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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과 국권의 유린

marineset 2023. 5. 27. 02:43
을사조약과 국권의 유린

노일전쟁(露日戰爭)은 1905년 1월에 여순(旅順)이 함락되고, 3월에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일본의 승리, 그리고 5월에 남해 앞바다에서 발틱함대를 물리치고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의 알선으로 노 일 양국은 9월에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미국의 극동정책은 처음부터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승인하는 대가로, 중국에 있어서는 러시아 세력의 남하(南下)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이 중국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노 일 양국의 조정역할을 스스로 자원했던 것이다. 1905년 9월에 조인된 노일강화조약(露日講和條約) 제2조에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정치 군사 경제의 우월한 권리를 승인하고 앞으로 일본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보호 및 감리(監理)를 설치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본은 이보다 앞서 영국과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1905년 8월에 개정조약(改正條約)을 체결할 때 처음 영일동맹조약에서 나타난 '한국의 독립'이란 말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탁월한 권리를 승인 운운'이란 말이 들어갔다. 이것은 분명히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영미 양국이 사전에 승인하여 동조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포츠머스조약에서 한국에 있어서의 탁월한 이익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감리의 조치를 일본에 승인시킴과 동시에 「영일동맹확장협약(英日同盟擴張協約)」 및 「계(桂) 태프트비밀협정」등 외교상에 있어서도 영미 양국의 양해를 얻었던 것이다.[註19]
이리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한국민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전국 각지에서 일제 축출에 대한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왕실위문사(韓國王室慰問使)라는 명목으로 11월 9일에 서울에 왔다. 그 이튿날 그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친서를 진상하는 자리에서 「노일강화조약」 후의 한일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면을 이야기하고, 15일에는 을사조약의 복안(腹案)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는 일본정부가 감리(監理) 지휘하며 한국의 국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을 중개로 하여 경유하지 않으면 국제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의 체결(締結)이나 약속도 해서는 안된다. 제3조 일본정부는 그 대표자로써 한국 황제 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고 전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케 한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각지에는 이사관(理事官)을 배치하며 통감(統監)은 이들을 직접 지휘한다.
제4조 일본과 한국간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條款)에 저촉하지 않은 한,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본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국가가 위기사태에 직면했음을 알고 망국을 초래하는 이 조약을 완강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이등(伊藤)의 협박과 탄압에 견디지 못한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중대한 국사(國事)에 관한 결정은 짐(朕)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가 없기에 국민의 여론을 들은 연후 정부 경재신하(卿宰臣下)들과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어 결정하겠노라.」

이에 이등(伊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박으로 내각회의(內閣會議)를 열게 하고 수많은 헌병을 대동하여 삼엄한 분위기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註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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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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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이 사실이 장지연(張志淵)에 의하여「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발표되자 온 국민들은 격분하여 조약반대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시일야방성대곡 ( 是日也放聲大哭 )
오늘은 대성통곡을 해야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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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된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난하고, 을사 오적(五賊)은 우리나라를 남에게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드려는 매국노임을 규정하였다. 또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 신문은 평소보다 1만 부를 더 인쇄하여 서울 전역에 배포되었다. 같은 날 오전 5시 장지연은 체포되어 경무청에 수감되었으며 <황성신문>의 사원 10명도 체포되었고 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했다. 정간의 사유는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였다.



시일야방성대곡 ( 是日也放聲大哭 ) 전문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고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단군.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황성신문> (190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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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즉 애국자는 죽음을 맹세하고, 농민들은 의병으로써, 상인들은 점포를 닫고, 학생들은 매국노의 타도를 부르짖으면서 동맹휴학(同盟休學)을 하고, 유림(儒林)들은 서울에 집결하여 고종께 상소를 올리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온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
(李漢應), 이한응 [李漢應, 1874.9.21~1905.5.12]

요약
한말의 외교관.

