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麗順事件에 관한 자료의 성격과 연구 현황
marineset
2023. 5. 28. 01:26
麗順事件에 관한 자료의 성격과 연구 현황
< 목 차 >
1. 머리말
2. 여순사건에 대한 자료의 특징과 연구시각
3. 여순사건의 배경과 원인
4. 여순사건의 전개과정과 성격
5. 맺는말
1. 머 리 말
해방직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은 여러 차례의 유혈충돌을 촉발하였다. 한반도에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4월에는 제주도에서 이른바 4 · 3사건이 일어났고, 정부수립 직후인 10월에는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지역민 일부의 지지를 받아 봉기하였다. 이른바 ‘여순사건’* 이 논문은 1996년도 순천대학교 공모과제 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여순사건’에 대한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상세하게 언급하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잠정적으로 여순사건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이 그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에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어 1950년에는 민족의 최대 비극으로 알려진 6 · 25전쟁이 일어났다. 4 · 3사건에서 여순사건, 그리고 6 · 25전쟁은 징검다리와 같은 연결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6 · 25전쟁은 50년대부터 현재까지 상당한 연구성과를 축적해온 편이다
4 · 3사건의 경우에도 종래에는 언급조차 꺼리는 주제였으나, 최근에 이르러 자료집에서부터 구체적인 연구논저에 이르기까지 간행이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경우에는 지금까지도 주목할만한 연구성과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6 · 25전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여순사건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여순사건을 일으킨 세력이 이제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체제를 부정하는 反亂의 성격이 강한 까닭에 여순사건은 禁斷의 주제가 되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주동하였다.
이들은 제주도출동을 거부하고서 무장폭동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그후 이들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삼아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른바 빨치산투쟁을 선도하였다. 이처럼 이 사건은 발생 당시만이 아니라 4-5년 동안이나 남한사회의 저변을 뒤흔든 커다란 사건 여순사건은 제주 4 · 3사건과 함께 현대 한국의 60대사건의 하나로 포함되었고(김광식, 「제주 4 · 3사건과 여순반란사건」, ꡔ현대 한국을 뒤흔든 60대 사건ꡕ, 신동아 1988년 1월호 부록), 「광주·전남 50대사건」의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전남일보 1994년 9월 6일자 「여순사건-항쟁인가 반란인가」 참조). 이었다. 이 글은 여순사건의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으로서, 사건과 관련된 자료와 연구성과 등을 분석 ·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자료의 성격이나 특징을 이해하고 나아가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봄으로써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는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여순사건에 대하여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정치학계와 향토사학계에서는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에 초점을 맞추거나 명칭문제 혹은 진상규명을 강조해왔다. 이로써 여순사건의 원인이나 성격, 혹은 전개과정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문학계에서는 매우 주목할만한 업적을 내놓음으로써 한국현대사의 그늘 속에 파묻혀 있던 여순사건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조정래의 ꡔ태백산맥ꡕ(전 10권, 한길사, 1989 ; 해냄, 1995)과 이태의 ꡔ여순병란ꡕ(전2권, 청산, 1994)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접근에 풍부한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객관성을 입증할 수 없는 문학작품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여순사건에 관련된 자료의 특징을 살펴본 후 이 사건에 대한 연구시각, 사건의 배경과 원인, 사건의 전개과정과 성격 등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끝으로 앞으로의 연구과제를 제기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2. 여순사건에 대한 자료의 특징과 연구시각 여순사건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알려된 자료를 잘 분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이 글의 뒷부분에 소개된 [부록]-A의 참고문헌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진압과 관련된 것으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 당국의 각종 발표문, 주한미군 당국의 각종 정보문서 등이 해당된다. 이 사건에 대한 초기의 대응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이범석 국무총리겸국방장관의 「반란군에 대한 고시문」(1948. 10. 22)과 이승만 대통령의 「반란 경고문」(10. 23), 그리고 ꡔ駐韓美軍情報日誌ꡕ(주로 G-2보고서) ꡔ駐韓美軍情報日誌ꡕ([부록]-A의 13 참조)는 그간 몇몇 자료집에 발췌 · 인용되다가, 1989년에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완간한 바 있다. 그 중에 여순사건과 관련된 자료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가 해당된다. 이 자료에서는 대체로 사건의 원인과 진행과정, 그리고 진압과정과 그 처리 문제, 희생자의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면 당시 미국의 관심과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등이 주목된다([부록]-A의 1 · 2 · 17 참조). 그런데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는 주로 언론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장관의 발표문은 당시의 신문에 그 全文이 실려있으나, 신문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새한민보(1948년 11월 하순 ; ꡔ한국현대사자료총서ꡕ 7, 돌베개, 1986, 632쪽)에 게재된 기사가 참고하기에 편리하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정부당국의 다른 발표문 등도 중앙과 지방의 주요 일간지에 실려 있다. 중앙지인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그리고 지방지인 호남신문과 동광신문 등에 실린 기사는 최근에 발간된 몇몇 자료집에 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ꡔ여수문화ꡕ 5<여수문화원, 1990> · ꡔ14연대반란50년결산집ꡕ<여수문화원, 1997> · ꡔ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ꡕ 1<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등 참조). 하지만 실린 자료가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다 이해하기 어렵게 편집되어 있으므로 자칫 다른 내용과 혼동할 우려가 없지 않다. 