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이매창(李梅窓)1** 이매창(李梅窓)2
marineset
2023. 5. 28. 02:41
이매창[ 李梅窓 ] 1
요약조선 중기의 화가로 신사임당의 맏딸이다.
출생-사망
1529 ~ ?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매창(梅窓)은 호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로 유명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첫째딸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는 손윗누이가 된다.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조말생(趙末生)의 4대손인 조건(趙鍵)의 아들이자 강절교위(康節校尉)ㆍ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등을 지낸 조대남(趙大男)과 결혼해서 조영(趙嶸) 등을 낳았다.
이매창은 신사임당이 26세 때인 1529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를 닮아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 중기 명필로 유명한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에게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 풀벌레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는 이매창이 그린 〈매화도(梅花圖)〉가 전해진다. 지본수목화(紙本水墨畵)로 30 × 20.5㎝의 크기인 이매창의 〈매화도〉는 동생인 옥산(玉山) 이우(李瑀)가 그린 〈국화도(菊花圖)〉와 함께 화첩으로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으며, 이 화첩은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매창의 둘째아들인 조영도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그린 〈군산이우도(君山二友圖)〉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그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매창은 남편인 조대남과 함께 경기도 파주의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 매장되었다.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현재 이이와 신사임당을 비롯해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씨 부인의 합장묘, 이매창의 아들인 조영의 묘 등이 있다. 이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인 율곡선생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참조항목매창 매화도 및 옥산 국화도첩, 파주 이이 유적
[네이버 지식백과] 이매창 [李梅窓] (두산백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이매창과 이옥산은 신사임당의 자녀로, 둘 모두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예능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매창의 매화도는 가로 26.5㎝, 세로 30㎝의 종이에 그린 묵화로, 굵은 가지와 잔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은은한 달빛아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는 매화를 실제로 보는 듯 하며, 깔끔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옥산의 국화도는 가로 25㎝, 세로 35㎝ 크기의 종이에 그린 묵화로, 국화 한줄기가 화면에 솟아오른 단순한 구도이면서도 만발한 국화를 보는 듯 담백한 여운을 풍긴다.
매창과 옥산 남매의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후손인 이장희 가에 소장되어 오던 것을 1965년에 2개로 나누어 오죽헌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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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 李梅窓 ]2
증취객 / 이매창 贈醉客 李梅窓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를 잡으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명주저고리 손길을 따라 찢어졌네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다만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두려워라
〈감상〉
이 시는 취한 손님에게 준 것으로, 매창의 성품과 인생관이 드러난 시이다.
취한 손님이 명주로 된 저고리를 잡으니, 몸을 돌려 피하려다 명주저고리가 손님의 손에 찢어졌다. 비싼 명주저고리지만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손님께서 보내 주신 은혜의 정이 이 일 때문에 깨질 것이 두렵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매창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기녀(妓女)의 시와 위의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어 놓았다.
“옛날 재주 있고 시에 능한 기생으로 설도(당(唐)나라의 여류시인)·취교 같은 무리가 상당히 많았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비록 글을 배우지 않았으나, 기생들 중에 자질이 영특하고 빼어난 자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전혀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여자들의 시는 삼국시대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고려 오백 년 동안 용성의 창기인 우돌과 팽원의 창기인 동인홍만이 시를 지을 줄 안다.’고 하였는데, 이들 시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보한집』에는 실려 있다). 근자에 송도의 진낭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겨룰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 진랑의 「영반월」은 다음과 같다. ······ 계생의 호는 매창으로 「증취객(贈醉客)」 시가 있다. ······ 시어가 모두 공교하고 곱다. 아! 승려와 기녀는 사람들이 매우 천하게 여기어 함께 나란히 서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작품이 이와 같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재주를 볼 수가 있다
(古之才妓能詩者(고지재기능시자) 如薛濤翠翹之輩頗多(여설도취교지배파다) 我東方女子(아동방여자) 雖不學書(수불학서) 妓流中英資秀出之徒(기류중영자수출지도) 不無其人(불무기인) 而以詩傳於世者絶無(이이시전어세자절무) 何哉(하재) 按魚叔權稗官雜記(안어숙권패관잡기) 東方女子之詩(동방여자지시) 三國時則無聞焉(삼국시칙무문언) 高麗五百年(고려오백년) 只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지유룡성창우돌팽원창동인홍) 解賦詩云(해부시운) 而亦無傳焉(이역무전언) 頃世松都眞娘扶安桂生(경세송도진낭부안계생) 其詞藻與文士相頡頏(기사조여문사상힐항) 誠可奇也(성가기야) 眞娘詠半月詩(진낭영반월시) ······ 桂生號梅窓(계생호매창) 其詩云(기시운) ······ 語皆工麗(어개공려) 噫(희) 緇髡娼妓(치곤창기) 人之所甚賤(인지소심천) 羞與爲齒者也(수여위치자야) 而今其所作如此(이금기소작여차) 則可見我東人才之盛也(칙가견아동인재지성야)).”
〈주석〉
〖衫〗 윗도리 삼, 〖惜〗 아깝다 석
각주
1 이매창(李梅窓, 1573, 선조 6~1610, 광해군 2):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계생(癸生) 또는 계생(桂生)이라 했으며, 애칭으로 계랑(癸娘)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자를 천향(天香), 향금(香今)이라고도 하였으며, 초호(初號)를 섬초(蟾初)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자호(自號)를 매창(梅窓)이라 하여 널리 매창으로 불리고 있다. 매창은 16세기 말 부안 출신의 기류문학(妓流文學)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다.
이매창(李梅窓)
한스러워-이매창(李梅窓)
春冷補寒衣(춘랭보한의) : 차가운 봄날 겨울옷 깁는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 비단 창가에 햇볕 비치는 시간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 고개 숙여 손 따라 가는 곳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 구슬 눈물 바느질 실에 떨어진다
자상(自傷)-이매창(李梅窓)
서러워-이매창(李梅窓)
夢罷愁風雨(몽파수풍우) : 꿈 깨니 비바람 근심스러워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 세상길 어려움음을 조용히 읊어본다
慇懃樑上燕(은근량상연) : 들보 위의 은근한 제비는
何日喚人還(하일환인환) : 어느날에야 임 불러 돌아올게 할까
自傷3(자상3)-李梅窓(이매창)
속상해-李梅窓(이매창)
一片彩雲夢(일편채운몽) : 한 조각 꽃구름 이는 꿈
覺來萬念差(각래만념차) : 깨어나면 허망하여라
陽臺何處是(양대하처시) : 임과 만나는 따뜻한 누대는 그 어느 곳인가
日暮暗愁多(일모암수다) : 날은 저물어 어둑한데 수심만 짙어지네
春思(춘사)-李梅窓(이매창)
봄 심사-李梅窓(이매창)
東風三月時(동풍삼월시) : 봄바람 불어오는 삼월 어느 때
處處落花飛(처처락화비) : 곳곳에 흩날리는 떨어진 꽃잎
綠綺相思曲(녹기상사곡) : 거문고로 상사곡을 타보나
江南人未歸(강남인미귀) : 강남 간 내 님은 오지를 않네
등어수대(登御水臺)-이매창(李梅窓)
어수대에 올라서-이매창(李梅窓)
王在千年寺(왕재천년사) : 왕이 왔던 천년사
空餘御水臺(공여어수대) : 쓸쓸히 어수대만 남았구나
往事憑誰問(왕사빙수문) : 지난 일을 누구에게 물으랴
臨風喚鶴來(임풍환학래) : 바람결에 우는 학이 내려 앉는다
유부여백마강2(遊扶餘白馬江2)-이매창(李梅窓)
부여 백마강에서-이매창(李梅窓)
誰云洛下是多變(수운낙하시다변) : 누가 세상 변화 심하다 하나
我願人間事不聞(아원인간사불문) : 나는 인간사 듣는 것 원하지 않는다
莫向樽前辭一醉(막향준전사일취) : 술동이 앞, 한 잔 술 사양 말라
五陵公子草中墳(오릉공자초중분) : 오릉의 공자들도 풀속 무덤에 누웠노라
유부여백마강1(遊扶餘白馬江1)-이매창(李梅窓)
부여 백마강에서-이매창(李梅窓)
水村來訪小柴門(수촌래방소시문) : 강마을에서 사립대문 찾아드니
