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작가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

marineset 2023. 5. 29. 01:57
작가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


최정희와 두 딸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970년대 초의 어느 날 저녁 문인들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문학상 시상식 후의 뒤풀이 자리였던 것 같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한 젊은 문인이 앞자리에 앉은 60대의 여류소설가 최정희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일제 때 왜 친일 활동을 하셨나요?”


술 탓이거나 철없는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임종국이 60년대 후반에 펴낸 ‘친일문학론’의 파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에 해당하는 원로 문인들 앞에서 ‘친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로 생각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원로 문인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호통을 치고 자리를 떠났거나 못 들은 체 딴전을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최정희의 얼굴에 일순 당황하는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나, 뭐.” 친일 활동을 했던 대개의 문인들이 심정적으로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듣는 문인들이 오히려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최정희가 얼마나 순진한 사람이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정희는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부드럽고 담백한 성격이라는 것이 그를 아는 문인들의 인물평이었다.

최정희의 그런 기질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자리의 분위기를 좋아해 문인들의 술자리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화투놀이를 즐겨 문단의 화투꾼들을 집으로 불러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50년대 후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처음 소설창작론을 강의할 때 ‘너무 가슴이 떨려’ 소주를 몇 잔 들이켜고 강단에 섰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기질들이 타고난 미모에다 그 특유의 여성다움과 어우러져 최정희는 일찍부터 문단의 모든 남성들에게 애인이요, 누님이요, 어머니로 통했다.

20대 중반부터 6·25전쟁으로 남편 김동환(1901~?)과 생이별할 때까지 20여 년에 걸친 최정희의 삶이 그 어떤 소설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했던 것도 그와 같은 그의 성격이나 기질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최정희는 1906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한의사의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으나 아버지가 첩살림을 시작하면서 그의 삶도 고달파지기 시작한다.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보통학교에 다니다가 19살 때 숙명여고보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너무 나이가 많아 편입이 어렵게 되자 호적 나이를 여섯 살이나 낮춰 1912년 생으로 등재한 것이 평생 그 나이로 살게 된 계기였다.

30년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치진이 주도하던 학생연극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영화감독 김유영과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최정희의 삶은 파란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최정희는 지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정희는 홀로 귀국하지만 뒤따라온 김유영은 끈질기게 결혼을 강요했고, 아들을 출산하자 어쩔 수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난폭해서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데다 가정을 전혀 보살피지 않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 쓰던 최정희는 31년 동향의 시인 김동환이 운영하던 종합월간지 ‘삼천리’에 입사하게 되었다. 기자로 일하면서 곧바로 그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직장도 가졌고 소설도 쓰게 되었다지만 아들이 딸린 최정희의 삶은 여전히 삭막했고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동환은 그런 최정희를 여러모로 보살폈고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39년 김유영이 사망하자 두 사람은 경기도 덕소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김동환은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었지만 최정희는 이때부터 활력을 찾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폈다. 특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맥’ ‘지맥’ ‘천맥’ 등 이른바 ‘맥(脈) 시리즈’가 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써진 것을 보면 최정희는 문학적으로도 김동환으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42년 말에 큰딸 김지원이, 46년 말에는 둘째 딸 김채원이 태어난다. 자매가 똑같이 70년대 중반 소설가로 데뷔하게 되니 모두 부모에게서 문학적 재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집 살림이었지만 김동환은 세 모녀에게 자상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자매는 특히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여러 가지 기억들을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김동환은 6·25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 공산군들에 의해 청운동 ‘본가’에서 납치돼 북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정규웅 | 제161호 | 20100410 입력

파인 김동환이 지은 한국 최초의 서사시



시인 김동환


소설가 김지원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갔다-/ 오르명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김동환 ‘국경의 밤’ 제 1장-

뉴욕에 사는 소설가 김지원(65·사진)씨가 부친 김동환(1901∼?)의 서사시 ‘국경의 밤’을 각색한 시극(詩劇)을 월간 ‘문학사상’ 3월호에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은 파인(巴人) 김동환이 1925년 출간한 동명 시집에 수록된 작품. 3부 72장 893행으로 구성된 원작시는 두만강을 건너간 소금 밀수꾼 남편과 남편이 떠난 사이 돌아온 옛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순이’가 여주인공이다.

