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여성으로 본 중국사]송경령과 그 자매 송애령, 송미령
marineset
2023. 5. 28. 01:28
송경령과 그 자매 송애령, 송미령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宋氏三姐妹
‘송씨 집안의 세 자매’의 생애는 극히 파란만장한 인간드라마일 뿐만 아니라, 중국혁명과 20세기의 역사에 남을 귀중한 증언을 함축하고 있다.
송애령(宋靄齡:공상희 부인), 송경령(손문 부인), 송미령(장개석 부인)의 아버지인 송가수(宋嘉樹)는, 해남도(海南島)의 가난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보스톤에서 상업을 하는 외삼촌의 양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장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곳을 도망쳐 나와 전전하다가 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886년 귀국하여『만국공보(萬國公報)』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영 알렌 밑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일했지만 알렌의 권위적인 태도에 불만을 느껴 독자적인 전도활동을 하기 위해 사임하였다. 그 후 상해에서 외국자본의 대리인으로 일하고 후에는 스스로 제분공장과 인쇄소를 경영하는 부르주아로 성장하여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손문의 혁명활동을 원조했다.
어머니 예계진(倪桂珍)은 그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여자중학까지 졸업했다.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학교제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교회가 전도를 목적으로 세운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 만큼 복음주의자로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여성이었다. 가정교육은 상당히 엄했지만, 장녀인 송애령(宋靄齡)과 막내딸 송미령은 꽤 활달했고, 중간인 송경령은 내성적이며 온순했다고 전해진다.1)
세 딸은 모두 전족(纏足)을 하지 않았으며 학교교육을 받았다. 송애령이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한 것은 1898년, 다섯 살 때였다. 바야흐로 중국자본주의가 최초의 성장기를 맞이하려는 때였으며, 외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여성교육이 주목되기 시작하여 기독교인과 개화지식인 사이에서 ‘천족(天足)’ 운동이 일어나려고 하던 무렵이었는데 송가수 부부는 그 선구자였다.
송경령2)은 1900년에 언니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고, 송미령은 1905․6년 경, 다섯 살 때 부속유치원에 들어갔는데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 무렵, 이미 유신변법에 실패한 중국에서는 의화단 봉기를 시발점으로 1900년에는 손문의 두 번째 봉기가 일어났다. 굴욕적인 신축조약(辛丑條約)과 막대한 배상금을 떠맡아 청조는 산업진흥과 과거제도의 폐지 등, 신정(新政)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국민의 부담은 점점 가중되어 여기저기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4년 송애령은 미국의 웨슬리언 여자대학으로 유학갔다. 중국에서는 학교제도가 만들어져 있기는 했지만 여학교는 아직 공인되지 않은 채 개혁을 지향하는 소수의 지사들이 자기재산을 털어 설립하는 정도였다.
당시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금지조치를 취하려 하던 차여서 송애령은 엄격한 검문을 받느라고 잠시동안 배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이상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으로 향한 첫 걸음은 송애령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웨슬리언 여자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 해 아는 사람의 소개로 테오도르 루우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자 입국 당시의 체험을 이야기하며 ‘미국은 언제까지나 자유로운 나라이기를 바란다’고 말하여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였다. 그녀의 배후에는 1908년 화교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중국본토로 확산된 반미보이코트 운동이라는 힘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11년 송경령․미령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다음 해에는 송애령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귀국하였다. 송경령은 웨슬리언대학에 들어가 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또 문학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중국에서는 이미 손문이 지도하는 중국 동맹회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켜, 추근(秋瑾)을 비롯한 많은 혁명가가 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경령은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학내지(學內誌)에 게재된「귀국유학생의 중국에 미치는 영향」(1911년 11월)이라는 글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에 있어서의 오랜 정치적 부패는 민중을 비참한 생활에 빠뜨려 폭동으로 몰아 넣고 있다. 그러나 귀국유학생에 의한 정치적 관심을 부정직 등의 악덕을 바로잡고, 의회도 열게 하려고 하고 있다.
교육에 대해 말하자면, 자유․평등은 스트라이크나 폭동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광범한 교육․계몽에 의해 달성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되었다.
특히 아편추방․전족반대․변발폐지․빈민의 생활상태개선 등 사회개혁의 면에 있어서도 귀국유학생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송경령은 폭동을 부정하여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개혁의 초점은 대중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녀의 유학목적은 단순한 흥미나 자기 만족이 아니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武昌)봉기가 발발하여 다음 해 1월, 손문은 남경에서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송경령은 벽에 붙어 있던 청조의 용기(龍旗)를 떼어내고 아버지가 보내준 오색기(五色旗)를 거는 등 혁명의 승리를 기뻐했다.
“혁명은 중국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왔다. 너무나 많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이 두가지의 인간의 권리를 확립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박애(博愛)가 획득되지 않으면 안된다.”3)(「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건」1912년 4월)
그리고 ‘박애야말로 자유와 평등의 기반이다’라고 쓰고, 중국이야말로 박애의 이상을 실현시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포부를 나타내고 있다. 만년에 후미꼬씨에게 “내안에서 성서의 사상은 박애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4)라고 말했듯이 그녀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원류는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귀국한 송애령은 혁명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아버지를 도와, 손문의 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나 원세개(袁世凱)의 반혁명, 그리고 이에 대항한 제2혁명의 실패 후 손문과 송씨 일가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3년 웨슬리언 여자대학을 졸업한 송경령은 8월 29일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 언니를 다시 만나 기쁨을 나누고, 다음날 손문의 집을 방문했다. 송경령의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손문이었지만, 이 아름다운 찬미자와의 재회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송경령은 혁명활동을 돕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하고 일본과 중국을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송애령과 함께 손문을 도왔다.
