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중국의 역사분쟁-서남공정 (티베트 독립운동)

marineset 2023. 5. 28. 02:01

중국의 역사분쟁-서남공정 (티베트 독립운동)

 
 
150년 전 영국에살았던밀은 '자유론(On Liberty)'이라는 책에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침묵을 강요하면,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비교해 볼 기회를 잃게 된다."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중국에대해이야기해놓은것을읽어보면참으로흥미있다. 중국은 티베트에 그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지속적으로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 이로인해 우리는 틀린의견과 옳은 의견을 비교해 볼 기회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국내 조선족의 합리적인 귀속을 위해 만든 고구려의 역사왜곡의 중심인 동북공정처럼 티베트의 역사를 이미 1986년 서남공정으로 티베트가 원래부터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여 티베트를 일개 지방정부로 격하시켰으며 또한 적극적인 한족 이민정책을 실시하여 빠르게 진행되는 한족 유입으로 인해 티베트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시키려 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소위 서남공정이라고 하는 티베트문제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본 기사를 통하여 티베트의 독립 유무가 어떠한지 보다는 중국과 티베트의 객관적인 역사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좀더 현실적으로 접근해보았으면 한다.

1. 달라이라마 그리고 티베트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자치구이다. 티베트는 17세기부터 티베트 불교의 최고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정치적인 지도자 역할까지 맡아왔다. 현재는 1940년 네 살 때 즉위한 달라이 라마 14세가 그 지위를 잇고 있다.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저항해 티베트를 탈출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의 다름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달라이 라마는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고 있다. 1989년 라마14세는 폭력에 기대지 않고 대화를 통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한 점이 높이평가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대화는 그다지 진전되지 않아 1998년에는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인이 단식 투쟁 후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국제적인 주목을 끌었다. 2000년에는 달라이 라마 판첸라마에 이어 세번째 지위를 가진 중국이 우대하고있는 티베트 불교 카규파의 카르마파 17세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달라이라마 14세와 함께 합류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에서 반중국시위대와 중국 경찰이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국제적으로 큰이슈가 되었으며, 2011년 3월 라마 14세는 티베트 망명정부 수반에서 은퇴할 것임을 선언했다.( “티베트인들의 운동은 직접 선거에 의해 정치지도자를 선출할 정도로 성숙돼 있다”며 은퇴 의사를 재확인했다. 달라이 라마는 이날 “우리의 망명 생활이 몇십 년 더 이어질 경우 내가 더 이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라며 새 지도자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달라이라마14세가 국제사회에서 티베트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중국은 티베트 문제를 국내문제로 취급하는등 대립이 계속되고있다.(출처: 달라이 라마, 티베트망명정부 수반은퇴 2011.3.10일자 경향신문 김기범기자)

 
2. 중국이 티베트에 집착하는 이유 

먼저 티베트는 한반도의 약 6배 크기에 천연자원도 금강석, 마그네슘, 철, 석탄, 크롬등 70종이 넘게 매장돼 있어 경제적 가치가 엄청나다. 게다가 티베트는 군사전략적 가치도 매우 높은데, 고원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티베트는 무기 배치와 개발에 이상적이다. 특히 아시아의 패권을 각축하는 인도와의 충돌을 막는 완충지대로서 정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여 중국 정부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티베트의 독립적인 움직임은 다른 소수민족을 자극할 게 자명하다. 티베트의 경제 군사적 가치가 높은데다가 위구르족 등 다른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요구가 분출 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중국정부에서는 티베트의 독립이나 자치요구를 결코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3.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

7세기 초 중앙 티베트를 중심으로 토번(吐蕃)이 발흥하였으며 그 후 티베트족은 중앙정부와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 1253년 원의 몽케칸은 군대를 파견, 티베트 전역을 장악하고 세조 쿠빌라이는 티베트 라마교의 고승 파스파를 중용하여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티베트에서는 정교합일적(政敎合一的) 지배체제가 확립되었고 명•청시대에는 중국의 종주권 밑에 라마교의 지배자가 정치적 지배권도 함께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7세기 달라이라마 5세가 종교와 정치양쪽의 지도자로서 현재 티베트의 기초를 다졌다. 티베트는 1720년 청나라의 침략 이후 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청나라가 티베트의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킨건 아니였다. 오히려 청나라의 황제가 티베트 불교를 믿으면서 티베트 불교가 크게 확대되었고, 티베트는 독자적인 문화를 구가할 수 있었다.