荷落寒塘菊老盆(하락한당국로분) : 연꽃 떨어진 쓸쓸한 연못, 국화꽃 시든 화분
鴉帶夕陽啼古木(아대석양제고목) : 석양빛에 갈가마귀 고목에서 울고
雁含秋氣渡江雲(안함추기도강운) : 가을 기운 머금은 기러기 강건너 구름에 든다
규원2(閨怨2)-이매창(李梅窓)
여인의 원망-이매창(李梅窓)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 말못하는 그리운 심정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 온 밤의 회포에 머리는 반백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 그리운 이 고통 아시려면
須試金環減舊圓(수시금환감구원) : 금반지 닮아짐을 보시구려
규원1(閨怨1)-이매창(李梅窓)
여인의 원망-이매창(李梅窓)
離恨悄悄掩中門(이한초초엄중문) : 혹독한 이별이 한스러워 안방 문 닫으니
羅袖無香滴淚痕(나수무향적누흔) : 비단 소매엔 임의 향기 없고 눈물 얼룩 뿐이로다
獨處深閨人寂寂(독처심규인적적) : 혼자 있는 깊은 방엔 다른 사람 아무도 없고
一庭微雨鎖黃昏(일정미우쇄황혼) : 마당 가득 내리는 보슬비는 황혼조차 가리운다
병중추사(病中秋思)-이매창(李梅窓)
가을에 병들어-이매창(李梅窓)
空閨養拙病餘身(공규양졸병여신) : 빈 방에 외로운 병던 이몸
長任飢寒四十年(장임기한사십년) : 외롭고 굶주린 인생 사십년이로다
借問人生能幾許(차문인생능기허) : 묻거니 인생살이 몇 년인가
胸懷無日不沾巾(흉회무일불첨건) : 수건 마를날 없는 마음 속 회포여
한거(閑居)-이매창(李梅窓)
한가히 살며-이매창(李梅窓)
石田茅屋掩柴扉(석전모옥엄시비) : 바위 사이 초가집 사립문 닫고 사니
花落花開辨四時(화락화개변사시) : 꽃 지고 꽃 핀들 계절을 알 수 있겠는가
峽裡無人晴盡永(협리무인청진영) : 골짝엔 사람 없고 맑은 날은 길기도 한데
雲山炯水遠帆歸(운산형수원범귀) : 구름 낀 산, 번쩍이는 물에 멀리 돛단배 돌아온다
자한3(自恨3)-이매창(李梅窓)
한스러워라-이매창(李梅窓)
悖子賣莊土(패자매장토) : 패륜아가 농토를 팔아
莊土漸次裂(장토점㧗렬) : 농토가 점차 줄어드는구나
不惜一莊土(불석일장토) : 한 배기 농토는 아깝지 않으나
只恐宗祀絶(지공종사절) : 조상의 제사 끊어질까 두렵도다
자한2(自恨2)-이매창(李梅窓)
한스러워라-이매창(李梅窓)
故人交金刀(고인교금도) : 옛사람 돈으로 사귀더니
金刀多敗裂(금도다패렬) : 돈으로 패망한 사람 많도다
不惜金刀盡(불석금도진) : 돈 다 쓰는 것 아깝지 않으나
且恐交情絶(차공교정절) : 사귀는 정이 끊어질까 걱정이라오
자한1(1自恨)-이매창(李梅窓)
한스럽구나-이매창(李梅窓)
夢罷愁風雨(몽파수풍우) : 꿈에서 깨니 비바람이 근심스러워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 고요히 행로난을 읊노라
慇懃梁上燕(은근양상연) : 무심하구나, 들보 위의 제비여
何日喚人還(하일환인환) : 어느날에야 임을 불러 돌아오게 하려나
추천(鞦韆)-이매창(李梅窓)
그네타기-이매창(李梅窓)
兩兩佳人學伴仙(양량가인학반선) : 두 사람씩 짝지은 미인이 신선을 배우려
綠楊陰裡競鞦韆(녹양음리경추천) : 푸른 버드나무 그늘에서 그네를 다투는구나
佩環違響浮雲外(패환위향부운외) : 노리게 소리 구름 밖 하늘까지 울리니
却訝乘龍上碧天(각아승룡상벽천) : 도리어 용을 타고 푸른 하늘 오르는 듯하여라
등천층암(登千層菴)-이매창(李梅窓)
천층암에 올라-이매창(李梅窓)
千層隱佇千年寺(천층은저천년사) : 천년을 우두커니 선 천년사
瑞氣祥雲石逕生(서기상운석경생) : 상서로운 기운과 구름 돌길에 서린다
淸磬響沈星月白(청경향침성월백) : 달빛과 별빛 환한데 맑은 경쇠소리 잦아드니
萬山楓葉閙秋聲(만산풍엽료추성) : 온 산에 가득한 단풍잎 가을 소리로 요란하다
야좌(夜坐)-이매창(李梅窓)
밤에 혼자 앉아-이매창(李梅窓)
西窓竹月影婆娑(서창죽월영파사) : 서창 대숲 달그림자 어른거리고
風動桃園舞落花(풍동도원무낙화) : 복숭아 밭에 바람 부니 낙화가 춤을 추네
猶倚小欄無夢寐(유의소난무몽매) : 여전히 작은 난간에 기대니 잠은 오지 않고
遙聞江渚菜菱歌(요문강저채릉가) : 강가의 마름 캐는 노래소리 아득히 들려오네
조춘(早春)-이매창(李梅窓)
초가을-이매창(李梅窓)
千山萬樹葉初飛(천산만수엽초비) : 온 산의 나무마다 단풍져 날리고
雁叫南天帶落暉(안규남천대낙휘) : 지는 햇빛 물든 남녘 하늘에 기러기 운다
長笛一聲何處是(장적일성하처시) : 어지선가 들려오는 긴 한 가닥 피리소리
楚鄕歸客淚沾衣(초향귀객루첨의) : 먼 고향가는 나그네는 눈물이 옷을 적신다
탄금(彈琴)-이매창(李梅窓)
李梅窓-이매창(李梅窓)
誰憐緣綺訴丹衷(수련연기소단충) : 우리의 사랑 진정에 소호함을 누가 알리오
萬恨千愁一曲中(만한천수일곡중) : 온갖 원한, 갖은 수심 한 곡조에 들어있네
重奏南江春欲暮(중주남강춘욕모) : 강남곡을 거듭 타니 봄날이 저물어 가니
不堪回首泣東風(불감회수읍동풍) : 봄바람 돌아보니 눈물 흘러내림 견딜 수 없네
범주(泛舟)-이매창(李梅窓)
뱃놀이-이매창(李梅窓)
參差山影倒江波(참차산영도강파) : 산 그림자 어른어른 물결에 어리고
垂柳千絲掩酒家(수류천사엄주가) : 늘어선 버들가지 주막을 덮었구나
輕浪風生眠鷺起(경랑풍생면로기) : 바람이는 가벼운 물결에 잠자던 백로 깨우고
漁舟人語隔煙霞(어주인어격연하) : 강 안개 속에서 어부들 이야기 소리 들린다
고인(故人)-이매창(李梅窓)
옛 사랑-이매창(李梅窓)
松柏芳盟日(송백방맹일) : 송백같이 맺은 사랑의 약속
思情與海深(사정여해심) :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는데
江南靑鳥斷(강남청조단) : 강남 땅의 반가운 소식 끊어지고
中夜獨傷心(중야독상심) : 이 한밤 홀로 마음만 아프구나
병중2(病中2)-이매창(李梅窓)
병이 나서-이매창(李梅窓)
誤被浮虛說(오피부허설) : 헛소문 자못 입어
還爲衆口暄(환위중구훤) : 도리어 여러 사람 입방아 거리
空將愁與恨(공장수여한) : 고연히 시름과 원한을 가져
抱病掩柴門(포병엄시문) : 가슴에 벼을 안고 사립문 닫아놓았다
병중1(病中1)-이매창(李梅窓)
병이 나서-이매창(李梅窓)
不是傷春病(불시상춘병) : 봄이라 마음 아픈 병이 아니라
只因憶玉郞(지인억옥랑) : 단지 임 생각에 난 병이라네
塵寰多苦累(진환다고루) : 인간세상 고통과 괴로움도 많아
孤鶴未歸情(고학미귀정) : 돌아가 오지 않은 마음 때운이네
강대즉사(江臺卽事)-이매창(李梅窓)
강가 누대에서 본대로-이매창(李梅窓)
四野秋光好(사야추광호) : 사방 들판에 가을빛 좋아
獨登江上台(독등강상태) : 혼자 강 위 누대에 올라보네
風流何處客(풍류하처객) : 어디선 온 풍류객인가
携酒訪余來(휴주방여래) : 술 가지고 날 찾아온다네
자상4(自傷4)-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夢罷悲風雨(몽파비풍우) : 꿈 깨니 비바람에 서글퍼지고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 행로난을 침울하게 읊어본다네
慇懃梁上燕(은근양상연) : 은근한 대들보 위의 제비여
何日喚人歸(하일환인귀) : 어느날에야 임을 불러 오게하느냐
자상3(自傷3)-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一片彩雲夢(일편채운몽) : 꿈속의 한 조각 채색 구름
覺來萬念差(각래만념차) : 꿈에서 깨니 온갖 생각 엇갈린다
陽臺何處是(양대하처시) : 양대는 어느곳에 있는가
日暮暗愁多(일모암수다) : 해 지는 저녁 어둠에 수심이 짙어진다
자상2(自傷2)-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洛下風流客(낙하풍류객) : 서울 풍류객 있어
淸談交契長(청담교계장) : 정담을 나누며 약속했는데
今日飜成別(금일번성별) : 오늘 번복하고 이별하니
離盃暗斷腸(이배암단장) : 이별 술잔에 암담히 마음이 아프네
자상1(自傷1)-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京洛三年夢(경락삼년몽) : 서울 꿈 삼년
湖南又一春(호남우일춘) : 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
黃金移古意(황금이고의) : 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
中夜獨傷神(중야독상신) : 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
춘사(春思)-이매창(李梅窓)
봄의 심사-이매창(李梅窓)
東風三月時(동풍삼월시) : 봄바람 부는 삼월
處處落花飛(처처낙화비) : 여기저기 낙화가 날린다
綠綺相思曲(녹기상사곡) : 비단옷 입고 상사곡 불러도
江南人未歸(강남인미귀) : 강남 가신 그이는 오지도 않는다
심진3(尋眞3)-이매창(李梅窓)
진경을 찾아-이매창(李梅窓)
遠山浮翠色(원산부취색) : 먼 산에 푸른 빛 감돌고
柳岸暗煙霞(유안암연하) : 버드나무 언덕은 물안개 자욱하다
何處靑旗在(하처청기재) : 어디 곳에 주막이 있을까
漁舟近杏花(어주근행화) : 고기잡이 배 살구꽃 가까이에 있다
심진2(尋眞2)-이매창(李梅窓)
진경을 찾아-이매창(李梅窓)
巖下繫蘭舟(암하계난주) : 바위 아래 고운 배 매어놓고
耽看碧玉流(탐간벽옥류) : 벽옥같은 맑은 물 정신없이 바라본다
千年名勝地(천년명승지) : 천년 명승지에
沙鳥等閒遊(사조등한유) : 물새가 한가하게 놀고 있구나
심진1(尋眞1)-이매창(李梅窓)
진경을 찾아-이매창(李梅窓)
可憐東海水(가련동해수) : 가련하다, 동해로 흐르는 물이여
何時西北流(하시서북류) : 어느 때라야 서북쪽으로 흐르는가
停舟歌一曲(정주가일곡) : 배를 머추고 한 곡조 노래하니
把酒憶舊遊(파주억구유) : 술잔 들고 옛 놀던 때를 생각하노라
자한(自恨)-이매창(李梅窓)
스스로 한탄하네-이매창(李梅窓)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 봄이 추워 겨울옷 꿰매노니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 깁 창가에 해빛 비칠 때로다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 머리 숙여 바느질 손길 닿는 곳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 구슬같은 눈물 바늘과 실을 적신다
증별(贈別)-이매창(李梅窓)
이별하며 드립니다-이매창(李梅窓)
我有古秦箏(아유고진쟁) : 나에게 진나라 거문고 있어
一彈百感生(일탄백감생) : 한번 타면 온갖 느낌 일어난다
世無知此曲(세무지차곡) : 세상에는 이 곡조 아는 사람 없어
遙和緱山箏(요화구산쟁) : 멀리 구산쟁에만 화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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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응길, 劉希慶
목차
예학자 남언경의 제자가 되다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추었으니 인정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받다
천민에서 양반으로, 영광의 날들
여류시인 이매창과의 사랑 혹은 풍류
신분 차별이 엄연했던 조선 시대에 자신의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천역을 벗어던진 인물이 종종 나타났다. 선조 때의 인물 유희경도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행운아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여류시인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출세와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
마음 속 그리운 정 말로는 다할 길 없어
밤새 생각타보니 머리카락 반이나 세었구나.
