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同床異夢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자
marineset
2023. 5. 30. 06:33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자
2010년 03월 04일 (목) 18:45:27 안호원
몇 해 전 입적하신 성철 스님이 중생들 앞에서 말씀 하셨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법어가 한 때 큰 화젯거리로 장안이 떠들썩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당연한 말이 왜 화젯거리가 되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미천한 필자로서는 그 법어에 담긴 심오한 뜻을 이해 못하고 그저 유명하신 분이 하신 말씀이라 유명세를 타는가보다 생각하고 덤덤한 마음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 대전에서 올라오는 열차에서 우연히 노스님(비구니)이 내 옆좌석에 앉게 됐다. 82세라지만 정정하신 노스님은 내게 말을 걸어 어떤 일에 종사하시는 분이냐고 물으신다.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공직자냐, 군인이냐 하시며 자꾸 말을 걸으셨다.
내 신분을 밝히자 풍기는 모습에서 그런 것 같았다고 웃으시며 중과 같이 하셔서 불편하시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으신다.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화젯거리로 성철 스님의 법어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화두가 되면서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을 알았다.
700년전 중국에서 다섯분의 큰 스님이 금강경을 해설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에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荷處).(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라는 야보(治父)스님의 시구(詩句)가 담겨 있는데 이를 성철 스님이 그 앞의 구절만 인용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부처님을 만나면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만물의 근본이 하나이므로 산과 물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심오한 뜻이 담겨진 그 구절 일부를 성철 스님이 인용 법당안에서만 부처님을 찾는 불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것이다.
그제서야 성철 스님의 그 법어에 대한 심오함을 뒤늦게 깨닫고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표했다. 한 종교인을 떠나서 성인에 대한 예우였다. 불교에서는 흔히 깨달음을 견성이라고 한다. 일체 만물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보고 알았다는 뜻이다.
견성에는 법열(法悅), 곧 깨달음으로 인한 기쁨이 수반된다. 주머니가 텅텅 비어 있어도 즐겁고 먹지 않았어도 배고프지 않는 기쁨이다. 불교계에서는 이 때를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말한다. 이유는 이 때가 이제 겨우 입문했을 뿐인데도 자기 스스로가 ‘도’를 터득한 존재로 착각하고 누가 더 큰 수행의 도를 깨쳤는지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며 부처님의 자비를 말하면서도 누구보다 오만함과 교만함이 가득 찰 때가 바로 이 때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또 이런 말을 한다. ‘남정네가 장작을 패고 아낙네가 물긷는 것도 구도의 행위’라고 한다. 이 때부터 참된 의미의 불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고 하신 것은 참된 불자됨의 여부는 비록 법당을 떠나있을지라도 자기 삶의 현장에서 판가름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법어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시 위와 마찬가지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자기 삶은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해왔고 또 사용되어져 왔다. 그래서 자기 직업과 소유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영(靈)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되면(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성령세례, 또는 침례라고도 한다)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예전의 삶의 모습이 아니다.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진리앞에서 이제껏 살아왔던 모든 삶의 가치가 무의미해 보이게 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과 하늘나라에 대한 번민을 하게 된다.
이 시기가 되면 불교와 마찬가지로 위험 한 시기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우주만물이 다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허구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자신만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마치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게 사는 것으로 착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가 가장 위험하고 또 시험에 빠지기 쉬울 때라고 한다.
이 시기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모든 가치체계가 바뀐 단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견성은 오도의 경지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산은 산이 되고 물은 물이 되는 가치체계가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울러 자기 유익과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한 도구로서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때부터 무슨 일을 하든 참 신자로서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직업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바뀜으로 삶에 대한 변화가 오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모 신문에 ‘중’(승려)을 ‘스님’이라고 호칭했다며 어느 기독교인이 항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벤쿠버 겨울 올림픽 중계에서 흥분한 해설자가 ‘주여’ 라는 말을 했다고 일부 불교계가 특정종교를 운운하며 성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칭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중생(重生.기독교-새롭게 거듭난 자). 중생(衆生 불교-함께 존재하는 공동체) 모두가 이 세상에서 함께 하는 공동체인데 부끄러움과 함께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성철 스님 법어처럼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면 되련만 어찌하여 사랑의 예수와 자비의 부처는 어디로 보내고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일까.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스님이란 중(승려)이 자기 스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했다. 또한 성직자로 불리는 목사나 신부의 경우 일종에 사회적인 직급으로 고유 명사다. 성경에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면 너희도 먼저 그리하라’ 하셨다. 마찬가지다. 남을 높여주면 나도 높은 대우를 받을 수가 있다.
남의 부친을 부를 때 어떤 이는 아버지로 또 어떤 이는 아버님이란 호칭을 부칠 수 있다. 또 어떤 상황이 돌발했을 때 대부분이 무의식중에 어머니나 엄마 이름을 부른다. 마찬가지 원리다. ‘님’자는 글자 그대로 높임말이다.
그저 남에게 높임말을 썼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기독교인이기에 몸에 배인 ‘주여’를 찾을 수도 있다고 좋게 생각하자. 그런 마음을 갖는 게 참 신자가 아니겠는가. 법당 안에서만 자비를 베풀고, 교회 안에서만 사랑을 나눈다면 그것은 참 신자가 아니다.
모든 불자가 법당 밖 일상의 삶 속에서 불법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밖에서 자신의 삶과 직업을 구도자적인 입장에서 성직으로 수행을 한다면 이 세상은 더 없이 맑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천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작금처럼 종교계가 철길처럼 갈라져 분열을 조장하면서 불자와 기독교인들이 불당과 교회 안에서만 부처와 예수를 찾는다면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세상은 더욱 혼탁해지고 어지러워질 뿐이다. 결국은 우리가 세상을 속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부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그에 영광을 가리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밝은 세상, 맑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악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 열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부처님은 이게 아닌데 하시며 우실 것 같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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