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1989년 크리스마스

35년간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는 그해 11월 반정부 시위에 굴복해 물러난 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몇해 뒤 사망했다.20년 이상 일당독재를 이끈 차우셰스쿠는 반정부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며 버텼으나 결국 실각, 그해 성탄절 부부가 함께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은 장기독재, 우상화, 부정부패, 공포정치 외에도 김일성가(家)와 특별한 친분을 유지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차우셰스쿠는 생전, 김일성의 통치 스타일을 루마니아에 이식시켜 철혈통치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신앙에 가까운 지도자 숭배, 가부장적 권위주의, 공포심을 접목한 상징조작, 가족 독재, 폐쇄주의 통치술은 차우셰스쿠, 지프코프, 김일성 3인의 공동작품인 셈이다. 김정일이 차우셰스쿠 처형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측근들에게 “우리도 인민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되뇌었다는 뉴스위크 보도는 그가 느꼈을 공포감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측근들과 함께 처형 비디오를 보며, 그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김정일은 수차 강조했다고 한다. 보도내용대로라면, 김정일이 차우셰스쿠정권과 북한정권의 유사성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어서 흥미롭다. 하지만 이후 김정일은 차우셰스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동유럽식 변혁이 아니라, 핵무기 개발과 미국에 대한 대결과 적대감을 극대화하는 길을 걸었다. 역사의 교훈과는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미국의 보수학자들이 북한정권교체 필요성까지 제기하며 김정일정권의 초조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차우셰스쿠식 종말을 초래할지 모를 북한 내부의 움직임일 것이다. 북한 나름대로는 경제분야에서 일부 변화시도도 없지 않지만, 그 노력이 아직은 너무 미미하고 더디다. 북한지도부가 지금부터라도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새겨 개방 개혁의 길을 걷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책임일 것이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기사일자 : 2004-12-01
독재자의 항변 비디오proces(3).wmv
군법회의 심문 사본(영문)trial.hwp

-----------------------------------------------------------------------------------
“깨어나라 루마니아여”를 부르며 국민이 지켜온 나라 루마니아
루마니아 지도romania_rel96.jpg 깨어나라 루마니아여ro.mid
"깨어나라 루마니아여”를 부르며 국민이 지켜온 나라 루마니아
동부유럽에 있는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 헝가리, 크로아티아, 불가리아에 둘러싸여 흑해와 접해있는 둥그스름한 나라이다. 흑해와 접해있긴 하지만 대륙성기후로 나타나는 뚜렷한 사계절은 한국과 비슷하다. 바다의 영향으로 다소 온난하지만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한국보다 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루마니아 중앙을 가로지르는 카르파티아 산맥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그리고 트란실바니아를 비슷한 크기로 나누며 평야와 산지 그리고 고원이 같은 비율로 펼쳐져 있다. 강과 접해있는 비옥한 평야에서는 곡류와 약초 등을 재배하고 고원은 과수원들로 가득하다.

공산주의 문양이 있는 1965~1989의 루마니아 국기(위)