신첩의 괴로워하는 이 심정 아시려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이 손가락을 보옵소서.
-규원(閨怨)
위 시는 이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신석정 시인이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扶安三絶)’로 꼽았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비련은 오늘날까지도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유희경
예학자 남언경의 제자가 되다
유희경(劉希慶)의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이다. 1545년(인종 1년) 2월 27일 한양 대묘동에서 태어났다. 한자로 씌어진 할아버지의 이름은 유도치(柳道致),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천민임에 분명하다.
어린 시절 효심이 남달랐던 유희경은 30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배씨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 냈고, 기저귀를 빨아 바위에 펼쳐 말리며 글을 읽었다. 형제간에 우애도 남달라서 동생 유희운이 염병에 걸리자 수일동안 곁에서 간호했다. 이웃사람들이 전염될까 두려워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형제는 한 몸인데 동생을 외면하면 자신의 몸을 버리는 것’이라며 거부했고, 마침내 동생의 목숨을 구했다.
13세 때인 1557년(명종 1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수락산 자락에 부친의 시신을 묻으려 했는데, 근처에 있던 고관의 무덤을 지키던 묘지기가 쫓아내자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묘를 쓸 수 있었다.
유희경은 장사를 마친 뒤 매일 무덤 앞에 단정히 앉아 곡을 하고 흙을 져다가 무덤에 오가는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만 집에 돌아가 상청에 제사를 지내며 어머니의 용태를 살폈다.
그 소문을 듣고 당대의 대학자인 남언경이 찾아가 두꺼운 옷 한 벌을 주었다. 또 근처에 있는 망월암의 승려를 불러 묘지 곁에 초막을 지어주게 하고 매일 그에게 죽을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그 인연으로 1559년(명종 14년) 삼년상을 마친 유희경은 남언경의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웠다.
남언경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서 예학에 조예가 깊었고, 조선에서 최초로 양명학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유희경은 곧 《삼례》를 종합하고 《두씨통전》과 《구씨의절》에 통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제관계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1573년(선조 6년) 유희경은 당시 양주목사로 부임한 남언경을 도와 조광조를 모시는 도봉서원 건립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추었으니 인정한다
유교의 통과의례인 가례에는 관례·혼례·상례·제례가 있다. 그 중에 상례는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동시에 유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는 절차로서 인정을 중시하는 유학의 규범 가운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당시 왕실에서는 《국조오례의》의 규범을 따르고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은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의례를 행했다. 한데 관례와 혼례, 제례는 전통에 따라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상례는 조선의 실정과 맞지 않는 점이 많아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다.
집례자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어서 장례식 한 번 치르면 구설수가 난무했고, 때론 정치적인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충효를 실천하는 상례를 제대로 치르기에는 교과서가 너무 난해했던 것이다. 조정에서도 이 문제를 직시하고 여러 차례 주석과 언해 작업을 시도했지만 아무래도 전문가가 없어서 매조지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례전문가 유희경이 혜성처럼 등장했던 것이다.
유희경은 《주자가례》를 조선에 적용하면서 의례의 근본적인 의미에 주목했다. 엄격한 절차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망자의 명분을 높이면서 동시에 가족들의 애정과 공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가례에 대한 유희경의 새로운 해석과 집행 절차가 알려지자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초상이 나면 그를 집례 책임자로 초빙했다. 그러다 보니 ‘양예수가 후문으로 빠져나오면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간다.’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어의인 양예수는 허준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의관이었으니 당대 유희경의 입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부모의 상을 모신 사람은 신분이 낮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유교의 법도였다. 때문에 유희경은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았지만 거만하지 않고 늘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자신을 칭송하는 《유희경전》의 저자 유몽인에게까지 시를 지어 바치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유희경의 행동거지는 양반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성미 급하기로 소문난 의주부윤 박엽이 언젠가 자신의 눈에 난 관리 한 명을 죽이려다 그가 유희경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풀어주기도 했다.
유희경은 천출에서 벗어난 뒤에도 다섯 차례나 승진함으로써 양반의 지위를 굳혔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홍가신, 서인원, 허상, 안민학 등에게 《주자가례》를 가르쳤고 유성룡의 제자로 예론에 밝았던 정경세를 지도했다. 《상례초》란 저서를 남겼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받다
유희경의 예학에 대한 경지는 당대 제일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좀 수준 높은 장의사였을 뿐이었다. 늘 죽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을 누가 사귀려 하겠는가. 한데 양반들은 너도 나도 그와 교유하려 했다. 그의 시문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에게 당시(唐詩)를 배운 그는 뛰어난 시문으로 성가를 높였다. 젊은 날 그는 선비 임훈을 따라 광주에 갔을 때 임억령의 별장에서 한시를 지어 극찬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유희경이 임훈 집안의 노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동시대의 노비시인 백대붕과 함께 위항시인으로 쌍벽을 이루면서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고 박계강·정치·최기남 등 중인들과도 시회를 즐겼다.
백대붕은 군선을 만드는 전함사의 서리 출신으로 매우 호협한 인물이었는데, 사신 허성을 따라 일본에도 다녀오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순변사 이일의 부대에 차출되었다가 전사한 비운의 시인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유희경은 낙산 아래쪽으로 흐르는 시냇가에 침류대를 만든 뒤 차천로·이수광·신흠·김현성·홍경신·임숙영·조우인·성여학 등 대시인들과 시회를 열었다. 그때의 부산물로 완성된 시집이 《침류대시첩》이다.
당시 침류대 시사를 찾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화담 서경덕 계열의 명사들이었다. 본래 화담 계열의 학풍은 정통유학 외에도 상수학이나 노장사상, 양명학, 불교 등에 관심을 보인다. 그의 스승 남언경이 화담의 제자였으므로 유희경은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유희경은 평생 권력에 기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80세를 넘겼을 때 인연을 맺은 택당 이식은 그가 인격이 돈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 시인들이 흔히 보이는 옹고집이 하나도 없으므로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명성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칭찬했다.
그 과정에서 유희경은 여류시인 매창과의 절절한 사랑을 외면해야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탓일까. 훗날 매창과 교유했던 허균은 자신의 문집 《성수시화》에서 그를 이렇게 상찬하고 있다.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천민에서 양반으로, 영광의 날들
유희경이 13세 때 스승 남언경을 만난 것이 첫 번째 행운이라면 47세 때 일어난 임진왜란은 두 번째 행운이었다. 당시 궁궐에서 제복장(祭服匠)으로 복무하고 있던 유희경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의병을 모아 왜군에 맞섰다. 그 공으로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1594년(선조 27년) 정월 선조의 교지를 받아 오랜 천역에서 벗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유희경의 참전 기록은 미미하다. 안민학의 《풍애선생집》에는 1593년(선조 26년) 자신이 소모사(召募使)로 광주에 도착했을 때 유희경을 보내 의병장 고경명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란 중에도 그는 상례전문가였던 것이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는 위장소서원(衛將所書員)의 직분으로 왕비를 호위했다.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이 보위를 잇자 명나라 황실에서 탐탁찮게 여기고 왕위 책봉 절차를 미루었다. 이를 구실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들이 사복을 채웠다. 1602년(선조 32년) 때 명의 태자 책봉을 알리려 왔던 한림학사 고천준은 수만 냥의 은을 갈취해 갔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내조한 엄일괴 역시 이미 등극한 광해군을 외면하고 임해군을 면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수만 냥의 은을 챙겨 돌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국고가 바닥을 드러낸 1609년(광해군 1년) 또 다시 명나라 사신이 들어온다는 전갈이 당도했다. 한데 더 이상 그들에게 챙겨줄 재물이 없었다. 사석에서 호조의 담당자들의 고충을 알게 된 유희경은 자신의 전력에 빗대어 이렇게 조언했다.
“농사는 마땅히 사내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것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일은 돈에 관련된 것이니 백인호, 김서, 신천룡에게 물으십시오.”
그가 언급한 세 사람은 장안의 갑부들이었다. 중신들이 그들을 불러 대책을 묻자 5부 부녀자들의 반지를 거두자는 계책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가까스로 사신에게 줄 뇌물을 마련한 중신들은 임금에게 주청하여 유희경과 세 부호들에게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그로 인해 유희경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1615년(광해군 7년) 《유희경전》을 지어 그를 극구 칭송했다.
1617년(광해군 9년)에 조정에서는 대북파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희경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이첨의 집에 발을 끊었다. 어느 날 한길에서 우연히 유희경을 발견한 이이첨이 요즘 왜 얼굴을 비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인은 요즘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공을 찾아갈 겨를이 없습니다.”
이 말은 그가 앞장서 추진하는 폐모론을 은근히 비판한 것이었다. 그 일로 앙심을 품은 이이첨은 그해 겨울 불거진 허균의 역모사건을 수사하면서 유희경을 잡아들였지만 별다른 빌미를 찾지 못하고 풀어주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권좌에 오른 인조는 1623년(인조 1년) 유희경의 절의를 칭송하여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주었다. 그 무렵 정명공주의 남편인 영안위 홍주원이 그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인목대비가 술과 안주를 내렸다. 1636년(인조 14년)에는 나이 80세에 노인계(老人階), 즉 나이 많은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전례에 따라 종2품 가의대부가 되었다. 그해 2월 6일 세상을 떠나 도봉서원 동쪽 양주 장의동에 묻혔다.
그는 조강지처인 허씨 사이에 역관이 된 큰 아들 순민을 비롯하여 우민, 성민, 사민, 일민 등 다섯 아들을 얻었고 중인 화가 이등에게 출가한 딸이 하나 있었다. 1646년(인조 24년) 막내아들 유일민이 심기원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영국원종공신이 되자 그에게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를 가자하고 한성부 판윤이 증직되었다.
여류시인 이매창과의 사랑 혹은 풍류
유희경과 이매창의 만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시인 유희경과 백대붕의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고, 부안 기생 이매창의 이름도 한양의 풍류가에 회자되고 있었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매창의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桂生) 또는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1591년(선조 24년) 초봄, 48세의 유희경은 서울을 떠나 명기 계생이 있다는 부안으로 향했다. 그것이 애틋한 로맨스의 서막이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빠져들었다. 28년의 나이차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날 유희경은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시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구나.