이를 통해 애정의 삼각관계, 지방 소외계층의 애환, 그리고 일제강점기 어두운 조국의 현실을 노래한 작품이다.

김지원씨는 친구인 소설가 서영은(63)씨에게 32년 전 “국경의 밤을 연극화하고 싶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한국전쟁 중 납북된 후 행방불명된 부친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각색에 몰두했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시극 ‘국경의 밤’은 두만강변 국경마을의 눈보라 치는 밤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회오리 소리가 날카로운 가운데 눈보라 치는 듯한 조명으로 가득한 극장.

아이를 업고 다듬이질하는 여러 여인들이 무대 위에서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를 외친다. 무대 한 구석으로 조명이 옮겨가면 등잔불 앞에 앉은 순이가 나지막이 읊조린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시극은 순이가 청년을 거부하고 남편은 주검으로 돌아오는 등 원작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3부는 3막과 4막으로 나눠 장면 연출과 이야기 전환이 쉽도록 했다.

원작시의 서사적 구성을 그대로 따르면서 지문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 원작의 시적 진술을 등장인물의 대화로 바꾸는 등 극적인 긴장감을 살렸다.

김씨는 총소리, 바람소리 등 음향 효과를 사용해 극의 암울한 분위기도 연극적으로 각색했다. 또한 ‘봄이 오면’과 ‘산 너머 남촌에는’ 등 부친의 서정시도 발췌 사용했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원작의 수사적 기교와 리듬 의식 등이 시극에서 어떻게 재편되면서 극적 상황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것도 이 작품을 새롭게 음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환과 김지원

시인 김동환은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일본 도요대학에 유학했다. 1925년 ‘금성’지에 추천을 받고 데뷔해 이듬해 시집 ‘국경의 밤’을 출간했다.

1929년 ‘삼천리’, 38년 ‘삼천리문학’을 창간해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평론을 발표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공민권을 정지당했으며 한국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소설가 최정희(1906∼90)는 숙명여고 졸업 후 삼천리의 기자로 일하며 김동환과 사랑을 키웠다. 이후 조선일보와 주부생활지에서 일하다 ‘지맥’‘인맥’‘장미의 집’‘인간사’ 등 소설을 발표했다.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지원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75년 현대문학에 ‘사랑의 기쁨’과 ‘어떤 시작’으로 데뷔했다. 1997년 ‘사랑의 예감’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내부의식과 분위기 묘사에 뛰어난 작가로 대표작으로 ‘알마덴’‘먼 집 먼 바다’‘모래시계’‘물빛 목소리’ 등이 있다. 김씨는 30여년 전 미국으로 이주해 맨해튼에 살고 있다.

동생 김채원(62)씨는 이화여대 회화과 졸업 후 1975년 현대문학에 ‘밤 인사’로 등단했으며, 1989년 ‘겨울의 환’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언니와 함께 자매 소설집 ‘먼 집, 먼 바다’‘집, 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 등을 펴내기도 했다.

박숙희 기자 sukie@koreadaily.com
 
  • 김지원이 말하는 자신의 문학과 삶



    ‘소설 나부랭이’를 읽으며 시작된 작가의 길

    김지원

    너무나 좋고 고마운 나의 이생

    서양 철학자들의 말이나 중국 고전의 글귀, 성경, 불경의 구절을 외워 대는 사람들을 보면 전에는 유식을 자랑하는 것 같아 답답하고 지루했었는데, 나이 들어 갈수록 나도 그렇게 되어 간다.