국민들의 강한 정신력으로 지켜온 루마니아
루마니아라는 말은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106년경, 다키아족이 살던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을 로마 황제 트라얀이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었고 이때 받아들인 라틴 문화가 언어는 물론 루마니아의 전반적인 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3세기 말 로마가 루마니아의 통치권을 포기하면서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세 나라로 나뉘게 되었고 이후부터 헝가리와 오스만튀르크의 침입이 잦아졌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의 침략에도 맞서야 했지만 루마니아 국민들은 혁명운동과 독립운동을 통해서 점차 자주권을 되찾았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루마니아는 러시아로부터 정치·경제적 독립을 획득해 갔으며 피의 혁명을 통해 24년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도 마감시켰다.
이처럼 루마니아인들은 강한 민족성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나라의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될 때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마음을 한데 모아 끝까지 독립과 자유를 위한 혁명을 펼쳤는데 이때 늘 부르던 노래는 국가인 ‘깨어나라 루마니아여’이다. 국가 중에 나오는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해낼 수 있다.”등과 같은 강력한 메시지는 루마니아인들로 하여금 불의에 저항하며 나라를 수호하는 정의감을 심어주었다. 다함께 국가를 부르기 시작하면 루마니아인들은 총칼 앞에서도 두려움을 잊었다.
루마니아를 둘러싼 대부분의 나라들은 슬라브 족에 속하고 있어서 슬라브권의 바다에 홀로 떠있는 라틴의 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지켜오던 라틴 문화와 다키아 문화 그리고 서구 문화는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루마니아의 민속춤과 민속 음악, 목공예와 도자기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루마니아인들의 창의성은 매우 뛰어나 현대문화와 전통문화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대와 중세의 전통을 잘 간직한 나라
루마니아의 거리는 마치 거대한 박물관과 유적지 같다. 길에서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가진 전통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차우셰스쿠 정권이 도시화 정책을 펼치며 역사적인 건물들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도시 곳곳에는 정교회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 건물과 성, 궁전 등 수백 년 전의 건물들이 시간을 되돌린 듯한 느낌을 준다. 심지어 시골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집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양치기들이 둥글게 생긴 큰 치즈를 생산해서 팔고 있다.
루마니아인들에게는 독특한 풍습이 몇 가지 있다. 그들은 바람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바람을 쏘이게 되면 병이 난다고 믿기 때문에 후덥지근한 여름에도 버스의 창문을 절대 열지 않는다. 그래서 여름철 루마니아의 버스에는 땀 냄새와 발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루마니아에는 많은 집시들이 있어서 그들의 풍습도 전해오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예쁜 아이에게 침을 세 번 뱉으면서 심한 욕설을 하는 것이다. 예쁜 아이들은 잡귀가 질투를 해서 병에 걸리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침을 뱉으며 “아이. 미워라!”라는 말과 함께 욕설을 한다.
루마니아는 독특한 풍습만큼이나 음식도 독특하다. 우라나라의 경우 식초는 독특한 신맛 때문에 정해진 음식에만 넣지만 루마니아는 거의 모든 음식에 식초를 넣어서 시게 먹는다. 가장 많이 먹는 옥수수 죽부터 국과 고기로 만드는 음식까지 식초는 필수 양념이다.
춤과 노래, 축제를 사랑하는 루마니아 사람들
라틴 문화를 가진 루마니아 사람들이 즐기는 민속춤은 라틴 특유의 빠른 박자로 흥을 돋워 경쾌하고 발랄한 것이 특징이다. 민속춤의 종류는 수천 가지에 이르며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다른 춤을 춘다.
비록 춤의 종류가 수천 개에 달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춤을 출 때는 항상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기 위해 “포아이에 베르데”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 말은 ‘푸른 잎새’라는 뜻인데 루마니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다.
이렇게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루마니아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축제이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축제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 항상 같이 모여 전통 춤과 노래를 즐긴다.
먼저, 매년 5월이 되면 루마니아 거리는 ‘젊은이들의 축제’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정열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4개월 동안 4만 개의 금속 조각으로 정성들여 만든 갖가지 의상을 입고서 거리 를 행진하며 루마니아의 민속놀이와 민속춤을 함께 즐긴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즐기는 또 하나의 축제는 이름부터 충격적인 ‘여자시장’이다. 이것은 루마니아의 청춘 남녀들이 사랑을 만들어가는 축제로, 시장에서 여자를 사고 판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과거 루마니아의 총각들은 양을 치느라 늘 풀이 가득한 초원을 찾아다녀야 했고 처녀들은 늘 집안에서 일만 했기 때문에 이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시장’을 만들어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한마디로 단체 선이라고 하면 이해가 훨씬 빠를 것이다. 이 축제는 카르파치 산맥의 거이너 산 근처에서 매년 7월 세 번째 일요일에 열린다.
‘요정의 축제’가 열리는 하지는 루마니아인들이 가장 설레는 때이다. 곧 수확할 곡식들이 자라는 마지막 시기이면서 풍작인지 흉작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렸던 여자들은 새벽에 줄을 지어서 미리 정해둔 숲 속의 한 장소로 간다. 새로 짠 리넨에 나뭇가지에 맺힌 이슬을 스며들게 한 다음 새로 만든 항아리에 정성껏 모은다. 여자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맑은 물이 젊음을 유지시켜 주며 여기에 약초를 섞으면 병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과 청결을 지속시킨다는 의미에서 모닥불을 뛰어넘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농촌에서는 소박한 마을 축제가 열린다. ‘수확의 화관’은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가을 축제로 농촌에서 첫 수확을 자축하는 축제이다. 마을 여자들은 모두 나와 곡식 줄기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쓰고 줄을 맞춰 행렬을 한다. 집집마다 방문해서 농부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풍년에 대한 기쁨을 함께 나눈다. 행렬을 인도하는 사람은 참가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데 다른 여자들이 어린 인도자에게 끊임없이 물을 뿌려준다.
공산주의의 잔재로 힘들어 하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몰락과 함께 루마니아의 공산주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루마니아가 40년이 넘도록 겪은 공산주의는 국민들이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을 잊게 만들었다.