따라서 여순사건에 관련된 신문기사만이라도 모두 한데 모아 자료집으로 발간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에서는 여순사건에 관한 자료집과 증언집을 간행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당시 진압의 당위성과 진압방법, 진압작전의 추이, 그리고 피해상황과 진압후의 현지 분위기 등을 비교적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많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10월 24일을 전후하여 여수와 순천이 완전히 탈환되었다거나, 10월 24일자의 조선일보 「順天麗水完全鎭壓」과 동아일보 「麗水, 順天 完全 奪還」 및 東光新聞과 湖南新聞의 같은 題號 「麗水順天完全奪還」 등의 기사 참조.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지방민이라는 주장이 실리기도 하였다. 예컨대, 동광신문 1948년 10월 29일자 「叛軍主力은 男女學生」, 같은 신문 11월 3일자 「國軍智異山에 集結中--麗水反亂은 地方人이 主動--」, 조선일보 10월 27일자 「麗水叛亂指揮는 女中校長」, 10월 31일자 「叛軍指揮한 宋郁逮捕」, 같은 날짜 동아일보 「叛徒魁首宋郁逮捕」, 서울신문 10월 27일자 「叛軍總指揮者 麗水女中校長」 등의 기사 참조. 前者는 유엔총회의 개막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당시 한국문제가 유엔에서 논의될 의제의 하나였기 때문에, 정부당국은 여순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점을 내외에 천명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내용이 실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국방부와 공보처, 현지 토벌사령부, 심지어 수도청장까지 여순사건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ꡔ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ꡕ 1,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154-163쪽 참조. 後者는 군 당국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는 과정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당시 군 당국은, 지역민들이 반란에 적극 가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주로 발표하였다.
이는, 처음에 반란을 야기했던 軍에 대한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군 당국의 일방적인 발표로 인해 여수여중 교장 宋郁은 반란의 주동자로 몰려 훗날 무고한 희생자의 대표가 되고 말았다. 반충남, 「여수 14연대 반란과 宋郁 교장」, ꡔ말ꡕ 1993년 9월호 참조. 이른바 ‘민간인주동설’의 의도적인 유포로 말미암아 이 사건이 이른바 ‘여순반란’으로 불려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한편, 군 당국이 저지른 대표적인 誤報로는 金智會를 체포했다는 기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은 김석학 · 임종명의 ꡔ광복30년ꡕ 제2권 여순반란편(전남일보사, 1975), 336-343쪽을 참고하라. 군 당국이 한 지방신문 기자에게 김지회를 체포했다고 제보함으로써 그 기사가 국내외에 전송되는 촌극을 빚은 바 있다. 따라서 신문기사를 인용할 경우에는 기사에 대한 엄정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당시에 간행되거나 발표된 목격기나 취재기사도 여순사건 연구에 크게 도움을 준다. 玄允三 洪漢杓 등이 ꡔ開闢ꡕ 등 당시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인데, [부록]-A의 4-10의 글 참조. 이들은 대체로 신문사나 통신사의 기자들로서 진압직후 현지를 방문 · 취재하였다. 그 가운데 현윤삼과 李在漢의 글은 진압을 담당하는 군경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朴燦植의 글은 날짜별로 사실만을 기록하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民主日報 기자인 홍한표와 合同通信 기자인 薛國煥의 글은 언론을 통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계엄령이 내려진 제한된 상황에서 씌어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려한 점이 크게 돋보이는 자료라 하겠다. 이 글들은 여순사건이 마무리된 이후인 11-12월 사이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사건 당시보다는 좀더 차분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한표는 수십 번이나 망설이다가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참고자료로 제공할 의도아래 썼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본 것 역시 표면적일 뿐, 공평하고 정확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사건 당시 신문기자들은 대체로 국군과 경찰, 우익인사의 발표를 기사화한 탓에 사실과 전연 거리가 멀거나 비상식적인 내용이 없지 않다고 부언하였다. 설국환 역시 비슷한 論調를 보이며, 도망나온 철도경찰의 엉터리 증언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현지의 상황을 전하였다. 事實 順天麗水에 들어가기 前에 우리는 叛軍과 叛徒가 放火와 强盜질을 恣行하였고 强姦과 屍體破壞를 餘地없이 하였을 뿐더러 殺害에 있어서 警察官의 全家族을 沒殺하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나 現地의 死體에서 婦女子 老人의 屍體는 거진 볼 수 없었을 뿐더러 屍體에 손을 댄 痕迹도 별로 보지 못하였다. 다만 數人의 警察責任者와 國軍將兵의 家族을 殺害하였다는 이야기를 當事者의 口傳으로 들었을 뿐이며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금 摘發에 當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는 多少의 에누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설국환, 「叛亂地區踏査記」, ꡔ新天地ꡕ 1948년 11·12합병호 ; ꡔ한국현대사자료총서ꡕ 8, 돌베개, 1986. 위의 인용문에서는 반군의 만행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던 당시의 신문기사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당시 현지에 파견된 특파원들은 진압이후의 상황이 “復讐와 私感” 또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무서운 논리가 지배하였음을 안타까워했다. 이와 같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신문기사에 비하여 오히려 참고할만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자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장사진들이다. 당시 호남신문 사진부장이자 광양출신이었던 이경모의 사진첩 ꡔ격동기의 현장ꡕ에는 여순사건에 관련된 귀중한 사진들이 들어 있다. ꡔ격동기의 현장ꡕ, 눈빛, 1991, 57-90쪽 참조. 이 사진첩을 통하여 여순사건의 참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방에서 6 · 25전쟁에 이르기까지 전남지역의 상황을 풍부하게 전해준다. 아울러 주목되는 자료로는 이른바 빨치산들이 남긴 기록을 들 수 있다. ‘빨치산자료’는 6 · 25전쟁 중에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미공개 상태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 자료는 최근에야 기밀해제됨으로써 일반인들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이 자료는 최근에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부록]-A의 15 참조.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ꡔ빨치산자료집ꡕ 제1권에는 빨치산의 회의록 · 결정서 · 명령서 · 유격대원의 명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제7권에는 빨치산부대가 발행한 陣中新聞이 들어 있다. 이른바 남부군의 기관지인 「승리의 길」을 비롯하여 각 道別로 발행한 신문들이다.
