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여행

안섬포구

marineset 2026. 10. 14. 11:33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에 위치한 안섬포구는 원래 아산만 안쪽에 있던 작은 섬(안섬)에서 유래한 역사 깊은 어촌 포구입니다. 
안섬포구 역사 연표
시기 / 연도주요 역사 및 변화 내용
조선시대~근대 • 아산만 건너편(우정읍 남포나루 등)을 오가는 나루터이자, 황해도 연안까지 조기잡이를 나가던 어업 전진기지 역할 수행
• 행정구역: 조선시대 홍주목 신평현 → 1895년 면천군 → 1914년 당진군 편입
1960년대 • 1960년 유두목 다리가 놓이면서 육지와 연결됨
• 1965년 연륙교 가설
1970년대 • 1971년 새마을사업으로 제방을 확장하여 정기여객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함
• 야간 조업 및 입출항 안전을 위해 포구에 등대 신설
1980년대 • 1981년까지 송악면의 유일한 유인도(면적 1.2㎢, 1980년 기준 주민 535명 중 80% 이상이 어민)였음
• 1983년 송산방조제 준공
1990년대 이후 • 1995년 한보철강(현 현대제철)이 공유수면을 포함해 공단을 조성하면서 완전한 육지화가 이루어짐

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안섬포구 1 송악에서 가장 큰 섬이었던 ‘안섬’

 

당진시대 (djtimes@hanmail.net)

 

현재 송악읍에는 섬이 존재하지 않지만, 남양만과 아산만에 접해 있고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하여 여러 개의 섬이 존재하였다. 특히 바닷물이 송악읍의 고대리, 월곡리, 정곡리를 지나 석포리까지 드나들면서 내륙에 형성된 내포(內浦)가 발달하였다.

송악 지역에 존재했던 섬으로는 안섬, 구지섬, 딴섬, 대섬 등이 있었으며 이 중 면적이 가장 넓고 규모가 큰 섬이 안섬이었다. 송악면지에 따르면 “안섬은 송악면 내에서 한진과 함께 어업이 발달한 곳으로 현재도 어업의 명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안섬은 원래 송악면 유일의 유인도로 1.2㎢ 면적에 535명(1980년)의 주민이 거주하던 큰 섬으로 주민의 80% 이상이 어민이었다. (중략) 육지와 100m 정도 떨어져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하던 차 1971년 새마을사업으로 제방을 확장하여 정기여객 버스가 다니게 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또한 “송악면의 최북단에 위치한 안섬은 1981년까지 송악면의 유일한 유인도였다. 1983년 송산방조제 준공과 함께 1995년 한보철강이 공유수면을 포함하여 79ha의 공단을 조성하면서 완전히 육지화 되었다. (중략) 마을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갯벌에 유도(流道)라고 부르는 징검다리를 놓고 바닷물이 빠진 후에 건너서 육지로 왕래하다가 1960년 장만순 이장 재임시 주민의 숙원에 따라 하태봉·김기환 등의 노력으로 충청남도 지원사업비를 얻어 폭 3m의 연육도로를 완공하여 도보로 자유롭게 육지로 통하였다”고 쓰여 있다.

송악읍의 옛 도서 현황

 

섬 이름 소재지 간척년도
안섬(內島) 송악면 내도리로 1960년도에 돌로 제방을 쌓아서 고잔과 연결하여 현재는 간척으로 완전 육지화됨. 145가구가 거주하였음. 1960년
구지섬(九芝島) 송악면 정곡리 배울 서북쪽 400m에 있던 섬으로 곶으로 됨. 현재는 육지화됨. 4가구가 거주하였음. 1943년
대섬(竹島) 송악면 내도리 남쪽 200m 전방에 있던 섬으로 송산간척지 개발 사업 때 육지화되었음. 현재는 현대제철연구소가 자리하고 있음. 1990년
딴섬(똥섬) 1951년때 고대리 고잔 연안과 월곡리 개머리 일대 연안을 막아 고합사 염적을 만들면서 육지화됨. 1가구가 거주하였음.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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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가곡리와 동곡리의 나루터 2
“썰물 때면 바지 걷고 걸어 다녔지”

 

 

동곡리 은골과 쌍천동 

 

송산면 동곡리에 남은 옛 지명 중 ‘은포’라 불리는 포구를 기억하는 이는 만나지 못했다. 다만 현재 송산방조제를 막은 지점에 은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안평일 씨의 집은 앞마당에서 낚시대를 던지면 바다에 닿을 만큼 바다와 가까웠단다.

“지금 송산방조제에 위치한 휴게소 바로 옆이 옛날 우리집터인데, 집에 앉아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망둥이 잡느라고 낚시질을 했어. 거길 은골이라 불렀어. 그 근처에서 어업했던 사람은 나 하나였고. 집 앞까지 물이 들어오니까 포구는 아니었어도 배를 대놨었지. 그리고 우리집에서 한 500m 떨어진 곳에 소금을 실어 나르는 부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쌍천동이라는 데여. 소금 실은 돛단배가 그때만 해도 한 10척은 왔다 갔다 했지.”

송산면 동곡리와 송악읍 고대리 사이로 흐르던 바닷길은 신흥개발 방조제와 송산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막혔다.

 

동곡리와 안섬 사이 ‘장거리 해변’

 

“동곡리 땅인데 성구미하고 사이지. 지금 현대제철 고로 세운 곳, 그 자리일 거야, 아마. 거길 윗장거리, 아랫장거리라고 부르는데, 장거리에 바위가 세 개가 있었어. 그 사이에 곤쟁이 잡는 살을 두 개 쳤다고.

그때는 그물이 없으니까 갈대 같은 걸로 밀짚방성 만들듯 엮어서 끄트머리만 모기장 같은 걸로 만들어서 세워놓고 곤쟁이를 잡았어. 젓갈 담가 먹는 곤쟁이라고 있어. 아주 작은 새우 같은 거. 그걸 지금 돌아가신 이춘호 씨가 했던 걸로 알어.”

그 밖에도 장거리라 불리는 해안가에서 사둘질도 이뤄졌다.

“나 어릴 때 어른들이 밤중에 가서 사둘질을 하셨지. 밤에 가야 많이 잡으니까. 그때는 전깃불도 없고 하니까 석유등 달고 가서 물 들어올 때 가서 사둘질을 했다고. 위험했지. 그때만 해도 안개도 많이 끼고 그러니까 못 나와서 죽은 사람들도 많았지.”

1960년대에만 해도 간조시 동곡리와 내도리 사이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사람들이 바닷길로 왕래를 했단다. 사리 때 물이 많이 빠져나가면 바지를 걷어붙이고 걸어 다닐 정도였다.

“조금때는 물이 많이 안 나가니까 수영 쳐서 왔다갔다 했다고. 거기서 얼마 안 되니까. 옷 벗어서 머리에 감고. 그때는 내도리라 하지 않고 안섬이라고 했는데,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길로 갈려면 중흥리 거쳐서 빙 돌아야 하니까 아침부터 걸어도 저녁 때나 다 돼야 안섬에 들어가잖어. 그러니까 쉽게 바닷길로 건너 다녔지.”


우현선 작가

 

 

 

당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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