다음 해 9월 송애령은 같은 미국유학생으로 당시 일본 YMCA의 총간사로 있던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하게 되어 그녀가 하던 영문비서의 역할을 송경령에게 맡겼다. 공상희는 산서성 태곡(山西省 太谷) 태생으로 공자의 75대 자손이었으며, 부유한 금융가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요꼬하마(橫浜)의 작은 교회에서 가족․친지의 축복을 받으며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귀국 후 산서성에서 오베링 대학 설립 활동을 하였으며, 송애령은 이 대학에서 한때 영어와 위생학 강의를 맡았는데 중국 여성으로서는 아마도 최초로 대학강단에 선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출산 후에는 거의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고 현모양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손문에게는 송경령보다 나이 많은 아들도 있었지만 부인과 헤어지고 송경령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1915년 10월 25일의 일이다. 손문으로서는 ‘참다운 가정생활, 그리고 동료이며 협력자인 사람과의 새로운 생활’5)의 시작이었다. 송경령은 뒤에 에드가 스노우에게 그때의 감정은 연애라기보다는 구국운동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며 ‘손박사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6)
1916년 4월 제3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손문은 송경령과 함께 귀국, 원세개가 죽은 뒤 북양군벌정권과 맞서 광동군정부를 세웠다. 송경령은 주위의 비난이나 호기심과 싸워나가면서, 손문의 아내이자 동지로서 늘 그의 곁에 머물렀다. 1918년 즉 손문이 군정부 내부의 모순 때문에 광동을 떠나, 상해에서 혁명이론의 저작에 몰두하던 시기에는 자료수집이나 원고정리 뿐만 아니라 강력한 조언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1919년 5․4운동을 시작으로 거대한 삼파(三罷)투쟁(상인․노동자․학생의 스트라이크)의 물결이 상해까지 밀어닥치자 손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 노동자, 학생의 체포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광동군정부에게 보낸 손문의 전문(電文) 또한 송경령이 쓴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가서 완전히 미국생활에 익숙해진 송미령도 매사추세츠주 웰슬리(Wellesley)대학을 졸업한 뒤7), 1917년 귀국했다.
그녀는 상해의 YMCA의 지도적 회원이었으며, 또한 전국 영화겸열위원회에서 활약했다. 국제기독교는 일찍부터 노동문제에 주목하였고, 특히 러시아혁명 후 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는데 5․4운동을 겪은 중국에서도 아동․여성노동문제에의 관심이 높아졌다. 1923년에는 상해시 참사회의 의뢰로 유년노동위원회에 참가하여, 조사작업과 제언(提言)을 하였다. 그녀가 쓴「공업주의와 여성」이라는 논문에서는 금세기 초,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급속한 산업발전에 따라 중국의 노동조건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8)
1920년 12월, 다시 광동에서 군정부를 조직하는 손문을 도우며 송경령은 장병 위로와 적십자 활동을 위해 전선에도 다녔다. 1922년 진형명(陳炯明)의 반란때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송경령은 억지로 손문을 먼저 내보내고 손문은 손문대로 그녀를 위해 모든 경호원들을 남겨 놓은 채 혼자 탈출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실패는 손문으로 하여금 국공합작을 단행하게 했는데,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회담에는 줄곧 송경령도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1924년 1월 국공합작의 발족을 정식으로 성립시킨 중국국민당 제1회 대표대회에서는 특별히 손문의 지시를 받은 송경령이 왕정위의 부인인 진벽군(陳壁君), 요중개의 부인인 하향응(何香凝)과 함께 참가했다.9) 이 대회에서 손문의 삼민주의는 반제국주의․농공부조의 새로운 의의가 첨부되고, 여성해방의 면에서도 ‘법률적․교육적․경제적인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인하며, 여권의 발전을 돕는다’라는 명확한 주장이 보여졌다.
손문은 북경에 있는 단기서(段祺瑞)와 중국의 통일과 평화에 대해 회담하기 위해 그해 11월 송경령과 함께 광동을 떠났다. 도중에 일본에 들른 그녀는 고오베(神戶)현립고등여학교에서 가진「현대부인의 자각」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중․일의 평화유지를 위해 여성들은 자각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말하여, 많은 청중을 감동시켰다.10)
그러나 북경에 도착한 후 손문은 병이 들어 1925년 3월 12일 서거하였다. 송경령과 동지들에게, 중국의 자유․평등을 위한 국민혁명의 성취를 당부하며…….
사회주의 혁명세력과 민족․민주혁명세력과의 통일전선의 결성을 진행했던 레닌․손문 두 사람의 지도자를 잇따라 잃고 난 뒤, 역사는 송경령에게 이 사명을 이어갈 역할을 부여했다. 4월, 북경에서 장례를 치르고 상해로 돌아오자 향경여(向警予)․양지화(楊之華) 등 중국공산당의 여성들이 그녀를 찾아와서 위로해 주었는데, 뒤에 채화삼(蔡和森)은 “이 시기에는 송여사에게 사상적으로 절대적인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 송여사 사상이 좌경화하는 데 중대한 요점이 되었다”11)라고 말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암흑을 민중의 가난과 불행 속에서 보아온 송경령은 실제로 중국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자로 되어 갔다.
5․30운동의 고양을 계기로 국공양당의 대립과 국민당내의 분화가 두드러져 갔지만, 송경령은 “제국주의 타도야말로 손선생의 40년 동안의 목적의 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전당(全黨)․전국민에게 단결을 호소하였다. 이 때 송경령은 손문이 남기고 간 뜻의 계승자로서 처음으로 확실하게 정치적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했던 것이다.
이 국민혁명기에 송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 송경령과 가장 가까운 입장을 취했던 사람은 송자문으로 무한 정부의 말기를 빼고는 송경령을 줄곧 지지했다. 송애령은 변함없이 현모양처의 역할에 전념했으며, 그의 남편인 공상희도 잠시동안 광동 국민정부의 재정을 맡는 정도였다. 송미령의 활동도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크리스찬으로서 반제국주의 운동의 격화에 비판적이었을지도 모른다.
1926년 1월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 대회는 중국의 여성해방운동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갖는다. 제1회 대회에서는 손문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명의 여성대표가 참석했지만, 이번에는 송경령이 의장단에 가담하고 전회의 몇 배나 되는 여성대표가 참가했다. 이때의 ‘여성운동결의안’은 국공분열 후에도 계속 유효한 결의로 남아 국민당 치하에서의 운동의 지주가 되었다. 대회에서 송경령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11월 북벌군의 무한 공략과 더불어 송경령은 무한으로 향하고, 국민정부도 그 곳으로 이사했다. 송경령은 중국 국민당 여성당무훈련반의 주임으로서 1927년 2월 12일의 개교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여성은 평등을 요구하기에 앞서 동성(同性)에 대하여 평등해야 한다. 빈부귀천의 계급을 타파하고, 전국의 아니 전 세계의 여성과 단결하여 혁명적인 일대 동맹을 만들어야만 한다.”12)
이러한 말에서 송경령이 이 시기에 이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의 투사로 변신했다’는 평가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13) 그러나 송경령에게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손문의 혁명노선을 계승한 것이며, 국민당 좌파의 입장이라고 생각되었다.