19세기말, 청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지도자였던 달라이라마 13세가 티베트의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때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고 그 교두보가 된 티베트에는 인도를 식민화한 영국의 군대가 주둔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다시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한다. 다음해 1913년 티베트 영국 중국대표가 모여 회담을 열었으나 독립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때 티베트와 영국은 심라협정을맺고 영국령 인도와 티베트의 국경선을 결정했다.

그 후 유럽에서 제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서구열강은 중국에서 철수했다. 한편 중국 국내에서는 중화민국 정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군벌이 군웅할거하는 상황이 된다.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서구열강과 중국 모두 자신들의문제에 열중해 티베트를 둘러싼 상황은 공동화되었다. 1949년 국민당과의 내전에 승리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함으로써 사태는 크게 변화했다.

1950년 중국은 티베트 동부에 군대를 보내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약체결을 강요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이 회담에서 티베트 대표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1951년 양국은 ‘티베트 평화해방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는 티베트의 자치권, 달라이라마의 지위보장, 신앙의자유 등이 명시되어 있었으나 사태는 조약의 내용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 (그림출처: http://blog.naver.com/kohyoungsoo/60049235257)





평화해방협정에는 티베트의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중국 정부에 의한 토지개혁과 종교탄압이 심해지기 만했다. 그럴수록 티베트에서는 중국에대한 반발이 강해졌다. 1959년 약 2만명의티베트인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중국은 곧 이를 진압했지만, 달라이라마 14세는 10만명 가까운티베트인과 함께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다음해인 1960년에 인도북부의 다름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티베트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이를계기로 1962년 중국-인도전쟁이 발발했다)반란을 진압한 중국은 달라이 라마에 이어 두번째 지위에있는 판첸 라마 10세를 앞세워 티베트를 지배했다. 그후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인해 티베트어의 사용제한과 한족의 티베트자치구로의 이주 등이 이루어졌다.







 
                                      ▲ (그림출처:中 “어떤 형태든 티베트 독립 불허” 2008.11.8일자 동아일보)







문화대혁명후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하자 외국인 여행자의 티베트 방문이 가능해졌다. 개혁개방 노선은 티베트 독립운동을 활성화 하는 결과를 가져와, 1980년대에 들어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등이 단속적으로 발생했다. 1988년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분리독립운동 노선을 폐기하면서 방위와 외교는 중국이 담당하고 티베트에게는 고도의 자치권을부여하는 자치연방구상을 발표했다. 자치연방구상은 같은중국내에 있으면서 고도의 자치권을 획득하고있는 홍콩의 1국가 2제도(一国两制)를 본뜬것으로, 분리독립을 폐기함으로서 중국 측에 대화를 촉구한것이다.

 
4. 티베트와 중국의 갈등(국내문제로 축소하고자 하는 중국,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서구)

티베트와 중국간의 새로운 대립의 불씨라고 할 수 있는 판첸 라마 인정사건은 1989년 1월 달라이 라마에 이어 두번째 위치에 있는 고승 판첸 라마 10세가 사망하자 달라이 라마 14세와 중국은 각각 다른 어린아이를 그 환생으로 인정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판첸라마 11세 인정 문제

티베트 불교에서는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등의 고승은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 고승의 사후 49일 이내에 수태된 아이들이 선택되어, 몇 차례 의식을 거쳐 고승이 환생한 소년이 결정된다. 달라이라마에 이은 제2의 고승이 판첸라마이다. 1989년 판첸 라마 10세가 사망하자 환생 조사가 시작되었다. 6년이 지난 1995년 달라이 라마 14세는 겐둔 최키 니마를 판첸라마 11세로 인정했다. 그러나 겐둔 최키 니마는 중국 당국에 구속되어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다. 한편 중국은 독자적으로 걀첸 노르부를 판첸 라마 11세로 인정하고 티베트내에 그의 초상화를 배포하는 등 그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이 환생을 찾아 인정하는 관계이다. 그래서 판첸 라마 11세의 인정 문제는 1950년대부터 티베트 독립운동의 선두에선 달라이 라마 14세의 환생, 즉 달라이 라마 15세의 인정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중국이 인정한 소년이 판첸 라마 11세가 되면 달라이 라마 15세의 인정에 중국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내용 출처:<한눈에 보는 세계분쟁지도>,마스다 다카유키