-증계랑(贈癸娘)
이 시에서 유희경은 매창을 무산 신녀에 비유했다. 무산 신녀란 초나라 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속에 나타나 교합했다는 절세 미녀이다. 신녀는 시집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유희경은 매창이 그 신녀처럼 신선이 사는 삼청, 즉 옥청·상청·태청에 내려온 것 같다며 상찬했다.
첫날부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혼탁한 세상사를 잊었다. 그들에게 세속의 체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희경은 당시 천민이자 상례전문가로서 궁중이나 양반가에 초상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가야 하는 몸이었다.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던 두 사람은 훗날 다시 만나 열흘 동안 시를 지으며 회포를 풀기로 약속했다.
얼마 후 그가 서울로 돌아가자 매창은 이제나 저제나 그가 돌아올까 애를 태웠다. 하지만 유희경은 몇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임이 가을이 짙어만 가는데 소식 한 장 없으니 매창에게서 이런 시조가 나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내 생각 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유희경의 마음도 매창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왜군이 전 국토를 초토화시킨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고래 등 같은 궁궐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고 만인지상의 임금이 의주로 몽진하는 험난한 시국 속에서 사랑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당시 유희경은 임금을 모시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다. 그에게 있어 전쟁은 천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임금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매창의 곁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임금의 은혜로 평생의 한이었던 천역을 벗어던진 그에게는 명철보신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보수적인 양반 사대부들의 비틀린 시선을 의식하고 몸을 잔뜩 사려야 했던 것이다.
화살 같은 세월 속에서 매창이 유희경만 학수고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엄연히 관장이 원하면 몸을 내주어야 하는 기생이었다. 그리하여 김제 군수로 내려왔던 이귀와 인연을 맺었고, 1601년 해운판관으로 부안에 들렀던 허균과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허균의 《조관기행》에는 매창과 조우했던 날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01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렸기 때문이었다.’
유희경의 눈에 매창은 선녀였지만 허균의 눈에는 시들어가는 재주 많은 퇴기일 뿐이었다. 허균은 남녀의 정욕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부르짖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매창을 여자로 보지 않고 친구로 보았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시문을 함께 지으면서 삶에 대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것이다. 허균은 그리움에 메말라버린 그녀의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불교의 참선을 가르쳐 주었다. 고독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한 것이었다.
몇 달 뒤 서울에 돌아온 허균은 형조정랑, 수안군수 등을 거쳐 정3품 공주목사에 이른다. 그 사이에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수한 탄핵과 파직을 경험했지만 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된 그는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머물며 유유자적을 즐겼다. 이때 허균과 재회한 매창은 스스럼없이 이전의 우정을 나누며 기꺼워했다.
그 뒤에도 허균은 매창에게 편지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젊은 날 심혼을 바쳤던 유희경에게 머물러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남자는 무슨 까닭인지 소식 한 자 없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15년만인 1607년, 유희경과 매창은 다시 만났다. 남자는 환갑이 넘은 63세의 양반이었고, 여자는 35세의 퇴기였다. 두 사람은 눈물 흘리며 두 손을 부여 쥐었지만 유희경으로서는 예전처럼 연인과 자유로운 로맨스를 즐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행여 고약한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은 물론 자손들에게까지 흠결이 미칠 것이다. 그런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절망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610년 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정인은 그녀의 꺼져가는 불길을 되살려주지 못했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 봉덕리에 손때 묻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녀의 부음을 들은 유희경은 허전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도옥진(悼玉眞)
그에게 있어 매창은 선녀였고 양귀비였다. 유부남으로써 영혼을 바쳐 사랑했건만 그것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륜이었다. 불륜은 비극을 잉태하는 법, 하지만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미화할 수 있는 구실이 된다. 매창이 죽은 뒤에도 유희경의 생애는 2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승승장구하는 노년을 보내면서 그는 재가 되어버린 그 시절을 돌이켜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한때의 풍류였다.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를 잡으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명주저고리 손길을 따라 찢어졌네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다만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두려워라
〈감상〉
이 시는 취한 손님에게 준 것으로, 매창의 성품과 인생관이 드러난 시이다.
취한 손님이 명주로 된 저고리를 잡으니, 몸을 돌려 피하려다 명주저고리가 손님의 손에 찢어졌다. 비싼 명주저고리지만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손님께서 보내 주신 은혜의 정이 이 일 때문에 깨질 것이 두렵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매창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기녀(妓女)의 시와 위의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어 놓았다.
“옛날 재주 있고 시에 능한 기생으로 설도(당(唐)나라의 여류시인)·취교 같은 무리가 상당히 많았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비록 글을 배우지 않았으나, 기생들 중에 자질이 영특하고 빼어난 자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전혀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여자들의 시는 삼국시대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고려 오백 년 동안 용성의 창기인 우돌과 팽원의 창기인 동인홍만이 시를 지을 줄 안다.’고 하였는데, 이들 시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보한집』에는 실려 있다). 근자에 송도의 진낭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겨룰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 진랑의 「영반월」은 다음과 같다. ······ 계생의 호는 매창으로 「증취객(贈醉客)」 시가 있다. ······ 시어가 모두 공교하고 곱다. 아! 승려와 기녀는 사람들이 매우 천하게 여기어 함께 나란히 서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작품이 이와 같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재주를 볼 수가 있다
(古之才妓能詩者(고지재기능시자) 如薛濤翠翹之輩頗多(여설도취교지배파다) 我東方女子(아동방여자) 雖不學書(수불학서) 妓流中英資秀出之徒(기류중영자수출지도) 不無其人(불무기인) 而以詩傳於世者絶無(이이시전어세자절무) 何哉(하재) 按魚叔權稗官雜記(안어숙권패관잡기) 東方女子之詩(동방여자지시) 三國時則無聞焉(삼국시칙무문언) 高麗五百年(고려오백년) 只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지유룡성창우돌팽원창동인홍) 解賦詩云(해부시운) 而亦無傳焉(이역무전언) 頃世松都眞娘扶安桂生(경세송도진낭부안계생) 其詞藻與文士相頡頏(기사조여문사상힐항) 誠可奇也(성가기야) 眞娘詠半月詩(진낭영반월시) ······ 桂生號梅窓(계생호매창) 其詩云(기시운) ······ 語皆工麗(어개공려) 噫(희) 緇髡娼妓(치곤창기) 人之所甚賤(인지소심천) 羞與爲齒者也(수여위치자야) 而今其所作如此(이금기소작여차) 則可見我東人才之盛也(칙가견아동인재지성야)).”
〈주석〉
〖衫〗 윗도리 삼, 〖惜〗 아깝다 석
각주
1 이매창(李梅窓, 1573, 선조 6~1610, 광해군 2):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계생(癸生) 또는 계생(桂生)이라 했으며, 애칭으로 계랑(癸娘)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자를 천향(天香), 향금(香今)이라고도 하였으며, 초호(初號)를 섬초(蟾初)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자호(自號)를 매창(梅窓)이라 하여 널리 매창으로 불리고 있다. 매창은 16세기 말 부안 출신의 기류문학(妓流文學)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다.
이매창(李梅窓)
한스러워-이매창(李梅窓)
春冷補寒衣(춘랭보한의) : 차가운 봄날 겨울옷 깁는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 비단 창가에 햇볕 비치는 시간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 고개 숙여 손 따라 가는 곳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 구슬 눈물 바느질 실에 떨어진다
자상(自傷)-이매창(李梅窓)
서러워-이매창(李梅窓)
夢罷愁風雨(몽파수풍우) : 꿈 깨니 비바람 근심스러워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 세상길 어려움음을 조용히 읊어본다
慇懃樑上燕(은근량상연) : 들보 위의 은근한 제비는
何日喚人還(하일환인환) : 어느날에야 임 불러 돌아올게 할까
自傷3(자상3)-李梅窓(이매창)
속상해-李梅窓(이매창)
一片彩雲夢(일편채운몽) : 한 조각 꽃구름 이는 꿈
