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을사오적 이지용

marineset 2023. 5. 27. 02:43
이지용 [李址鎔, 1870~1928]

본관 전주(全州). 자 경천(景天). 호 향운(響雲). 초명 은용(垠鎔).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요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900년(광무 4) 궁내부협판(宮內府協辦), 이듬해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를 지내고 190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다녀와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조인했다.

후에 법부대신 ·규장각학사 ·돈령부판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 때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7년(융희 1)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이 되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일본 정부가 주는 백작(伯爵) 칭호를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도박으로 소일한 친일 백작]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요 일제의 훈장을 3개나 받았으며 '합병'시 백작을 수여받은 이 지용. 그는 한일'합병' 이후에는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날을 보냈다. 고종의 종질이기도 한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양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 굳게 닫힌 문 안에는 소위 귀현신사(貴顯紳士) 한 무리가 항상 모여서 무뢰한들처럼 도박에 혈안이 되어 있곤 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억대 도박판이 매일 벌어진 셈이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은 굶주리는데 그는 도박귀족으로서 도박판에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귀공자의 청아한 풍모도 없고 위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풍격도 없었다. 다만 도박배들과 무리지어 무뢰한의 대열에 끼어가고 있는 이지용일 따름이었다.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도박장에서는 믿기 어려웠다.

[고종의 종친으로서 입신]

이지용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북 완산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은용(垠鎔)이며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즉 사도세자의 5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의 손자이며 이희하(李熙夏)의 아들인데 완영군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으니 고종의 종질이 된다.

1887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895년에는 칙명으로 신사 수십 명과 함께 일본을 유람,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89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궁내부 협판이 되고 다시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를 거쳐 의정부 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로 부임하였다.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끗지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일본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1만 엔의 로비 자금에 넘어가서 한일의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만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 침략에 문을 열어주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로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일의정서를 협정·조인하였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에게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내준 조약으로서, 일본에게는 5월의 '대한시설강령', 8월의 '제1차 한일협약'과 함께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으로 가는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예상외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자 조선 정계의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 철병을 요구하며 전쟁을 도발하고 뤼순(旅順)·인천 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기 시작하자, 조선 조정도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표명해 오던 박제순, 윤웅렬(尹雄烈), 이도재(李道宰), 권재형(權在衡) 등으로 내각의 주요 인물을 바꾸었다. 이 때 이지용도 외부대신 서리라는 중책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일본공사관은 그간 막대한 자금으로 매수해놓은 이지용이 외부대신이 되자 아주 손쉽게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공수동맹'이라 불리는 한일의정서 제4조의 내용을 보자. "대일본제국 정부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은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 또 제5조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 없이 차후 본 협정의 취의를 위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고 못 박고 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꼼짝없이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이후 2월 25일경부터 일본 군마와 병사들은 경성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입경한 군대가 줄잡아 5만여 명, 군마가 1만여 필이었는데, 대궐 주변과 각 성문, 창덕궁, 문희묘, 원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모두 18개처를 군영으로 삼고,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헐어서 마구간을 만들었다. 또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연안에 천막을 치고 침처(寢處)를 만들었으니 밥 짓는 연기가 수백 리까지 퍼졌다.

또 3남 각 지방에도 일본군이 속속 도착하여 각처에 전선을 가설하고 병참을 설치했다. 남로(南路)는 동래에서 대구로, 남해에서 남원으로, 군산에서 전주로 향하여 세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서로(西路)는 평양·삼화, 북로(北路)는 원산·성진에서 상호간의 거리를 110리로 하여 점차 랴오둥(遼東)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곳마다 민가에 주둔하거나 군수에게 군수품을 청하니 민심이 소요했다. 백성들은 난을 피하여 성이 텅텅 비고 군수는 관직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4월에는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에는 2개 사단 가량 되는 조선주차군을 확대·재편함으로써 조선 방위를 담당한다 하였고, 9월에는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가 '천황' 직속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경성에 부임하였다. 또한 7월에는 군용 전선 및 철도선 보호라는 명목으로 치안유지를 주차군이 담당한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하더니, 1905년 1월에는 경성과 그 주변의 치안경찰권을 조선 경찰 대신 일본군이 장악한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군사방위권, 치안권이 모두 일본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이었다.

