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박인수/1954년

marineset 2023. 5. 29. 01:08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1954년)
역사가 남성 상위로 꾸려져 내린 우리나라에서 남녀가 맥락된 사건에서 가해자는 항상 남자요 피해자는 여자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춤바람으로 뭇 여대생을 유린한 박인수는 분명 가해자요 유린당한 여대생은 피해자다.
한데 스스로의 순결이나 정조를 지키지 못 한 여자의 정조까지 법이 지켜줄 수는 없다는 파격적인 판결을 내려 이 천년래의 공식을 깨트린 것이다.
박인수는 여성의 적이냐 우군이냐를 두고 한 대학에서 토론이 있었을 정도다.
박인수는 성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게 한 한국 여성사에 도표를 세운 악인이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결혼을 빙자, 1년간 70여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기소됐던 박인수(당시 26세)가 혼인 빙자 간음죄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는 순간이었다.
재판장 권순영 판사의 판결문은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희대의 명언으로 남아있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50년대 한국의 웃지 못할 풍속화다.
자유로와진 성 풍속도, 그러나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던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 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 바람과 댄스홀… 이 모든 새로운 사회 문화 코드의 조합이 박인수 사건으로 응축됐다.

대학 재학 중 전쟁 발발로 입대했던 훤칠한 미 청년 박인수는 해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해군장교구락부(LCI),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 홀을 드나든다.
1954년 제대한 그는 이후로도 해군 대위를 사칭, 인기 댄스홀을 휩쓸며 여성 편력을 펼친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 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도 많았다.
검찰은 박을 혼인 빙자 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이 죄는 친고죄.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 뿐이었으며, 그나마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여성은 너댓밖에 안됐다.

재판에서 박인수는 혼인 빙자 간음 혐의를 부인하며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장원에 다니는 이모(23)씨 한사람밖에 없었다"고 밝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또 "그들과는 결코 결혼을 약속한 사실이 없었으며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는 으례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권순영 판사는 박인수 피고에게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환의 벌금형을 과했다.
"댄스홀에서 만난 정도의 일시적 기분으로 성교 관계가 있었을 경우 혼인이라는 언사를 믿었다기보다 여자 자신이 택한 향락의 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는 게 "보호 가치가있는 정조를 보호한다"는 말에 이어지는 무죄 판결 이유였다.

그러나 세간은 떠들썩했고 검찰은 항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 1년형을 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고의로 여자를 여관에 유인하는 남성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유죄 판결 이유였다.
그로부터 40년.
1994년 성폭력 방지법이 제정되면서 우리 법전에서는 '정조'라는 말이 사라졌다. 예전 형법에서 강간 추행 등은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됐지만, 부녀자에 한정해서 적용되는 '정조'라는 단어가 여성을 수동적이고 상대적인 위치에 놓는다고 여권 운동가들이 삭제를 강력하게 요청한 결과다.
최영애 성폭력 상담소장은 "성범죄는'성적 자기 결정권' 유린"이라며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 말을 쓰자"고 주장한다.
'보호가치 있는 정조'란 것도 문제로 여겨졌다.
술취한 여성이 추행당했을 때 오히려 그 여성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 우리 사회지만, 이제 직장마다 성희롱 방지 교육이 제도화되면서 분위기도 바뀌어가고 있다.

[http://www.everyoung.ne.kr/index.html]발췌

oartPDF.pdf/ 1955년 7월 23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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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돈후안-박인수'사건 당시 판사의 아들 본지 투고

[동아일보 2002-07-25 15:08]

《연재 칼럼 ‘광고 속의 에로티시즘’의 ‘미국 더홀사의 성폭력 반대 공익광고’ 편(위크엔드 19일자 13면)에 대해 이 글의 내용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독자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른바 박인수 사건에서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고 권순영 판사의 판결 배경 설명을필자 김홍탁씨가 ‘피해자의 인권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보수 남성 논리’라고 해석한 데 대해 다른 의견을 보내왔다.편집자》

저는 박인수 사건의 1심 담당 고 권순영 판사의 아들되는 사람입니다.

먼저 김홍탁님이 언급하신 ‘박인수 사건’(55년)은 ‘성폭력 사건’이아닌 ‘혼인빙자 간음’과 ‘공문서 부정행사’에 대한 건으로 성폭력이나 강간과는 거리가 있는 재판으로 기억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박인수는 70명이 넘는 여자와 춤을 추다가 만나서 양자의 합의에 의해 수십회씩 서로의 쾌락을 위하여 성교를 하였으며(강간이 아닌 화간) 그 중 ‘처녀’는 한 명만 존재했음을 밝혔다고 합니다. 1950년대가 아닌 지금이라면 아무 문제가 될 사항은 아니겠으나 6·25 후 문란해진 성도덕에 따가운 경종을 울려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개인간의 은밀하고도 침범되지 않아야 할 성생활에 개입해서는 아니 되고 개입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에 그쳐야함이 옳다는 것이 선친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사료되는군요.

