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백색전화(白色電話)
marineset
2023. 5. 27. 03:24
전화가입권에 대하여 이를 재산권으로 보느냐 또는 오로지 그 전화를 사용하기만 하는 사용권으로 보느냐 하는 양론이 있으나 통상 전자로 보아 왔었다. 따라서 전화가입권은 양도가 가능하였다. 전화의 적체가 심화됨에 따라 가입승낙을 받기 위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탁행위가 생기고 가수요의 청약이 발생하는 등 각종 부조리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1970년 9월 전기통신법을 개정하여 "가입전화에 의하여 공중통신역무의 제공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이를 양도하거나 증여 등을 할 수 없으며 질권의 목적으로 할 수 없다"라고 개정하였다. 그래서 종전에 재산권의 일종인 가입권을 사용권으로 규정함으로써 전화가입권의 양도 · 증여 등을 전면 금지하여 공공시설을 이용하는데 그치는 것으로 하여 실수요자 우선주의의 실현과 이권을 목적으로 하는 가수요를 일소함으로써 공정한 전화공급을 기하게 되었다.
여기서 법 개정 이전의 가입전화 즉 양도가 가능한 전화와 개정 이후의 가입전화 즉 사용권만이 인정된 전화를 확연히 구분하기 위하여 전화원부의 색을 전자는 백색, 후자는 청색을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속칭 백색전화와 청색전화란 말이 사용되게 되었다. 1970년 8월말 현재 가입자수는 총 45만 7,280명이었고 서울은 19만 6,599명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색전화의 가입자수인 것이다.
[한국인의 삶을 바꾼 것들 ③] 전화기
휴대전화 하나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강의를 듣고, 은행업무를 보고, 가사를 돌보고, 위성TV를 시청하는 시절이 됐다. 유비쿼터스 혁명이라는 말이 난무할 정도다. 세계 10대 단말기 메이커에는 국내 업체가 3개나 포함됐다. 대한민국의 IT혁명을 주도하는 통신기기의 발전상을 전화기의 변천사를 통해 살펴봤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통신이 도입된 시점은 1895년, 한성전보총국이 출범하면서부터다. 맨 먼저 들어온 것은 전신이었다. 1885년 9월28일 서울~인천 구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전신업무가 시작됐다. 전화가 도입된 것은 전신보다 10년이 늦은 1895년. 그 이듬해에는 조선 왕실 궁내에 자석식 전화가 개통됐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을 음역해 ‘덕진풍’ ‘득률풍’이라고 했고 ‘말 전하는 기계’라는 의미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불렸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는 왕통을 막 승계한 순종이 고종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통해 곡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02년 서울~인천 간 일반 전화선이 개통됐고, 한성전화소는 최초 13명의 가입자를 대상으로 전화업무를 시작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은 곧 통신주권의 회복을 의미했다. 통신권을 회복한 정부는 국·영문 전신을 다시 취급하고, 전국 주요 도시에 전신전화 건설국을 신설하는 등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 통신기반 확립을 위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미·소 양국 군 주둔으로 인한 국토 분단, 이후의 6·25한국전쟁으로 통신산업의 발달은 후퇴에 가까운 정체를 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광복 직후 전화 가입자 4만5,000명이 16년이 지난 1961년에도 9만5,000명에 머물렀다.
광복 무렵 가입자가 사용하던 전화기는 보통전화기·갑호탁상전화기·을호탁상전화기 등 3종류였다. 보통전화기는 외양이 목제로 된 것으로 벽이나 기둥에 설치했으며, 갑호탁상기는 송·수화기를 함께 연결해 발전기와 벨을 함께 수용한 것으로 성능은 을호탁상기와 동일한 것이었다. 을호탁상기는 탁상용이기는 했지만 송·수화기와 벨을 별도로 설치하게 돼 있었다.
수동식 교환기의 전면적이고도 체계적 교환은 1946년 하반기부터 시작됐다. 미 군정청의 자금을 할당받아 1946년 6월부터 전화기·건전지·축전지·플러그·진공관 등이 조달돼 자동식 교환기로의 이행이 개시됐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은 전기통신산업의 양적 발전을 급속도로 촉진했다. 폭증하는 통신 수요를 충족시키는 한편 통신기술 자립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1970년 금산위성지구국의 건설은 태평양 상공의 인텔셋 통신위성을 통해 위성통신 시대의 막을 열었다.
