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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베테랑 승마인 김형칠, 애마 밴디와 잠들다

marineset 2023. 6. 1. 06:33
31년 베테랑 승마인 김형칠, 애마 밴디와 잠들다
                                                                                              

2006.12.08. 15:52

 

                                                                 

“결혼 13주년 기념으로 꼭 금메달을 따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승마 종합마술경기 도중 낙마해 숨진 고(故) 김형칠(47ㆍ금안회) 선수의 부인 소원미(41) 씨는 8일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넋이 나간 채로 눈물만 훔쳤다.
전날 오후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실신한 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고인이 도하로 떠나면서 했던 약속이 귓전을 맴돌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소씨는 “그저께 전화 통화에서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 같다더니 그게 마지막 대화일 줄 몰랐다”고 흐느꼈다. 고인의 자녀인 김민지(12) 양과 아들 김민석(11) 군은 아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조용히 엄마곁을 지키고 있어, 보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이날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대한체육회 승마협회 관계자들도 평생을 말과 함께 살아온 김형칠 선수의 갑작스런 비보에 당혹스러움과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 승마계의 맏형인 고인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금메달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던 것을 모두가 기억하기에 더욱 그랬다. 승마협회 이대호 사무국장은 “승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분이 이런 사고를 당해 믿기지 않는다”며 “자기관리가 철저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던 분”이었다고 아쉬워했다.

고인은 ‘승마 가족’의 일원이었고 자타가 인정하는 ‘베테랑 승마인’이었다. 부친인 고 김철규 씨는 지난 1964년 도쿄올림픽 승마경기에 출전한 한국승마 1세대로, 김형칠 선수는 부친이 은퇴한 1976년부터 대를 이어 승마선수로 나섰다.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운 그인 만큼 실력도 출중했건만 유독 금메달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85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톱랭커로 이름을 떨치는가 싶더니 86년 서울아시안게임 때 동메달 이후 94년 히로시마 대회부터 도하까지 5회 연속 국가대표로 나섰지만 2002년 부산대회 때 은메달을 따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 때문에 금메달을 향한 그의 31년 승마인생은 더 큰 안타까움을 주고 네티즌들도 이런 사실을 접하며 애도의 글을 올리고 있다.‘영원한 승마인’김형칠 선수는 사고 당시 그를 깔고 앉았던 애마 ‘밴더버그 블랙’과 함께 영원히 잠든다. 고인이 4년 전 구입해 애칭을 ‘밴디’라고 붙이며 찰떡 궁합을 과시했지만 ‘밴디’가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안락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 '영원한 승마인' 김형칠
기사입력 2006.12.07 오후 07:11 최종수정 2006.12.07 오후 07:11

(도하=연합뉴스) 특별취재단 = 7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 승마클럽에서 열린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종합마술 개인.단체 크로스컨트리 도중 낙마 사고로 숨진 김형칠(47.금안회)은 경력 31년의 베테랑이다.

한영고등학교, 건국대를 졸업한 김형칠은 용인대학교에서 승마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아 명실상부한 '승마박사'로 유명했다.

1976년부터 선수로 나선 김형칠은 1985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김형칠은 아시안게임에만 이번이 다섯번째 출전이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처음 국가대표로 나서 동메달을 땄던 김형칠은 1994년 히로시마, 1998년 방콕, 그리고 2002년 부산대회에 이어 도하대회까지 아시안게임 출전을 이어왔고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대회마다 말이 병이 나는 등 말썽을 부려 메달과는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86년 서울대회 동메달과 2002년 부산대회 때 조카 김균섭(25)과 함께 출전한 종합마술 단체전에서 딴 은메달 등 2개의 메달은 그의 기량으로 볼 때 다소 부족했다.

이번 도하 대회 대표 선발전에서 꼴찌인 4위로 간신히 태극 마크를 단 김형칠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꼭 메달을 따겠다고 다짐했었다.

김형칠이 이렇게 오랫동안 승마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승마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 고(故) 김철규 씨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승마 1세대였다. 2002년 1월 향년 72세로 별세한 김철규 씨는 1976년 은퇴한 뒤 대한승마협회 경기력향상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최근 승마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대표로 선발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는데도 김형칠이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태극마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온 말(馬)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한국생활체육승마연맹 김인 회장은 "그는 진정한 승마인이었다"면서 "말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부산대회 때 은메달을 목에 건 뒤 "다음 아시안게임 때에는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다"고 했던 김형칠은 금빛 희망을 품고 날아온 이역만리 카타르 도하에서 예상치 못한 참변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min76@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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