의 유골(遺骨)을 사이공에서 수습해 경주 땅에 뿌리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리던 고향 땅을 생전 밟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김상율 회장…. 1960년의 눈물겨운 첫 만남 후 다시 만나 상봉의 기쁨을 나누고 고국 땅도 밟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슴이 아려왔다.
4월 29일. 이틀간의 항해를 마치고 두 척의 상륙함은 푸콕 근해에 도착했다.
수심(水深)이 깊은 외곽 바다에는 미 구축함과 수송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모처럼 우방을 만나 반가웠다. 이제 월남 해군에 연락해 피란민과 물자를 인계하면 작전은 마무리를 향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월남 해군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월남 해군이 부두를 제공하고, 우리가 접안해 난민과 물자를 하선하면 작전은 마무리에 당도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월남 해군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월남 정부에서 수송 요청한 난민이고 물자가 아닌가. 어쩌면 사이공을 출발할 때 우리에게 내려진 체포령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함에 가득 실린 피란민과 물자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대로 싣고 한국으로 귀항(歸港)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외항에 정박 중인 미 구축함 아메리칸챌린저호에 통신으로 푸콕섬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메리칸챌린저호에서 회신을 보내왔다.
“아직 별다른 이상은 없다. 우리는 탑승 중인 피란민 총원을 하선 조치할 것이다. 일부는 푸콕에 하선시키고 나머지 피란민은 괌으로 이송할 것이다.”
미 함선이 보내온 내용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우리도 하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낭에서는 미국 선박에 승선한 난민들이 배를 강제로 운항시킨 사건이 있었다. 필사적인 난민들이 하선을 거부하거나 다른 나라 항구로 항해할 것을 강요하는 등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되도록 빨리 피란민과 물자를 하역, 하선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라면으로 월남 선박 유인
라면을 이용해 푸콕에서 하역 작업을 도울 월남 선박을 유인했다.
해군본부는 즉시 귀국하라는 훈령을 다시 내렸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이대로 귀항했다가 다낭 철수 작전에서 보듯 피란민의 선상 반란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도 피란민들이 푸콕섬으로의 하선 거부 혹은 제3국행(行)을 주장할까 봐 내심 전전긍긍하는 판국인데….
기함의 사령관도 해군본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리 810함의 난민을 하선시키기로 결정했다.
난민을 하선시키기 위해 섬 연안에 접근, 몇 번 접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푸콕의 조석표(潮汐表)가 없어 물때를 가늠할 수 없는 탓에 연안 접안이 불가능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당시, 푸콕행을 예상하지 않은 터라 푸콕의 조석표를 준비하지 못했다. 등에서 진땀이 흘렀다. 푸콕의 월남 해군본부와는 아직 통신이 되지 않았다. 항해 보조시설은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지나가는 배들에 도움을 청해도 모른 척 응답이 없었다. 상황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와중에 이렇게 하역, 하선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시 꼼수를 동원하는 수밖에. 바다로 돌아와 닻을 놓고 함수 램프(문)를 열었다.
창고에서 라면 박스를 꺼내 램프 앞쪽에 쌓아놓고 지나가는 배를 유혹했다. 모른 척 도망가기 바쁘던 LCU(Landing Craft Utility) 1척에 이어 또 한 척의 LCM(Landing Craft Medium)이 물살을 가르며 접근해 왔다. 라면 박스가 여러 개 건너가고 LCU(상륙주정)와의 계류가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난민들에게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가지고 온 모든 이삿짐을 들고 안전하게 하선하라”고 방송했다. 먼저 내리기를 원하는 몇 사람을 하선시켰더니 난민들이 보따리와 재산을 챙겨 이고 지고 끌면서 줄지어 따라 내리기 시작했다.
“함장님!”
초조한 마음으로 하선을 감독하는데 중사 한 명이 뛰어왔다.
“월남 난민 일부가 하선을 거부합니다.”