자료로써 여순사건에 가담한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14연대와 지역민 중에 입산한 사람들의 이력사항 등을 알 수 있게 됨으로써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도세력과 참여층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특히, 「승리의 길」 제23호(1951. 11. 3)에 들어있는 ‘려수병란삼주년기념좌담회’의 내용이 주목된다. 당시 빨치산들의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신문에는 여순사건에 참여한 5명(14연대 소속 3, 순천의 민간인 남성 1, 구례의 민간인 여성 1)의 경험담이 게재되어 있다. 전쟁중이던 1951년 겨울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 같은 좌담회를 기획한 의도는 빨치산의 투쟁성과 희생정신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격대 사령관의 결론에서 여순사건의 정치적 의의와 교훈을 특별히 강조한 점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아울러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표명한 반면, 미국과 이승만정권을 격렬히 비판한 점을 통하여 이들의 南北韓觀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밖에도 국회에서 간행한 속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국회사무처, ꡔ제1회 국회속기록ꡕ 89-124호, 1948년 10-12월. 이 자료는 여순사건 직후에 국회가 개원하여 그 진상을 조사한 내용이다. 국회의 질의에 대한 정부측의 답변과 자체적인 조사활동 및 수습대책을 논의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건의 전말에서 전과 및 피해상황, 그리고 수습대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계엄령의 위헌시비와 황두연 의원의 불법감금, 반군점령기 이전과 이후의 희생자규모 등의 문제가 크게 논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이범석 장관을 비롯한 정부측이 이 사건에 대하여 국회에 종합적으로 보고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정부는 사건의 원인을 ‘남로당의 지령설’, ‘군부내 좌익의 지방좌익포섭설’과 ‘극우극좌세력의 합작음모설’ 등으로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건 당시를 회고하거나 증언한 자료들이 1980년대 후반이후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부록]-A의 18-35의 글 참조. 대체로 좌익계 빨치산 인사들의 자전적 증언과 진압을 주도했던 군경 수뇌부의 회고록, 그리고 지역민들의 목격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좌익계와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시민들의 자신감이 출판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빨치산관련 책들이 그야말로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또한 북한의 부도덕성을 간접적으로 폭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정부 당국에서도 간행을 굳이 막을 필요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한 책에는 빨치산들에게 가혹한 희생만 요구하는 북한의 잔학상을 고발할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 ꡔ남부군ꡕ 상 · 하, 두레, 1988 ; 1993 합본판, 14쪽. 그런데 좌익관련 서적에는 자신들의 입산 동기, 빨치산으로서 활동한 내용, 남북한 당국의 자신들에 대한 처리전말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한편, 현지 주민들은 좌우익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이나 목격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과거에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하여 함부로 언급하지 못한 문제들을 자신들이 겪은 내용을 말하게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진압군측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회고록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물론 진압의 당사자였으므로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한 반면, 빨치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빨치산 관련 서적이 세상에 버젓이 나오게 된 상황을 개탄하며 쓰여진 글도 없지 않다. 劉官鍾, 「麗水, 第14聯隊叛亂事件」 3, ꡔ現代公論ꡕ 1989년 4월호, 383쪽. 따라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여순사건 직후에 현지를 답사한 설국환의 글이나 당시 군 당국의 수뇌부로 참여한 짐 하우스만 대위의 글도 비슷한 시각에서 씌어졌다. 설국환의 글은 사건직후에 썼던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 · 증보한 것인데, 「共産叛徒의 蠻行」이라는 副題가 붙어 있다. [부록]-A의 18 참조. 이는, 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인지 냉전적 시각이 더욱 강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하우스만 대위의 글은 사건에 관여한 미군의 역할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부록]-A의 31 참조. 당시 한국군 작전권이 미군에 있었다는 점, 미군의 대응조치와 사건의 원인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이루어진 연구성과는 그리 많지 않다. 해방전후의 시대적 배경이나 6 · 25전쟁을 다루는 과정에서 여순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며, 여순사건만을 다룬 全稿는 별로 많지 않다. 여순사건을 다룬 구체적인 연구는 아닐지라도 비교적 長文의 글을 포함한 논문은 [부록]-B의 6 · 8 · 13 · 16 · 17 · 21 · 27 · 31 · 32 · 35 · 36 · 39 등이 해당된다. 그 중에서 여순사건만을 전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8 · 13 · 16 · 17 · 31 · 32 · 35 · 36 등 8편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보다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음이 주목된다. [부록]-B의 <국외의 연구> 참조. 이 사건이 좌우익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데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가 강력히 지배되던 1970년대까지도 국내에서 연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외국에서는 자료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연구환경이 한결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외국에서는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여순사건을 검토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대체로 네 가지 시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전체적인 시각만을 언급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한편, 정청주는 전통주의적 연구 · 수정주의적 연구 · 향토사가의 연구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여순사건 연구 자료소개」, 전남사회연구회 1989년 10월 21일 발표요지 ; 전남사회연구회회보, ꡔ지역사회연구ꡕ 3, 1990. 1). 그는 이 발표요지를 수정 · 보완하여 최근에 논문으로 발표하였는데(「麗順事件 硏究의 現況과 課題」, ꡔ麗水大學校 論文集ꡕ 13, 1998), 필자는 그러한 사실을 이 글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정청주의 글은 여순사건에 관한 주요 연구논저의 내용과 특징을 검토한 최초의 연구사 정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효춘은,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 · 지방민의 연구 · 진압과정이나 남로당에 직접 참여한 인사의 연구 ·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분석적 연구 등 대략 네 가지로 연구유형을 나누어 살펴보았다(「麗順軍亂硏究」,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2-4쪽). 