1927년 장개석의 4․12쿠데타와 그 뒤의 백색테러는 그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7월에는 무한정부의 국민당도 공산당과 결렬되었는데 송경령은 이것에 대해 손문의 뜻을 등지고, 노농대중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는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든 송씨 집안의 사람들과도 정치적으로 결별한 채14)…… 8월 1일의 남창봉기 때는 혁명위원회 주석단의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한편 송미령은 이 해 12월 장개석과 결혼했다. 송애령․공상희는 물론 이 결혼을 축복했다. 다만 한 사람, 모스크바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송경령은 까무러칠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배반자, 백색테러의 장본인인 장개석과 동생이 결혼하다니! 님 웨일즈에 의하면 이 당시 무한 시절부터 친구인 레이나 프롬의 돌연한 객사나, 송경령이 자신과 함께 망명한 진우인(陳友仁)과 재혼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므로 송경령은 매우 괴로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 혁명을 둘러싸고 격화된 스탈린파와 트로츠키파의 대립에서 혁명의 이면을 엿보게 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송경령의 가장 송경령다운 활동, 즉 국제적 반제국주의․반전․반파시즘의 활동이 시작된다.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반제동맹에서 대회 명예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9년에는 베를린의 반파시즘 국제대회에 출석하고 그 후에도 유럽의 반제․평화운동에 참가했다. 이미 1927년 경부터 유럽에 있어서 반파시즘 운동은 앙리 바르뷔스, 로망 롤랑등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었으며, 송경령은 그 후 이 국제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중국혁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1929년에 손문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잠깐 귀국한 바 있었던 송경령은 1931년 어머니 예계진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다시 돌아왔다. 그녀를 맞이했던 것은 세계대공항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중국 침략에서 구하려는 일본의 만주침략이었으며, 국공대립의 격화에 의해 민중의 자발적인 항일운동은 있었지만, 민족적 저항이라고는 할 수 없는 중국 그리고 등연달(鄧演達)을 비롯한 정치범과 민중에 대한 불법적인 체포와 고문, 살육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체포된 범태평양 노동동맹(汎太平洋勞動同盟)의 누란부부 석방운동에 대한 해외로부터의 호소가 ‘위대한 손문 이상의 진실한 계승자’15)인 송경령에게 큰 기대와 함께 쇄도하였다.
1932년 1월 28일 반일 운동의 격화를 빙자한 일본의 상해공격은 한층 항일의 기운을 강하게 했다. 민족적 위기는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당분간 협력하게 만들어 송애령과 송경령도 부상병을 위한 병원건설에 힘을 합쳤다.
이러한 가운데 송경령은 1932년 말,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창립했다. 채원배(蔡元培), 호적(胡適)(뒤에 제명되지만) 등도 가담하여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한 시민으로서 민권옹호․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싸우는 조직으로서 송경령은 ‘국부’ 손문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이러한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이 운동은 구체적으로 정치범에게 있어서는 한 줄기의 광명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의 민족주의 통일전선의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된다.
중국민권보장동맹은 1933년 6월 중심인물인 양행불(楊杏佛)이 암살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송경령은 언제까지나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파리에서 성립된 반파시즘 세계위원회는 송경령을 부주석에 임명했다.
일본이 열하․화북으로 침략의 발걸음을 내딛는데 대항하여, 하향응 등과 함께 ‘중화인민의 대일작전기본강령’을 발표하여, 내전 정지․일치항일을 호소하는 등 그녀는 꾸준하고 강하게 항일통일 전선의 형성을 추진했다.
1935년 ‘화북분리반대!’, ‘동북탈환!’, ‘내전정지․일치항일!’을 부르짖는 북경 학생의 12․9운동으로부터 여성구국회 연합회 결성을 위시한 구국회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그 지도자 7인의 체포에 항의하여 송경령은 ‘구국입옥(入獄)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때의 송경령은 중국공산당과 해방구를 국제적인 반파시즘세력이나 국민당 치하의 항일민주세력과 연결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세계의 눈을 해방구에 집중시켰던『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 등을 연안에 보냈던 사실 등도 그 중 하나였다.
반파시즘 세계위원회의 로망 롤랑은 당시의 송경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6)
“우리의 탁월한 부주석 송경령은 단지 세계에서 향기로운 향기를 내는 아름다운 꽃일 따름인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둘러쳐진 철조망을 물어 뜯어 버리려고 하는 용맹스러운 사자이다.”17)
이제 송애령․송미령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상해사변에서 활약한 뒤 송애령은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다. 영국에서 뭇솔리니와 회견했던 그녀는 전례를 깨고 뭇솔리니 쪽에서 악수를 청해서 걸어 나오게 했던 여성으로서 그 의연한 태도는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었다.18) 이러던 중 강서소비에트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목적으로 했던 장개석은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해 우선 여기서부터 ‘신생활운동’을 발족시켜 전국으로 확산했다. ‘예․의․염․치(禮․義․廉․恥)’의 유교도덕의 복권과 청결을 두 개의 기둥으로 하는 이 운동을 송미령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추진했다.
이러한 여동생과 언니의 활동에 대한 송경령의 비판은 준엄하여 송애령이 파시즘의 수령 뭇솔리니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실을 몹시 분개했다. 또한 신생활운동에 대해서는「유교와 현대중국」(1937)이라는 글을 써서 아무것도 받아들일 것이 없는 운동이라고 비판하고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한층 위대한 운동을 주장하였다.
