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진료실斷想

간호사1호 이정애

marineset 2023. 5. 25. 01:32
 



우리나라에서 간호사라는 말이 생긴 시기는 1887년 6월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에 의하여 국왕 치료 기관인 시병원(施病院)이 설립되면서 부터였다.
그때는 의사의 치료를 보조하고 환자를 돌보는 아녀자라고 해서 간호부라고 불렀었고, 그 후로는 간호원, 최근에는 간호사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최초의 간호사가 누구였느냐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그리 쉽지가 않다.
요즘처럼 자격면허시험 제도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합격 1호를 상으로 삼았겠지만, 미국인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병원이다보니 진짜 간호사는 분명 미국인 여자였을 것이고, 한국인 여자는 횐 가운만을 걸쳤을 뿐 미국인 간호사를 도와주는 한낱 보조자에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정애(李貞愛)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간호사가 된 인물이다.
이정애가 한국인 최초의 간호사로서 인정을 받은 시기는 그녀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하와이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남대문 역전 부근에 자리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실 부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부터였다.
그 당시 간호실 원장은 미국인이었다.
이정애는 1901년 8월 17일 새벽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이정애가 태어날 것을 예측이라도 하였는지 그동안 질질 끌어오던 서울시내 전등 공사도 이날 마무리되고, 그 점등식을 갖게 된 연유로 온 거리는 밤새 껏 밝기만 하였다.
이정애는 여섯 살이 되면서 여학교 양규의숙(養閨義塾)에 입학하여 낮에는 신학문이라고 일컫는 산술(算術)이며 국어를 배우고 밤에는 냉천동의 어느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웠다.
이런 기초 학습을 마친 이정애는 열두 살이 되자 이화학당(梨花學堂) 중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이정애는 중등과정을 그럭저럭 마치고 곧바로 고등과에 입학했다.
이정애가 고등과 수업을 받던 중 3·1독립운동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정애는 전국에 발송 할 편지와 유인물들을 등사 하느라고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런가하면 3·1독립운동 사건으로 연루되어 투옥된 동료들 가정의 생활비를 위하여 삯바느질로 매달 오원씩(당사 쌀 한가마 값이 일원 오십전 정도였음)을 벌어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대학 시절은 학교 규칙에 의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이정애는 줄곧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워낙 빼어난 미모로 학교 안에서는 동료들간에 즐거운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밖으로는 이 시대의 절세 미인이 이화대학에 숨어 있다는 등 누가 먼저 그 미인을 차지하는가 내기를 하느라고 뭇 남성들의 가슴을 조여 버리는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장 용기 있다고 자처한 미혼 남성이라면 이정애에게 청혼을 하기 위하여 이화대학 교문 밖으로 몰려들었는데,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채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중 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안창남(安昌南)의 청혼 사건이었다.
안창남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가 아닌가.
안창남은 1922년 12월 10일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 고국 방문위원회' 주선으로 서울 상공에서 시범 비행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창남이 서울 상공 시범 비행을 마치던 날 그 위원회에서는 각계 유명인사를 초대하여 멋있는 연회 잔치를 벌였다.
안창남은 그 연회석상에서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일지도 모르는 미인 이정애라는 여대생이 이화대학 기숙사에 갇혀 있는데, 용기 있으면 청혼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 대학생이라고요?"
안창남이 매우 흥미 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옆에 있던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다니까! 하지만 안될걸."
하면 안창남의 그런 흥미를 비웃듯 까르륵 웃어댔다.
"…?"
안창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모 인사가 그 까닭을 소상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용기있다는 조선 장정들이 그렇게 몰려가 이정애를 만나 청혼하려고 발버둥쳤지만 만나기는커녕 교문 밖에서 면회조차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오."
"그럼 좋습니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청혼에 실패하면 나는 평생 장가갈 자격이 없는 걸로 선언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창남은 그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정애로부터 청혼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이정애는 이화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의 뜻에 따라 1925년 김옥현(金玉鉉)과 결혼하였으나, 딸 하나를 낳고는 무슨 사연인지 이혼이라는 불행을 겪고 말았다.
때마침 미국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와 신시대의 우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김활란(金活蘭)은 자기보다 두살 아래인 학교 친구로 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이정애의 그런 불행을 전해 듣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이정애를 가정 주부로 썩히는 것도 아까웠지만 친구의 불행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일은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활란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있는 쿠인지대학에서 장학금을 얻어냈다.
이정애의 유학을 위한 장학금이었다.
맨처음 이정애는 하와이 유학을 완강히 거절하였지만 김활란의 설득에 공감을 하고 간호학 전공을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1928년 가을 이정애는 하와이로 떠나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뱃길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은 그 매에 동승했던 일본의 황족 지찌부노미야가 이정애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버린 나머지 결혼을 간청한 일이었다.
지찌부노미야의 청혼 역시 여지없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정애는 유학 3년만인 1931년 간호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남대문 역전 부근의 세브란스 병원 간호실 부원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이정애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학 아니면 천사나 다름없었다.
백옥같은 얼굴만으로도 눈꺼풀이 마비될 지경인데, 거기에다 빳빳하게 다리미질하여 까만 머리 중앙에 핀으로 눌러 쓴 백색 간호사의 모자며, 손이 닿으면 유리알 만지듯 주르륵 미끄러질 것만 같은 백색 유니폼의 모습은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쉬울 정도였다.
이정애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 업무에 충실을 다하는 한편 후학을 위하여 간호학과의 간호윤리라는 과목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1937년 7월 21일 영국에서 열린 국제 간호원대회 조선 간호협회장 자격으로 파견되어 조선에도 명실공히 조선인 간호사가 있음을 유감없이 알리기도 하였다.
이정애는 영국의 그 대회를 참석한 계기를 끝으로 세브란스 병원 생활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중·일전쟁 선전포고로 미·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일본은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세브란스 병원에 대하여 전에 없는 심한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그 속에서 종사하는 한국인에 대하여는 노골적인 간섭으로 압박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세브란스 병원을 그만 둔 이정애는 김활란이 부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전의 사감으로 취임을 하였다.
이곳의 생활은 세브란스 병원 시절보다도 정신적인 위안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해방이 되자 이정애는 1947년 김활란의 배려로 다시 미국의 유학길에 올라 콜럼비아대학에서 간호행정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여서는 대한 간호협회장으로 추대되었는가 하면, 이화여대의 의약대학 교수로서 재직하여 후학을 육성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6·25 동란중에는 인민군에 붙들려 죽을 고비에 이르렀으면서도 자신의 위기보다는 김활란 총장의 위기를 걱정하는 의리를 보여주기도 하여 이정애와 김활란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하였다.
휴전이 성립되고 나라도 차츰 안정을 되찾자 이정애는 영아기나 다름없는 이 땅의 간호사업에 열정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탄생 133주년인 1953년 5월 12일에 정부로 부터 간호 관련자로서는 처음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운명의 사신은 하필이면 이 땅의 간호사업의 선구자인 이정애에게 암(癌)을 선고하였단 말인가.
김활란의 눈물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공로 표창장을 받은 지 일년만인 1954년 5월 라일락 꽃 향기에 싸여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김활란은 이정애를 망우리의 양지 바른 곳에 편히 모셔 놓고 다음과 같은 묘비를 세워 줬다.