현재는 정조라는 말도 잘 사용되지 않고 ‘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던데 본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성행위를 하였을 경우에는 미성년자이거나 매춘이 아닌 경우에는 처벌치 않는 것이 현재의 조류입니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고 광고인은 ‘광고 카피’로 말을 하겠지요? 의사인 저는 ‘진단명’으로 말을 합니다.

고인은 그 당시 ‘때려 죽일 놈’이던 박인수에게 ‘혼인 빙자 간음’부분에는무죄,‘공문서행사’부분에는 유죄판결을 내렸지요.

포퓰리즘에 묻혀서 유죄 판결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인은 박인수가 도덕적인 죄(sin)를 저지른 것일지언정 법률적인 범죄(crime)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단죄는 종교나 윤리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윤리적으로 돌을 던질 수는있어도 법률적으로 ‘혼빙간’으로 죄를 엮어 넣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던 것 같군요.

지금은 저세상으로 가신 지도 오래 되어 이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재판정을 나서며 기자들에게 “정조라고 하여 다 법이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에 비추어 가치가 있고 보호할 사회적 이익이 있을 때 한하여 법은 그 정조를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자기의사로 성행위를 한 뒤 남자가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혼인을 빙자한 간음’으로 처벌하는 ‘선진국’은 없습니다. 고인은 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라 ‘성의 자기결정권’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그에 대해서는 법률이라는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 같습니다. 그를 통해 박인수와 함께 성의 쾌락을 즐긴 여성들에게 ‘성의자기 결정’에 따른 책임감을 물은 것 아닐까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법학도나 법조인 사이에서 고인의 판결은 ‘시대를 앞서간 명판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보수’가 아닌 ‘진보적’인 혜안을 지닌 판사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권용갑 49·의사·전북 군산시 나운 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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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端雅한 `몸`차림 하도록…李 大統領, 婦女子 生活態度에

[端雅한 ‘몸’차림 하도록…李 大統領, 婦女子 生活態度에 言及]

李 대통령은 十六일 우리나라 부녀자의 생활태도에 언급하여 혼란된 환경하에서라도 단아(端雅)한 몸가짐을 가져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미풍을 살려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전란 이후로 부녀들 중에 조신(操身)해서 단아한 태도와 언사를 지키지 못하고 길에서 물건을 사거나 파는 데 있어서나 또는 타인들과 접대하는 데 있어서 상스러운 언사와 막된 사람들의 언사를 보이며 음성이 높고 행동이 무례해서 남이 보면 예의 없는 사람으로 알게 되니 우리 부녀 전체에도 좋은 명예를 주기 어려우니 여태(女態)를 많이 보유해서 미개한 사람들의 태도를 아무쪼록 벗어나야 할 것이다.”[동아일보 1954년 11월 17일자에서pdf_view(2).pdf]

[여인들 몸가짐까지 관여했던 `家父長 대통령`]

 나라 전체가 전후 복구에 정신없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이례적인 담화문을 발표한다. 부녀자들에게 ‘여자다운 태도’를 갖추도록 당부하는….

아마도 전후의 ‘신풍속도’가 배경이었던 것 같다. 교수 부인의 춤바람을 다룬 소설 ‘자유부인’(1954년), 댄스홀을 들락거리며 여대생 등 70여명의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엽색행각(1955년) 등이 사회문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오죽했으면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말이 유행했을까.
전쟁 직후 여성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생활전선에 직접 나서는 일이 늘면서 낯 뜨거운 각종 부산물이 생겨나고, 그런 사건들이 마침내 ‘가부장(家父長)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의 행동거지까지 챙기는 대통령의 행태에서 유교적 권위와 민주적 리더십이 혼재된 건국 초기의 과도기적 정치상황도 엿보인다.

'조신’ ‘여태’ 등 담화에 사용된 용어들만 봐도 가부장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오늘날 여성계의 입장에서 보면, 상스러운 말이나 무례한 행동에서는 남자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대통령이 부녀자들의 태도만 문제 삼았느냐고 항의할 법하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지도자였지만 당시 국민에게 대통령은 군주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여전했다.

이런 유교적 권위주의는 그 뒤에도 한국정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 때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법의 지배’보다 ‘사람의 지배’로 흐르곤 하는 대통령의 권력독점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내면화되지 못한 ‘민주적 리더십’의 이면은 그런 것인가.

발행일: 2004-11-15 기고자: 성동기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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