1936년 12월 장개석은 일치항일을 원하는 장학량․양호성 등의 군대에 의해 서안에서 납치되었다. 송미령은 국민당 내부의 ‘장학량일파 처벌, 서안진공(西安進攻)’의 주장을 진정시킨 뒤 송자문 등과 함께 평화적 해결을 찾아서 서안으로 달려갔다. 항일 통일전선형성의 진행은 이 서안사건을 계기로 크게 진전하였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설립은 세 자매를 제휴하게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송경령은 홍콩으로 가서 보위중국동맹을 창립하고 외국인이나 화교들에게 항일의 정황 특히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군과 항일근거지의 상황을 전하며 모금을 해서 의약품 및 기타의 물자를 보내곤 했다. 뒤에 그녀가 정열을 쏟았던 아동복리사업과의 관계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송미령은 여성운동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38년 5월 여산에서 여성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항전과 생산에 각계각층의 여성을 동원하는 동시에 노동여성의 문화 생활면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특히 여성을 속박하는 풍속습관을 배제한다고 하는 항일전쟁 시기의 여성운동 방침을 결정했다. 이 회의에는 중국공산당의 등영초(鄧潁超) 등도 참가했다. ‘신생활운동촉진총회 여성지도위원회’는 여성운동방침에 따라 다시 조직되어 훈련․문화사업․생활지도․생산사업․부상병위로․아동보육․농촌복무 등의 각 부분을 두었다. 그 아동보육활동은 삼만명에 가까운 고아를 양육하고 생산사업은 여성생산합작사․여성공장․여성공작단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띄고 진행되었다.19)
레위 알리, 님 웨일즈, 에드가 스노우 등이 발기했던 공업합작사운동에는 세 자매의 협력이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세 자매가 협력하여 행했던 일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국제적인 항일원조를 호소하여 반파시즘 국가들의 정부와 국민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 당시의 여성운동을 회고하면서 사량(史良)은 송미령은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연설을 잘하고 실천력이 있었기 때문에 항일운동에서 한 역할은 컸었다고 말한다.
물론 세 자매 사이의 모순은 이 시기에도 전부 해소될 수는 없었다. 역시 사량이 제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각 성의 주석부인을 대상으로 했던 훈련반의 모임이었다.
송미령이 “여러분들은 외국의 친구들을 접대하는 데 필요한 것, 예를 들면 나이프와 포오크를 들고 식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송경령이 “오늘날 중국여성과 중국 인민의 문제는 나이프와 포오크를 들고 식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먹을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자 송미령이 난처해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송애령이 구원을 나서서
“오늘날 여성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단결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0)
항일전쟁 말기 국공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송경령은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운동에의 지원을 강력하게 호소하여 국제적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항일전쟁 후 송가수의 세 딸들은 다시금 각각의 길을 찾아갔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서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는 모택동 옆에는 송경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 후 송경령이 국제평화를 위한 활동과 다음 대를 이어나갈 어린이들의 복지와 문화방면에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전국 여성연합회 명예주석으로서 여성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송경령의 그때그때마다의 발언에는 언제나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버리지 않고, 맞서려고 하는 자세가 보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송경령과 행동을 같이 했던 민주제당파(民主諸黨派) 사람들이 홍위병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그녀 자신의 사업도 타격을 입고 잡지『아동시대』가 정간되어 괴로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송경령은 손문탄생 백주년기념집회 강연을 통하여 손문의 불굴의 혁명정신을 예찬하고 그 혁명이론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21)
또한「중국의 여성해방」(『북경주보』1972년 2월 15일)이라는 논설은 아직까지 중국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봉건적 가부장사상의 일소를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임표(林彪)사건 직후의 문화대혁명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완수하였던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된다.
송경령은 1981년 5월 29일에 그 생애를 마쳤다. 중국공산당원으로서22) 또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주석으로서 그리고 본인의 간절한 희망에 따라 만국공묘에 잠들어 있는 부모의 무덤 아래에 오랜 세월 그녀를 돌봐준 이마(李媽:李燕娥)의 곁에 나란히 묻혔다. 송미령은 대만으로 건너가서 장개석을 받들어 여성․아동의 복지와 교육 등의 분야에서 지도적인 활동을 하다가 현재 미국에서 요양중이라고 한다. 송애령은 전후 일가를 거느리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973년 10월 10일 죽었다.23)
송경령이 그녀의 자매들과 길을 달리한 주체적인 분기점은 그녀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운동과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실현하는 운동사이에는 건널수 없을 정도의 깊은 강은 없다는 신념을 유지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박애사상이란 그 두가지를 잇는 것이 아니면 안되었던 것은 아닌가.
1) 송가수에게는 세 딸 외에 아들이 있었으며, 나이 순으로 보면 애령․경령․자문․미령․자량․자안의 순 이다.
2) 출생은 1893년 1월 27일.
3) 『The Wesleyan』1912년 4월호. 中文역문 『中國建設』1983년 제5기.
4) 仁木 후미꼬 옮김.『宋慶齡選集』일본, 동경 도메스 출판사, 1979.
5) 손문이 은사인 제임스 컨트리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國父全集』제5책(대북판, 1974) p.416
6) 에드가 스노우저, 송강양자(松岡洋子) 역, 『目ざめへの旅』, 筑摩書房, 1973년 p.89.
7) 송미령은 처음에는 언니 송경령과 같은 대학인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송경령의 귀국후 오빠 송자 문이 다니는 하버드 대학과 가까운 곳에 있는 웰슬리 대학으로 옮겼으며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8) 앤더슨 저, 고산양길(高山洋吉)역,『支那勞動視察記』, 生活社, 1939년 p.154.
9)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宋慶齡同志故居 편『紀念宋慶齡同志』(문물출판사, 1982)의 기술에 따른다.
10)『神戶又新日報』大正13년(1924) 11월 30일자.
11) 久保田博子,「中國革命における宋慶齡の位置」,『中國硏究月報』423호, 1983년 5월.
12)『송경령선집』, p.14.
13) 久保田博子, 위의 논문, p.30.
14) 송자문․공상희 등은 그후 국민당 정권의 재정․실업부문을 장악한 정치가로서 또한 대실업가로서, 소위 ‘관료자본가’의 길을 걸었다.
15) 클라라 제트퀸으로부터 불려졌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등 편『중국민권보장동맹』p.44.
16) 에드가 스노우의 앞의 책.
17) 전준서(錢俊瑞)「痛悼偉大的 國際主義戰士 宋慶齡同志」(『송경령기념집』, p.124, 인민출판사, 1982)).
18) 松本重治『上海時代․上』중앙공론사, 1981년 p.155.
19) 張玉法,『중국부녀사문집』(대만, 상무인서관, 1981)
20) 사량(史良)「我的生活道路․下」(『人物』1983년 6월 pp.78~9).
21)「孫中山一確固不動, 百折不撓의 革命家」(『송경령선집』, p.530).
22) 1981년 5월 15일 입당을 결심했다. 1950년대에 입당을 희망했지만 오히려 밖에서 협력해 줄 것을 요청받 았다.