또 그해 3월에는 티베트 봉기 30주년을 맞아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1만명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들은 중국공안부대가 충돌해 이후 일년동안 티베트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같은해 10월,

달라이 라마 14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로 인해 티베트 문제는 ‘중국에 의한 소수민족 인권 탄압’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 문제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과 유럽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인권 탄압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티베트 문제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중요한 카드이기 때문에 해결을 서두르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다. 냉철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그리고 현재, 달라이라마14세가 올해 3월 은퇴를 선언함에 있어 그 후계자에 관한 문제도 또하나의 갈등으로 대두되고 있다. 먼저 달라이 라마 14세 측은 한족의 티베트 이주가 늘어나면서 티베트 내에서 티베트족이 소수민족화되고있다고 주장한다. 이는티베트족에 대한 느슨한 민족정화정책이라고도 할 수있다.








                                       ▲그림출처: http://blog.naver.com/kimseye3/130039414259


먼저 현재 티베트에서 주장하고있는 영토 부분도 큰 쟁점중 하나이다. 인도,네팔과 국경을 접하고있는 티베트 자치구는 다섯소수민족자치구중 하나다. 그면적은 약 120만제곱킬로미터로 중국전체의 8분의1을 차지한다. 그러나 달라이라마14세를 위시한 티베트인이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는 이 티베트 자치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지역을 大藏区(따장취란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뒤1950년 11월티베트 지역의 절반가량을 칭하이 간쑤 쓰촨 윈나성에 떼어주기전에 티베트인이 거주하던 고유의영토를 말한다. 주석달기)라고 하며, 달라이라마 14세에 따르면 티베트는 우창,캄,암도 세지역에 이르며, 현재 티베트 자치구로 지정된 지역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세지역의 면적을 모두 합하게 되면 중국전체의 4분의1에 달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티베트의 독립 또는 완전한 자치를 인정하게 되면 비슷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신장웨이얼자치구와 내몽골 자치구에까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힘들다. 특히 신장 웨이얼 자치구에서는 이슬람교도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편 티베트에게 앞서 말한 판렌 라마의 인정문제는 다음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5세의 인정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이 인정한 소년이 그대로 판첸라마 11세가 되면 달라이라마 15세의 인정과정이 중국의 의도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즉 티베트 독립운동이 지도자를 잃게 되는 것이다.

2013년 현재까지 티베트에서는 중국 정부의 종교활동과 독립시위탄압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 이외에 분신자살을 하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분신 자살은 중국 정부의 종교 활동에 대한 가혹한 결말에 항의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중국 정부 측은 분신자살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선동하고 있다 라고 주장하며 비난을 반복하고 있다.

 5. 정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니 적어도 중국에 있어서는 역사는 빼앗은 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흐른다. 적어도 중국에 있어서 역사는 그들 중심으로 흐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조차 역사라는 국경 없는 자유로운 학문을 국가와 민족이라는 자그만 울타리에 가두어 국가민족주의라는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선 안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나라의 국민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가 분쟁화 되어가고 있는 실태와 현실을 외면하여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찾기 위해서 티벳, 위구르 같은 주변나라의 분쟁사태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 끝나지 않은 중국의 역사분쟁-서남공정(티베트독립운동)|작성자 외교부


 

티베트 침공 - 1950년

티베트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한 험준한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여, 독자적인 문화권을 구축해왔다. 그러나 청나라때 일시 청국군의 주둔을 받아들여 보호국이 되었다. 또 19세기에는 영국의 세력하에 들어가 1904년에 영국군은 라사에 주둔했다.
신해혁명 후 티베트는 자립하여 제 2차 세계대전시엔 중립정책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전시 티베트는 중립정책을 표방했어도 영국군 및 미군 등 연합군과 중화민국으로의 병참선을 제공했다. 당시 티베트의 지도자는 제 14대 달라이 라마였는데, 1945년에 전쟁이 종결되자 인도와 중화민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티베트의 주권을 확립하려 시도했지만 중국 국민당 내부의 강경파가 저항하여 실패했고 곧이어 발발한 국공내전의 여파로 독립으로의 길은 미루어졌다.