일본 공사는 일찍이 이용익(李容翊)이 주도하여 건설하려 했던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 회사에게 양여하도록 조선 조정에 강요하였으니, 이는 하루빨리 경의철도를 건설하여 군수 운반을 민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곳에 멋대로 구역을 점령하고서는 '군용지'라 이름 붙이고 푯말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조선 땅 어디든지 빼앗고자 하는 땅이 있으면 군용지라 하면서 강탈해간 것이었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은 당연히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이지용과 그의 참서관 구완희(具完喜)에게 쏟아졌다. 그들을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일본 순사 10여 명을 항상 이지용에게 붙여서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토를 보낸 데 대한 답사로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이지용을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그런데 이지용은 일본에 가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는다. 의정서 체결의 공로를 일본이 모르는 체하지 않은 것이리라. 귀국한 뒤에도 그는 법부대신, 규장각 학사, 판돈녕 부사, 교육부 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 대신, 내부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05년 11월에는 특명대사로 다시 일본에 가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으니, 이 두번째 훈장은 바로 '을사보호조약'에 도장 찍은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

의정서 체결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이지용이 당시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도 '가'(可)를 하고서 돌아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 병자호란시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大韓季年史}, 171면).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주화론자로서 종사를 지키고자 했지만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지키고자 한 것은 일신의 영달과 재물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를 듣는 사람마다 침 뱉고 욕하면서 가소롭다 하였음은 물론이고 격앙된 군중은 그의 집을 방화하였다.

그런데도 이지용은 11월 29일 이토의 귀국에 맞추어 열렸던 송별연에 각부 대신과 함께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고종황제에게 말하기를, "이토의 말이 통감이 오는 것은 단지 외교를 감독할 뿐이며 기타 정무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 하고, 만약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정무를 잘 처리하면 1년이 되지 않아 당연히 국권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면서 거짓으로 고종을 안심시켰다. 그런 그가 1906년 10월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에 간 것은 이토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을사조약 당시 내부 참서관으로 있던 조남익이라는 사람은 이지용과 도저히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에 나가지 않았고 또 교체를 원하면서도 이지용에게 청원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자신의 집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한다.

[일본인들과 놀아난 부인 이옥경의 친일 행각]

이지용에게는 뛰어난 미모의 아내 이옥경(李玉卿:원성은 홍씨)이 있었다. 그녀는 1906년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일본 공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및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의 처와 궁내대신 민영철(閔泳喆),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재극(李載克), 한성판윤 박의병(朴義秉) 등 상류층 고관들의 부인 다수가 참여한 친일 부인단체로서 이옥경이 부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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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월 한일부인회 창립

총재
엄황귀비(嚴皇貴妃)/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에 대하여

?∼1911. 조선 고종의 계비(繼妃). 흔히는 엄비(嚴妃)로 불린다.
일찍이 궁인으로 입궁하여 궁중생활을 하다가 1895년(고종 32)의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明成王后)가 비명에 간 뒤 고종의 총애를 입어 1897년에 고종의 제3자 은(垠)을 낳았다.
1900년 8월에 귀인(貴人)에서 순빈(淳嬪)으로 봉해졌고, 1901년 마침내 고종의 계비로 책립되어 엄비라 불리게 되었으며, 1903년 10월에 황귀비로 진봉되었다.
여성의 근대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906년에 내탕금(內帑金)을 내려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와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개설시켜 여성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당시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던 민병석(閔丙奭)의 제청으로 시호를 순헌으로 정하니 순헌황귀비이다.
이때 궁호(宮號)를 망덕(望德)으로, 능원의 원호(園號)를 영휘(永徽)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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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20년] 일등공신은 ‘嚴상궁’

