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同床異夢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marineset 2023. 5. 30. 06:29
[전원책/변호사 시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7월 30일 참 기가 꽉 막히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탄 승용차를 경찰이 검문하고 트렁크까지 검색하였다 하여 종단에서 '야단법석'이더군요.
야단법석(野壇法席)이되, 법석을 펼 자리가 아닌 것 같아 기가 막혔다는 말씀입니다.

종교는 그 어느 경우라도 정치와는 담을 쌓아야 합니다. 종교가 정치와 연통하게 되면 권력의 맛을 들이게 됩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그런 전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나라의 존망이나, 대중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종교가 세속의 일에 연연하여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종교가 정치권력에 영합하거나 그 반대로 간섭하게 되면 종교는 그때부터 청정한 성역이 아니라 혼탁한 사바(娑婆)가 될 뿐입니다.

그런 뜻에서 무슨 종교행사마다 정치인들이 맨 앞 줄에 앉아 있는 모습은 참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대중의 앞자리를 차지할 까닭이 없는 것처럼, 종교가 그 분들을 배려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스스로 부처 앞에 나가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야 뭐라 하겠습니까만 선거 때마다 성직자들을 '배알하는' 정치인들과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는 성직자들을 보노라면 절로 혀를 차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관계 없이 종교를 찾아다녔고 성직자들은 괘념치 않고 다 받아 주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청와대에서 민심을 듣는다면서 성직자들을 초대하는 일이 이 나라에선 어색하지 않게 돼버렸습니다. 그런 높은 지위의 총무원장 스님을 그만 경찰이 방약무인하게 검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설마 경찰의 검문이 지관스님에 대해 예우를 다하지 못했다 하여 법석을 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중(僧)에 고하(高下)가 있어본들 부처님 손바닥 안이 아니겠습니까. 아니할 말로, 스님들이 대우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찌 중노릇 한다 하겠습니까. 스님들이 탄 승용차를 검문 검색하는 것 자체에 대한 불만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성직자라 하여 세속의 법과 상관없이 살 수 없거니와 법 집행을 막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기독교도이고 특정 교회 인맥이 이 나라 수뇌부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불교가 여러모로 피해를 입는다 합시다. 그렇다고 불교가 성내어 무엇하겠습니까. 불교는 그 어떤 기독교인이 집권을 하더라도 결코 폄훼할 수 없는 '성역(聖域)'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아마 조계사에 한 달째 농성중인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수배자에 대한 배려라 여겨집니다. 안그래도 이미 조계종은 이 문제로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수배자를 체포하기 위해 조계사 경내에 들어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옛날 삼한(三韓)시대에 솟대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신을 모시던 장소였지요.
당시에는 '신앙'이 모든 권력에 앞섰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자가 이 솟대로 도망쳐 숨으면 군장도 감히 들어가 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계사가 '솟대'가 된 것이 아닌가 염려합니다. 광우병대책회의 수배자들이 옳든 그르든, 어차피 세속의 '정의(正義)'는 법원에서 판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이 나라의 공권력이 잡으려드는 것을 세속과는 초연해야 할 종교가 막아서도 안 되고 막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죄지은 자마다 절집으로 도망쳐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때마다 스님들이 재판하여 공권력에 넘겨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시렵니까. 세속의 죄가 부처 앞엔 다 죄가 아니듯 죄인을 그리 구별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조계사는 부처의 법력(法力)이 광활히 펼쳐지는 성역이지, 세속의 법에서 벗어나 있는 치외법권(治外法權)의 '솟대'가 아닐 것입니다. 공권력이 조계사에 들어와 수배자를 잡는 일을 불교에 대한 침탈로 보셨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불교를 비하하는 것이요, 사원(寺院)을 부처의 법당(法堂)이 아닌 세속의 법당으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산문폐쇄라니요. 전국의 절집 문을 다 걸어잠그겠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느 스님이 하신 겁니까. 절이 어디 스님들의 것이었습니까. 절이 부처님의 것이라면 나라가 존망에 처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수도를 하는 스님들이 절집 문을 닫아걸겠다는 말씀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부처님은 스님들만의 부처님이 아니라 고해에 빠져 있는 모든 대중들의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문명국가인 이 나라에서 지금처럼 공권력이 무력해진 적이 없습니다. 명백히 불법인 야간 시위대는 머릿수로 열 배가 넘는 경찰을 비웃으며 거리를 행진합니다. 누가 그런 시위를 비난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 험악한 욕설과 협박이 쏟아집니다. 합법적인 수사권을 가진 검찰이 소환을 해도 감사원이 출석을 요구해도 공영방송의 사장이란 분은 들은 척도 않습니다. 이런 공권력의 무력화에 불교가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속상합니다.

고려조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스님(1299-1375)의 말씀을 다시 새겨볼까 합니다.
경한스님은 임제(臨濟) 18대손인 석옥(石屋)으로부터 마음(心)을 전해 받고 지공(指空)에게 법(法)을 물은 대선사로서,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佛祖直指心體要節)는 바로 스님이 쓴 것입니다. 그 분의 평생 시자(侍者)인 석찬(釋璨)스님이 쓴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가운데 신흥사입원소설(新興寺入院小說)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전합니다.



'산시산 수시수 승시승 속시속(山是山 水是水 僧是僧 俗是俗)'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중은 중이고 속은 속이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한 칼입니다. 보우(普愚)스님이나 나옹화상(懶瓮和尙)과 달리 스님은 왕사며 국사를 마다하고 수행하다 누더기 한 벌로 취암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성철(性徹)스님이 이 칼을 다시 뽑은 지 반 갑자(甲子)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중 노릇 제대로 하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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