23) 羅比․尤思森「宋代三妹姉」(『時代的報告』1983년 10,11,12월). 송미령은 1998년 뉴욕에서 100세를 맞았으며 2003년10월 100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宋氏三姐妹
‘송씨 집안의 세 자매’의 생애는 극히 파란만장한 인간드라마일 뿐만 아니라, 중국혁명과 20세기의 역사에 남을 귀중한 증언을 함축하고 있다.
송애령(宋靄齡:공상희 부인), 송경령(손문 부인), 송미령(장개석 부인)의 아버지인 송가수(宋嘉樹)는, 해남도(海南島)의 가난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보스톤에서 상업을 하는 외삼촌의 양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장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곳을 도망쳐 나와 전전하다가 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886년 귀국하여『만국공보(萬國公報)』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영 알렌 밑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일했지만 알렌의 권위적인 태도에 불만을 느껴 독자적인 전도활동을 하기 위해 사임하였다. 그 후 상해에서 외국자본의 대리인으로 일하고 후에는 스스로 제분공장과 인쇄소를 경영하는 부르주아로 성장하여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손문의 혁명활동을 원조했다.
어머니 예계진(倪桂珍)은 그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여자중학까지 졸업했다.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학교제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교회가 전도를 목적으로 세운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 만큼 복음주의자로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여성이었다. 가정교육은 상당히 엄했지만, 장녀인 송애령(宋靄齡)과 막내딸 송미령은 꽤 활달했고, 중간인 송경령은 내성적이며 온순했다고 전해진다.1)
세 딸은 모두 전족(纏足)을 하지 않았으며 학교교육을 받았다. 송애령이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한 것은 1898년, 다섯 살 때였다. 바야흐로 중국자본주의가 최초의 성장기를 맞이하려는 때였으며, 외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여성교육이 주목되기 시작하여 기독교인과 개화지식인 사이에서 ‘천족(天足)’ 운동이 일어나려고 하던 무렵이었는데 송가수 부부는 그 선구자였다.
송경령2)은 1900년에 언니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고, 송미령은 1905․6년 경, 다섯 살 때 부속유치원에 들어갔는데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 무렵, 이미 유신변법에 실패한 중국에서는 의화단 봉기를 시발점으로 1900년에는 손문의 두 번째 봉기가 일어났다. 굴욕적인 신축조약(辛丑條約)과 막대한 배상금을 떠맡아 청조는 산업진흥과 과거제도의 폐지 등, 신정(新政)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국민의 부담은 점점 가중되어 여기저기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4년 송애령은 미국의 웨슬리언 여자대학으로 유학갔다. 중국에서는 학교제도가 만들어져 있기는 했지만 여학교는 아직 공인되지 않은 채 개혁을 지향하는 소수의 지사들이 자기재산을 털어 설립하는 정도였다.
당시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금지조치를 취하려 하던 차여서 송애령은 엄격한 검문을 받느라고 잠시동안 배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이상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으로 향한 첫 걸음은 송애령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웨슬리언 여자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 해 아는 사람의 소개로 테오도르 루우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자 입국 당시의 체험을 이야기하며 ‘미국은 언제까지나 자유로운 나라이기를 바란다’고 말하여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였다. 그녀의 배후에는 1908년 화교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중국본토로 확산된 반미보이코트 운동이라는 힘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11년 송경령․미령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다음 해에는 송애령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귀국하였다. 송경령은 웨슬리언대학에 들어가 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또 문학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중국에서는 이미 손문이 지도하는 중국 동맹회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켜, 추근(秋瑾)을 비롯한 많은 혁명가가 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경령은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학내지(學內誌)에 게재된「귀국유학생의 중국에 미치는 영향」(1911년 11월)이라는 글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에 있어서의 오랜 정치적 부패는 민중을 비참한 생활에 빠뜨려 폭동으로 몰아 넣고 있다. 그러나 귀국유학생에 의한 정치적 관심을 부정직 등의 악덕을 바로잡고, 의회도 열게 하려고 하고 있다.
교육에 대해 말하자면, 자유․평등은 스트라이크나 폭동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광범한 교육․계몽에 의해 달성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되었다.
특히 아편추방․전족반대․변발폐지․빈민의 생활상태개선 등 사회개혁의 면에 있어서도 귀국유학생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송경령은 폭동을 부정하여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개혁의 초점은 대중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녀의 유학목적은 단순한 흥미나 자기 만족이 아니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武昌)봉기가 발발하여 다음 해 1월, 손문은 남경에서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송경령은 벽에 붙어 있던 청조의 용기(龍旗)를 떼어내고 아버지가 보내준 오색기(五色旗)를 거는 등 혁명의 승리를 기뻐했다.
“혁명은 중국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왔다. 너무나 많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이 두가지의 인간의 권리를 확립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박애(博愛)가 획득되지 않으면 안된다.”3)(「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건」1912년 4월)
그리고 ‘박애야말로 자유와 평등의 기반이다’라고 쓰고, 중국이야말로 박애의 이상을 실현시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포부를 나타내고 있다. 만년에 후미꼬씨에게 “내안에서 성서의 사상은 박애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4)라고 말했듯이 그녀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원류는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귀국한 송애령은 혁명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아버지를 도와, 손문의 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나 원세개(袁世凱)의 반혁명, 그리고 이에 대항한 제2혁명의 실패 후 손문과 송씨 일가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3년 웨슬리언 여자대학을 졸업한 송경령은 8월 29일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 언니를 다시 만나 기쁨을 나누고, 다음날 손문의 집을 방문했다. 송경령의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손문이었지만, 이 아름다운 찬미자와의 재회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송경령은 혁명활동을 돕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하고 일본과 중국을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송애령과 함께 손문을 도왔다.
