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한국 최초 여기자 李珏璟

marineset 2023. 5. 30. 05:39



한국 최초의 여성기자는 매일신보의 이각경이다. 이씨는 경성출생으로 한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곧 귀국했다. 그후 교육계에서 2년 종사하다가 1920년 9월 5일 매일신보에 입사하였다.

우리 나라의 최초의 여기자는 1924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근무했던 최은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사저널 1992년 9월 17일자 문화란에 실린 정진양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글에 의하면, 공채로 신문사에 들어간 최초의 여기자는 최은희보다 4년 먼저인 1920년 9월에 <매일신보>에 입사한 이각경이다.

<매일신보>는 1920년 7월 1일 신문에 여기자 공채사고를 내고 우리 나라 최초로 여기자를 채용하게 되었다. 응모자격은 가장있는 부인이라야 하며, 연령은 20세 이상 30세 이하이고, 학력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 이상으로 문필에 취미가 있어야 한다.

<매일신보>는 가정개량과 여성계의 개조를 위해서는 현숙하고도 박학한 여기자의 책임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여기자의 자격 가운데 첫째가 '가장있는 부인'이었으며, 명칭도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였다.

부인기자로써 이씨는 여성을 위한 계몽적인 기사를 주로 썼고, 보수를 바탕으로 한 개혁론을 피면서 여성운동의 최첨단에 서서 기수노릇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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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論史學者 鄭晉錫 교수가 추적한생애

「번민 끝에 飮毒… 남편 사랑하는 기생이 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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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晉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일본 천리大 교환교수. 재단법인 LG상남 언론재단 이사.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한국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등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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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에 자살 기도 음독

1920년 9월 5일자 매일신보. 李珏璟의 입사를 알리는 기사가 게재돼 있다. 사진이 李씨의 얼굴이다. 1925년 7월27일 밤 11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李珏璟(이각경)은 서울 笠井洞(입정동) 15번지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신음 중인 그를 집안 사람들이 발견하고 낙원동 仁濟病院(인제병원)에 연락하여 의사 朱榮善(주영선)이 달려와 응급치료를 했으나 이미 신경중추가 마비되어 소생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1920년 9월 총독부 기관지 每日申報(매일신보)의 기자로 화려하게 등장하여 계몽적인 여성 관련 기사를 썼던 최초의 여기자로 활약했었고, 자살을 기도했던 당시에는 마포보통학교 訓導(훈도=교사)였던 첨단의 新여성 李珏璟은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28세의 짧은 일생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李珏璟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때는 「乙丑대홍수」로 알려진 500년 만의 물난리로 참담한 수해를 겪고 있던 무렵이었다. 乙丑대홍수는 기상관측이 실시된 이래 최대의 홍수 피해로 기록되고 있다. 한강 뚝이 무너져 서울의 이촌동, 용산, 마포 등 한강변 일대가 범람하여 물바다로 변했다. 1만5000여 호의 집이 침수되었으며 시내 중심지 곳곳과 종로, 관훈동 일대도 물에 잠기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어지고 전차와 기차 통신기관을 비롯한 문명의 利器(이기)가 완전히 멈추어 서울은 도시 전체가 마비되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같은 물난리가 닥쳤던 무렵에 李珏璟은 왜 자살을 기도하였나? 李珏璟은 우리나라 언론사상 여자로서 선구적인 행적을 남긴 사람이며 여성의 전문직 진출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李珏璟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행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상과 활동을 추적할 만한 기록은 너무나 빈약했다. 1920년에 每日申報가 공개 채용한 「부인기자」였다는 간단한 사실만 겨우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랜 추적 끝에 10여 년 전에는 그가 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고등여자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으나, 무슨 이유로 기자생활을 마감했는지, 홀연히 언론계를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李珏璟의 가족관계를 증빙할 문서와 함께 그의 음독자살을 보도했던 신문기사를 발견하여 신문사를 떠난 후의 생활에 관한 의문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경기여고 출신 「부인기자」 제1호