내심 조마조마하던 터였다. 중사를 따라 어수선한 갑판의 함상 마을로 건너갔다. 몇몇 사람이 갑판 한쪽에 짐을 쌓아놓고 하선을 이끌던 장병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난민 중 한 사람이 나를 향해 거친 월남말을 쏟아부었다. 동행한 작전관이 그의 살벌한 말투와 행동에 벌컥 해 앞으로 나서는 걸 제지했다. 통역을 맡은 교민대표가 난처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자기들을 제3국으로 보내달랍니다. 여기서 내리지 않겠답니다. 푸콕으로 올 줄 몰랐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한국 해군이 고의로 숨겼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푸콕은 지금은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섬이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야자수, 긴 해안선과 모래사장이 빛나는 낙원 같은 바다, 그러나 1975년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였다. 캄보디아에서 불과 10마일 떨어진 푸콕섬은 피란민 집결지인 동시에 포로수용소였다. 대충 보기에도 기반시설이라곤 전무해서 피란민이 생존해 나가기에는 지극히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사이공에 대한 최종 공격이 임박해 외부지원조차 끊어졌을 것이었다.
푸콕에서의 下船
캄보디아 인근 푸콕섬에서 월남 난민 등 567명이 하선했다.
나는 되도록 침착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제3국으로 가는 것은 당신들 자유다. 우리 대한민국은 월남을 돕기 위해 많은 구호물자를 싣고 먼 길을 왔다. 당신들을 이곳까지 수송해 줄 의무가 우리에겐 없다. 사이공은 알다시피 지금 격전 중이다.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은 교전 중인 사이공에서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무고한 국민들을 도와달라는 월남 정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우리도 과거에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전쟁의 고통을 잘 안다. 우리가 전쟁으로 고통받을 때 다른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 빚을 갚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신들을 제3국으로 보내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 한국 해군이 월남의 정치에 내정(內政)간섭을 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한국은 새로운 외교문제, 국제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당신들이 진정 제3국으로 가고 싶다면 이 배에서 내려 다른 루트로 제3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몇몇 월남인이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안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더니 이윽고 한두 명씩 짐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차로 탑승 중인 월남 피란민 537명과 베트콩 협력자로 의심되는 자 30명 등 567명을 단정(短艇·LCU)으로 하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사람과 무거운 차량, 800개의 용도를 알 수 없는 드럼통 등이 문제였다.
그동안 우리 배에 승선해 부지런히 푸콕 월남 해군과 교신을 시도하던 월남 연락장교는 “함의 안전과 작업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접안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걸 누군들 모르랴. 연안 접안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이 고생인 것을. 어차피 단정으로 800개의 드럼통과 차량을 실어내다가는 어느 세월에 하역이 끝날지 몰라 물때가 변하기를 기다려 새로 접안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抗命
함 내에 비상이 걸렸다. 전포(全砲) 전투배치, 소병기(小兵器), 근접 전투요원 배치!
장병들이 이 더위에 철모를 쓰고 두꺼운 라이프 재킷을 입고 총을 들고 뜨거운 프라이팬 같은 갑판 위 제 위치로 뛰어갔다. 수차례 접안을 시도해 보았지만, 얕은 수심과 조석(潮汐)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 만조(滿潮)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함을 외항으로 이동해 닻을 내리고 대기했다.
내 머리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실패한 전투 접안을 어떻게든 내일은 성공시켜야 한다. 함에 실린 공(空)드럼과 차량, 남은 피란민을 하선하면 이번 작전의 대미(大尾)는 넘어선다.’
기관실에서는 귀국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기관부원들은 남지나로 향할 때 일어났던 기관 고장의 악몽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귀국 점검을 하느라 기관장 이하 사병들이 기관실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온 후 한시도 편한 시간이 없던 장병들의 고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의 접안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부장은 옆에서 밤 커피를 마시며 다른 지역의 조석표 같은 걸 뒤적이고 있는데 통신사가 들어섰다.
“함장님. 사령관님 통신입니다. 기함 815함의 주(主) 통신장치가 고장 났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낭패한 얼굴로 부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내 얼굴색도 변했다.
“본국 해군본부와 대사관에서 보내온 폭주하는 통신량 때문이랍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기관실처럼 24시간 쉬지 못하고 풀가동하던 통신실이었으니…. 전장에서 통신기는 심장과 같은 것인데 기함에서 사고가 생기면 우리도 연락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 큰일이다.
“사령관님께서 우리 함의 주 통신기를 815함으로 이전하랍니다.”
뭐라고? 참으로 곤혹스런 요구였다. 나를 믿고 있는 함 안의 수많은 얼굴이 스쳐갔다. 나는 그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함장이다. 생명은 사령관이나 말단 수병이나 다 같이 소중한 것. 나는 ‘불가(不可)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통신병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도록 했다.