覺來萬念差(각래만념차) : 깨어나면 허망하여라
陽臺何處是(양대하처시) : 임과 만나는 따뜻한 누대는 그 어느 곳인가
日暮暗愁多(일모암수다) : 날은 저물어 어둑한데 수심만 짙어지네
春思(춘사)-李梅窓(이매창)
봄 심사-李梅窓(이매창)
東風三月時(동풍삼월시) : 봄바람 불어오는 삼월 어느 때
處處落花飛(처처락화비) : 곳곳에 흩날리는 떨어진 꽃잎
綠綺相思曲(녹기상사곡) : 거문고로 상사곡을 타보나
江南人未歸(강남인미귀) : 강남 간 내 님은 오지를 않네
등어수대(登御水臺)-이매창(李梅窓)
어수대에 올라서-이매창(李梅窓)
王在千年寺(왕재천년사) : 왕이 왔던 천년사
空餘御水臺(공여어수대) : 쓸쓸히 어수대만 남았구나
往事憑誰問(왕사빙수문) : 지난 일을 누구에게 물으랴
臨風喚鶴來(임풍환학래) : 바람결에 우는 학이 내려 앉는다
유부여백마강2(遊扶餘白馬江2)-이매창(李梅窓)
부여 백마강에서-이매창(李梅窓)
誰云洛下是多變(수운낙하시다변) : 누가 세상 변화 심하다 하나
我願人間事不聞(아원인간사불문) : 나는 인간사 듣는 것 원하지 않는다
莫向樽前辭一醉(막향준전사일취) : 술동이 앞, 한 잔 술 사양 말라
五陵公子草中墳(오릉공자초중분) : 오릉의 공자들도 풀속 무덤에 누웠노라
유부여백마강1(遊扶餘白馬江1)-이매창(李梅窓)
부여 백마강에서-이매창(李梅窓)
水村來訪小柴門(수촌래방소시문) : 강마을에서 사립대문 찾아드니
荷落寒塘菊老盆(하락한당국로분) : 연꽃 떨어진 쓸쓸한 연못, 국화꽃 시든 화분
鴉帶夕陽啼古木(아대석양제고목) : 석양빛에 갈가마귀 고목에서 울고
雁含秋氣渡江雲(안함추기도강운) : 가을 기운 머금은 기러기 강건너 구름에 든다
규원2(閨怨2)-이매창(李梅窓)
여인의 원망-이매창(李梅窓)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 말못하는 그리운 심정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 온 밤의 회포에 머리는 반백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 그리운 이 고통 아시려면
須試金環減舊圓(수시금환감구원) : 금반지 닮아짐을 보시구려
규원1(閨怨1)-이매창(李梅窓)
여인의 원망-이매창(李梅窓)
離恨悄悄掩中門(이한초초엄중문) : 혹독한 이별이 한스러워 안방 문 닫으니
羅袖無香滴淚痕(나수무향적누흔) : 비단 소매엔 임의 향기 없고 눈물 얼룩 뿐이로다
獨處深閨人寂寂(독처심규인적적) : 혼자 있는 깊은 방엔 다른 사람 아무도 없고
一庭微雨鎖黃昏(일정미우쇄황혼) : 마당 가득 내리는 보슬비는 황혼조차 가리운다
병중추사(病中秋思)-이매창(李梅窓)
가을에 병들어-이매창(李梅窓)
空閨養拙病餘身(공규양졸병여신) : 빈 방에 외로운 병던 이몸
長任飢寒四十年(장임기한사십년) : 외롭고 굶주린 인생 사십년이로다
借問人生能幾許(차문인생능기허) : 묻거니 인생살이 몇 년인가
胸懷無日不沾巾(흉회무일불첨건) : 수건 마를날 없는 마음 속 회포여
한거(閑居)-이매창(李梅窓)
한가히 살며-이매창(李梅窓)
石田茅屋掩柴扉(석전모옥엄시비) : 바위 사이 초가집 사립문 닫고 사니
花落花開辨四時(화락화개변사시) : 꽃 지고 꽃 핀들 계절을 알 수 있겠는가
峽裡無人晴盡永(협리무인청진영) : 골짝엔 사람 없고 맑은 날은 길기도 한데
雲山炯水遠帆歸(운산형수원범귀) : 구름 낀 산, 번쩍이는 물에 멀리 돛단배 돌아온다
자한3(自恨3)-이매창(李梅窓)
한스러워라-이매창(李梅窓)
悖子賣莊土(패자매장토) : 패륜아가 농토를 팔아
莊土漸次裂(장토점㧗렬) : 농토가 점차 줄어드는구나
不惜一莊土(불석일장토) : 한 배기 농토는 아깝지 않으나
只恐宗祀絶(지공종사절) : 조상의 제사 끊어질까 두렵도다
자한2(自恨2)-이매창(李梅窓)
한스러워라-이매창(李梅窓)
故人交金刀(고인교금도) : 옛사람 돈으로 사귀더니
金刀多敗裂(금도다패렬) : 돈으로 패망한 사람 많도다
不惜金刀盡(불석금도진) : 돈 다 쓰는 것 아깝지 않으나
且恐交情絶(차공교정절) : 사귀는 정이 끊어질까 걱정이라오
자한1(1自恨)-이매창(李梅窓)
한스럽구나-이매창(李梅窓)
夢罷愁風雨(몽파수풍우) : 꿈에서 깨니 비바람이 근심스러워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 고요히 행로난을 읊노라
慇懃梁上燕(은근양상연) : 무심하구나, 들보 위의 제비여
何日喚人還(하일환인환) : 어느날에야 임을 불러 돌아오게 하려나
추천(鞦韆)-이매창(李梅窓)
그네타기-이매창(李梅窓)
兩兩佳人學伴仙(양량가인학반선) : 두 사람씩 짝지은 미인이 신선을 배우려
綠楊陰裡競鞦韆(녹양음리경추천) : 푸른 버드나무 그늘에서 그네를 다투는구나
佩環違響浮雲外(패환위향부운외) : 노리게 소리 구름 밖 하늘까지 울리니
却訝乘龍上碧天(각아승룡상벽천) : 도리어 용을 타고 푸른 하늘 오르는 듯하여라
등천층암(登千層菴)-이매창(李梅窓)
천층암에 올라-이매창(李梅窓)
千層隱佇千年寺(천층은저천년사) : 천년을 우두커니 선 천년사
瑞氣祥雲石逕生(서기상운석경생) : 상서로운 기운과 구름 돌길에 서린다
淸磬響沈星月白(청경향침성월백) : 달빛과 별빛 환한데 맑은 경쇠소리 잦아드니
萬山楓葉閙秋聲(만산풍엽료추성) : 온 산에 가득한 단풍잎 가을 소리로 요란하다
야좌(夜坐)-이매창(李梅窓)
밤에 혼자 앉아-이매창(李梅窓)
西窓竹月影婆娑(서창죽월영파사) : 서창 대숲 달그림자 어른거리고
風動桃園舞落花(풍동도원무낙화) : 복숭아 밭에 바람 부니 낙화가 춤을 추네
猶倚小欄無夢寐(유의소난무몽매) : 여전히 작은 난간에 기대니 잠은 오지 않고
遙聞江渚菜菱歌(요문강저채릉가) : 강가의 마름 캐는 노래소리 아득히 들려오네
조춘(早春)-이매창(李梅窓)
초가을-이매창(李梅窓)
千山萬樹葉初飛(천산만수엽초비) : 온 산의 나무마다 단풍져 날리고
雁叫南天帶落暉(안규남천대낙휘) : 지는 햇빛 물든 남녘 하늘에 기러기 운다
長笛一聲何處是(장적일성하처시) : 어지선가 들려오는 긴 한 가닥 피리소리
楚鄕歸客淚沾衣(초향귀객루첨의) : 먼 고향가는 나그네는 눈물이 옷을 적신다
탄금(彈琴)-이매창(李梅窓)
李梅窓-이매창(李梅窓)
誰憐緣綺訴丹衷(수련연기소단충) : 우리의 사랑 진정에 소호함을 누가 알리오
萬恨千愁一曲中(만한천수일곡중) : 온갖 원한, 갖은 수심 한 곡조에 들어있네
重奏南江春欲暮(중주남강춘욕모) : 강남곡을 거듭 타니 봄날이 저물어 가니
不堪回首泣東風(불감회수읍동풍) : 봄바람 돌아보니 눈물 흘러내림 견딜 수 없네
범주(泛舟)-이매창(李梅窓)
뱃놀이-이매창(李梅窓)
參差山影倒江波(참차산영도강파) : 산 그림자 어른어른 물결에 어리고
垂柳千絲掩酒家(수류천사엄주가) : 늘어선 버들가지 주막을 덮었구나
輕浪風生眠鷺起(경랑풍생면로기) : 바람이는 가벼운 물결에 잠자던 백로 깨우고
漁舟人語隔煙霞(어주인어격연하) : 강 안개 속에서 어부들 이야기 소리 들린다
고인(故人)-이매창(李梅窓)
옛 사랑-이매창(李梅窓)
松柏芳盟日(송백방맹일) : 송백같이 맺은 사랑의 약속
思情與海深(사정여해심) :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는데
江南靑鳥斷(강남청조단) : 강남 땅의 반가운 소식 끊어지고
中夜獨傷心(중야독상심) : 이 한밤 홀로 마음만 아프구나
병중2(病中2)-이매창(李梅窓)
병이 나서-이매창(李梅窓)
誤被浮虛說(오피부허설) : 헛소문 자못 입어
還爲衆口暄(환위중구훤) : 도리어 여러 사람 입방아 거리
空將愁與恨(공장수여한) : 고연히 시름과 원한을 가져
抱病掩柴門(포병엄시문) : 가슴에 벼을 안고 사립문 닫아놓았다
병중1(病中1)-이매창(李梅窓)
병이 나서-이매창(李梅窓)
不是傷春病(불시상춘병) : 봄이라 마음 아픈 병이 아니라
只因憶玉郞(지인억옥랑) : 단지 임 생각에 난 병이라네
塵寰多苦累(진환다고루) : 인간세상 고통과 괴로움도 많아
孤鶴未歸情(고학미귀정) : 돌아가 오지 않은 마음 때운이네
강대즉사(江臺卽事)-이매창(李梅窓)
강가 누대에서 본대로-이매창(李梅窓)
四野秋光好(사야추광호) : 사방 들판에 가을빛 좋아
獨登江上台(독등강상태) : 혼자 강 위 누대에 올라보네
風流何處客(풍류하처객) : 어디선 온 풍류객인가
携酒訪余來(휴주방여래) : 술 가지고 날 찾아온다네
자상4(自傷4)-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夢罷悲風雨(몽파비풍우) : 꿈 깨니 비바람에 서글퍼지고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 행로난을 침울하게 읊어본다네
慇懃梁上燕(은근양상연) : 은근한 대들보 위의 제비여
何日喚人歸(하일환인귀) : 어느날에야 임을 불러 오게하느냐
자상3(自傷3)-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一片彩雲夢(일편채운몽) : 꿈속의 한 조각 채색 구름
覺來萬念差(각래만념차) : 꿈에서 깨니 온갖 생각 엇갈린다
陽臺何處是(양대하처시) : 양대는 어느곳에 있는가
日暮暗愁多(일모암수다) : 해 지는 저녁 어둠에 수심이 짙어진다
자상2(自傷2)-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洛下風流客(낙하풍류객) : 서울 풍류객 있어
淸談交契長(청담교계장) : 정담을 나누며 약속했는데
今日飜成別(금일번성별) : 오늘 번복하고 이별하니
離盃暗斷腸(이배암단장) : 이별 술잔에 암담히 마음이 아프네
자상1(自傷1)-이매창(李梅窓)
마음 상하여-이매창(李梅窓)
京洛三年夢(경락삼년몽) : 서울 꿈 삼년
湖南又一春(호남우일춘) : 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
黃金移古意(황금이고의) : 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
中夜獨傷神(중야독상신) : 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
춘사(春思)-이매창(李梅窓)
봄의 심사-이매창(李梅窓)
東風三月時(동풍삼월시) : 봄바람 부는 삼월
處處落花飛(처처낙화비) : 여기저기 낙화가 날린다
綠綺相思曲(녹기상사곡) : 비단옷 입고 상사곡 불러도
江南人未歸(강남인미귀) : 강남 가신 그이는 오지도 않는다
심진3(尋眞3)-이매창(李梅窓)
진경을 찾아-이매창(李梅窓)
遠山浮翠色(원산부취색) : 먼 산에 푸른 빛 감돌고
柳岸暗煙霞(유안암연하) : 버드나무 언덕은 물안개 자욱하다
何處靑旗在(하처청기재) : 어디 곳에 주막이 있을까
漁舟近杏花(어주근행화) : 고기잡이 배 살구꽃 가까이에 있다
심진2(尋眞2)-이매창(李梅窓)
진경을 찾아-이매창(李梅窓)
巖下繫蘭舟(암하계난주) : 바위 아래 고운 배 매어놓고
耽看碧玉流(탐간벽옥류) : 벽옥같은 맑은 물 정신없이 바라본다
千年名勝地(천년명승지) : 천년 명승지에
沙鳥等閒遊(사조등한유) : 물새가 한가하게 놀고 있구나
심진1(尋眞1)-이매창(李梅窓)
진경을 찾아-이매창(李梅窓)
可憐東海水(가련동해수) : 가련하다, 동해로 흐르는 물이여
何時西北流(하시서북류) : 어느 때라야 서북쪽으로 흐르는가
停舟歌一曲(정주가일곡) : 배를 머추고 한 곡조 노래하니
把酒憶舊遊(파주억구유) : 술잔 들고 옛 놀던 때를 생각하노라
자한(自恨)-이매창(李梅窓)
스스로 한탄하네-이매창(李梅窓)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 봄이 추워 겨울옷 꿰매노니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 깁 창가에 해빛 비칠 때로다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 머리 숙여 바느질 손길 닿는 곳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 구슬같은 눈물 바늘과 실을 적신다
증별(贈別)-이매창(李梅窓)
이별하며 드립니다-이매창(李梅窓)
我有古秦箏(아유고진쟁) : 나에게 진나라 거문고 있어
一彈百感生(일탄백감생) : 한번 타면 온갖 느낌 일어난다
世無知此曲(세무지차곡) : 세상에는 이 곡조 아는 사람 없어
遙和緱山箏(요화구산쟁) : 멀리 구산쟁에만 화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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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응길, 劉希慶
목차
예학자 남언경의 제자가 되다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추었으니 인정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받다
천민에서 양반으로, 영광의 날들
여류시인 이매창과의 사랑 혹은 풍류
신분 차별이 엄연했던 조선 시대에 자신의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천역을 벗어던진 인물이 종종 나타났다. 선조 때의 인물 유희경도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행운아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여류시인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출세와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
마음 속 그리운 정 말로는 다할 길 없어
밤새 생각타보니 머리카락 반이나 세었구나.