李珏璟은 매일신보의 첫 여기자 공개채용에 응시해서 탄생한 여기자였다. 그는 1920년 7월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여기자를 채용한다는 「社告(사고)」를 보고 응모하여 9월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하였으므로 최초의 여기자인 동시에 공채 여기자 1호이기도 했던 것이다. 매일신보는 여기자를 모집하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계의 추세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여성해방은 아직도 요원하다. 이를 통탄하고 가정개량과 여성계의 개조를 위해서 현숙하고 박학한 여기자를 모집한다>

그런데 응모자격은 첫째 「家長이 있는 부인」이라야 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미혼 처녀가 기자로 활동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것이다. 남편이 있는 「부인」이라야 남녀차별의 사회구조에서 여성의 지위를 체험하는 입장이 될 수 있고, 집안살림 경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명칭도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였다. ☞ 반년만에 6억번 주식초보 최대리???

매일신보가 부인기자를 모집하던 시점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지 약 3개월 후였다. 매일신보는 武斷정치 시기에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지가 없는 상황에서 총독부 기관지의 특권을 누리며 유일한 한국어 신문으로 독점적인 지위에서 발행되었으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후에는 이들 민간지와 경쟁을 벌여야 할 입장이 되었다. 매일신보는 민간지 출현에 대처하여 편집국의 기구를 개편하는 동시에 조선일보, 동아일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실시한 것이 부인기자 모집이었다. 李珏璟은 흔히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진 조선일보의 崔恩喜(최은희)보다 4년 먼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자 채용 사고를 낸 지 2개월 후인 9월5일자 매일신보에는 자랑스럽게 李珏璟의 입사를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의 부인사회를 위하야 건전한 붓을 휘두를 그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본사가 이미 천하에 고함과 같이 다년간 현안중이던 여자기자의 채용문제가 비로소 해결하게 되었는 바 이번에 부인기자로 입사하게 된 여사는 원래 경성 출생으로 엄숙한 아버지의 교훈과 따뜻한 어머니의 무릎 아래서 장중의 보옥과 같이 黃口(황구)를 겨우 면한 때로부터 새로운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는 바 그 사람됨이 총명한 중에도 정숙하므로 항상 학교의 온 존경과 온 사랑을 독차지하였었으며 거금 13년 전에 관립 한성고등여학교에 입학하야 대정 4년에 이르러 남의 뛰어나는 조흔 성적으로서 영광스럽게 졸업하얏다>

이 기사는 李珏璟이 1915년(대정 4년)에 한성고등여학교의 技藝科(기예과)와 사범과를 졸업하고 東京으로 건너가 공부했으나 가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귀국한 뒤 교육계에서 2년 동안 종사하였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가 종사했다는 교육계가 어떤 학교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부인기자가 입사했다는 기사와 함께 매일신보에는 李珏璟이 직접 쓴 「입사의 辭(사)」가 실려 있었다.

李珏璟은 이 글에서 여기자로서의 사명감을 피력했다.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여자를 너무 멸시하고 무시하여 여자는 다만 남자의 종속적 물건으로 절대 복종하고 절대 무능한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신문사업에 나선 책임은 참으로 무겁다고 기자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李珏璟이 졸업한 한성고등여학교는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1908년 4월에 설립되어 교장에 魚允迪(어윤적)이 취임하고 7월6일부터 본과와 예과의 수업을 시작했다. 1911년 11월에 「고등여학교령」이 공포되면서 학교 이름을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바꾸고 본과와 기예과를 두었다가 1914년에는 사범과를 설치했다. 교육은 예과 2년, 본과 3년 과정으로서 모두 5년이 소요되었다.

1920년을 기준으로 13년 전이라면 李珏璟은 1908년에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된 해에 입학했을 터인데 경기여고 졸업생 명단에는 李珏璟이 1913년에 졸업한 제3회 졸업생 2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사범과에 진학하여 1915년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사범과 졸업생은 22명이었다. 1913년 졸업생 가운데는 許英肅(허영숙)과 崔雪卿(최설경)이 있었다.