    무얼 좀 깨달은 것 같아 얘기를 하려고 보면, 그것을 너무나도 지혜롭게 설명해 놓은 얘기가 이미 있으므로, 내 말을 따로이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듣는 이들을 하품으로 눈물 솟게 하는 줄 알면서, 나 자신에게도 들려주고 싶어 그런 성현명철의 말이나 글귀들을 자주 인용하게 된다.

    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들이 처음 한낱에서 비롯되어 큰 하나가 열리는 것이니 --『천부경』에서

    나는 이생이 너무나 좋아서 내생으로 가기 전에 그 고마움을 어디엔가 표시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못 하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좋고 고마운 나의 이생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물과 엿이 녹아서 엿물이 되듯 그 안에 형제와 자식과 친구, 스승, 나아가 우리 민족에 대한 동포애, 더 나아가 인류애까지 깃들어 있다. 문득 바늘귀보다도 좁아 터진 나의 마음이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 생각에 미치게 되면, 생존해 계셨을 때 어리석게 굴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감당도 못 하게 마구 넓어지며, 하늘과 땅에서 우주와 지구로 뻗어 가고 확장된다. 그렇게 나의 상념의 세계는 천맥과 지맥과 인맥이 창세기인 듯 함께 어울려 소용돌치니다.

    지금은 제세상에 계신 세 분 아버지와 세 분 어머니

    동생 채원이의 지난 생일에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세인트 안소니 성당으로 가서 촛불을 켰다.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때여서 예수의 말구유 탄생 장면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으며, 성탄 장식이 반짝거리는 등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는데, 어떤 청년이 유년반 아이들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습시키고 있는 장면이 특히 내 눈길을 끌었다.

    어린시절 할머니를 따라서 다니던 덕소의 예배당과 동네 아이들을 따라다니던 서울 동숭동의 동숭교회가 생겨났고, 그때 어린이들을 지도했던 매력적인 젊은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그날 채원이와 함께 촛불을 켜며 형제는 참, 같은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부모, 조부모, 조국 등 똑같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채원이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버지가 세 분, 어머니도 세 분 계신다. 형제도 아홉이나 되는데 파인(巴人). 김동환 아버지와 신원혜 큰어머님은 4남매를, 최정희 어머니와 일찍 세상을 뜬 감독 김유영 아버님은 아들 하나, 그리고 우리에게 호적을 주신 김유영 아버님의 동생되시는 김영식 아버님은 남매를 낳으셨다. 지금 세 분 아버님과 세 분 어머니, 그리고 삼형제는 저세상에 계신다. 그분들은 우주에 가득 차고 나는 귀를 활짝 열어 놓은 채 그 우주가 내게 하는 말이 무엇일까 하고 귀를 기울인다.

    작년에는 김영주 언니가 시집을 내 파인의 세 딸들이 문학을 한다고 여성 잡지 같은 곳에서 화제성 질문을 받기도 했다. 채원이와는 너인지 나인지 모르게, 어떤 때는 집의 아이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채원이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서로의 생활에 막 참견을 해가며 성가실 정도로 정을 퍼부었으나, 혈연의 아버지를 함께 가진 김영식 오빠와 김영주 언니는 다른 면으로 꿈같이 사모한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지극스런 마음이 우러난다.

    김영식 오빠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납북되신 ‘파인 김동환’의 모든 원고를 찾아 정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실로 하늘이 낸 효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고, 사랑은 직관적으로 순수하게 아는 것이라 저절로 그런 노력이 되는 것일까 싶다. 김영식 오빠는 채원에게 우리들이 다 잘 돼야 한다며, 한집에서 문인이 셋이나 나왔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다고 한다. 셋은 무슨 셋? 대통령 셋도 아니고 의사 셋도 아니고, 문인 셋. 어떤 집에선 이거 야단났다 할 수도 있는 일이겠다.