1967년 마이크로 웨이브 기간망 건설, 1975년 서울~부산 간 동축반송시설 개통은 8년의 시차를 두고 국내 장거리 통신망에 획기적 발전을 이뤄낸 쾌거였다. 지상은 마이크로 웨이브, 지하는 동축반송시설로 이원화돼 폭주하는 시외통화를 신속 정확히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 통신 서비스도 크게 향상됐다. 스캐타통신(1968)과 해저 동축 케이블(1980)의 개통으로 국제 통신 서비스의 종합적 품질이 향상됐고, 다양한 국제 통신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전송로를 확보해 급속한 경제발전에 일조했다. 1979년 도입된 전자교환기와 역시 이 무렵 개발돼 실용화된 광통신이 전기통신산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반 국민의 통신 서비스 적체 현상은 여전히 심각했다.
1962년 12만 명의 가입자에서 1981년 326만 가입자로 비약적 증가를 이뤄냈지만 여전히 전화 수요의 70% 정도만 수용할 수 있었다. 가입자가 사고 팔 수 있었던 소위 ‘백색전화’는 강남 일부 지역의 경우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는 했다.
세계 최대 휴대용 통신기기 생산국으로 부상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KT의 전신)의 발족은 우리나라 전화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주도한 전국 시외 전자 교환망 완성, 전국 전화 광역 자동화는 1997년 전화 가입자 2,000만 명 돌파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고, 이는 정보통신 대중화의 완료를 의미하는 기준점으로 간주됐다.
유선 전화망의 전국적 완성은 휴대용 무선전화산업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 1984년 3월29일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위탁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는 서울 구의동 광장전화국 한구석 셋방에서 32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다. 이 회사가 차량전화(일명 카폰)로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첫해 가입자는 2,658명, 매출액은 3억9,0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4년 말 현재 휴대전화 가입자는 전 국민의 75%인 3,700만 명. 최대 사업자인 SK텔레콤은 가입자 1,830만 명, 매출 9조5,000억 원, 순이익 1조9,000억 원 규모의 세계적 통신사업자로 부상했다.
미국·일본·유럽 제조사들이 주도하던 세계 통신기기시장 판도도 한국의 기업들이 뒤집었다. 세계 10대 단말기 제조사 가운데 삼성전자·LG전자·팬택&큐리텔 등 3개 업체가 포함돼 있어 한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휴대용 통신기기 생산 국가로 부상했다.
자석식 수동교환 전화기에서 시작한 한국의 통신 역사는 이제 신기원을 맞고 있다.
휴대전화는 한국민에게 통신, 지급 및 결제, 엔터테인, 기록의 수단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상파와 위성TV의 다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폰의 등장으로 휴대전화는 또 한번의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DMB는 최대 7인치 화면에서 고품질의 이동 TV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울러 CD 수준의 음질과 데이터 서비스도 제공 가능하다.
5월부터 상용화될 DMB가 활성화되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의 풍경도 달라질 것 같다. 휴대전화나 전용 단말기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조간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 : 코리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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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1970년 9월 전기통신법을 개정하여 "가입전화에 의하여 공중통신역무의 제공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이를 양도하거나 증여 등을 할 수 없으며 질권의 목적으로 할 수 없다"라고 개정하였다. 그래서 종전에 재산권의 일종인 가입권을 사용권으로 규정함으로써 전화가입권의 양도 · 증여 등을 전면 금지하여 공공시설을 이용하는데 그치는 것으로 하여 실수요자 우선주의의 실현과 이권을 목적으로 하는 가수요를 일소함으로써 공정한 전화공급을 기하게 되었다.
여기서 법 개정 이전의 가입전화 즉 양도가 가능한 전화와 개정 이후의 가입전화 즉 사용권만이 인정된 전화를 확연히 구분하기 위하여 전화원부의 색을 전자는 백색, 후자는 청색을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속칭 백색전화와 청색전화란 말이 사용되게 되었다. 1970년 8월말 현재 가입자수는 총 45만 7,280명이었고 서울은 19만 6,599명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색전화의 가입자수인 것이다.
[한국인의 삶을 바꾼 것들 ③] 전화기
휴대전화 하나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강의를 듣고, 은행업무를 보고, 가사를 돌보고, 위성TV를 시청하는 시절이 됐다. 유비쿼터스 혁명이라는 말이 난무할 정도다. 세계 10대 단말기 메이커에는 국내 업체가 3개나 포함됐다. 대한민국의 IT혁명을 주도하는 통신기기의 발전상을 전화기의 변천사를 통해 살펴봤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통신이 도입된 시점은 1895년, 한성전보총국이 출범하면서부터다. 맨 먼저 들어온 것은 전신이었다. 1885년 9월28일 서울~인천 구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전신업무가 시작됐다. 전화가 도입된 것은 전신보다 10년이 늦은 1895년. 그 이듬해에는 조선 왕실 궁내에 자석식 전화가 개통됐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을 음역해 ‘덕진풍’ ‘득률풍’이라고 했고 ‘말 전하는 기계’라는 의미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불렸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는 왕통을 막 승계한 순종이 고종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통해 곡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02년 서울~인천 간 일반 전화선이 개통됐고, 한성전화소는 최초 13명의 가입자를 대상으로 전화업무를 시작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은 곧 통신주권의 회복을 의미했다. 통신권을 회복한 정부는 국·영문 전신을 다시 취급하고, 전국 주요 도시에 전신전화 건설국을 신설하는 등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 통신기반 확립을 위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미·소 양국 군 주둔으로 인한 국토 분단, 이후의 6·25한국전쟁으로 통신산업의 발달은 후퇴에 가까운 정체를 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광복 직후 전화 가입자 4만5,000명이 16년이 지난 1961년에도 9만5,000명에 머물렀다.