신첩의 괴로워하는 이 심정 아시려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이 손가락을 보옵소서.
-규원(閨怨)
위 시는 이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신석정 시인이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扶安三絶)’로 꼽았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비련은 오늘날까지도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유희경
예학자 남언경의 제자가 되다
유희경(劉希慶)의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이다. 1545년(인종 1년) 2월 27일 한양 대묘동에서 태어났다. 한자로 씌어진 할아버지의 이름은 유도치(柳道致),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천민임에 분명하다.
어린 시절 효심이 남달랐던 유희경은 30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배씨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 냈고, 기저귀를 빨아 바위에 펼쳐 말리며 글을 읽었다. 형제간에 우애도 남달라서 동생 유희운이 염병에 걸리자 수일동안 곁에서 간호했다. 이웃사람들이 전염될까 두려워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형제는 한 몸인데 동생을 외면하면 자신의 몸을 버리는 것’이라며 거부했고, 마침내 동생의 목숨을 구했다.
13세 때인 1557년(명종 1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수락산 자락에 부친의 시신을 묻으려 했는데, 근처에 있던 고관의 무덤을 지키던 묘지기가 쫓아내자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묘를 쓸 수 있었다.
유희경은 장사를 마친 뒤 매일 무덤 앞에 단정히 앉아 곡을 하고 흙을 져다가 무덤에 오가는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만 집에 돌아가 상청에 제사를 지내며 어머니의 용태를 살폈다.
그 소문을 듣고 당대의 대학자인 남언경이 찾아가 두꺼운 옷 한 벌을 주었다. 또 근처에 있는 망월암의 승려를 불러 묘지 곁에 초막을 지어주게 하고 매일 그에게 죽을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그 인연으로 1559년(명종 14년) 삼년상을 마친 유희경은 남언경의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웠다.
남언경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서 예학에 조예가 깊었고, 조선에서 최초로 양명학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유희경은 곧 《삼례》를 종합하고 《두씨통전》과 《구씨의절》에 통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제관계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1573년(선조 6년) 유희경은 당시 양주목사로 부임한 남언경을 도와 조광조를 모시는 도봉서원 건립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추었으니 인정한다
유교의 통과의례인 가례에는 관례·혼례·상례·제례가 있다. 그 중에 상례는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동시에 유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는 절차로서 인정을 중시하는 유학의 규범 가운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당시 왕실에서는 《국조오례의》의 규범을 따르고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은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의례를 행했다. 한데 관례와 혼례, 제례는 전통에 따라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상례는 조선의 실정과 맞지 않는 점이 많아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다.
집례자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어서 장례식 한 번 치르면 구설수가 난무했고, 때론 정치적인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충효를 실천하는 상례를 제대로 치르기에는 교과서가 너무 난해했던 것이다. 조정에서도 이 문제를 직시하고 여러 차례 주석과 언해 작업을 시도했지만 아무래도 전문가가 없어서 매조지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례전문가 유희경이 혜성처럼 등장했던 것이다.
유희경은 《주자가례》를 조선에 적용하면서 의례의 근본적인 의미에 주목했다. 엄격한 절차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망자의 명분을 높이면서 동시에 가족들의 애정과 공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가례에 대한 유희경의 새로운 해석과 집행 절차가 알려지자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초상이 나면 그를 집례 책임자로 초빙했다. 그러다 보니 ‘양예수가 후문으로 빠져나오면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간다.’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어의인 양예수는 허준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의관이었으니 당대 유희경의 입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부모의 상을 모신 사람은 신분이 낮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유교의 법도였다. 때문에 유희경은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았지만 거만하지 않고 늘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자신을 칭송하는 《유희경전》의 저자 유몽인에게까지 시를 지어 바치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유희경의 행동거지는 양반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성미 급하기로 소문난 의주부윤 박엽이 언젠가 자신의 눈에 난 관리 한 명을 죽이려다 그가 유희경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풀어주기도 했다.
유희경은 천출에서 벗어난 뒤에도 다섯 차례나 승진함으로써 양반의 지위를 굳혔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홍가신, 서인원, 허상, 안민학 등에게 《주자가례》를 가르쳤고 유성룡의 제자로 예론에 밝았던 정경세를 지도했다. 《상례초》란 저서를 남겼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받다
유희경의 예학에 대한 경지는 당대 제일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좀 수준 높은 장의사였을 뿐이었다. 늘 죽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을 누가 사귀려 하겠는가. 한데 양반들은 너도 나도 그와 교유하려 했다. 그의 시문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에게 당시(唐詩)를 배운 그는 뛰어난 시문으로 성가를 높였다. 젊은 날 그는 선비 임훈을 따라 광주에 갔을 때 임억령의 별장에서 한시를 지어 극찬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유희경이 임훈 집안의 노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동시대의 노비시인 백대붕과 함께 위항시인으로 쌍벽을 이루면서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고 박계강·정치·최기남 등 중인들과도 시회를 즐겼다.
백대붕은 군선을 만드는 전함사의 서리 출신으로 매우 호협한 인물이었는데, 사신 허성을 따라 일본에도 다녀오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순변사 이일의 부대에 차출되었다가 전사한 비운의 시인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유희경은 낙산 아래쪽으로 흐르는 시냇가에 침류대를 만든 뒤 차천로·이수광·신흠·김현성·홍경신·임숙영·조우인·성여학 등 대시인들과 시회를 열었다. 그때의 부산물로 완성된 시집이 《침류대시첩》이다.
당시 침류대 시사를 찾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화담 서경덕 계열의 명사들이었다. 본래 화담 계열의 학풍은 정통유학 외에도 상수학이나 노장사상, 양명학, 불교 등에 관심을 보인다. 그의 스승 남언경이 화담의 제자였으므로 유희경은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유희경은 평생 권력에 기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80세를 넘겼을 때 인연을 맺은 택당 이식은 그가 인격이 돈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 시인들이 흔히 보이는 옹고집이 하나도 없으므로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명성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칭찬했다.
그 과정에서 유희경은 여류시인 매창과의 절절한 사랑을 외면해야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탓일까. 훗날 매창과 교유했던 허균은 자신의 문집 《성수시화》에서 그를 이렇게 상찬하고 있다.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천민에서 양반으로, 영광의 날들
유희경이 13세 때 스승 남언경을 만난 것이 첫 번째 행운이라면 47세 때 일어난 임진왜란은 두 번째 행운이었다. 당시 궁궐에서 제복장(祭服匠)으로 복무하고 있던 유희경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의병을 모아 왜군에 맞섰다. 그 공으로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1594년(선조 27년) 정월 선조의 교지를 받아 오랜 천역에서 벗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유희경의 참전 기록은 미미하다. 안민학의 《풍애선생집》에는 1593년(선조 26년) 자신이 소모사(召募使)로 광주에 도착했을 때 유희경을 보내 의병장 고경명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란 중에도 그는 상례전문가였던 것이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는 위장소서원(衛將所書員)의 직분으로 왕비를 호위했다.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이 보위를 잇자 명나라 황실에서 탐탁찮게 여기고 왕위 책봉 절차를 미루었다. 이를 구실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들이 사복을 채웠다. 1602년(선조 32년) 때 명의 태자 책봉을 알리려 왔던 한림학사 고천준은 수만 냥의 은을 갈취해 갔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내조한 엄일괴 역시 이미 등극한 광해군을 외면하고 임해군을 면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수만 냥의 은을 챙겨 돌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국고가 바닥을 드러낸 1609년(광해군 1년) 또 다시 명나라 사신이 들어온다는 전갈이 당도했다. 한데 더 이상 그들에게 챙겨줄 재물이 없었다. 사석에서 호조의 담당자들의 고충을 알게 된 유희경은 자신의 전력에 빗대어 이렇게 조언했다.
“농사는 마땅히 사내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것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일은 돈에 관련된 것이니 백인호, 김서, 신천룡에게 물으십시오.”
그가 언급한 세 사람은 장안의 갑부들이었다. 중신들이 그들을 불러 대책을 묻자 5부 부녀자들의 반지를 거두자는 계책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가까스로 사신에게 줄 뇌물을 마련한 중신들은 임금에게 주청하여 유희경과 세 부호들에게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그로 인해 유희경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1615년(광해군 7년) 《유희경전》을 지어 그를 극구 칭송했다.
1617년(광해군 9년)에 조정에서는 대북파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희경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이첨의 집에 발을 끊었다. 어느 날 한길에서 우연히 유희경을 발견한 이이첨이 요즘 왜 얼굴을 비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인은 요즘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공을 찾아갈 겨를이 없습니다.”