다음 해 9월 송애령은 같은 미국유학생으로 당시 일본 YMCA의 총간사로 있던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하게 되어 그녀가 하던 영문비서의 역할을 송경령에게 맡겼다. 공상희는 산서성 태곡(山西省 太谷) 태생으로 공자의 75대 자손이었으며, 부유한 금융가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요꼬하마(橫浜)의 작은 교회에서 가족․친지의 축복을 받으며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귀국 후 산서성에서 오베링 대학 설립 활동을 하였으며, 송애령은 이 대학에서 한때 영어와 위생학 강의를 맡았는데 중국 여성으로서는 아마도 최초로 대학강단에 선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출산 후에는 거의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고 현모양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손문에게는 송경령보다 나이 많은 아들도 있었지만 부인과 헤어지고 송경령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1915년 10월 25일의 일이다. 손문으로서는 ‘참다운 가정생활, 그리고 동료이며 협력자인 사람과의 새로운 생활’5)의 시작이었다. 송경령은 뒤에 에드가 스노우에게 그때의 감정은 연애라기보다는 구국운동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며 ‘손박사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6)
1916년 4월 제3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손문은 송경령과 함께 귀국, 원세개가 죽은 뒤 북양군벌정권과 맞서 광동군정부를 세웠다. 송경령은 주위의 비난이나 호기심과 싸워나가면서, 손문의 아내이자 동지로서 늘 그의 곁에 머물렀다. 1918년 즉 손문이 군정부 내부의 모순 때문에 광동을 떠나, 상해에서 혁명이론의 저작에 몰두하던 시기에는 자료수집이나 원고정리 뿐만 아니라 강력한 조언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1919년 5․4운동을 시작으로 거대한 삼파(三罷)투쟁(상인․노동자․학생의 스트라이크)의 물결이 상해까지 밀어닥치자 손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 노동자, 학생의 체포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광동군정부에게 보낸 손문의 전문(電文) 또한 송경령이 쓴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가서 완전히 미국생활에 익숙해진 송미령도 매사추세츠주 웰슬리(Wellesley)대학을 졸업한 뒤7), 1917년 귀국했다.
그녀는 상해의 YMCA의 지도적 회원이었으며, 또한 전국 영화겸열위원회에서 활약했다. 국제기독교는 일찍부터 노동문제에 주목하였고, 특히 러시아혁명 후 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는데 5․4운동을 겪은 중국에서도 아동․여성노동문제에의 관심이 높아졌다. 1923년에는 상해시 참사회의 의뢰로 유년노동위원회에 참가하여, 조사작업과 제언(提言)을 하였다. 그녀가 쓴「공업주의와 여성」이라는 논문에서는 금세기 초,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급속한 산업발전에 따라 중국의 노동조건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8)
1920년 12월, 다시 광동에서 군정부를 조직하는 손문을 도우며 송경령은 장병 위로와 적십자 활동을 위해 전선에도 다녔다. 1922년 진형명(陳炯明)의 반란때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송경령은 억지로 손문을 먼저 내보내고 손문은 손문대로 그녀를 위해 모든 경호원들을 남겨 놓은 채 혼자 탈출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실패는 손문으로 하여금 국공합작을 단행하게 했는데,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회담에는 줄곧 송경령도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1924년 1월 국공합작의 발족을 정식으로 성립시킨 중국국민당 제1회 대표대회에서는 특별히 손문의 지시를 받은 송경령이 왕정위의 부인인 진벽군(陳壁君), 요중개의 부인인 하향응(何香凝)과 함께 참가했다.9) 이 대회에서 손문의 삼민주의는 반제국주의․농공부조의 새로운 의의가 첨부되고, 여성해방의 면에서도 ‘법률적․교육적․경제적인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인하며, 여권의 발전을 돕는다’라는 명확한 주장이 보여졌다.
손문은 북경에 있는 단기서(段祺瑞)와 중국의 통일과 평화에 대해 회담하기 위해 그해 11월 송경령과 함께 광동을 떠났다. 도중에 일본에 들른 그녀는 고오베(神戶)현립고등여학교에서 가진「현대부인의 자각」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중․일의 평화유지를 위해 여성들은 자각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말하여, 많은 청중을 감동시켰다.10)
그러나 북경에 도착한 후 손문은 병이 들어 1925년 3월 12일 서거하였다. 송경령과 동지들에게, 중국의 자유․평등을 위한 국민혁명의 성취를 당부하며…….
사회주의 혁명세력과 민족․민주혁명세력과의 통일전선의 결성을 진행했던 레닌․손문 두 사람의 지도자를 잇따라 잃고 난 뒤, 역사는 송경령에게 이 사명을 이어갈 역할을 부여했다. 4월, 북경에서 장례를 치르고 상해로 돌아오자 향경여(向警予)․양지화(楊之華) 등 중국공산당의 여성들이 그녀를 찾아와서 위로해 주었는데, 뒤에 채화삼(蔡和森)은 “이 시기에는 송여사에게 사상적으로 절대적인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 송여사 사상이 좌경화하는 데 중대한 요점이 되었다”11)라고 말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암흑을 민중의 가난과 불행 속에서 보아온 송경령은 실제로 중국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자로 되어 갔다.
5․30운동의 고양을 계기로 국공양당의 대립과 국민당내의 분화가 두드러져 갔지만, 송경령은 “제국주의 타도야말로 손선생의 40년 동안의 목적의 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전당(全黨)․전국민에게 단결을 호소하였다. 이 때 송경령은 손문이 남기고 간 뜻의 계승자로서 처음으로 확실하게 정치적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했던 것이다.
이 국민혁명기에 송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 송경령과 가장 가까운 입장을 취했던 사람은 송자문으로 무한 정부의 말기를 빼고는 송경령을 줄곧 지지했다. 송애령은 변함없이 현모양처의 역할에 전념했으며, 그의 남편인 공상희도 잠시동안 광동 국민정부의 재정을 맡는 정도였다. 송미령의 활동도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크리스찬으로서 반제국주의 운동의 격화에 비판적이었을지도 모른다.
1926년 1월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 대회는 중국의 여성해방운동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갖는다. 제1회 대회에서는 손문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명의 여성대표가 참석했지만, 이번에는 송경령이 의장단에 가담하고 전회의 몇 배나 되는 여성대표가 참가했다. 이때의 ‘여성운동결의안’은 국공분열 후에도 계속 유효한 결의로 남아 국민당 치하에서의 운동의 지주가 되었다. 대회에서 송경령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11월 북벌군의 무한 공략과 더불어 송경령은 무한으로 향하고, 국민정부도 그 곳으로 이사했다. 송경령은 중국 국민당 여성당무훈련반의 주임으로서 1927년 2월 12일의 개교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여성은 평등을 요구하기에 앞서 동성(同性)에 대하여 평등해야 한다. 빈부귀천의 계급을 타파하고, 전국의 아니 전 세계의 여성과 단결하여 혁명적인 일대 동맹을 만들어야만 한다.”12)
이러한 말에서 송경령이 이 시기에 이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의 투사로 변신했다’는 평가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13) 그러나 송경령에게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손문의 혁명노선을 계승한 것이며, 국민당 좌파의 입장이라고 생각되었다.