마오쩌둥(毛沢東)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 승리하여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그 6주 후,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영역인 동부 국경부근에 집결했다. 이는 티베트 세력으로의 침공을 위한 전초였다. 1950년 1월 1일에 중국 국제방송(라디오 베이징)은 판첸라마 10세의 요청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했다.

삼동 린포체 및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것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방적인 약속이다>라고 주장했다. 1월 7일에 중국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동포해방을 개시한다>라고 선언하여 중국의 침공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의 움직임에 미국 정부는 영국의 대표단을 만나 국무성에서 회의를 열고 티베트에 대한 지원을 논의했지만 한국의 정세가 급박하고 자국의 권익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8월에 티베트에 인도를 경유한 극비원조만을 실시했다.
1950년 3월 7일에 티베트 정부대표단이 중국과의 대화에 나서, 영역보전과 안전보장을 위해 제 3국인 인도의 칼린퐁에서 만나, 티베트, 인도, 중국, 영국의 대표단이 개최장소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티베트는 싱가포르나 홍콩에서의 개최를 희망했고 영국은 인도, 인도와 중국은 베이징을 지지했다. 티베트 대표단은 최종적으로 1950년 9월 16일에 델리에서 중국측 대표단을 만났다.

중국측 대표인 위안쭝시안(袁仲賢)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다, 중국이 티베트의 국방, 외교, 무역을 담당한다>라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면 평화적인 해방이 될것이며 거부하면 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 및 여러 장로들이 모여 곧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이를 논의하던 중, 인민해방군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1950년 3월에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국경에서 훈련을 마치고 먼저 캄의 다르셋(현재의 캉딩시)으로 진주했다. 다르셋은 중국인이 많은 도시라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4월에 약 3만명의 인민해방군이 다르셋을 지나 캉제까지 이르는 자동차도로 건설과 지형정보 수집에 나섰다.

6월에 인민해방군은 캉제의 앞에 있는 뎅고의 티베트군 기지에 600명의 조사대를 보냈다. 티베트 민간인들이 살해당하긴 했지만 티베트는 군 자체가 없었기에 큰 저항없이 이를 점령했다. 티베트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티베트의 토착 부족장들이 800명의 무장한 수하세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600명의 인민해방군은 전원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에 있어서 병사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아, 점령에 있어 충분한 정보를 모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1950년 8월까지

캉제까지의 자동차 도로가 완성되자 상인들은 이를 환영했다. 인민해방군은 캉제를 점령하고 캉제에 거점을 설치했다. 당시 공산당
제 1서기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서남국(西南局) 산하의 인민해방군 제 18군이 가을부터 본격적인 침공에 착수했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인민해방군은 장궈화(張国華)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라싸의 동쪽 100km 위치까지 침공했다. 인민해방군의 병력은 약 4만명 남짓으로, 동쪽에서 세 갈래로 동시에 진군했다. 이에 대해 티베트는 의용군을 포함한 약 8천명의 병력이 저지에 나섰다. 덩커우(磴口)에선 무자 다본이 이끄는 티베트인 부대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브렌 303 경기관총으로 응전했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인 부대 50명을 전멸시키고 란삼의 티베트군 주둔지를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약 200km 남쪽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양쯔강을 도하하여 마캄 가투크 주둔지를 습격해 250명의 티베트인 부대를 전멸시켰다. 티베트 북쪽에서 무자 다본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도하저지에 나섰지만 란삼의 티베트인들이 후퇴하면서 고립되고 말았다.
10월 8일에 인민해방군의 파상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던 무자 다본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정도로 병력이 감소하자 야간에 부대를

해산했다. 결국 무자 다본도 휘하의 몇명만 데리고 라싸 방면으로 후퇴했다. 10월 16일에 차무도(현재의 창딩시)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응가포 응가완 지크메 지사를 발견한 무자 다본은 그에게 전력을 집중하여 라싸로의 교통로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응가포는 이에 반대하여 10월 17일에 인민해방군에 투항해버렸다. 10일간의 저항 끝에 티베트측은 패배하여 인민해방군은 10월 24일에 티베트군에게 완정승리하여 차무도를 점령했다.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파견된 병사들도 결국 후퇴해버려 티베트군은 약 6천명이 전사했다고 추정된다. 인민해방군의 피해는 114명이 전사했다.