許英肅은 후에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소설가 李光洙와 결혼하는 사람이다. 許英肅은 의사로 개업했다가 동아일보의 여기자가 된다. 崔雪卿은 崔南善(최남선)의 여동생으로 朴錫胤(박석윤)과 결혼했다. 朴錫胤은 東京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국제법을 연구한 인텔리였는데, 1930년 2월에는 매일신보의 부사장이 되어 2년 반 동안 재직하다가 만주국의 폴란드 주재 총영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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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
1920년 7월 2일자 (매일신보)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이채로운 사고 하나가 실려 있다. '부인기자 채용'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다.
"...가정 개량 급 부녀계 개조의 완벽을 박함에난 현숙박한한 숙녀의 책임있난 노력에 재할 뿐이니라.
시세의 요구에 응하야 20세에서 30세 가량에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에 문필에 취미가
있는 가장있는 부인을 기자로 채용코저 함."
이 사고는 다름아닌 여기자를 공개 채용하겠으니 뜻있는 사람은 응모하라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국내에는 상당수의 신문들이 명명했었지만 여기자를 공개적으로 채용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 신문이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이때 채용된 여기자야말로 우리나라 신문사, 여성사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최초의 여성인셈이 되는 것이다.
이때 채용된 여기자는 다름아닌 이각경이다.
그녀가 이름을 밝히고 쓴 최초의 기사를 1921년 1월 1일자에 '신년 벽두를 제하야 조선의 가정의 주부께'라는 계몽적인 내용의 논설이었다.
그 논설의 제목 밑에 '본사 기자 이각경 여사'라고 이름이 발혀져 있다.
이각경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데 당시 신문기자였던 유광렬의 1970년 회고에 의하면 그녀는 주로 명사들의 인터뷰 기사를 썼다고 한다.
또한 그녀와 동시대에 여기자로 맹활약했던 최은희의 회고에 의하면 긴 치마를 입고
고무신 신은 부인이 그녀보다 먼저(매일신보)에서 여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다는 말을
유광렬 씨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여기자가 바로 이각경인 것이다.
아직 유교의 전통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였던 만큼 여성이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초창기 때 활약했던 여기자들은 선각자적인 기질이 농후했고,
성격부터가 진취적이었으며 맹렬여성이란 호칭을 마다하지 않았다.
탄실 김명순이 그랬고, 허헌의 딸이었던 허정순이 그랬으며 (조선일보)에 입사했던 최은희가 또한 그랬다.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이 등장할 무렵을 보면 여성을 기자로 채용하려는 신문사측의 고층을 어느 정도 느낄 수가 있다.
무엇보다 남편이 있는 부인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내건 걸 보면 풍기 문제를 염려한
것이 분명하다.
역시 남성들 속에서 일해야 했던 만큼 그런 문제가 우선적으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우습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당시로서는 그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으리라.
그럼에도 부인이어야 한다는 전제로 여기자를 모집한 것은 용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고에서, 밝힌 대로 여기자를 채용하려는 것은 '시세의 요구에' 응하기 위한 것이었다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을 때까지의 고심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최초의 여기자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매일신보)가 동아, 조선이 나오기 전까지 유일하게 발행되었던 우리말 신문이라는 점,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문화적 의의를 전혀 도외시할 수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각경의 출현은 그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매일신보)는 일제 통치 전 기간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부정적, 긍정적 측면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문이었다.
(혈의 루), (무정)등의 작품이 선보인 곳도 바로 이 신문이었고,
이곳에서 일했던 기자들 중에 1920년 민간지 창간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도 있다.
또 동아, 조선이 폐간되자 그곳에서 근무하던 기자들이 이 신문에 몸을 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매일신보)는 일제 36년의 식민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이곳에서 최초 여기자로 근무 했던 이각경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지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무신에 긴 치마를 입고 명사 탐방을 떠나는 한 부인의 모습일 뿐이다.
그 이후로 이 땅에는 부인 기자 대신 여기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여졌고, 기라성 같은 여기자들이 명멸한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최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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