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아! 죽미령(竹美嶺)

marineset 2005. 10. 29. 12:03

             

                          


 
이 고개에서 1950년 7월5일, 인민군과 유엔군 선발대인 스미스부대간에 최초로 교전이 벌어졌다.
초전기념비에서 바라본 죽미령.
photo by badoc 2005/4/11 오후 1시



죽미령 전투(1950. 7. 5)

[미군 최초의 전투]


◁ 미24사단마크
죽미령 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국군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파병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소속의 스미스(Charles B. Smith) 특수임무부대가 남하중인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주요장비와 군수품의 약 70%를 한강이북에 유기한 채 한강이남으로 내려온 국군은 그 후 한강저지선을 돌파한 북한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6월 29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맥아더 원수는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을 서둘렀다. 이 날, 트루먼 미 대통령은 지상군의 투입을 승인하였고 맥아더 원수는 즉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한국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미 제24사단을 우선적으로 투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선견대로서 제21연대를 선정하였으며 스미스 특수임무대대는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아 7월 1일 부산에 공수되었는데, 이들 대원 406명은 다음 날 대전에 도착하여 새벽 비가 내리던 7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만났다.

<무용지물 로켓포>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밀려드는 북한군의 보·전부대를 맞아 보·포 협동으로 치열한 단독전투를 치렀으나, 북한군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하여 약 12시간 동안의 방어전투를 치른 후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하였다.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34명의 포병과 함께 하였는데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첫 포탄발사는 7월 5일 오전 8시 16분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도 밀려오는 북한군 전차들을 파괴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도로변에 배치한 2.36인치 로켓포로 전차의 뒷면에 22발을 갈겨도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미군은 충격을 받았으며 북한군의 전차가 마치 거대한 전함(戰艦)과 같이 보였다고 말하였다. 미군들은 맥아더 원수가 말했듯이 그들만 전선에 나타나면 북한군은 겁을 먹고 모두 도망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이 전투로 쌍방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북한군은 미군의 참전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능력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출처 : 이것이 한국전쟁이다. 노병천 지음]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현실인식을 제대로 못해 맛봐야 했던 가장 쓰라린 패배 사례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
미군 첫 한국전 참전 스미스 특공대장 별세

[조선일보 2004-07-05 18:53]

죽미령서 탱크 4대 격파…6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
[조선일보 유용원 기자]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참전 미군으로는 처음으로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던 찰스 B 스미스 미 특공대장(당시 중령·88)이 지난 5월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지갑종(池甲鍾) 유엔 한국참전국협회장은 5일 오산시 주관으로 열린 ‘스미스 특공대 오산전투 제54주년 기념식 및 추도식’을 마친 후 “오늘 행사 소식을 알리기 위해 미국의 스미스씨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부인 베티 에번스 여사가 남편의 사망소식을 알려왔다”고 전했다. 베티 여사에 따르면 스미스씨는 지난 5월 23일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30여년간 스미스씨와 교분을 가져온 지 회장은 “지난 3월 국제전화로 통화했을 때도 ‘건강이 좋다’고 했는데 사망 소식을 들어 충격을 받았다”며 “오늘 전화를 통해 내년도 55주년 행사에 꼭 방한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미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스미스씨는 6·25전쟁 당시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장(중령)으로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반도 긴급투입 명령을 받은 그의 부대원 406명은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첫발을 디뎠다. 이튿날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포병부대원 134명이 합류, 540명 규모의 특수임무대로 탈바꿈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6시간여 동안의 치열한 교전 끝에 탱크 4대를 격파하고 4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도 170여명의 전사자 및 행방불명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스미스 중령은 북진(北進) 대열에 참가, 11월 1일 신의주 남쪽 30㎞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다가 11월 10일 전출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스미스 중령은 뒤에 준장으로 진급한 뒤 67년 예편했다.
 
 
75년 7월 방한한 그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87년 7월 오산에 새 전적비가 세워짐에 따라 두 번째로 방한했다.

한편 이날 54주년 기념식 및 추도식에는 6·25전쟁 당시 1사단장으로 참전한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전 육군참모총장)과 박신원 오산시장, 권용원 육군 제5067부대장(소장), 케인 유엔사 부참모장, 매케인 주한미군 군수참모부장, 각급 기관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유용원기자 kysu@chosun.com )
-----------------------------------------------------------------------------------
최초의 기념비는 1955년 7월 5일, 미군 제24단과 장병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1964년 미 24사단 장병 및 동지회, 미8군장병, 육군 동지회, 재항군인회, 한국신문 편찬협회, UN군 자유수호참전 건립위원회 등에 의해 보수되었으며, 1972년 9월 20일 미8군, 제802 공병대, 제22 K,S,C 중대 및 K,S,C 제22본회에 의하여 약 20평의 주차장 확보와 1981년 전적지 개발계획에 의해 구 기념비 앞산에 5천여평의 규모로 새로이 단장하여 매년 7월 5일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죽미령 100고지/ 구 초전비가 산등성이에 보인다. 1987년, 길건너 117고지 앞에 새로운 초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구 초전비 사진파일(1972년 9월 21일 건립)tfs.gif/korea1168-13.jpg
1958년 초전비안내문paul-black-pic0088.jpg/paul-black-pic0083.jpg


상황지도1 b0053005_044369.jpg
상황지도2 b0053005_0445876.jpg
관련사이트(미국)



 
대전역/우측에 그들이 부산에서 타고온 열차가 보인다.
1950년 7월 2일, 대전에 진입하는 스미스부대 선발대.
1st Units of Task Force Smith entering Taejon, 7/2/50
U.S. Army 24th Infantry Division Photo
D.M. Giangreco, War in Korea: 1950-1953 (Presidio Press).