광복 무렵 가입자가 사용하던 전화기는 보통전화기·갑호탁상전화기·을호탁상전화기 등 3종류였다. 보통전화기는 외양이 목제로 된 것으로 벽이나 기둥에 설치했으며, 갑호탁상기는 송·수화기를 함께 연결해 발전기와 벨을 함께 수용한 것으로 성능은 을호탁상기와 동일한 것이었다. 을호탁상기는 탁상용이기는 했지만 송·수화기와 벨을 별도로 설치하게 돼 있었다.
수동식 교환기의 전면적이고도 체계적 교환은 1946년 하반기부터 시작됐다. 미 군정청의 자금을 할당받아 1946년 6월부터 전화기·건전지·축전지·플러그·진공관 등이 조달돼 자동식 교환기로의 이행이 개시됐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은 전기통신산업의 양적 발전을 급속도로 촉진했다. 폭증하는 통신 수요를 충족시키는 한편 통신기술 자립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1970년 금산위성지구국의 건설은 태평양 상공의 인텔셋 통신위성을 통해 위성통신 시대의 막을 열었다.
1967년 마이크로 웨이브 기간망 건설, 1975년 서울~부산 간 동축반송시설 개통은 8년의 시차를 두고 국내 장거리 통신망에 획기적 발전을 이뤄낸 쾌거였다. 지상은 마이크로 웨이브, 지하는 동축반송시설로 이원화돼 폭주하는 시외통화를 신속 정확히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 통신 서비스도 크게 향상됐다. 스캐타통신(1968)과 해저 동축 케이블(1980)의 개통으로 국제 통신 서비스의 종합적 품질이 향상됐고, 다양한 국제 통신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전송로를 확보해 급속한 경제발전에 일조했다. 1979년 도입된 전자교환기와 역시 이 무렵 개발돼 실용화된 광통신이 전기통신산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반 국민의 통신 서비스 적체 현상은 여전히 심각했다.
1962년 12만 명의 가입자에서 1981년 326만 가입자로 비약적 증가를 이뤄냈지만 여전히 전화 수요의 70% 정도만 수용할 수 있었다. 가입자가 사고 팔 수 있었던 소위 ‘백색전화’는 강남 일부 지역의 경우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는 했다.
세계 최대 휴대용 통신기기 생산국으로 부상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KT의 전신)의 발족은 우리나라 전화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주도한 전국 시외 전자 교환망 완성, 전국 전화 광역 자동화는 1997년 전화 가입자 2,000만 명 돌파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고, 이는 정보통신 대중화의 완료를 의미하는 기준점으로 간주됐다.
유선 전화망의 전국적 완성은 휴대용 무선전화산업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 1984년 3월29일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위탁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는 서울 구의동 광장전화국 한구석 셋방에서 32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다. 이 회사가 차량전화(일명 카폰)로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첫해 가입자는 2,658명, 매출액은 3억9,0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4년 말 현재 휴대전화 가입자는 전 국민의 75%인 3,700만 명. 최대 사업자인 SK텔레콤은 가입자 1,830만 명, 매출 9조5,000억 원, 순이익 1조9,000억 원 규모의 세계적 통신사업자로 부상했다.
미국·일본·유럽 제조사들이 주도하던 세계 통신기기시장 판도도 한국의 기업들이 뒤집었다. 세계 10대 단말기 제조사 가운데 삼성전자·LG전자·팬택&큐리텔 등 3개 업체가 포함돼 있어 한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휴대용 통신기기 생산 국가로 부상했다.
자석식 수동교환 전화기에서 시작한 한국의 통신 역사는 이제 신기원을 맞고 있다.
휴대전화는 한국민에게 통신, 지급 및 결제, 엔터테인, 기록의 수단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상파와 위성TV의 다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폰의 등장으로 휴대전화는 또 한번의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DMB는 최대 7인치 화면에서 고품질의 이동 TV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울러 CD 수준의 음질과 데이터 서비스도 제공 가능하다.
5월부터 상용화될 DMB가 활성화되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의 풍경도 달라질 것 같다. 휴대전화나 전용 단말기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조간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 : 코리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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