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경 연해주 이주로 시작된 우리나라 해외동포는 규모로는 중국, 이태리, 이스라엘, 인도 등에 이어 세계 5위, 인구 대비비율로는 이스라엘, 이태리에 이어 3위에 해당된다. 해외동포들은 다음과 같은 비극을 겪으며 살아남아 현재 8 백만명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1.블라디보스톡 신한촌 사건: 독립군이 일본군을 공격한대 대한 보복으로 1920년 4월에 신한촌이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한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유격대가 일본군을 습격할 때 한인들이 같이 유격전을 전개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여 그 이튿날 아침에 큰 마당과 큰 거리에 시체가 산 같이 쌓이고,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 또 한민학교를 벤진을 부어 불지르고 체포한 한인 유지와 청년을 다 처형한다.
2.1920년 경신년 대참안: 1920년 9월 청산리전투에서 2천 5백명의 독립군은 5만명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3천 3백명이나 사살한다. 보복으로 일본군이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이 "대토벌" 에서 훈춘, 연길, 화룡, 왕청 4개 현에서만 한인 3,500여명을 살해하고 5,058명을 체포하였으며 가옥 2,500여 채, 사립학교 30여 개소, 양곡 4만 5,000여 섬을 불태웠다. 특히 "해란강대참안"은 일본군이 해란구에 대해 94차의 토벌을 감행하여 항일군중 1,700여명을 살해하였다.
3.1923년 관동대지진: 1923.9.1 오전 11시58분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關東)지방에 7.8도의 대지진이 일어난다. 이 지진은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했다. 사망자 9만9,331명, 가옥 전파(全破) 12만 8천 266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다음날 야마모토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 '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조선인 측에서는 3만 명, 일본측에서는 6천 여명으로 집계 되었다.
4.1937년 강제이주 사건: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자 당시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지도자 2,500명을 먼저 사살한 후 18만여 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킨다. 9월에 시작한 강제이주는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고 시베리아 횡단 열악한 열차 속에서 한인들이 죽어 갔으며 하차한 중앙아시아의 반 사막지대에서 겨울을 나면서 한인들의 5분의 1이 죽어갔다. 한인 촌에 일본 스파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다.
5.1992년 LA 폭동사건: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은 인종차별과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로드니 킹 구타사건과 백인경관들에 대한 무죄평결이 그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불똥은 한인촌으로 튀었다. 흑인과 히스패닉 폭도는 사흘 동안 한인타운을 유린했다. 세 집에 한 집 꼴로 불이 나 상점 2,800곳이 파괴되고 4억 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언론은 노골적으로 ‘한-흑(韓黑) 갈등’을 부추겼다. 흑인밀집지역의 상권을 장악한 한인들은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당시 LA폭동은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이었다.
국경 지대인 함경북도 경원군 출생이다. 1902년 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 그는 1911년 경에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김좌진 등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1]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이다. 이범석과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은 총재를 맡았다. [위키백과]
1921년에는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러시아 제국기부터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알렉세예프스크Алексеевское'라고 불렸다. 스보보드니라는 이름은 공산주의자인 적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바꾼 것으로 러시아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구한말 한국에서는 이 이름을 의역해 자유시라고 불렀다. 한편 이 적군은 한국독립운동 사상 최악의 악몽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다. 한국인들이 이 작은 도시 이름을 들어봤다면 분명 자유시 참변 때문일 것이다.
Svobodny is a town in Amur Oblast, Russia, located on the right bank of the Zeya River, 167 kilometers north of Blagoveshchensk, the administrative center of the oblast. Population: 58,778; 63,889; 80,006.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