1927년 장개석의 4․12쿠데타와 그 뒤의 백색테러는 그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7월에는 무한정부의 국민당도 공산당과 결렬되었는데 송경령은 이것에 대해 손문의 뜻을 등지고, 노농대중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는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든 송씨 집안의 사람들과도 정치적으로 결별한 채14)…… 8월 1일의 남창봉기 때는 혁명위원회 주석단의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한편 송미령은 이 해 12월 장개석과 결혼했다. 송애령․공상희는 물론 이 결혼을 축복했다. 다만 한 사람, 모스크바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송경령은 까무러칠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배반자, 백색테러의 장본인인 장개석과 동생이 결혼하다니! 님 웨일즈에 의하면 이 당시 무한 시절부터 친구인 레이나 프롬의 돌연한 객사나, 송경령이 자신과 함께 망명한 진우인(陳友仁)과 재혼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므로 송경령은 매우 괴로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 혁명을 둘러싸고 격화된 스탈린파와 트로츠키파의 대립에서 혁명의 이면을 엿보게 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송경령의 가장 송경령다운 활동, 즉 국제적 반제국주의․반전․반파시즘의 활동이 시작된다.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반제동맹에서 대회 명예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9년에는 베를린의 반파시즘 국제대회에 출석하고 그 후에도 유럽의 반제․평화운동에 참가했다. 이미 1927년 경부터 유럽에 있어서 반파시즘 운동은 앙리 바르뷔스, 로망 롤랑등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었으며, 송경령은 그 후 이 국제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중국혁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1929년에 손문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잠깐 귀국한 바 있었던 송경령은 1931년 어머니 예계진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다시 돌아왔다. 그녀를 맞이했던 것은 세계대공항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중국 침략에서 구하려는 일본의 만주침략이었으며, 국공대립의 격화에 의해 민중의 자발적인 항일운동은 있었지만, 민족적 저항이라고는 할 수 없는 중국 그리고 등연달(鄧演達)을 비롯한 정치범과 민중에 대한 불법적인 체포와 고문, 살육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체포된 범태평양 노동동맹(汎太平洋勞動同盟)의 누란부부 석방운동에 대한 해외로부터의 호소가 ‘위대한 손문 이상의 진실한 계승자’15)인 송경령에게 큰 기대와 함께 쇄도하였다.
1932년 1월 28일 반일 운동의 격화를 빙자한 일본의 상해공격은 한층 항일의 기운을 강하게 했다. 민족적 위기는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당분간 협력하게 만들어 송애령과 송경령도 부상병을 위한 병원건설에 힘을 합쳤다.
이러한 가운데 송경령은 1932년 말,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창립했다. 채원배(蔡元培), 호적(胡適)(뒤에 제명되지만) 등도 가담하여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한 시민으로서 민권옹호․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싸우는 조직으로서 송경령은 ‘국부’ 손문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이러한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이 운동은 구체적으로 정치범에게 있어서는 한 줄기의 광명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의 민족주의 통일전선의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된다.
중국민권보장동맹은 1933년 6월 중심인물인 양행불(楊杏佛)이 암살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송경령은 언제까지나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파리에서 성립된 반파시즘 세계위원회는 송경령을 부주석에 임명했다.
일본이 열하․화북으로 침략의 발걸음을 내딛는데 대항하여, 하향응 등과 함께 ‘중화인민의 대일작전기본강령’을 발표하여, 내전 정지․일치항일을 호소하는 등 그녀는 꾸준하고 강하게 항일통일 전선의 형성을 추진했다.
1935년 ‘화북분리반대!’, ‘동북탈환!’, ‘내전정지․일치항일!’을 부르짖는 북경 학생의 12․9운동으로부터 여성구국회 연합회 결성을 위시한 구국회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그 지도자 7인의 체포에 항의하여 송경령은 ‘구국입옥(入獄)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때의 송경령은 중국공산당과 해방구를 국제적인 반파시즘세력이나 국민당 치하의 항일민주세력과 연결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세계의 눈을 해방구에 집중시켰던『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 등을 연안에 보냈던 사실 등도 그 중 하나였다.
반파시즘 세계위원회의 로망 롤랑은 당시의 송경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6)
“우리의 탁월한 부주석 송경령은 단지 세계에서 향기로운 향기를 내는 아름다운 꽃일 따름인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둘러쳐진 철조망을 물어 뜯어 버리려고 하는 용맹스러운 사자이다.”17)
이제 송애령․송미령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상해사변에서 활약한 뒤 송애령은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다. 영국에서 뭇솔리니와 회견했던 그녀는 전례를 깨고 뭇솔리니 쪽에서 악수를 청해서 걸어 나오게 했던 여성으로서 그 의연한 태도는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었다.18) 이러던 중 강서소비에트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목적으로 했던 장개석은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해 우선 여기서부터 ‘신생활운동’을 발족시켜 전국으로 확산했다. ‘예․의․염․치(禮․義․廉․恥)’의 유교도덕의 복권과 청결을 두 개의 기둥으로 하는 이 운동을 송미령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추진했다.
이러한 여동생과 언니의 활동에 대한 송경령의 비판은 준엄하여 송애령이 파시즘의 수령 뭇솔리니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실을 몹시 분개했다. 또한 신생활운동에 대해서는「유교와 현대중국」(1937)이라는 글을 써서 아무것도 받아들일 것이 없는 운동이라고 비판하고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한층 위대한 운동을 주장하였다.