차무도가 긴급히 무선을 라싸정부에 보냈지만 당시 지도부는 휴가기간이었고 다른 나라들도 이 사태를 몰랐다. 라싸정부는 어디까지나

중앙 티베트만을 지키며 사태가 중앙 티베트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인도의 매스컴이 티베트 대표단에게 중국의

침공에 대해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태도를 묵인하는듯한 행동을 취했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환영모습과 항복조인을 하는 모습의 사진을 언론에 내보내며 선전활동에 열을 올렸다. 1950년 10월 25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를 선언했다. 이것은 차무도 침공에서 17일이 경과한 후였다. 다음날인 26일에

인도정부는 이를 <침략행위>라고 비난성명을 내고 영국정부도 이를 지지했지만 양국은 실제 티베트에 대한 군사지원에 나서진 않았다.
11월 7일에 섭정이던 타크타 린포체 가완 순라푸는 은퇴하고 덴진 감쵸가 16세에 본인의 희망과 상관없이 국왕이 되어 친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라싸회의의 요청에 따라 인도 국경의 야톤으로 피난했다. 티베트의 라싸정부는 UN에 인민해방군의 침공을 제소했지만 UN은 UN군이 관련된 한국전쟁의 대응에 바빠 티베트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한편 티베트는 UN의 상임이사국인 중화민국이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국영토로 취급했기에 정식적인 독립국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제소문도 티베트 정부가 인도를 거쳐 발송했기에 제대로 확인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대해 사라예보와 엘 살바도르가 티베트를 옹호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또 중화민국 정부도 티베트를 <자국영토>로 취급했기에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적국인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티베트 침공을 변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또 UN총회 운영위원회도 <티베트와 중국, 인도에 평화를 위해서도 UN에서 토의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라고 하여 심의의 연기를 결정했다.

1950년 11월 9일에 중국 공산당은 중앙 티베트 공략작전의 준비에 들어가 티베트 정부와 협상을 계속했다. 인민해방군이 제압한 동티베트 지역은 12월 15일에 시캉성(西康省) 장족자치구(蔵族自治区), 칭하이성(青海省) 인민정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후
차무도에선 친중, 반중부족간의 약탈과 살육이 시작되어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인민해방군은 중앙티베트로의 군사침공 거점으로 1951년 1월 1일에 차무도를 창두(昌都)로 개칭하고, 인민해방위원회를 설립했다.

195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동투르키스탄(신장위구르), 칭하이(靑海), 창두의 세 방면에서 인민해방군을 라싸로 진격시켜 그 무력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 정권에 17개조 협정을 강요시켜 조인케했다.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 정부대표로서 아보 아왕 지그메 등에게 <인민해방군의 창두에서의 철수를 협상하는 권한>을 주어 베이징으로

파견했다. 창두 인민정부의 티베트인 괴뢰였던 아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제시한 17개조 협정에 서명하여 5월 23일에 승인하게 했다.
이 17개조 협약에서 티베트 정부는 지방정부로 규정하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사실상 귀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7개조 조약협정문을 건네고 있는 마오쩌둥(좌)과 아보 아왕 지그메(우)

1951년 5월 26일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영방송은 아보에 의한 협정서명을 방송했다. 이 합의로 인해 UN은 1959년에 티베트의 지위에 관한 법률회의를 무효로 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티베트 남부의 야톤에 피난했는데 가지고 있던 라디오에서 아보에 의한 티베트어 방송을 듣고 경악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체결의 뉴스를 듣고 아보의 행위에 충격을 받았지만 판첸 라마는 5월 30일에 달라이 라마에 대하여 중국정부의

지도하에 티베트 정부에 협력한다>고 표명했다. 한편 아보는 이후 티베트에서 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1951년 7월에

인민해방군 라싸주둔사령관인 장징우(張経武)장군이 야톤을 방문해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해 망명하여 협정의 무효를 외치라고 했지만 많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라싸 복귀를 원했기에

결국 라싸로 돌아가 협정에 기초한 개혁에 추진하게 되었다. 9월 6일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9개월만에 라싸로 돌아왔는데, 3일 후

3천명의 인민해방군이 라싸로 진주했다.
10월 24일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을 승인하며 인민해방군의 진주를 지지한다>라는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이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크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무력적인 제압은 현지 티베트인의 반감을 불러 와 1956년에 티베트 동란이라는 대규모 소요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출처 : 모리 가즈코 <주변국가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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