지휘부 이동
첫째, 통신기는 함 지휘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장비다. 이를 기함에 이전하다 만일 고장이 발생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본 함장에게 있다. 지금 본 함과 기함에는 이전 전문인이 없다. 전에도 비전문가인 하사관이 해체 작업을 하다 통신기를 고장 낸 바 있다.
둘째, 전투지역에서 주 통신기를 타(他) 기관에 대여함은 자기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자멸 행위다. 따라서 본 함의 주 통신장비는 절대 이전할 수 없다.
셋째, 작전지역에서 필수 장비를 위험하게 이전하기보다 기동성이 좋은 지휘부가 810함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수행하기를 건의한다.
그날 23시30분. 푸콕 외항 안전해역에서 교민 분승(分乘) 작업이 이루어졌다. 승조원들을 전투배치하고 소병기를 사용 가능한 상태에 놓은 후, 근접 전투요원의 비상경계하에 810함과 815함 두 척이 해상계류하여 교민을 분승시켰다. 우리 함에 685명, 815함에 650명을 태웠다.
함상 마을도 다시 정렬하여 재배치해야 했다. 나도 힘들지만 더운 나라,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된 장병들의 고단함이 끝이 없었다.
4월 30일.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아침이 밝았다. 만조를 이용해 다시 접안을 시도했다. 새벽부터 깨어나 06시부터 닻을 거둬들이고 연안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역시 조석 및 조고(潮高) 관계로 실패했다. 더 이상의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해상에서 닻을 내리기로 했다.
이어 다시 LCU로 하역 작업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빈 드럼 500개와 차량 4대를 차례로 내렸다. 기함의 지휘부도 우리 배로 이동했다. 이로써 귀국 항로에는 우리 함이 기함이 되었다.
월남 敗亡
월남이 패망하던 1975년 4월 30일, 월맹군 탱크가 울타리를 부수며 월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하고 있다.
1975년 4월 30일 10시20분. 월남 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동시에 “모든 제3국의 함선은 150마일 영해(領海) 밖으로 물러나라”는 경고가 이어졌다. 우리는 한창 하역 작업 중이었다. 사이공에 공산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방송에 우리 교민과 월남 피란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역은 더욱 급하게 되었다.
우선 피란민을 먼저 내리게 하고 대형차량을 이송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앞 출입문의 램프를 지탱하는 체인이 끊어져 차를 빼낼 수가 없었다. 겨우 로프로 램프를 지지하는 비상조치로 마지막 트럭을 내리는 데 몇 시간을 잡아먹었다. 마음이 타들어가고 모두들 비지땀을 흘리며 일심동체가 되었다. 마지막 트럭을 이적하고 있는데 함교 당직과 사령관으로부터 급보가 날아왔다.
“함장! 월남 해군 함정 7척이 완전 전투배치로 우리 쪽으로 고속 접근하고 있습니다!”
나는 즉시 하역 작업을 중단하고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닻을 거두고 전투태세를 취하는 한편, 교포와 난민들을 급히 하부 갑판으로 피란시켰다.
주 기관이 세차게 돌면서 배가 외해로 기동하자 나는 작전관에게 사이공에서 싣고 온 빈 드럼통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지시했다. 교전 시 월남 군함의 항로(航路)에 장애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300여 개의 빈 드럼통이 군함의 스크루가 만들어내는 물살을 타고 그물처럼 퍼져나갔다. 저 멀리 7척의 월남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 향해 고속 항진하던 월남 해군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300개의 빈 드럼통을 보자 주춤했다. 드럼통 안에 위험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보고 미리 겁먹은 것 같았다. 드럼통 앞에서 미적거리던 월남 해군은 차례로 함수(艦首)를 되돌렸다. 어제의 우방이 오늘은 완전히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월남 방송, 항공기 공격 위협
월남 해군 함정의 출항 목적은 세 가지로 추정되었다.
첫째, 우리 배를 노린 해적으로 변할 가능성‐패잔병이 피란민을 약탈한 사례가 많았다.
둘째, 월남 해군이 제3국으로 도주‐이 경우 우리에게는 아무 해가 없다.