이효춘의 이러한 분류는 그 기준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국내외에서 진행된 상당수의 연구성과가 누락될 우려가 있다. 보수 · 진보 · 중립적 시각, 그리고 현지주민의 피해를 강조하는 입장 등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보수적 시각이란 반공적인 입장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부록]-B의 1-7 · 9 · 10 · 12 · 14 · 16 · 17 · 24 · 27 등이 해당된다. 이른바 우익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지령에 의해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점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1950년대 이후 꾸준히 발표되어 왔으며, 정부의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중립적인 시각으로 씌어진 글은 [부록]-B의 13 · 21 · 30 · 31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글에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검토하려고 시도하였다. 여순사건의 원인이나 성격, 전개과정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모두 소개하고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국내의 신진연구자들에 의해 80년대 후반부터 시도되었는데, 이는 민주화운동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생각된다.
국외에서의 연구는 대체로 6 · 25전쟁에 이르는 내란의 한 과정이나 민중봉기(폭동)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부록]-B의 33-41 등이 해당되는데, 이를 진보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진 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여순사건을 언급한 연구로는 [부록]-B의 20의 글과 박세길, 「여순봉기의 돌풍」(ꡔ다시쓰는 한국현대사ꡕ 1, 돌베개, 1988)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글에서는 대체로 북한이나 소련의 자료 등도 광범하게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연구를 좌파적인 시각이라 이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한편,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연구도 있다. [부록]-B의 8의 글이 그것이다. 북한학자의 짤막한 글인데, 미국과 대한민국 그리고 남로당 박헌영계를 정면으로 비판한 반면에 여순사건은 애국적 군인들의 투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런데 이 글이 1982년에 씌어진 점을 주목한다면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영향에서 씌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여수와 순천 등 지역적 피해를 강조하는 현지주민의 입장에서 씌어진 글도 적지 않다. [부록]-B의 25 · 29와 <지역중심의 연구> 42-55 등이 그것이다. 대체로 무고한 양민의 피해가 많았다는 점과 이 사건으로 인해 지역민 전체가 ‘暴徒’나 ‘叛徒’로 오해를 받는 억울한 상황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아울러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주민들이 당한 피해조사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지역민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는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연구성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학계의 시각도 주목된다. [부록]-A의 24와 [부록]-C의 1-3 등이 해당하는데, 진보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었다. 이 가운데 조정래의 ꡔ태백산맥ꡕ은 일제하 지주-소작제의 모순이 해방직후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글이고, 나머지의 작품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빨치산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특히 ꡔ여순병란ꡕ의 저자 이태는, “패자인 반란군의 편에서 여순병란의 실상과 그 종말을 접근해보려고 시도”하였다고 밝혔다. 이태, ꡔ여순병란ꡕ 상, 청산, 1994, 6쪽. 이러한 글을 통하여 14연대소속 군인들과 현지주민 입산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에 참고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수적 입장의 자료와 연구는 사건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축적되어왔다. 반면에 중립적 · 진보적 · 지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료와 연구는 80년대 후반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점에서 다양한 시각의 자료와 연구가 한꺼번에 분출된 시대적 배경을 아울러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여순사건과 관련된 자료와 연구는 나름대로의 특징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입장이나 다양한 시각을 견지하는 자료와 연구성과를 더욱 엄정하게 분석 · 비판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연구의 단초를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지역과 전망} 11.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1999)
<하략>
[출처] 여순사건에 관한 자료의 성격과 연구 현황|작성자 젊은그대
< 목 차 >
1. 머리말
2. 여순사건에 대한 자료의 특징과 연구시각
3. 여순사건의 배경과 원인
4. 여순사건의 전개과정과 성격
5. 맺는말
1. 머 리 말
해방직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은 여러 차례의 유혈충돌을 촉발하였다. 한반도에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4월에는 제주도에서 이른바 4 · 3사건이 일어났고, 정부수립 직후인 10월에는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지역민 일부의 지지를 받아 봉기하였다. 이른바 ‘여순사건’* 이 논문은 1996년도 순천대학교 공모과제 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여순사건’에 대한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상세하게 언급하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잠정적으로 여순사건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이 그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에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어 1950년에는 민족의 최대 비극으로 알려진 6 · 25전쟁이 일어났다. 4 · 3사건에서 여순사건, 그리고 6 · 25전쟁은 징검다리와 같은 연결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6 · 25전쟁은 50년대부터 현재까지 상당한 연구성과를 축적해온 편이다
4 · 3사건의 경우에도 종래에는 언급조차 꺼리는 주제였으나, 최근에 이르러 자료집에서부터 구체적인 연구논저에 이르기까지 간행이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경우에는 지금까지도 주목할만한 연구성과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6 · 25전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여순사건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여순사건을 일으킨 세력이 이제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체제를 부정하는 反亂의 성격이 강한 까닭에 여순사건은 禁斷의 주제가 되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주동하였다.