1936년 12월 장개석은 일치항일을 원하는 장학량․양호성 등의 군대에 의해 서안에서 납치되었다. 송미령은 국민당 내부의 ‘장학량일파 처벌, 서안진공(西安進攻)’의 주장을 진정시킨 뒤 송자문 등과 함께 평화적 해결을 찾아서 서안으로 달려갔다. 항일 통일전선형성의 진행은 이 서안사건을 계기로 크게 진전하였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설립은 세 자매를 제휴하게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송경령은 홍콩으로 가서 보위중국동맹을 창립하고 외국인이나 화교들에게 항일의 정황 특히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군과 항일근거지의 상황을 전하며 모금을 해서 의약품 및 기타의 물자를 보내곤 했다. 뒤에 그녀가 정열을 쏟았던 아동복리사업과의 관계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송미령은 여성운동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38년 5월 여산에서 여성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항전과 생산에 각계각층의 여성을 동원하는 동시에 노동여성의 문화 생활면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특히 여성을 속박하는 풍속습관을 배제한다고 하는 항일전쟁 시기의 여성운동 방침을 결정했다. 이 회의에는 중국공산당의 등영초(鄧潁超) 등도 참가했다. ‘신생활운동촉진총회 여성지도위원회’는 여성운동방침에 따라 다시 조직되어 훈련․문화사업․생활지도․생산사업․부상병위로․아동보육․농촌복무 등의 각 부분을 두었다. 그 아동보육활동은 삼만명에 가까운 고아를 양육하고 생산사업은 여성생산합작사․여성공장․여성공작단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띄고 진행되었다.19)
레위 알리, 님 웨일즈, 에드가 스노우 등이 발기했던 공업합작사운동에는 세 자매의 협력이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세 자매가 협력하여 행했던 일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국제적인 항일원조를 호소하여 반파시즘 국가들의 정부와 국민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 당시의 여성운동을 회고하면서 사량(史良)은 송미령은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연설을 잘하고 실천력이 있었기 때문에 항일운동에서 한 역할은 컸었다고 말한다.
물론 세 자매 사이의 모순은 이 시기에도 전부 해소될 수는 없었다. 역시 사량이 제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각 성의 주석부인을 대상으로 했던 훈련반의 모임이었다.
송미령이 “여러분들은 외국의 친구들을 접대하는 데 필요한 것, 예를 들면 나이프와 포오크를 들고 식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송경령이 “오늘날 중국여성과 중국 인민의 문제는 나이프와 포오크를 들고 식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먹을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자 송미령이 난처해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송애령이 구원을 나서서
“오늘날 여성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단결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0)
항일전쟁 말기 국공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송경령은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운동에의 지원을 강력하게 호소하여 국제적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항일전쟁 후 송가수의 세 딸들은 다시금 각각의 길을 찾아갔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서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는 모택동 옆에는 송경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 후 송경령이 국제평화를 위한 활동과 다음 대를 이어나갈 어린이들의 복지와 문화방면에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전국 여성연합회 명예주석으로서 여성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송경령의 그때그때마다의 발언에는 언제나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버리지 않고, 맞서려고 하는 자세가 보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송경령과 행동을 같이 했던 민주제당파(民主諸黨派) 사람들이 홍위병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그녀 자신의 사업도 타격을 입고 잡지『아동시대』가 정간되어 괴로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송경령은 손문탄생 백주년기념집회 강연을 통하여 손문의 불굴의 혁명정신을 예찬하고 그 혁명이론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21)
또한「중국의 여성해방」(『북경주보』1972년 2월 15일)이라는 논설은 아직까지 중국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봉건적 가부장사상의 일소를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임표(林彪)사건 직후의 문화대혁명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완수하였던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된다.
송경령은 1981년 5월 29일에 그 생애를 마쳤다. 중국공산당원으로서22) 또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주석으로서 그리고 본인의 간절한 희망에 따라 만국공묘에 잠들어 있는 부모의 무덤 아래에 오랜 세월 그녀를 돌봐준 이마(李媽:李燕娥)의 곁에 나란히 묻혔다. 송미령은 대만으로 건너가서 장개석을 받들어 여성․아동의 복지와 교육 등의 분야에서 지도적인 활동을 하다가 현재 미국에서 요양중이라고 한다. 송애령은 전후 일가를 거느리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973년 10월 10일 죽었다.23)
송경령이 그녀의 자매들과 길을 달리한 주체적인 분기점은 그녀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운동과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실현하는 운동사이에는 건널수 없을 정도의 깊은 강은 없다는 신념을 유지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박애사상이란 그 두가지를 잇는 것이 아니면 안되었던 것은 아닌가.
1) 송가수에게는 세 딸 외에 아들이 있었으며, 나이 순으로 보면 애령․경령․자문․미령․자량․자안의 순 이다.
2) 출생은 1893년 1월 27일.
3) 『The Wesleyan』1912년 4월호. 中文역문 『中國建設』1983년 제5기.
4) 仁木 후미꼬 옮김.『宋慶齡選集』일본, 동경 도메스 출판사, 1979.
5) 손문이 은사인 제임스 컨트리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國父全集』제5책(대북판, 1974) p.416
6) 에드가 스노우저, 송강양자(松岡洋子) 역, 『目ざめへの旅』, 筑摩書房, 1973년 p.89.
7) 송미령은 처음에는 언니 송경령과 같은 대학인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송경령의 귀국후 오빠 송자 문이 다니는 하버드 대학과 가까운 곳에 있는 웰슬리 대학으로 옮겼으며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8) 앤더슨 저, 고산양길(高山洋吉)역,『支那勞動視察記』, 生活社, 1939년 p.154.
9)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宋慶齡同志故居 편『紀念宋慶齡同志』(문물출판사, 1982)의 기술에 따른다.
10)『神戶又新日報』大正13년(1924) 11월 30일자.
11) 久保田博子,「中國革命における宋慶齡の位置」,『中國硏究月報』423호, 1983년 5월.
12)『송경령선집』, p.14.
13) 久保田博子, 위의 논문, p.30.
14) 송자문․공상희 등은 그후 국민당 정권의 재정․실업부문을 장악한 정치가로서 또한 대실업가로서, 소위 ‘관료자본가’의 길을 걸었다.
15) 클라라 제트퀸으로부터 불려졌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등 편『중국민권보장동맹』p.44.
16) 에드가 스노우의 앞의 책.
17) 전준서(錢俊瑞)「痛悼偉大的 國際主義戰士 宋慶齡同志」(『송경령기념집』, p.124, 인민출판사, 1982)).
18) 松本重治『上海時代․上』중앙공론사, 1981년 p.155.
19) 張玉法,『중국부녀사문집』(대만, 상무인서관, 1981)
20) 사량(史良)「我的生活道路․下」(『人物』1983년 6월 pp.78~9).
21)「孫中山一確固不動, 百折不撓의 革命家」(『송경령선집』, p.530).
22) 1981년 5월 15일 입당을 결심했다. 1950년대에 입당을 희망했지만 오히려 밖에서 협력해 줄 것을 요청받 았다.
23) 羅比․尤思森「宋代三妹姉」(『時代的報告』1983년 10,11,12월). 송미령은 1998년 뉴욕에서 100세를 맞았으며 2003년10월 100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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