Lt. Col. Charles B. Smith, Commanding Officer, 1st Battalion, 21st Infantry Regiment, 24th Infantry Division, led the first American troops to fight against North Korea. Task Force Smith, with only two under-strength rifle companies, B and C, and part of the 1st Battalion, supported by part of the 52nd Field Artillery Battalion, fought elements of the North Korean 4th Division and 105th Armored Division, a few miles north of Osan, on July 5, 1950.
A good on-line account of this battle
스미스 특수부대는 1대대 B중대와 C중대, 2개중대의 적은병력으로 52야전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오산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죽미령에서 북한군 4사단 105기갑연대를 맞아 싸웠다.
--------------------------------------------------------------------------------
ADDRESS - TASK FORCE SMITH MEMORIAL - 5 July 1998
by Bill Wyrick, former Plt Ldr, 2nd Plt, C Co, TFS
[스미스특수부대 C중대 2소대장이었던 빌 위릭의 1998년 7월 5일 연설문]
(The rostrum is located to the right front of the audience and the speaker faces essentially north. The audience is at the speaker's left and the monument and Hill 117 to his right The speaker addresses the men who were KIA, MIA, or POW [DIEH] on 5 July 1950) /
용어해설;
KIA(killed in action)전사 MIA(missing in action)실종 POW(prisoners of war)포로
DIEH(died in enemy hands)포로생활중 사망


Fellow members of Task Force Smith, it has now been 48 years since we deployed on this hill. We did not realize it at the time, but we were the vanguard of the United Nations Forces who came to help the South Korean people defend their freedom. Our mission was to delay the main enemy forces coming down this historic invasion route Seoul - Taejon - Taegu - Pusan.
스미스 특수부대의 전우 여러분, 우리가 이곳 언덕에서 전투를 겪은지 48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우리는 남한사람들의 자유방어를 위해 파견된 유엔군의 선발대였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잇는 역사적인 남침경로인 이곳에서 북한군 주력부대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My comrades, 53 of you were Killed In Action here on that day so long ago. 5 of you are still Missing In Action. 34 of you died in unspeakable conditions as Prisoners Of War in either South or North Korea. To you I report that we completed our assigned task with honor. The enemy had to deploy his forces in order to eject us from this hill. When the enemy's tanks reached this spot, followed by a convoy of truck-mounted Infantry many miles long, they were traveling at 20-25 miles per hour. About seven hours later the enemy's infantry was slowly occupying the high ground to my right. Afterwards, when the main body of the enemy's force continued down the road to my left they were walking at 2-3 miles per hour.
오래전 오늘, 이곳 전투에서 53명의 전우가 전사하였고, 5명이 아직도 실종상태이며, 남과 북의 전장에서 포로가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34명이 사망했습니다. 본인은 여러분께 우리의 임무가 명예롭게 종결되었음을 보고드리는 바 입니다. 적군은 우리를 이곳 언덕에서 제거하기위해 전투를 해야만 했습니다. 적의 전차는 먼곳에서부터 시속 20~25마일의 속도로 보병부대의 엄호하에 이 지점에 도착하였습니다. 약 7시간이 지난후 적의 사단은 내 오른쪽의 고지대를 서서히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후, 적군의 주력부대는 내 왼쪽의 도로를 따라 시속 2-3 마일로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
There are a number of your comrades here with me today. They marvel at the progress the Korean people have made since we arrived here so many years ago. Your sacrifice undoubtedly played a major role in the defense of their freedom.
오늘 이곳에는 본인을 비롯한 그 당시의 전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전에 이곳을 다녀간 이후, 한국인들의 발전과정을 보며 경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희생이 한국인들의 자유방어를 위한 주된 역활을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To the Korean people assembled here today, I say thank you for honoring my comrades. Always remember that here, on the fifth day of July 1950, your people and my people became Blood Brothers.
오늘 이곳에 참석하신 한국분들께서 내 전우들을 명예롭게 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1950년 7월 5일의 이곳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우리는 혈맹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When you explain the meaning of freedom to your children - tell them about Task Force Smith and the foreigners who died here. Tell them that FREEDOM IS NOT FREE!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자녀에게 자유의 의미를 설명할때,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십시오.
<번역/편집 by badoc>

Copyright (c) 2005 badoc All rights reserved

by badoc | 2005-04-11 00:10 |

한편의 전쟁 영화를 만들기까지 이렇게 힘들줄 몰랐습니다.
영화 자체가 그만큼 어렵고 험준한 세계라는걸 알게되었죠...
모든 일들이 다 그렇지요... 특히 중요한 프로젝트가 실행되기까지 절대로 혼자서 만들어 나가는건 불가능 하다는 걸요...
그런데 저는 하고 싶습니다.... 좀 미쳤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중앙 언론사에서 취재를 하셔서 언론 보도를 해 주셨네요...
몇달에 걸쳐 저와 시나리오 검증을 해 주신 언론사에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본 각본은 영화 시나리오 초안입니다. 어느 제작자가 O.K 한다면 이후 각본 전문가가 수십, 수백번의 수정을 하겠죠..)
목표가 정확히 설정 되어 있으니 하나. 하나씩 하다보면 될듯 싶습니다.
내년 말 퇴직하고 난 이후에도 계속 해 볼까 해요~~~~^^
ㅎㅎ... 인생은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