이들은 제주도출동을 거부하고서 무장폭동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그후 이들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삼아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른바 빨치산투쟁을 선도하였다. 이처럼 이 사건은 발생 당시만이 아니라 4-5년 동안이나 남한사회의 저변을 뒤흔든 커다란 사건 여순사건은 제주 4 · 3사건과 함께 현대 한국의 60대사건의 하나로 포함되었고(김광식, 「제주 4 · 3사건과 여순반란사건」, ꡔ현대 한국을 뒤흔든 60대 사건ꡕ, 신동아 1988년 1월호 부록), 「광주·전남 50대사건」의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전남일보 1994년 9월 6일자 「여순사건-항쟁인가 반란인가」 참조). 이었다. 이 글은 여순사건의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으로서, 사건과 관련된 자료와 연구성과 등을 분석 ·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자료의 성격이나 특징을 이해하고 나아가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봄으로써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는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여순사건에 대하여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정치학계와 향토사학계에서는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에 초점을 맞추거나 명칭문제 혹은 진상규명을 강조해왔다. 이로써 여순사건의 원인이나 성격, 혹은 전개과정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문학계에서는 매우 주목할만한 업적을 내놓음으로써 한국현대사의 그늘 속에 파묻혀 있던 여순사건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조정래의 ꡔ태백산맥ꡕ(전 10권, 한길사, 1989 ; 해냄, 1995)과 이태의 ꡔ여순병란ꡕ(전2권, 청산, 1994)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접근에 풍부한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객관성을 입증할 수 없는 문학작품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여순사건에 관련된 자료의 특징을 살펴본 후 이 사건에 대한 연구시각, 사건의 배경과 원인, 사건의 전개과정과 성격 등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끝으로 앞으로의 연구과제를 제기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2. 여순사건에 대한 자료의 특징과 연구시각 여순사건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알려된 자료를 잘 분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이 글의 뒷부분에 소개된 [부록]-A의 참고문헌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진압과 관련된 것으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 당국의 각종 발표문, 주한미군 당국의 각종 정보문서 등이 해당된다. 이 사건에 대한 초기의 대응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이범석 국무총리겸국방장관의 「반란군에 대한 고시문」(1948. 10. 22)과 이승만 대통령의 「반란 경고문」(10. 23), 그리고 ꡔ駐韓美軍情報日誌ꡕ(주로 G-2보고서) ꡔ駐韓美軍情報日誌ꡕ([부록]-A의 13 참조)는 그간 몇몇 자료집에 발췌 · 인용되다가, 1989년에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완간한 바 있다. 그 중에 여순사건과 관련된 자료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가 해당된다. 이 자료에서는 대체로 사건의 원인과 진행과정, 그리고 진압과정과 그 처리 문제, 희생자의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면 당시 미국의 관심과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등이 주목된다([부록]-A의 1 · 2 · 17 참조). 그런데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는 주로 언론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장관의 발표문은 당시의 신문에 그 全文이 실려있으나, 신문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새한민보(1948년 11월 하순 ; ꡔ한국현대사자료총서ꡕ 7, 돌베개, 1986, 632쪽)에 게재된 기사가 참고하기에 편리하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정부당국의 다른 발표문 등도 중앙과 지방의 주요 일간지에 실려 있다. 중앙지인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그리고 지방지인 호남신문과 동광신문 등에 실린 기사는 최근에 발간된 몇몇 자료집에 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ꡔ여수문화ꡕ 5<여수문화원, 1990> · ꡔ14연대반란50년결산집ꡕ<여수문화원, 1997> · ꡔ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ꡕ 1<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등 참조). 하지만 실린 자료가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다 이해하기 어렵게 편집되어 있으므로 자칫 다른 내용과 혼동할 우려가 없지 않다. 따라서 여순사건에 관련된 신문기사만이라도 모두 한데 모아 자료집으로 발간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에서는 여순사건에 관한 자료집과 증언집을 간행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당시 진압의 당위성과 진압방법, 진압작전의 추이, 그리고 피해상황과 진압후의 현지 분위기 등을 비교적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많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10월 24일을 전후하여 여수와 순천이 완전히 탈환되었다거나, 10월 24일자의 조선일보 「順天麗水完全鎭壓」과 동아일보 「麗水, 順天 完全 奪還」 및 東光新聞과 湖南新聞의 같은 題號 「麗水順天完全奪還」 등의 기사 참조.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지방민이라는 주장이 실리기도 하였다. 예컨대, 동광신문 1948년 10월 29일자 「叛軍主力은 男女學生」, 같은 신문 11월 3일자 「國軍智異山에 集結中--麗水反亂은 地方人이 主動--」, 조선일보 10월 27일자 「麗水叛亂指揮는 女中校長」, 10월 31일자 「叛軍指揮한 宋郁逮捕」, 같은 날짜 동아일보 「叛徒魁首宋郁逮捕」, 서울신문 10월 27일자 「叛軍總指揮者 麗水女中校長」 등의 기사 참조. 