이 말은 그가 앞장서 추진하는 폐모론을 은근히 비판한 것이었다. 그 일로 앙심을 품은 이이첨은 그해 겨울 불거진 허균의 역모사건을 수사하면서 유희경을 잡아들였지만 별다른 빌미를 찾지 못하고 풀어주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권좌에 오른 인조는 1623년(인조 1년) 유희경의 절의를 칭송하여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주었다. 그 무렵 정명공주의 남편인 영안위 홍주원이 그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인목대비가 술과 안주를 내렸다. 1636년(인조 14년)에는 나이 80세에 노인계(老人階), 즉 나이 많은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전례에 따라 종2품 가의대부가 되었다. 그해 2월 6일 세상을 떠나 도봉서원 동쪽 양주 장의동에 묻혔다.
그는 조강지처인 허씨 사이에 역관이 된 큰 아들 순민을 비롯하여 우민, 성민, 사민, 일민 등 다섯 아들을 얻었고 중인 화가 이등에게 출가한 딸이 하나 있었다. 1646년(인조 24년) 막내아들 유일민이 심기원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영국원종공신이 되자 그에게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를 가자하고 한성부 판윤이 증직되었다.
여류시인 이매창과의 사랑 혹은 풍류
유희경과 이매창의 만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시인 유희경과 백대붕의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고, 부안 기생 이매창의 이름도 한양의 풍류가에 회자되고 있었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매창의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桂生) 또는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1591년(선조 24년) 초봄, 48세의 유희경은 서울을 떠나 명기 계생이 있다는 부안으로 향했다. 그것이 애틋한 로맨스의 서막이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빠져들었다. 28년의 나이차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날 유희경은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시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구나.
-증계랑(贈癸娘)
이 시에서 유희경은 매창을 무산 신녀에 비유했다. 무산 신녀란 초나라 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속에 나타나 교합했다는 절세 미녀이다. 신녀는 시집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유희경은 매창이 그 신녀처럼 신선이 사는 삼청, 즉 옥청·상청·태청에 내려온 것 같다며 상찬했다.
첫날부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혼탁한 세상사를 잊었다. 그들에게 세속의 체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희경은 당시 천민이자 상례전문가로서 궁중이나 양반가에 초상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가야 하는 몸이었다.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던 두 사람은 훗날 다시 만나 열흘 동안 시를 지으며 회포를 풀기로 약속했다.
얼마 후 그가 서울로 돌아가자 매창은 이제나 저제나 그가 돌아올까 애를 태웠다. 하지만 유희경은 몇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임이 가을이 짙어만 가는데 소식 한 장 없으니 매창에게서 이런 시조가 나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내 생각 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유희경의 마음도 매창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왜군이 전 국토를 초토화시킨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고래 등 같은 궁궐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고 만인지상의 임금이 의주로 몽진하는 험난한 시국 속에서 사랑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당시 유희경은 임금을 모시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다. 그에게 있어 전쟁은 천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임금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매창의 곁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임금의 은혜로 평생의 한이었던 천역을 벗어던진 그에게는 명철보신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보수적인 양반 사대부들의 비틀린 시선을 의식하고 몸을 잔뜩 사려야 했던 것이다.
화살 같은 세월 속에서 매창이 유희경만 학수고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엄연히 관장이 원하면 몸을 내주어야 하는 기생이었다. 그리하여 김제 군수로 내려왔던 이귀와 인연을 맺었고, 1601년 해운판관으로 부안에 들렀던 허균과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허균의 《조관기행》에는 매창과 조우했던 날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01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렸기 때문이었다.’
유희경의 눈에 매창은 선녀였지만 허균의 눈에는 시들어가는 재주 많은 퇴기일 뿐이었다. 허균은 남녀의 정욕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부르짖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매창을 여자로 보지 않고 친구로 보았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시문을 함께 지으면서 삶에 대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것이다. 허균은 그리움에 메말라버린 그녀의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불교의 참선을 가르쳐 주었다. 고독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한 것이었다.
몇 달 뒤 서울에 돌아온 허균은 형조정랑, 수안군수 등을 거쳐 정3품 공주목사에 이른다. 그 사이에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수한 탄핵과 파직을 경험했지만 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된 그는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머물며 유유자적을 즐겼다. 이때 허균과 재회한 매창은 스스럼없이 이전의 우정을 나누며 기꺼워했다.
그 뒤에도 허균은 매창에게 편지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젊은 날 심혼을 바쳤던 유희경에게 머물러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남자는 무슨 까닭인지 소식 한 자 없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15년만인 1607년, 유희경과 매창은 다시 만났다. 남자는 환갑이 넘은 63세의 양반이었고, 여자는 35세의 퇴기였다. 두 사람은 눈물 흘리며 두 손을 부여 쥐었지만 유희경으로서는 예전처럼 연인과 자유로운 로맨스를 즐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행여 고약한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은 물론 자손들에게까지 흠결이 미칠 것이다. 그런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절망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610년 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정인은 그녀의 꺼져가는 불길을 되살려주지 못했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 봉덕리에 손때 묻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녀의 부음을 들은 유희경은 허전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도옥진(悼玉眞)
그에게 있어 매창은 선녀였고 양귀비였다. 유부남으로써 영혼을 바쳐 사랑했건만 그것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륜이었다. 불륜은 비극을 잉태하는 법, 하지만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미화할 수 있는 구실이 된다. 매창이 죽은 뒤에도 유희경의 생애는 2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승승장구하는 노년을 보내면서 그는 재가 되어버린 그 시절을 돌이켜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한때의 풍류였다.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lmc.hwp 부안 관기 이매창 스토리
촌은 유희경과 이매창의 사랑노래
서러운 만남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극에 달했다. 1591년 이른 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전운이 감도는 나라를 걱정하며 또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자주 불려 다니며 상례를 집행하던 중인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역시 그를 기방(妓房)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침류대를 중심으로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 시단을 이끌었던 위항문학의 선구자 유희경은 천리길을 내려와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났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 살의 유희경은 스물의 기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울에서부터 매창에 대해 들어 왔는지라 스물여덟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독수리는 너무 높이 날아서 국경을 넘는 줄도 모른다’고 했다. 촌은과 매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촌은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량(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를 바쳤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여라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매창은 이미 서울까지 알려진 기생 시인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무산의 신녀에 비유하면서 극찬하고 있다. 초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 속에 신녀가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그 신녀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삼청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 내려온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 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 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 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그해 봄 둘은 운우의 정을 나누며 로멘스와 불륜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촌은 유희경은 「희증계랑(戲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로 신선의 세계에서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런 유형의 시는 여인을 희롱하는 것으로 여겨 사대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당시 유희경은 중인의 신분인데다 매창과 육체를 교합한 상태라 스스럼 없이 지은 듯하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세속의 체면이나 권위는 필요치 않았다. 둘 간의 사랑과 시를 통한 화답이 얼마나 절정했으면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이라고 하였다. 황진이,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박연폭포처럼 말이다.
이별 그리고 그리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400여 년 전 애절한 별리를 노래했던 연인들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러움을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부안 기생 매창은 한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매우 뛰어났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이 짙어가도 소식 없으니 그이도 나를 생각하기나 하는지 애절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수절가는 애절하기만 하다. 쓸쓸한 가을밤에 들려오는 거문고 가락이 더욱 시렸으리라.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졌다.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동안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님에 대한 그리움의 한을 노래했다.
春冷補寒衣(춘빙보한의)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옥루적침사)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자한(自恨)」에서는 유희경이 떠나고 없는 봄은 너무나 추워 추울 때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수선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에 바느질이 되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서러움이 진하게 베여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 /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 마치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 생신날 지은 「사친시(思親詩)」를 연상하게 한다. 유희경 역시 전쟁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매창을 그리워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촌은은 「회계랑(懷癸娘)」에서 서울과 부안이라는 천리길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기는 고단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촌은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도중회계랑(途中懷癸娘)」에서는 가인을 이별한 후 남쪽 하늘이 막혀 떠도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파랑새마저 소식을 전하지 않음에 벽오동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들려 차마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아내 외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여자가 없었던 유희경, 기방 출입도 자제했던 그가 스물여덟이나 어린 매창에게 빠진 것은 둘 다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이별 후에도 사랑의 노래를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주고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이별해야 했던 두 연인은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부안으로 달려가야 했을 유희경이 왜 서울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독수공방 시킨 촌은의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긴 청춘을 매창은 수절해야 했다.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정조를 지킨 그녀의 심사는 또 무엇인가. 전쟁이 끝난 후 매창은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오로지 마음을 받친 늙은 시인만을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매창과 허균
매창의 명성은 전국에 이미 알려져 그녀를 만나 보기 위해 부안으로 찾아오는 사대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유희경만을 사랑했기에 헤어져 있었던 세월동안 외로움을 지켜왔다. 「증취객(贈醉客)」은 기녀(妓女)로 살아가지만 양반 사대부를 어르는 품격과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술 취하신 님 명주저고리 당기시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렬) 잡혔던 명주저고리 찢어졌다오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찢겨짐은 아깝지 않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단지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렵구나
규방을 찾아든 손님이 명주 저고리를 찢는 실수를 범하였지만, 그보다 님이 주신 온정이 끊어질까 두렵다는 여유는 매창이 지닌 속 깊은 마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촌은의 사랑이 알박혀 있어 육체는 당연이요, 마음 한 올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10년 별리의 세월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래도 한 조각 마음이라도 준 님이 있었으니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였다. 이귀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허균은 1601년 충청도와 전라도 해운판관이 되어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된 지 서너 달 뒤였다. 이귀는 훗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인물이다. 허균의 「조관기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601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매창은 두 번째 남자 이귀가 떠난 후 우리나라 최초의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을 만나 10년 동안의 정신적인 우정을 쌓았지만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촌은과의 이별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이 매창과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기생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플라토닉사랑 (Platonic love)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매창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며 걱정하고 위로하였다.