    너무나 행복했던 유년의 뜰

    나는 1942년 11월 30일 생으로 여섯 살까지 경기도 덕소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저 행복한 시절이었다가 아니라, 어린애임에도 너무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좋았고 우리 집이 너무 좋았다. 시골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사는 일이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학교에 안 보내겠다고 했으나,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워 울며불며 떼를 써서 여덟 살에 서울 창경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대구 피난지에서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중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녔다. 학창 시절에는 별로 뛰어난 구석이 없었는데, 2학년 때『여원』신인문학상에 응모한 「늪주변」이란 소설이 당선되었던 기억이 있다.

    좋은 분들, 유명한 분들, 재능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난 어린 시절

    집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학원』지와 학원사에서 나온 어린이 문고는 물론이고, 『여원』『여상』『아리랑』같은 어른잡지들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서로 교양을 넓히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이 순전히 재미로, 재미있는 것만 읽었다.

    잡지에 난 소설을 삽화까지 자세히 보고 아껴 읽으면서, 소설은 ‘소설 나부랭이’로 공부를 안 하고 읽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알았다. TV가 있는 시절이엇다면 책을 그렇게 읽었을까 싶다. 아마도 공부는 안 하고 TV만 본다고 걱정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마다 다르기는 한가 보다. 채원이는 그처럼 책이 많건만 하나도 안 읽고 나가 놀기만 했다. 집에는 우리들이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놀러왔고, 놀다가 자고 가기도 했다. 오빠가 노래를 좋아해서 아코디언 소리, 기타 소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집에 온 언니들과『제인 에어』의 로체스터 같은 남자가 좋은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가 좋은가, 일본 소설『만가』의 가쓰라기가 좋은가, 그런 얘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 얘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참혹했던 한국전쟁을 겪고 허물어져 가는 집, 아픈 데가 많은 어른들, 가난, 그런 어두운 삶의 부분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밝게 떠오르는 추억의 장면들이다.

    그리고 지금도 자랑하고 싶은 것은 채원과 나는 가족 관계로도 남보다 사랑을 받았지만, 어머니로 인해 좋은 분들, 유명한 분들, 재능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이다. 하나도 귀엽지 않은 모습으로 이제는 전설같이 되어 버린 그분들을 아저씨, 아줌마라 부르며 버릇없이 굴던 일이 부끄러워지며 또한 몹시 그립다.

    곡마단집 아이들은 다 곡마를 한다고, 나는 작가되는 일을 쉽게 생각했었다. 나는 시인 아버지와 소설가 어머니의 자식이었으며, 늘 가까이 대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신춘 문예 혹은 현상 문예 심사 위원들이라 그렇게 착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체원과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에는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젊은 문인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오정희, 김청조, 김승옥, 김문수, 서영은, 김영태, 이제하, 송상옥, 이재연, 조문진 등(그 누구 이름을 하나라도 빼놓았는가 염려스러운데……). 그들 모두는 김현, 김치수, 염무웅 같은 젊은 동료 평론가들과 활동하는 신예 작가들이었는데, 나만이 작가가 아니었다. 채원도 물론 작가가 아니었으나 여기서 채원을 거론할 여지가 없는 것이, 그때 채원은 작가가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미술 숙제도 힘들어하는 미술 전공 학생이었다. 그 시절 나는 신춘 문예에 가명으로 응모를 했는데 다 떨어졌다. 네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실망어린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집은 문인의 집이라 해도 책만 많았지 집 안에 예쁜 찻잔이 있다거나 아름다운 커튼이 쳐 있다거나 하는 멋이 없었고, 어쩌다 눈에 띌 만한 것이 있다면 채원과 내가 이대 입구에 있는 선물 가게에서 하나씩 사온 것이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김영태 씨가 예술의 향기, 인생의 향기를 몰고 왔음을 얘기 안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나 신고 있는 구두를 보며 스페인의 무희 같다라든가, 「부베의 연인」에 나오는 크로디아 카르디날레 구두 같다고 말해 줘서 삶을 마술같이 변화시켰다. ‘누아르’라는 이름의 찻집, 맛있는 커피, 연극, 무용, 음악 이야기를 휘감고 자신을 초개라고 낮추며 사는 일 자체를 예술로 만들었다. 러시아 여자같이 생긴 눈이 큰 여자를 만났는데 좋다고 하더니 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감옥’에 갇힌 인간을 풀어 주는 문학