본관 전의(全義)
호 국은(菊隱)
본명 경천(敬天)
활동분야 외교
출생지 경기 용인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 이한응열사묘 / 경기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49호


본문
본관 전의(全義). 호 국은(菊隱). 본명 경천(敬天). 경기 용인 출생.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 189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897년 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되었다가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駐箚公使館) 3등 참사관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주영공사(駐英公使)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署理公使)가 되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져 나라의 형세가 위축되고 대외적으로는 영 ·일동맹으로 한국정부의 지위가 떨어지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죽은 뒤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이 국내로 옮겨져 용인에 안장되고,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병정(兵丁) 전봉학(全奉學),
전찬판(前贊判) 홍만식(洪萬植), 참찬(參贊) 이상상(李相尙),
전경연관(前經筵官) 송병선(宋秉瑄) 등」

이러한 분사자(憤死者)들이 속출하는 속에서도 또「보호조약을 즉시 파기하라」「국적을 소탕하라」는 등의 표어를 높이 들고 각지방에서는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대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싸움은 다음과 같다.

「 1906년 2월에 충남 정산군(定山郡)의 민종식(閔宗植)이 각지의 유지(有志)들과 손을 잡고 5월 19일에는 홍주(洪州)를 점령하였다.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은 백 수십명의 의병(義兵)을 모아 순창(淳昌)에서 봉기하자 진압에 나선 일본군을 도리어 섬멸시킴으로써 우리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이들은 멸망된 조국을 순국으로써 나라를 찾겠다는 의병들이었다. 이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지만 훈련과 무기의 부족으로 도처에서 일제의 총검 아래 쓰러지게 되자 일제는 1906년 2월에 우리 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에 이등(伊藤)을 임명하였다. 사실상 이보다 앞선 1905년 12월에 통감부와 이사청관제(理事廳官制)가 발표되고, 1906년 2월에는 통감정치(統監政治)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에 주재하고 있던 열국(列國)의 공사(公使)들은 공사관(公使館)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후 일제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이 모두 등용되는 친일내각(親日內閣)을 만들고, 이 내각은 이등(伊藤)의 지시에 따라 일진회(一進會)라는 친일단체(親日團體)를 조직하여 당시 전국에 팽배해 있던 배일운동(排日運動)을 저지하고, 일제의 침략에 호응하는 선도적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궁중 내부와 정부관료 일부에서도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면서 미(美) 불(佛) 독(獨) 노(露) 등과 외교적인 타협의 기미가 보이자 일제는 즉시 이완용(李完用)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을 규합하여 매국내각(賣國內閣)을 만들었다. 이 매국내각의 성립은 우리 국민을 더욱 격분시켜 민중애국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항일의병투쟁(抗日義兵鬪爭)을 한층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결과를 초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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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친일논란 재점화

위암 장지연도 친일행적

"총독부 기관지에 내놓고 일 찬양"

항일언론인의 사표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로 알려진 위암 장지연의 친일논조는 경남일보가 1910년 정간됐다 10일 만에 복간을 하면서부터 뚜렷이 나타나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게재했던 17년까지 이어졌다. 장지연은 1905년 황성신문에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해 투옥되면서 민족 언론인으로 우뚝섰다. 특히 “아아 분하도다!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구절은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대변하는 글로 자주 인용되기까지 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추모사가 실려 있는 1909년 11월 5일자 경남일보.
/박민규 기자

장지연은 1909년 10월 진주에서 경남일보 창간과 함께 주필을 맡으면서 애국계몽적인 논설을 실었으나 일제에 강점되던 해인 이듬해 10월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실어 정간당한 이후부터 경남일보의 논조는 친일로 급변했다.

◇일왕 ‘성수무강’ 한시 게재=경남일보는 1910년 11월2일자에 일본왕 명치(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에 제호에다 일장기가 교차하는 모습을 실었다. 경남일보는 그 이듬해 11월2일 천장절에도 일장기가 걸린 제호과 함께 1면 톱기사에 일왕의 성수무강을 기리는 천장절 축하 기념 한시를 실었다.