명성황후에 쫓겨났다 을미사변 닷새만에 측근으로 돌아와
가마 두채에 임금과 왕태자 모시고 태연히 러 공사관으로
마지막 황태자 李垠 낳고 궁중 최고의 권력자 ‘황귀비’ 책봉
아관파천의 추진을 맡아 실행해낸 실무자이자 성공의 일등공신은 일개 궁녀였던 ‘엄상궁’이었다. 엄상궁(1854~1911)은 5세에 입궁한 아기 궁녀 출신으로서 한때 명성황후 민씨의 지밀 상궁으로 일하기도 했었다. 본래 뚱뚱하고 못생긴 용모였다는데, 을미사변 10년 전에 어찌된 조홧속인지 돌연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은 결과 중전 민씨의 격노를 사 궁 밖으로 쫓겨났다. 을미사변으로 중전 민씨가 시해된 지 닷새 만에 임금이 궁으로 불러들여서 항상 측근에 두었는데, 아관파천에서 웬만한 군사 전문가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고도의 전략가적 자질과 담력으로 사건을 성공시켰다.
엄상궁은 거사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를 대동한 두 채의 가마로 거들먹거리면서 건춘문을 무시로 드나들어 수비병들의 눈에 익게 한 뒤에, 바로 그 두 채의 가마 안에 임금과 왕태자를 나누어 모시고 앉아서 태연하게 궁궐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엄상궁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친러파와 친미파 인사들과 연결하여 대사를 결행한 것인데, 성사된 결과 궁중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모시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임금의 아기를 가졌고, 환궁하여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에 건강한 아들을 낳았으니 곧 뒷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된 이은(李垠)이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그녀는 나중에 궁중 내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어 약칭 ‘엄귀비(嚴貴妃)’라 불리면서 국모(國母)의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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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이정숙(李貞淑); 갑신정변때 살해된, 예조판서 조영하의 처
우리나라 최초의 여교장/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부회장
이옥경(李玉卿)/ 이지용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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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조경은 (숙대신보사 62기 취재부 기자)

여성인재의 발굴을 위한 여성교육의 필요성 인식한 이정숙


한국 여성 인재의 양성문제가 사회 각계의 지식인들에 의해 화두로 떠올랐을 때는, 우리 나라가 서구 열강과 신흥 제국주의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어 그 앞날이 상당히 위태로운 시절이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자국의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한 일본은 점차 그 세력을 대륙 쪽으로 확대하고자 하면서 그 발판을 한반도로 삼고자 하였고, 서구의 열강들은 세계무역의 명분을 앞세워 우리 나라의 각종 이권을 침탈하고자 하였다. 국가와 민족이 당면한 이런 시련 속에서 사회 전반에 서구 열강과 같이 선진화된 제도와 이를 따르는 신민들의 새로운 의식이 배양되어야 한다는 구호가 점점 확산되어갔다.
이정숙 여사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고자 '신명여학교(新明女學校)'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평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갑신정변때 살해된, 예조판서 조영하의 처로, 1875년에 정부인에서 정경부인으로 올라 고종황실의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이하 엄황귀비)와 친분을 다지며, 기울어진 국운의 회복과 여성인재의 발굴을 위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여성교육의 포부는 한일부인회의 결성을 통해 점점 현실화되는데, 이정숙여사는 이 기관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여학교의 설치를 적극 추진한다. 1895년 2월의 교육입국조서에서 공포된, '남녀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의 조항을 우리 민족의 힘으로 실현하게 된 것이었다.
그후, 이정숙 여사는 엄 귀비가 부인회관 건축 목적으로 하사한 박동(현 수송동) 용동궁의 동쪽 일원에 있는 대지 380여 평과 건물 75간, 그 밖에 내려졌던 황실의 지원을 토대로, 한일부인회의 회원들과 '자녀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여자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신문화 사조의 도입과 남녀 교육평등의 이념이 확산되고 있는 당시에, 명신(明新)이라는 교명을 걸고 과거의 봉건적 구습들을 타파하고 시대가 원하는 인재, 민족의식이 뚜렷한 애국인을 양성하고자 진보적 교육 방법을 채택하고 문호를 널리 개방한다.