    1973년에 미국으로 오기 전에「사랑의 기쁨」으로『현대문학』에 황순원 선생님의 1회 추천을 받고, 미국에 와서「어떤 시작」으로 추천을 마쳤다. 서른두 살 때였다.
    그 무렵은 일본에 그림 공부하러 갔던 채원이가 미국으로 와서 1년쯤 계속 공부를 하다가 또다시 파리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가기 전인데, 뉴욕 맨해튼 지하철 속에서 글을 쓰겠다고 해 내가 속으로 깜짝 놀라며 말렸다. 채원이가 글을 쓸 줄은 몰랐었고, 또 외국에 나와 보니 같은 예술이라고 해도 그림이나 음악, 무용은 잘 받아들여지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문학은 거의 길이 없는 듯 보였었다.

    그 후 결국 채원이와 같이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보통은 서로의 글을 잘 안 읽고 지낸다. 글을 쓸 때 마음의 자유를 가지라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격려, 그리고 마음이 조여서 서로의 작품을 읽기 어려운 면도 있어서다.
    나는 나이 들어 가면서 작가라는 사람들이 더욱 좋아진다. 글을 몇 십 년씩 쓴 사람은 절대 나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이러니 좋은 사람, 너는 이러니 나쁜 사람, 너는 이러니 미친 사람, 인간에게 딱지를 붙여 분류해 감옥에다가 딱딱 집어 넣는 지식이 있다면, 그 감옥에 갇힌 인간을 풀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돌이켜보면 ‘소설 나부랭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가의 길로 들어서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려고 애썼던 나의 삶. 이제는 소설만 가지고도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가끔 사람은 동그라미라는 생각을 한다. 이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이고, 저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인데, 살아 가며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에 이해의 영역이 넓어지면 그 동그라미는 커진다. 아니, 안 커지고는 배겨 낼 수가 없다. 나는 장차 아주 큰 원으로 퍼져 우리나라의 개국 신화와 설화들을 이해해 보고 싶다. 불가능한 줄은 알면서도 그날을 바라보며, 그 동안에는 다른 소설들을 쓰고 있을 것 같다.

    [출처] 김지원이 말하는 자신의 문학과 삶

  •  김유영 감독 2016/06/01 07:24 # 삭제 답글

  • "조선영화예술협회" 카프 영화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김유영| ┌[[善山金氏]]───┐[☆ 역사 이야기 ☆]

    金鄭淳祚 |조회 23 |추천 0| 2005.04.03. 22:57




    카프(KAFT)는 1925년에 조직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의 약어이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에 따라 형성된 이 조직은 식민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는 예술지상주의에 반대하면서, 당시의 사회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주로 문학이나 연극 분야에서 운동을 펼쳐 나갔던 지식인들이 영화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26년에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조선 영화는 신파조의 통속 멜로물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 영화로 알려진 <아리랑>의 등장과 성공은 이들에게 큰 자극제가 된 것 같다.

    의식있는 지식인들이 영화계로 입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조선영화예술협회"였다. 이 단체는 안종화, 이유, 이경손, 김을한 등이 1927년에 창립한 단체였다. 구태의연한 신파극 탈피, 지식을 갖춘 신인 발굴, 영화인 동호회를 통한 각본 검토와 연구 등을 실행했던 단체였는데, 여기에 임화, 김유영, 강호, 윤기정, 서광제 등이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강호에 의하면, 나운규는 이들 연구생에게 네 차례에 걸쳐 강의를 했는데, 이 네 번에 걸친 만남이 9개월 간 진행된 연구생 생활의 최대 수확이었다고 한다.