15년만의 재회와 매창의 죽음
1592년 이별했던 촌은과 매창은 1607년 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 긴 세월 매창의 애간장을 녹였던 촌은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났지만 매창은 더 없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유희경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 만이라도 시를 논하면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당나라 시인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더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가는 것은 꽃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좇음이라오
칠언절구「중봉계랑(重逢桂娘)」은 환갑을 지난 촌은 유희경이 매창과의 어렵고도 중요한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만남이 기녀 매창의 육체적 관계가 아닌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라고 단정하고 있다. 15년 전 매창은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며 시를 논하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촌은은 그 약속을 핑계로 재회하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사랑이 샘솟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시를 핑계로 삼을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촌은은 매창의 부고를 듣고 애도의 시인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를 읊는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王孫爭設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는 현종과 양귀비[양옥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촌은이여, 매창이여
남해 용문사에 소장된 『촌은집책판』은 남해의 보물이다.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시인 촌은 유희경과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는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사랑노래가 오롯이 담겨 있기에 그러하다.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정업원 아래 있던 자기 집 시냇가 흐르는 개울가에 있는 바위를 침류대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하였다. 그는 북악단풍 등 20경을 시로 지어 읊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시집 『침류대시첩』을 펴냈다. 그는 당시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사액을 받은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이이첨이 폐모의 소를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인조반정 후 왕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로 승진시켰다. 문집으로 『촌은집』, 저서로 『상례초』가 있다.
이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매창은 그의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桂生)과 계랑(桂娘)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녀는 시, 가무, 가야금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주옥같은 한시 수백수를 남겼다고 전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개암사에서 간행한 『매창집』에 수록된 5언절구 20수, 7언절구 28수, 5언율시 6수, 7언율시 4수로 한시 58수에 불과하다. 시문학사상 한 여인의 시집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고 한다.
황진이와 서화담을 이은 두 연인의 사랑노래가 용문사의 옥수를 타고 흘러 남해바다를 적셔주기를 기대한다. 올해 남해군에서 촌은집을 번역 간행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4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촌은과 매창이 깨어나는 날을 기다린다.
부안 기생 '매창'과 그의 정인 유희경
(그림 : 운보 김기창)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 중기 전북 부안의 기생이었다.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시기(詩妓)라고 불렸다.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주고받은 연시(戀詩)는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532년 부안에 내려왔다가 매창을 처음 만난 유희경. 유희경은 그러나 2년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매창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 방년 21세.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그 정은 매창의 시심으로 피어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흔히 ‘이화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 ‘이화우(梨花雨)’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아마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듯한 한시 한 편이 더 있다.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매창이 이러할 진대 그립기는 유희경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매창이 살고 있는 부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란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새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두 계절 동안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다시 수 년이 흘렀다. 유희경은 유희경대로, 매창은 매창대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씻기 어려운 정한(情恨)을 안게 되는 쪽은 대개 여성이다. 특히 당시 매창은 ‘노류장화(路柳墻花)’랄 수 있는 기생 신분이었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시 한 편을 소개하면,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須試金環減舊圍(수시금환감구위)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한양(서울)과 부안.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이젠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이 거리를 놓고 마치 서로가 지구 반대편에라도 있는 듯하다. 핸폰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두 사람의 사랑얘기는 마치 수 천년 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들린다.
문명의 발달로 편리는 해졌지만, 깊은 정(情), 가슴에 품은 한(恨)은 이제 그 어디서 만날 꺼나.... .
(출처 ; 오마이뉴스 블로그, 보림재)
서러운 만남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극에 달했다. 1591년 이른 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전운이 감도는 나라를 걱정하며 또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자주 불려 다니며 상례를 집행하던 중인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역시 그를 기방(妓房)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침류대를 중심으로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 시단을 이끌었던 위항문학의 선구자 유희경은 천리길을 내려와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났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 살의 유희경은 스물의 기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울에서부터 매창에 대해 들어 왔는지라 스물여덟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독수리는 너무 높이 날아서 국경을 넘는 줄도 모른다’고 했다. 촌은과 매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촌은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량(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를 바쳤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여라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매창은 이미 서울까지 알려진 기생 시인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무산의 신녀에 비유하면서 극찬하고 있다. 초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 속에 신녀가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그 신녀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삼청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 내려온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 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 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 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그해 봄 둘은 운우의 정을 나누며 로멘스와 불륜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촌은 유희경은 「희증계랑(戲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로 신선의 세계에서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런 유형의 시는 여인을 희롱하는 것으로 여겨 사대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당시 유희경은 중인의 신분인데다 매창과 육체를 교합한 상태라 스스럼 없이 지은 듯하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세속의 체면이나 권위는 필요치 않았다. 둘 간의 사랑과 시를 통한 화답이 얼마나 절정했으면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이라고 하였다. 황진이,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박연폭포처럼 말이다.
이별 그리고 그리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400여 년 전 애절한 별리를 노래했던 연인들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러움을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부안 기생 매창은 한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매우 뛰어났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이 짙어가도 소식 없으니 그이도 나를 생각하기나 하는지 애절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수절가는 애절하기만 하다. 쓸쓸한 가을밤에 들려오는 거문고 가락이 더욱 시렸으리라.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졌다.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동안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님에 대한 그리움의 한을 노래했다.
春冷補寒衣(춘빙보한의)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옥루적침사)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자한(自恨)」에서는 유희경이 떠나고 없는 봄은 너무나 추워 추울 때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수선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에 바느질이 되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서러움이 진하게 베여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 /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 마치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 생신날 지은 「사친시(思親詩)」를 연상하게 한다. 유희경 역시 전쟁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매창을 그리워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촌은은 「회계랑(懷癸娘)」에서 서울과 부안이라는 천리길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기는 고단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촌은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도중회계랑(途中懷癸娘)」에서는 가인을 이별한 후 남쪽 하늘이 막혀 떠도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파랑새마저 소식을 전하지 않음에 벽오동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들려 차마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아내 외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여자가 없었던 유희경, 기방 출입도 자제했던 그가 스물여덟이나 어린 매창에게 빠진 것은 둘 다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이별 후에도 사랑의 노래를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주고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이별해야 했던 두 연인은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부안으로 달려가야 했을 유희경이 왜 서울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독수공방 시킨 촌은의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긴 청춘을 매창은 수절해야 했다.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정조를 지킨 그녀의 심사는 또 무엇인가. 전쟁이 끝난 후 매창은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오로지 마음을 받친 늙은 시인만을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매창과 허균
매창의 명성은 전국에 이미 알려져 그녀를 만나 보기 위해 부안으로 찾아오는 사대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유희경만을 사랑했기에 헤어져 있었던 세월동안 외로움을 지켜왔다. 「증취객(贈醉客)」은 기녀(妓女)로 살아가지만 양반 사대부를 어르는 품격과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술 취하신 님 명주저고리 당기시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렬) 잡혔던 명주저고리 찢어졌다오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찢겨짐은 아깝지 않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단지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렵구나
규방을 찾아든 손님이 명주 저고리를 찢는 실수를 범하였지만, 그보다 님이 주신 온정이 끊어질까 두렵다는 여유는 매창이 지닌 속 깊은 마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촌은의 사랑이 알박혀 있어 육체는 당연이요, 마음 한 올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10년 별리의 세월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래도 한 조각 마음이라도 준 님이 있었으니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였다. 이귀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허균은 1601년 충청도와 전라도 해운판관이 되어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된 지 서너 달 뒤였다. 이귀는 훗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인물이다. 허균의 「조관기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601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매창은 두 번째 남자 이귀가 떠난 후 우리나라 최초의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을 만나 10년 동안의 정신적인 우정을 쌓았지만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촌은과의 이별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이 매창과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기생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플라토닉사랑 (Platonic love)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매창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며 걱정하고 위로하였다.
15년만의 재회와 매창의 죽음
1592년 이별했던 촌은과 매창은 1607년 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 긴 세월 매창의 애간장을 녹였던 촌은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났지만 매창은 더 없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유희경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 만이라도 시를 논하면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당나라 시인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더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가는 것은 꽃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좇음이라오
칠언절구「중봉계랑(重逢桂娘)」은 환갑을 지난 촌은 유희경이 매창과의 어렵고도 중요한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만남이 기녀 매창의 육체적 관계가 아닌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라고 단정하고 있다. 15년 전 매창은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며 시를 논하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촌은은 그 약속을 핑계로 재회하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사랑이 샘솟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시를 핑계로 삼을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촌은은 매창의 부고를 듣고 애도의 시인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를 읊는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王孫爭設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는 현종과 양귀비[양옥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촌은이여, 매창이여
남해 용문사에 소장된 『촌은집책판』은 남해의 보물이다.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시인 촌은 유희경과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는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사랑노래가 오롯이 담겨 있기에 그러하다.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정업원 아래 있던 자기 집 시냇가 흐르는 개울가에 있는 바위를 침류대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하였다. 그는 북악단풍 등 20경을 시로 지어 읊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시집 『침류대시첩』을 펴냈다. 그는 당시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사액을 받은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이이첨이 폐모의 소를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인조반정 후 왕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로 승진시켰다. 문집으로 『촌은집』, 저서로 『상례초』가 있다.
이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매창은 그의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桂生)과 계랑(桂娘)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녀는 시, 가무, 가야금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주옥같은 한시 수백수를 남겼다고 전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개암사에서 간행한 『매창집』에 수록된 5언절구 20수, 7언절구 28수, 5언율시 6수, 7언율시 4수로 한시 58수에 불과하다. 시문학사상 한 여인의 시집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고 한다.
황진이와 서화담을 이은 두 연인의 사랑노래가 용문사의 옥수를 타고 흘러 남해바다를 적셔주기를 기대한다. 올해 남해군에서 촌은집을 번역 간행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4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촌은과 매창이 깨어나는 날을 기다린다.
부안 기생 '매창'과 그의 정인 유희경
(그림 : 운보 김기창)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 중기 전북 부안의 기생이었다.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시기(詩妓)라고 불렸다.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주고받은 연시(戀詩)는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532년 부안에 내려왔다가 매창을 처음 만난 유희경. 유희경은 그러나 2년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매창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 방년 21세.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그 정은 매창의 시심으로 피어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흔히 ‘이화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 ‘이화우(梨花雨)’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아마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듯한 한시 한 편이 더 있다.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매창이 이러할 진대 그립기는 유희경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매창이 살고 있는 부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란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새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두 계절 동안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다시 수 년이 흘렀다. 유희경은 유희경대로, 매창은 매창대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씻기 어려운 정한(情恨)을 안게 되는 쪽은 대개 여성이다. 특히 당시 매창은 ‘노류장화(路柳墻花)’랄 수 있는 기생 신분이었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시 한 편을 소개하면,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須試金環減舊圍(수시금환감구위)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한양(서울)과 부안.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이젠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이 거리를 놓고 마치 서로가 지구 반대편에라도 있는 듯하다. 핸폰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두 사람의 사랑얘기는 마치 수 천년 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들린다.
문명의 발달로 편리는 해졌지만, 깊은 정(情), 가슴에 품은 한(恨)은 이제 그 어디서 만날 꺼나.... .
(출처 ; 오마이뉴스 블로그, 보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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