前者는 유엔총회의 개막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당시 한국문제가 유엔에서 논의될 의제의 하나였기 때문에, 정부당국은 여순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점을 내외에 천명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내용이 실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국방부와 공보처, 현지 토벌사령부, 심지어 수도청장까지 여순사건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ꡔ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ꡕ 1,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154-163쪽 참조. 後者는 군 당국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는 과정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당시 군 당국은, 지역민들이 반란에 적극 가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주로 발표하였다.
이는, 처음에 반란을 야기했던 軍에 대한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군 당국의 일방적인 발표로 인해 여수여중 교장 宋郁은 반란의 주동자로 몰려 훗날 무고한 희생자의 대표가 되고 말았다. 반충남, 「여수 14연대 반란과 宋郁 교장」, ꡔ말ꡕ 1993년 9월호 참조. 이른바 ‘민간인주동설’의 의도적인 유포로 말미암아 이 사건이 이른바 ‘여순반란’으로 불려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한편, 군 당국이 저지른 대표적인 誤報로는 金智會를 체포했다는 기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은 김석학 · 임종명의 ꡔ광복30년ꡕ 제2권 여순반란편(전남일보사, 1975), 336-343쪽을 참고하라. 군 당국이 한 지방신문 기자에게 김지회를 체포했다고 제보함으로써 그 기사가 국내외에 전송되는 촌극을 빚은 바 있다. 따라서 신문기사를 인용할 경우에는 기사에 대한 엄정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당시에 간행되거나 발표된 목격기나 취재기사도 여순사건 연구에 크게 도움을 준다. 玄允三 洪漢杓 등이 ꡔ開闢ꡕ 등 당시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인데, [부록]-A의 4-10의 글 참조. 이들은 대체로 신문사나 통신사의 기자들로서 진압직후 현지를 방문 · 취재하였다. 그 가운데 현윤삼과 李在漢의 글은 진압을 담당하는 군경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朴燦植의 글은 날짜별로 사실만을 기록하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民主日報 기자인 홍한표와 合同通信 기자인 薛國煥의 글은 언론을 통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계엄령이 내려진 제한된 상황에서 씌어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려한 점이 크게 돋보이는 자료라 하겠다. 이 글들은 여순사건이 마무리된 이후인 11-12월 사이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사건 당시보다는 좀더 차분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한표는 수십 번이나 망설이다가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참고자료로 제공할 의도아래 썼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본 것 역시 표면적일 뿐, 공평하고 정확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사건 당시 신문기자들은 대체로 국군과 경찰, 우익인사의 발표를 기사화한 탓에 사실과 전연 거리가 멀거나 비상식적인 내용이 없지 않다고 부언하였다. 설국환 역시 비슷한 論調를 보이며, 도망나온 철도경찰의 엉터리 증언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현지의 상황을 전하였다. 事實 順天麗水에 들어가기 前에 우리는 叛軍과 叛徒가 放火와 强盜질을 恣行하였고 强姦과 屍體破壞를 餘地없이 하였을 뿐더러 殺害에 있어서 警察官의 全家族을 沒殺하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나 現地의 死體에서 婦女子 老人의 屍體는 거진 볼 수 없었을 뿐더러 屍體에 손을 댄 痕迹도 별로 보지 못하였다. 다만 數人의 警察責任者와 國軍將兵의 家族을 殺害하였다는 이야기를 當事者의 口傳으로 들었을 뿐이며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금 摘發에 當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는 多少의 에누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설국환, 「叛亂地區踏査記」, ꡔ新天地ꡕ 1948년 11·12합병호 ; ꡔ한국현대사자료총서ꡕ 8, 돌베개, 1986. 위의 인용문에서는 반군의 만행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던 당시의 신문기사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당시 현지에 파견된 특파원들은 진압이후의 상황이 “復讐와 私感” 또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무서운 논리가 지배하였음을 안타까워했다. 이와 같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신문기사에 비하여 오히려 참고할만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자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장사진들이다. 당시 호남신문 사진부장이자 광양출신이었던 이경모의 사진첩 ꡔ격동기의 현장ꡕ에는 여순사건에 관련된 귀중한 사진들이 들어 있다. ꡔ격동기의 현장ꡕ, 눈빛, 1991, 57-90쪽 참조. 이 사진첩을 통하여 여순사건의 참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방에서 6 · 25전쟁에 이르기까지 전남지역의 상황을 풍부하게 전해준다. 아울러 주목되는 자료로는 이른바 빨치산들이 남긴 기록을 들 수 있다. ‘빨치산자료’는 6 · 25전쟁 중에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미공개 상태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 자료는 최근에야 기밀해제됨으로써 일반인들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이 자료는 최근에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부록]-A의 15 참조.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ꡔ빨치산자료집ꡕ 제1권에는 빨치산의 회의록 · 결정서 · 명령서 · 유격대원의 명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제7권에는 빨치산부대가 발행한 陣中新聞이 들어 있다. 이른바 남부군의 기관지인 「승리의 길」을 비롯하여 각 道別로 발행한 신문들이다.