셋째, 월남 해군이 우리 배를 점거할 가능성‐이 경우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4월 30일 오전 11시. 우리는 최대 속도로 푸콕을 떠나 미 해군이 정박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월남 방송은 계속해서 “한국과 미국의 함정들은 즉각 월남 영토로부터 150마일 밖으로 퇴각하라. 영해에 잔류하면 즉각 항공기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미 해군이 있는 해역을 빠져나와 월남 영해를 벗어나기 위해 남쪽으로 침로를 바꾸고 전속으로 항진했다.
5월 3일. 3일간 대공(對空)경계를 강화하며 항해한 우리는 남지나해로 진입, 귀국 항로에 올랐다. 우리 LST 두 척이 푸콕을 떠나면서 월남 피란민들의 운명은 간발의 차이로 갈라졌다. 함에 남은 월남인들은 한국에 정착하거나 후일 제3국으로 향했다. 푸콕에서 하선한 자들은 공산치하에서 생존을 모색했을 것이다.
월남 영해를 벗어나면서 함 내의 전투태세를 해제했다. 이제부터는 대민(對民)활동에 주력해야 했다. 갑판상의 함상 마을을 새로 배치, 가족을 중심으로 20명씩 한 반으로 편성했다. 반장을 통해 구호활동을 책임진 장교와 의사소통을 하게 했다. 교민대표와 반장은 인원파악이나 환자 보고, 기타 안전사고와 고충 등을 매일 보고했다. 나는 월남 피란민 대표자, 한국 교민 대표자 등을 불러 함 내에서 절대 혼란이 없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自害소동
810함 장병들은 귀국 중 월남 난민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장병들은 하루 8시간의 당직근무 이외 난민을 위한 봉사로도 바빴다. 1000여 명의 하루 식사 및 그 외 일상 뒤처리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병들이 난민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열심히 봉사한 덕분에 큰 갈등은 없었다. 다만 화장실과 물 공급에 힘든 점이 많았다.
월남 사람들은 평소 목욕을 여러 번 하는데 함상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러자 식사 때 배급하는 식수를 캔에 넣어두었다가 화장실에 가서 몸을 씻는 사람이 늘어났다. 나는 기관장에게 함미 양쪽에 바닷물을 이용한 간이 남녀 샤워실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비록 바닷물이지만 마음대로 몸을 씻을 수 있게 되자 난민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환호하는 난민들을 보고 815함에도 불편을 해소하도록 이 아이디어를 알려주었다.
귀국 중 소동이 한 번 있었다. 20대 월남 청년 한 명이 칼로 모포를 찢으며 자해(自害) 난동을 부렸다. 난민들로서는 예상치 않은 한국행과 함상 난민 생활이 비참했을 것이다. 반장이 그 청년에게 망국민인 자신들의 처지를 환기시킨 덕분에 난동은 무마되었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의 막막함과 참담함에 가슴이 저며 왔다.
어떤 동네에서는 몇몇 노파가 돌부처처럼 꼼짝 않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보았다. 통역이 “저들은 몸에 귀중품을 소지하고 있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내 방에 귀중품을 보관하세요. 함장 방의 금고는 이 배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한국에 도착하면 함장의 명예를 걸고 정확하게 귀중품을 돌려드릴게요.”
잠시 후 10여 명이 넘는 노파가 내 방으로 몰려왔다. 그들 내의에는 껌처럼 금붙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헌무사(憲務士·헌병)가 입회한 가운데 금덩이에 이름과 무게를 달아 적어 금고에 보관시켰다. 이후 노파들의 활동은 아무 의심 없이 활발하게 변해갔다. 금괴는 부산 입항 때 주인을 불러 모두 돌려주었다. 자기 금괴를 확인한 노파들은 한 명도 불평이 없었고 그때도 헌무사를 입회시켰다.
귀국 중 815함에서는 두 명의 임부(姙婦)가 출산(出産)을 하고, 한 명의 어린애가 사망해 수장식(水葬式)을 거행했다고 한다. 815함에서는 환자가 생겨 링거액 사용이 급증했다는데 우리 함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귀환
810함 장병들은 한 건의 불미스러운 사고 없이 난민수송작전을 성공시켰다.
5월 13일. 우리는 13일의 항해 끝에 오전 6시30분 부산 외항에 도착, 9시에 부산 중앙부두에 입항했다. 떠날 때의 적적하던 모습과는 달리 부산항은 국내외 보도진과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월남 패망으로 인한 안보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환영 분위기에 일조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령관, 815함의 함장과 함께 기자회견장에서 귀국 경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중에 우리는 함대사령부에서 보국(保國)훈장 삼일장(三一章)을 받았다.