천장절 축시는 ‘해가 부상에서 떠올라 혁혁한 태양이로구나/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우리 천황께서 나셨다/보위에 오르신 지 44년 동안 성수무강하셨네/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는구나/뭇 백성들을 어루만지시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우셨네/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 번이 되어 영원하리라’는 내용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김경현 연구원은 이 글의 필자는 장지연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장지연이 당시 경남일보의 주필이었고, 문장 하나하나가 그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하다는 것이다.

경남일보 영인판 1911년 11월2일자에 따르면 경남일보는 ‘천장절 경축행사를 위해 이날 하루 휴간한다’는 사고까지 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함께 다음날 기사에는 “천장절 경축행사는 진주군 수정봉 정상에서 천가지의 등화로 봉장한 ‘축 천장절’이란 네 글자가 밤을 밝히는 가운데 진행됐다. 50개면에서 수백명의 군민들이 모여 천장절을 경축했으며 즐거워했다”고 직접 보도한 것도 밝혀졌다. 이에 앞서 장지연은 1909년 11월5일자에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 역에서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글까지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고 김연구원은 전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기고=장지연은 경남일보를 물러난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에 친일논조의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경남일보 주필 시절과 달리 기명기사를 쓴 것이다. 장지연은 1915년 신년호에 실은 ‘조선풍속의 변천’에서 “조선총독부가 5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물산공전회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쓸모없는 것은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해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해 나열한 것”이라며 총독부를 극찬했다. 같은 해 7월13일자 ‘만필소어’라는 기사에선 “동양대국은 오직 일본과 중국 두 나라일 뿐이고 서로 손을 잡고 친선한 다음에야 외부를 막을 수 있다”고 적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당연시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장지연 ‘일왕찬양’ 漢詩 게재

2005.03.04/심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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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친일논란 재점화

민족문제연구소 "일제강점 이듬해에 일왕 찬양시 썼다"

▲ 위암 장지연 (1864~1921)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규탄한 신문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한 구한말의 언론인 장지연이 일제 강점 이듬해에 일왕을 찬양한 한시를 작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경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1911년 11월 2일 <경남일보>에 게재한 천장절(메이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를 4일 공개했다. 이 신문에 게재된 한시는 메이지 일왕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일왕을 태양으로, 일제를 동양의 중심으로 각각 묘사했다.

김 연구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신문들이 기명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장지연이 한시를 직접 지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경남일보는 그가 주필로 있던 언론사이며 문장의 수려함을 고려해 보면 장지연이 기재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김 연구원은 "경남일보는 일왕 찬양시를 게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천장절 당일 휴간까지 하면서 경남 진주 수정봉 정상에서 1000개의 등화를 봉장한 가운데 축제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영남대가 경남일보 영인판을 분석한 결과, 장지연은 1909년 10월 창간된 경남일보 초대 주필이 된 뒤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1913년 3월까지 4년 가까이 이 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장지연의 친일행각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3월 <경남도민일보>는 1915∼1916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 기사를 인용해 "위암이 일제 식민지 아래 동양평화를 외쳤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보도한 바 있다.

이번에 발굴된 1911년 경남일보 한시는 장지연의 '변절'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김 연구원은 "경남일보가 1910년 10월 11일자에 일제 강압에 의해 국권이 찬탈당한 것이 억울해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했다가 정간된 뒤 10일 만에 복간되면서 신문 논조가 친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장지연의 일제시절 행각이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1962년 추서된 국가유공자 서훈이 박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시일양방성대곡 발표 100돌을 맞아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비' 건립을 추진해온 독립기념관도 위암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남에 따라 '건립'에서 '신중 검토'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김삼웅 관장은 "기념비 건립 예산 등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현재로서 건립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05.03.04/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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