이 티끌 세상에 한 송이 백합
높은 뜻 깊은 사랑 그윽한 향기
우리 맘에 영원히 풍기리.


김활란은 그러고도 이정애의 타계를 못 잊어 <우리 친구 이정애>라는 조그만 전기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땅에 간호사라는 말을 가져와 병(病)으로부터 위험을 건져내는 선구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비단 김활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치가로 한창 인기가 높았던 장면(張勉)은 이정애를 가리켜 "언제나 한국 여인"이라고 극찬하였고, 이숙종(李淑鐘)은 "사람을 위해서나 일을 위해서나 말없이 아름답게 바치는 맘씨의 소유자"라고 했다.
또한 오천석은 이정애를 이 시대의 누님으로 부르면서 "현대 여성이 헌신짝 같이 버린 쪽을 곱게 끼고, 우리 옷에 날씬한 몸을 맵시 있게 감싼 그의 고요한 모습은 실로 고전적 조선 미의 상징"이라면서 그 짧은 운명을 애석해 했다.
그런가 하면 시인 노천명(盧天命)의 유고에서는 "결혼에 실패를 했을망정 여사는 어디까지나 가정적인 인물로 늘 가정의 단란을 염두에 두는 분"이라고 적혀진 이정애를 존경하는 귀절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정애의 뒤를 이은 대한 간호협회원 대표 이영복(李永福)은 그녀의 타계를 다음과 같이 슬퍼했다.
<병원이란 복잡한 곳이며 그 중에서도 간호사의 직책은 다각적입니다.
대인관계로 일어나는 많은 사건도 처리해야 되며, 직무상 책임추궁을 당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모저모로 고통을 겪으신 일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일제의 강압은 의료기관에까지 노골적으로 뻗치게 되어 뜻있는 지도자들을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또한 사회적으로 인식이 되지못한 이 사업을 이끌어 나가는데, 더구나 자칫하면 눌리기 쉬운 여성의 위치에 서서 수많은 간호사들을 대변하며 간호 교육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 주야로 얼마나 울분을 참아야 했습니까.
때로는 외국 선교 간호사들의 편견과 고집에도 응해야 했으며, 때로는 일부 병원 관리자들이나 의사들의 터무니 없는 조소도 흔연히 받아 넘기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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