우리 810함과 815함은 부산항 3부두에 접안해 사이공에서 다 하역하지 못한 화물을 하역, 군수사령부에 이관한 후 5월 16일 진해로 귀환했다. 이날 16시30분, 임무를 완수한 수송분대는 해산됐다. 한 명의 인명사고 없이 우리 장병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십자성 작전’은 월남 패망 직전 우리 교민과 대사관 직원을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수송함에는 우리나라 사람보다 월남 피란민의 수가 더 많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두 척의 수송함은 567명의 피란민을 푸콕에 하선시키고 우리 교민과 월남 난민 1326명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건의 불미한 사건, 사고도 없었던 ‘십자성 작전’은 난민수송작전 사상 세계 적으로 유례가 없던 일로 기록되었다.
에필로그
얼마 전 나는 거리에서 베트남 여자를 보았다. 가는 몸매에 가무잡잡하고 윤기 있는 피부, 검고 긴 생머리. 나는 ‘그녀가 1975년 5월 13일 우리 수송함으로 한국에 온 월남 피란민의 후예가 아닐까’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로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며 유심히 보았다.
영국의 정치가 팔머스톤(Palmerston)은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했다. 1975년 자유월남은 사라졌지만, 공산주의로 통일된 베트남은 지금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 있다. 이 새로운 월남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베트남 아가씨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스쳐간다.
1975년 4월 30일. ‘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사이공, 아름다운 사이공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그 이름을 지웠다. 이제 사이공은 공산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이라고 불린다. 하얀 아오자이 자락을 날리며 자전거를 타던 월남 아가씨들의 향기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 역사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흘러갔고 오늘도 나는 새로운 역사의 한가운데를 걷는다. 그날 함상에서 만난 레디 닌 여사처럼 월남 아가씨와 차라도 마시며 그녀의 이력을 듣는 상상을 한다.⊙
--------------------------------------------------------------------------------
[박정희 대통령의 일기]
“평화·인도 찾던 언론·인권단체는 크메르 학살에 왜 입을 닫는가?”
- 1976년 월남 패망 1년 후 일기에서 월남 패망의 교훈 자주 언급
월남이 패망하던 1975년 4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는 말로 일기를 끝맺었다. 박 대통령은 월남과 캄보디아(크메르)가 적화(赤化)된 지 1년 후인 1976년 4월의 일기에서도 여러 번 그 교훈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4월1일(토) 맑음
1년 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때 국내정세를 회고하고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사수(死守)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국론(國論)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타산지석으로 삼고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이란 것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4월24일(토) 황진·흐림
작금 지상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보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전(全) 인류가 특히, 툭 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인도(人道)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무슨 옹호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僞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에 하급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래도 자기들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귀국차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돌아간 그들이 지금 무사할까?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도 포악할까? 인류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주의(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容認)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똑같은 살인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적 조국의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하고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
[인터뷰] ‘십자성 작전’ 참여 함장 박인석 대령
“대한민국 정부는 목숨 걸고 작전 참여한 해군 269명을 잊지 말아달라”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전투를 하는 것만큼 전장에 남아 있는 자국 국민을 구출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 269명의 해군이 40여 년 전 수행한 ‘십자성 작전’은 베트남전 유일의 민간인 구출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십자성 작전’ 참전 해군을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해 주지 않는 건 너무나 억울합니다.”
몇 달 전, 40여 년 지난 이야기를 들고 한 노병(老兵)이 기자를 찾았다. 곧 여든이 되지만, 안광(眼光)이 살아 있고 등이 꼿꼿한 그는 손에 두툼한 원고 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 노병이 월남전 수기 ‘십자성 작전’의 필자 박인석 예비역 대령(해사 14기)이다.
그는 월남전 당시의 민간인 구출 작전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월남전에 관한 수많은 얘기를 들어봤지만 ‘십자성 작전’은 생소했다. 그는 “다른 어떤 작전보다 중요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지난 40여 년간 잊힌 작전이었다”고 했다.
원고를 훑어보자 그의 얘기가 과장이 아니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 대령은 1975년 ‘십자성 작전’ 당시 기록한 일기, 기억, 작전에 참여했던 부하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을 해놓았다.