    이들 연구생들은 1927년 8월에 카프에 가맹하여 카프 영화부로서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창립 멤버인 이경손, 김을한, 안종화 등을 축출하여 단체의 성격을 바꾸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안종화에게 제공된 생필름을 확보하고, 새로운 투자자를 확보하여 조선 최초의 카프 영화인 <유랑> (1928)을 제작하게 되었다.

    <유랑>은 이영진이라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영진과 순이의 사랑이 마을의 지주에 횡포로 훼방 받게 되자 고향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한다. 주인공의 이름이 영진이라는 점, 지주와 빈농의 대립 구도를 설정한 점, 사랑하는 남녀가 등장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아리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랑>을 감독한 사람은 김유영(본명은 김영득, 일명 김철)이었다. 그는 당시 영화 평론에서도 활발한 활약을 했던 지식인으로 카프 영화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이었다. 김유영은 1928년에 <혼가>, 1931년에 <화륜> 등의 카프 영화를 계속 연출하였다. 첫 번째 작품에서 당대 현실의 모순이 첨예하게 그려진 인상은 별로 없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으로 갈수록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그들의 삶을 보다 사실적으로 반영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효인의 경우 이 세 작품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을 지닌 작품이었는가에 대해 회의를 품는데,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그 시비를 검증하기는 어렵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당시 카프 영화들은 검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혼가>와 <화륜>이 검열로 인해 여러 부분이 삭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강호 감독의 <지지마라 순이야>는 검열 불합격으로 상영도 못했고, 그의 다른 영화 <지하촌>은 자금난과 당국의 감시로 인해 완성도 되지 못했다. 이효인에 의하면, 이외에도 <도로>, <낙동강>, <어머니> 등의 작품이 촬영에 착수했으나 완성되지 못한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김유영의 초기 세 작품 모두가 흥행에서 실패를 했는데, 이러한 당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김유영은 <화륜>이 흥행에서 실패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쿄토에 있는 일활(日活) 촬영소에서 영화의 연출과 기술을 습득하고 이듬해에 귀국한 그는 당분간 문단에서 활약하다가 1939년에 <애련송>이라는 작품으로 영화 연출을 재개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부터 그의 경향은 이전과 달라진다. 김수남은 이 후기 작품의 경향을 "탐미적이며 서정적인 색채를 띠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다섯 번째 작품은 1940년에 개봉된 <수선화>였다. 김유영이 지병인 신장염에도 불구하고 수레에 실려 나와 연출을 감행하다가 이 작품의 완성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작품은 결국 조감독 민정식에 의해 완성되었다.

    일제의 통압 정책 때문에 그가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순수 멜로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김수남의 지적은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시기에 김유영의 영화 만들기는 그 자체로 일제의 탄압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었다는 김수남의 지적을 한 번 곱씹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서광제 같은 카프 영화인이 이미 1938년에 최초의 일제 어용영화라 일컬어지는 <군용열차>를 제작하는 등 대다수 카프 영화인이 변절하여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자면, 김유영이 1939년과 1940년도에 친일적이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장우진 woojijn71@hanmail.net

    ※ 참고한 글들
    이효인, 《한국영화역사강의Ⅰ》, 이론과 실천, 1992.
    이효인, 《우리 영화의 몽상과 오만》, 민글, 1994.
    김수남, 《한국영화감독론 1》, 지식산업사, 2002.
    김 화, 《이야기 한국영화사》, 하서, 2001.
    김학수, 《스크린 밖의 한국영화사Ⅰ》, 인물과 사상사, 2002.
    안정숙, 〈김유영 - 스크린에 그린 식민지 현실〉,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②》, 한겨례 신문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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