자료로써 여순사건에 가담한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14연대와 지역민 중에 입산한 사람들의 이력사항 등을 알 수 있게 됨으로써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도세력과 참여층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특히, 「승리의 길」 제23호(1951. 11. 3)에 들어있는 ‘려수병란삼주년기념좌담회’의 내용이 주목된다. 당시 빨치산들의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신문에는 여순사건에 참여한 5명(14연대 소속 3, 순천의 민간인 남성 1, 구례의 민간인 여성 1)의 경험담이 게재되어 있다. 전쟁중이던 1951년 겨울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 같은 좌담회를 기획한 의도는 빨치산의 투쟁성과 희생정신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격대 사령관의 결론에서 여순사건의 정치적 의의와 교훈을 특별히 강조한 점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아울러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표명한 반면, 미국과 이승만정권을 격렬히 비판한 점을 통하여 이들의 南北韓觀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밖에도 국회에서 간행한 속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국회사무처, ꡔ제1회 국회속기록ꡕ 89-124호, 1948년 10-12월. 이 자료는 여순사건 직후에 국회가 개원하여 그 진상을 조사한 내용이다. 국회의 질의에 대한 정부측의 답변과 자체적인 조사활동 및 수습대책을 논의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건의 전말에서 전과 및 피해상황, 그리고 수습대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계엄령의 위헌시비와 황두연 의원의 불법감금, 반군점령기 이전과 이후의 희생자규모 등의 문제가 크게 논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이범석 장관을 비롯한 정부측이 이 사건에 대하여 국회에 종합적으로 보고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정부는 사건의 원인을 ‘남로당의 지령설’, ‘군부내 좌익의 지방좌익포섭설’과 ‘극우극좌세력의 합작음모설’ 등으로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건 당시를 회고하거나 증언한 자료들이 1980년대 후반이후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부록]-A의 18-35의 글 참조. 대체로 좌익계 빨치산 인사들의 자전적 증언과 진압을 주도했던 군경 수뇌부의 회고록, 그리고 지역민들의 목격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좌익계와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시민들의 자신감이 출판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빨치산관련 책들이 그야말로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또한 북한의 부도덕성을 간접적으로 폭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정부 당국에서도 간행을 굳이 막을 필요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한 책에는 빨치산들에게 가혹한 희생만 요구하는 북한의 잔학상을 고발할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 ꡔ남부군ꡕ 상 · 하, 두레, 1988 ; 1993 합본판, 14쪽. 그런데 좌익관련 서적에는 자신들의 입산 동기, 빨치산으로서 활동한 내용, 남북한 당국의 자신들에 대한 처리전말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한편, 현지 주민들은 좌우익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이나 목격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과거에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하여 함부로 언급하지 못한 문제들을 자신들이 겪은 내용을 말하게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진압군측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회고록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물론 진압의 당사자였으므로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한 반면, 빨치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빨치산 관련 서적이 세상에 버젓이 나오게 된 상황을 개탄하며 쓰여진 글도 없지 않다. 劉官鍾, 「麗水, 第14聯隊叛亂事件」 3, ꡔ現代公論ꡕ 1989년 4월호, 383쪽. 따라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여순사건 직후에 현지를 답사한 설국환의 글이나 당시 군 당국의 수뇌부로 참여한 짐 하우스만 대위의 글도 비슷한 시각에서 씌어졌다. 설국환의 글은 사건직후에 썼던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 · 증보한 것인데, 「共産叛徒의 蠻行」이라는 副題가 붙어 있다. [부록]-A의 18 참조. 이는, 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인지 냉전적 시각이 더욱 강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하우스만 대위의 글은 사건에 관여한 미군의 역할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부록]-A의 31 참조. 당시 한국군 작전권이 미군에 있었다는 점, 미군의 대응조치와 사건의 원인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이루어진 연구성과는 그리 많지 않다. 해방전후의 시대적 배경이나 6 · 25전쟁을 다루는 과정에서 여순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며, 여순사건만을 다룬 全稿는 별로 많지 않다. 여순사건을 다룬 구체적인 연구는 아닐지라도 비교적 長文의 글을 포함한 논문은 [부록]-B의 6 · 8 · 13 · 16 · 17 · 21 · 27 · 31 · 32 · 35 · 36 · 39 등이 해당된다. 그 중에서 여순사건만을 전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8 · 13 · 16 · 17 · 31 · 32 · 35 · 36 등 8편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보다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음이 주목된다. [부록]-B의 <국외의 연구> 참조. 이 사건이 좌우익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데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가 강력히 지배되던 1970년대까지도 국내에서 연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외국에서는 자료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연구환경이 한결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외국에서는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여순사건을 검토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대체로 네 가지 시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전체적인 시각만을 언급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한편, 정청주는 전통주의적 연구 · 수정주의적 연구 · 향토사가의 연구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여순사건 연구 자료소개」, 전남사회연구회 1989년 10월 21일 발표요지 ; 전남사회연구회회보, ꡔ지역사회연구ꡕ 3, 1990. 