공산 체제하에서 국민들은 정부에서 주는 집에서 살며 정부에서 제공하는 빵을 먹었다. 부모가 일을 하면 정부는 탁아소를 만들어 아이들을 맡아서 돌봐주었다. 국민들은 어린아이처럼 정부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다. 그러나 혁명과 함께 공산주의는 막을 내렸고 동시에 불어 닥친 자본주의로 국민들은 갈 바를 잃게 되었다. 루마니아 사람들 중에 자본주의 경제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정부가 뭔가를 해주기만을 애타게 바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경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경제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루마니아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국영화 기업의 민영화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외국인 투자 유치 법령도 일관성이 없어 외국인들의 투자는 감소추세에 있다.
게다가 사법 체계마저 무너지고 있다. 루마니아의 사법부 비리는 만성이 되어서 집안에 도둑이 드는 것은 사건 취급도 하지 않는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신고하면 그런 것으로 신고하냐며 오히려 면박을 당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큰손들은 허술한 법망을 이용해 국가를 상대로 사기치고 탈세를 하며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자연과 어울려 살며 집안의 대문도 잠그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융숭히 대접했던 루마니아 사람들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에 익숙해지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루마니아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루마니아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지켜왔던 굳건한 민족성은 그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한다. 지금도 루마니아 인들은 어디선가 “포아이에 베르데”를 외치며 그들이 누렸던 자연속의 평온함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李 瑟 기자 / slee@magazinegv.com
--------------------------------------------------------------------------------
인물로 보는 루마니아
■ 드라큘라 (1431~1476)
1431년 트란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에서 태어난 그는 루마니아의 소국 왈라키아의 영주였다. ‘블라드 체폐슈’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주변의 열강이었던 폴란드와 합스부르크 그리고 오스만튀르크 제국 가운데서 왕국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잔인하리만큼 강력하게 통치했다. 그는 범죄자나 배신자들 그리고 포로들을 꼬챙이로 몸을 관통시켜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백성들은 범죄 없는 세상에서 대문을 열어놓고 안심하고 살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해 몇몇 정치세력들은 그를 암살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고 한다.
브램 스토커라는 아일랜드의 괴기 소설작가에 의해 공포스럽고 잔인한 흡혈귀 드라큘라로 다시 등장하게 되면서 세계 각지에서 드라큘라 백작을 소재로 공포영화와 책을 만들게 되었다. 드라큘라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루마니아 사람들은 공산정권 때만 해도 그를 흡혈귀로 묘사한 영화와 서적의 배포를 금지시켰지만 지금은 오히려 브라쇼브 남부에 남아 있는 브란성을 ‘드라큘라 성’으로 명명하여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 ~ 1989)
루마니아인들을 비롯한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를 ‘독재자’라고 표현한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등에 비견되는 그는 루마니아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떠난 독재자였다.
그는 국수주의 정책으로 한때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노동력과 군사력 증강을 위해 45세 이전까지 여성은 5명의 아이들을 낳도록 강요하는 등 독재정치로 인권을 억압하고 경제를 악화시켰다. 국민들은 24년 동안의 독재를 거부하고 마침내 1989년 혁명을 일으켜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 엘레나를 처형했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독재의 잔재는 아직도 루마니아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강제출산정책으로 태어난 15만~20만 명의 아이들 중 절반 가량은 공산권의 몰락으로 많은 부모들이 양육을 포기하면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버렸다. 현재 성인이 된 이들은 일정한 직업조차 갖지 못한 채 환각제를 먹고 비틀거리는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했다.
■ 나디아 코마네치(1961~ )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코마네치가 평행봉 위에서 멋진 연기를 마치고 착지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점수판을 본 코마네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1.0이라는 형편없는 점수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체조에서 만점인 10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점수판은 9.9까지만 표현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만점을 받은 코마네치의 점수는 사실 1.0이 아닌 10.0이었다. 체조분야에서 만점은 역사상 최초였으며 전 세계인들은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코마네치의 체조에 극찬을 하였다. ‘체조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14세 소녀는 인형을 껴안고 올림픽 시상대에 섰고 머리 위에는 자랑스러운 루마니아의 국기 트리쿨로리가 걸렸다.
코마네치의 최고의 연기는 아름다움을 중시했던 체조 양상을 기술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1984년 화려하게 은퇴한 그는 1989년 미국으로 망명,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모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Nadia Comaneci
별칭 체조 요정
국적 루마니아
활동분야 체조
출생지 루마니아 게오르게 데지
주요수상 제21회 올림픽경기대회 체조부문 개인 종합, 평균대, 이단평행봉 우승
체조 사상 첫 10점 만점을 기록한 루마니아의 체조선수이다. 1961년 11월 12일 루마니아 게오르게 데지에서 태어나 1967년 벨라 카롤리 코치에게 발탁되어 체조를 시작하였다. 197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21회 올림픽경기대회의 이단평행봉에서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기록하였고, 이 대회에서 7차례나 10점 연기를 펼치며 개인종합과 평균대, 이단평행봉 등 3관왕에 올랐고 단체전에서 은메달, 마루운동에서 동메달 등 5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
동영상
-------------------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개인종합 준우승을 하였다. 이로써 코마네치는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 3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하여 인간 육체 표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2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스포츠 광장에서 은퇴하였으며, 그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경기대회에는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한 가운데 루마니아 코치로 참석하였다. 1989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993년에는 1988년의 올가 코르부트에 이어 두번째로 체조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였다. 1996년 미국 체조선수 출신인 버트 코너와 결혼하여 현재 오클라호마주 노먼에서 남편과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모델과 자선활동을 하고 있다.
------------------------------------------------------------------------------------

Copyright (c) 2005 bado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