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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9)정뜨르 비행장-1

marineset 2023. 5. 28. 00:50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9)정뜨르 비행장-1
사형장 방불케 팡~팡… 4·3 최대 학살터


입력날짜 : 2007. 11.27. 00:00:00

수많은 관광객들이 들고 나는 제주국제공항은 제주의 관문이자 날로 성장하는 제주관광의 상징이다. 그러나 60년전, 4·3 당시 벌어졌던 학살의 아수라장은 수많은 유족들과 도민들에 의해 입소문으로 전해졌으며, 대부분 희생자들의 유해는 토사에 덧씌워진 채 그대로 공항 여기저기에 묻혀있다.

드러나는 학살의 실상

최근 제주자치도가 발주하고 제주4·3연구소와 제주대학교가 구성한 유해발굴단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옛 정뜨르 비행장 4·3유해발굴사업에서 다량의 유해와 유품, 총탄 등이 발굴됨으로써 4·3 당시 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정뜨르 서비행장은 태평양전쟁 시기인 1942년 개장되었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결7호작전에 따라 모슬포의 알뜨르에 해군비행장, 신촌 진드르의 육군동비행장, 교래리에 비밀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다시 확장되기 시작한다.

현 제주국제공항의 전신인 정뜨르비행장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적산으로 관리되었으며 미군정 비행장으로 4·3기간 내내 사용되었다.

이 곳은 4·3 당시 일상적으로 제주도 주민들을 끌어다 총살하는 최대의 학살터였던 것이다.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숱한 주민들과 숙군과정에서 해당되는 군인들을 끌어다가 학살했다. 특히 1949년 7월부터 10월까지 제2차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가장 많이 희생된 날은 10월 2일이었다.

4·3과 정뜨르비행장

이 당시 오빠를 잃은 양여하 할머니(84·용담동)는 "오빠는 목포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는데, 오후에 경찰에 잡혀간 후 연락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관덕정 1구서에 있는걸 확인하고 옷 등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는 7월 칠석날 가보니까 오빠는 보이지 않고, 나중에는 비행장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이날 트럭 12대가 사람들을 실었으며, 구덩이 3개를 파고 총살한 후 그대로 묻어버렸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이 목불인견의 학살현장을 멀리서 지켜본 김의협 할아버지(어영 출신) 는 "총소리 팡팡나서 보니까 뒤로 포승을 묶은 사람들이 보였다. 열명씩 세워서 총살당하고 있더라. 당시 어영, 도두 일대는 군인들이 통행금지 시켰다. 비행장이 완전히 사형장이었으며, 군인들은 너무 잔인했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해서 도두봉에 해가 걸쳐질때까지 계속 총살시켰다. 서마파람이 불면 시신 썩는 냄새로 이 근방 대 여섯집은 아예 뒷문을 잠그고 막을 쳐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생생히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주민들을 연행, 예비검속하였다가 비행장 북쪽 굴렁진 곳에서 400여명을 집단학살했다. 이 날은 1950년 8월 19일, 20일이었으며 견우와 직녀가 사랑을 나눈다는 칠석날이었다.

대규모의 학살 이후에도 비행장에는 민간인이 출입을 통제하였으므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최근 발굴로 58년 만에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예비 검속령 발동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사령관 신현준 해병 대령)의 지시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인 양민학살은 정뜨르비행장의 유해발굴과 섯알오름 학살의 결과로 서서히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가 제주에 도착하여 마지막 4·3토벌의 임무를 시작했다. 1,200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해병대는 사령부만 제주농업학교에 두고,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모슬포 대촌병사에 주둔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즉각 '전국 요시찰인 단속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과 '불순분자 구속 처리의 건' 등의 치안국 통첩을 각 도 경찰국에 하달하여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물에 대한 검속을 단행하였다.

이는 이전의 4·3과 구분하여 제주에서는 '예비검속' 혹은 '재검속'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도 제주에서는 4·3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정뜨르비행장 2편에 계속)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현장에서 만난 사람/양용해씨]"아버지 마지막 모습 잊을 수 없습니다"

양용해씨(77·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 회장·사진)는 4·3 당시 아버지와 숙부를 잃었다. 노구를 이끌고 예비검속 희생의 실상을 찾아 나서는 노력은 대단히 열정적이다.

"아버지는 사태가 다 끝나고 49년 봄, 고향 장전에 돌아와 마을 일과 농삿일로 한참 바쁠 때 인데 신엄지서장(이근식 경사·이북출신)이 말타고 와서 쌀을 마대에 담고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손을 말 안장 뒤에 묶고 데려 갔다. 이 날은 동네에서 아버지만 데려 갔으나 며칠 후 4명을 더 예비검속했다."

그는 이 모습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에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숙부님은 동광리 처갓집에 갔다오다가 토벌대에 붙잡힌 후 탈출하여 어쩔수 없이 입산하였으나 행방불명 되었다. 그 후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의 제사를 음력 7월5일날 지내고 있다. 1구서에 같이 있던 사람이 석방돼서 비행장으로 간 날을 말해주어서 알았다고 했다. 또 한 그는 아버님과 숙부님이 4·3당시 억울한 죽음을 당한데 대해 아들과 조카로서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지니고 살다가 지난 73년 아버지와 숙부의 비석을 고향 장전리 언덕에 세웠다고 한다. 숱한 연좌제가 그의 앞에 있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초대 애월읍장을 지내기도 했다.

<오승국 4·3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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