1). 그는 이 발표요지를 수정 · 보완하여 최근에 논문으로 발표하였는데(「麗順事件 硏究의 現況과 課題」, ꡔ麗水大學校 論文集ꡕ 13, 1998), 필자는 그러한 사실을 이 글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정청주의 글은 여순사건에 관한 주요 연구논저의 내용과 특징을 검토한 최초의 연구사 정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효춘은,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 · 지방민의 연구 · 진압과정이나 남로당에 직접 참여한 인사의 연구 ·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분석적 연구 등 대략 네 가지로 연구유형을 나누어 살펴보았다(「麗順軍亂硏究」,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2-4쪽). 이효춘의 이러한 분류는 그 기준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국내외에서 진행된 상당수의 연구성과가 누락될 우려가 있다. 보수 · 진보 · 중립적 시각, 그리고 현지주민의 피해를 강조하는 입장 등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보수적 시각이란 반공적인 입장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부록]-B의 1-7 · 9 · 10 · 12 · 14 · 16 · 17 · 24 · 27 등이 해당된다. 이른바 우익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지령에 의해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점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1950년대 이후 꾸준히 발표되어 왔으며, 정부의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중립적인 시각으로 씌어진 글은 [부록]-B의 13 · 21 · 30 · 31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글에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검토하려고 시도하였다. 여순사건의 원인이나 성격, 전개과정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모두 소개하고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국내의 신진연구자들에 의해 80년대 후반부터 시도되었는데, 이는 민주화운동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생각된다.
국외에서의 연구는 대체로 6 · 25전쟁에 이르는 내란의 한 과정이나 민중봉기(폭동)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부록]-B의 33-41 등이 해당되는데, 이를 진보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진 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여순사건을 언급한 연구로는 [부록]-B의 20의 글과 박세길, 「여순봉기의 돌풍」(ꡔ다시쓰는 한국현대사ꡕ 1, 돌베개, 1988)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글에서는 대체로 북한이나 소련의 자료 등도 광범하게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연구를 좌파적인 시각이라 이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한편,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연구도 있다. [부록]-B의 8의 글이 그것이다. 북한학자의 짤막한 글인데, 미국과 대한민국 그리고 남로당 박헌영계를 정면으로 비판한 반면에 여순사건은 애국적 군인들의 투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런데 이 글이 1982년에 씌어진 점을 주목한다면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영향에서 씌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여수와 순천 등 지역적 피해를 강조하는 현지주민의 입장에서 씌어진 글도 적지 않다. [부록]-B의 25 · 29와 <지역중심의 연구> 42-55 등이 그것이다. 대체로 무고한 양민의 피해가 많았다는 점과 이 사건으로 인해 지역민 전체가 ‘暴徒’나 ‘叛徒’로 오해를 받는 억울한 상황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아울러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주민들이 당한 피해조사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지역민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는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연구성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학계의 시각도 주목된다. [부록]-A의 24와 [부록]-C의 1-3 등이 해당하는데, 진보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었다. 이 가운데 조정래의 ꡔ태백산맥ꡕ은 일제하 지주-소작제의 모순이 해방직후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글이고, 나머지의 작품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빨치산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특히 ꡔ여순병란ꡕ의 저자 이태는, “패자인 반란군의 편에서 여순병란의 실상과 그 종말을 접근해보려고 시도”하였다고 밝혔다. 이태, ꡔ여순병란ꡕ 상, 청산, 1994, 6쪽. 이러한 글을 통하여 14연대소속 군인들과 현지주민 입산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에 참고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수적 입장의 자료와 연구는 사건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축적되어왔다. 반면에 중립적 · 진보적 · 지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료와 연구는 80년대 후반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점에서 다양한 시각의 자료와 연구가 한꺼번에 분출된 시대적 배경을 아울러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여순사건과 관련된 자료와 연구는 나름대로의 특징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입장이나 다양한 시각을 견지하는 자료와 연구성과를 더욱 엄정하게 분석 · 비판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연구의 단초를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지역과 전망} 11.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1999)
<하략>
[출처] 여순사건에 관한 자료의 성격과 연구 현황|작성자 젊은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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