연재를 마친 박인석 대령을 다시 만나, 글에는 옮기지 못한 ‘십자성 작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집에도 행선지 알리지 않고 출항
—수기(手記)를 보면 작전 수행 명령을 받을 때 굉장히 긴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저는 계봉함을 이끌고 제주항 인근에서 작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함대사령부에서 ‘우선순위 초긴급’ 전문이 오더군요. 저는 해군에서 정보를 오래 담당했기 때문에, ‘혹시 북한의 도발이 있나’ 싶어서 긴장했습니다. 전문을 받은 즉시 진해항으로 전속 항진해 함대사령부에 출석했더니, 초긴급 완벽한 극비 사항인 임무를 부여하더군요. 그게 ‘십자성 작전’입니다.”
—그렇게 급박했습니까.
“임무가 떨어진 후, 불과 이틀 만에 물품을 모두 싣고 출항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극비라서 아내에게조차 어디로 간다고 말을 못했습니다. 당시 큰딸이 곤히 자고 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1975년 4월 5일 새벽에 진해 1부두에서 출항을 하는데, 자매 함장 서너 명만 나와서 경례를 하더군요. 월남전을 위해 출항하면, 군악대도 나오고 가족들도 나와서 마치 잔치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 작전은 완전히 달랐죠. ‘아, 잘못하면 죽으러 가는 길이겠구나’ 했습니다.”
—그렇게 급박한 작전이었다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알고 있었겠네요.
“작전이 끝나고 들은 얘기입니다만, 박정희 대통령께서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교민들과 당시 주(駐) 월남대사관 직원들의 생명이 관련된 작전이라 국방부와 해군 안에서도 일부 고위인사들만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한 해군들
—결과적으로 ‘십자성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십자성 작전’이 해군 전사(戰史)에서 빠진 건 왜입니까? 이 때문에 일반 국민들도 ‘십자성 작전’을 잘 알지 못합니다.
“1975년 5월 13일 부산항 제3부두에 입항할 때만 해도 저희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월남전의 마지막 작전이며 유일한 민간인 구출 작전으로 전사에 길이 남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랑 같이 오지 않고 현장에 남아 있던 이대용 당시 주 월남대사관 공사 등 몇 분이 베트콩에 잡혀 포로가 됐습니다. 결국, 이분들의 안전을 저희가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중에 더 컸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대용 공사가 인질이 돼서 진노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당시 이대용 공사가 왜 계봉함이나 815함에 승선하지 않고 남은 겁니까.
“당시 저희가 여러 차례 함께 승선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사가 ‘아직 정리할 일이 있으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떠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미군이 헬기를 보내기로 약속을 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떠난다고 하자, 손을 흔들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미군과 했던 약속이 어긋나서 헬기가 오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5년간 억류된 채 고생을 한 거지요. 자신의 안전을 개의치 않고,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이대용 공사의 기백을 지금도 높이 평가합니다.”
—‘십자성 작전’에 참전한 해군들이 월남전 참전용사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성 작전’은 사이공이 베트콩에 완전 점령당해서 피격과 나포를 당할 위험을 뚫고 1326명의 교민과 난민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 작전입니다. 그런데도 작전기간이 짧으며 주월사령부가 철수한(1973년 3월 23일) 이후에 실행한 작전이라는 이유로 저희 269명의 작전 대원들은 월남전 참전용사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십자성 작전 대원들은 군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으로 우리 군이 철수한 적진에 들어가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저희 분대원들은 이 작전을 받들어 수행한 것을 평생의 긍지로 여기며 살고 있어요. 이제 일흔이 넘어 많은 대원이 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함장이었던 제가 ‘십자성 작전’ 대원들이 월남전 참전용사로 인정받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겁니다.”
—국방부나 국가보훈처 등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주월사령부가 철수한 이후의 작전이며 기간이 짧다’는 얘기만 되풀이합니다. 월남전에 하루만 참전해도 참전용사로 인정을 받습니다. 저희 작전기간이 짧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주월사령부가 철수한 이후의 작전이라는 것도 월남전 참전자의 범위를 규정한 대통령령을 유연하게 바꾸면 된다고 봅니다. 전쟁은 전투행위와 지원행위로 나뉩니다. 지원행위 가운데, 아국 정부의 공무원과 교민들을 구출하는 건 핵심 활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저희의 충성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 monthly.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secret.docx 秘錄
secret.pdf 秘錄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