임종직전에 받은 퇴직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
그러나 그 당시 이러한 목적에서 설립된 여러 민족사학들은 자금난으로 인하여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한때 유지조차도 어려워 인재양성이라는 구호가 허구로 돌아갈 뻔했던 양정의숙의 경영난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신명여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한일부인회 소속으로 엄황귀비가 하사한 전답과 건물이 있었다고는 하나, 당시에는 고아원이 있었던 곳으로 매우 황폐했고, 한일부인회도 정치성을 배제한 친목도모의 모임으로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거국적인 모금운동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정숙 여사는 경선군과 영친왕궁이 하사한 농경지에 농장을 경영하고, 확대하면서 그 곳에서 나는 농경지 수익금으로 학교 운영을 해 나갔다. 당시 한반도 내에 출몰하던 외국의 영향력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고 '우리'다운 교육을 시키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사학을 일구어 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35년 임종 때에는 임종 직전에 받은 퇴직금 1만원 전액을 학교 장학금으로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민족사학을 위해 헌신함으로 민족여성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4년 학무국에서 교육공로자 표창을, 1927년 동아일보사에서 민간교육공로자로 은배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민족사학에의 헌신은 1938년 12월, 제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지식인들이 일으킨 거국적 '숙명여전 설립 모금 운동'으로 계승되어, 신명여학교는 '숙명여자 전문학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정숙 여사가 평생을 헌신하며 일구어온 여성교육의 현장은 그의 뜻을 계승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한국 민족의 근대사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정숙 여사가 지향했던 여성교육의 이념은, 숙명여자대학교의 창학이념인 '민족의 정통성과 주체성을 확립하는 민족교육의 실현', '국가와 민족, 세계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전인적이고 지도적인 여성 인재의 배출'이라는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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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이옥경은 특히 영리하고 예뻐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기와라와 정을 통했다가 또 구니와케와 통하고 뒤에는 하세가와와 정을 통하니 하기와라는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옥경이 전송을 나와 입을 맞추자 그녀의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옥경은 아픈 것을 참고 돌아왔으나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를 조소했다. 또한 그녀가 여러 일본인을 바꿔가며 서로 좋아하고 일본인 또한 그것을 질투하는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그녀는 또 일본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양장을 하고 이지용과 함께 팔짱을 끼고 돌아다녔다. 또한 인력거를 타면 얼굴을 내놓고 궐련을 피우며 양양하게 돌아다녀서 행인들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지용이 허랑방탕하다고 누차 고종의 견책을 받았으나, 그녀가 고종의 계비인 엄비(嚴妃)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고종의 뜻을 회복시켜 이지용이 드디어 요직에 등용되었으니, 그녀의 방자한 행동을 이지용은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종척대가가 의(儀)를 좀먹어 먼저 망하니 외국인에 대하여 우리를 예의지국이라 칭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한편 미모와 기개가 모두 뛰어나기로 소문난 산홍이라는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서는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산홍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권력과 재물로도 한 미인의 기개를 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또 이지용의 아들 이해충(李海忠)이 일본에 가서 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더니 유학생들이 "우리들이 비록 타국에 있지만 역적의 아들과 함께 배울 수는 없다" 하고 내쫓아 입학을 할 수 없었다. 이지용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수백 원을 기부하며, 유학생들의 여비를 보조하려 하였지만 유학생들은 "우리들은 비록 역적의 재물을 쓰지 않아도 이제까지 죽지 않았다"라고 준엄히 거부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 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지용을 죽이러 갔을 때 이지용은 용산 강정에 있었다. 이지용 암살을 맡은 사람이 가서 엿보니 사동(寺洞)에서의 권중현 암살 미수사건이 이미 전화로 보고 되어서 병정 60여 명이 급히 달려와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죽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도박에 탕진한 백작 수당 3000원]

1907년 봄 대구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설치하고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국채 총액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인구 2000만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1인당 1개월에 담뱃값으로 새 화폐 20전씩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석 달 안에 국채 원금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취지였고 전국적으로 큰 호응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도 이에 호응하여 권련을 멀리하자 각급 학교 생도들과 군인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주상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랴" 하고 담배를 끊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이지용을 협박하여 이를 금지시키게 하려 하였으나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오적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몸 둘 곳이 없소.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으나 오직 이것만은 가히 금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정미조약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부의 이토가 조인할 때도 이지용은 나서기를 사양하며 "우리는 을사조약을 맺은 이래 위로는 황제를 우러러 뵈올 수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대할 수 없어 제대로 허리를 펴서 얼굴을 쳐들 수도 없는 형편인데 오늘에 이르러 또 이 안을 담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고서 조인에서 빠졌다. 한일의정서 체결, 을사조약 서명 등으로 인하여 역적 괴수로 지목된 후 방화, 암살 위협, 갖은 모욕 등에 겁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일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7년 5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박람회 시찰을 위해 세 번째 도일하여, 다음해 2월에 대훈(大勳)에 특서되어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아 도박에 탕진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

⊙ 참고문헌 ⊙

◦ 黃 玹,{梅泉野錄}.
◦ 尹孝定,{風雲韓末秘史}.
◦ 鄭 喬,{大韓季年史}.
◦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 1910.
◦ 細井肇,{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1910.

을사오적 이지용 | 뒷간 잡지 2005/03/18 10:55
http://blog.naver.com/mbpyk/120011169347 [참고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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