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audio-visual

마이웨이/ my way

marineset 2023. 6. 1. 00:39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
(1915.12.12~1998.5.14)






The songs are:

1. Fly Me To The Moon
2. Summer Wind
3. How Insensitive
4. The Way You Look Tonight
5. It Was A Very Good Year
6. If You Go Away
7. All Or Nothing At All
8. That's Life
9. Everything Happens To Me
10. The Days Of Wine and Roses
11. Strangers In The Night
12. I Concentrate On You
13. September Song
14. My Way
15. I've Got You Under My Skin
16. Theme from "New York, New York"

1930년대부터 노래를 멈추지 않는 프랭크 시내트라는 '전후(戰後)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팝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프랭크의 가계(家係)는 빙 크로스비, 냇킹콜, 팻분의 가계처럼 유명한 연예인 집안이다.












딸 낸시 시나트라와 아들 프랭크 시나트라 Jr.도 싱어이자 배우다. 프랭크는 또한 여배우 에바 가드너(1951∼57년까지), 미아 패로우(1966∼68년까지)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미아 패로우 Mia Farrow
1945년 2월 9일생/미아 패로우는 1963년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하여, 다음 해에는 TV 오페라 [페이톤 플래이스]에 출연하였다. [페이톤 플래이스]로 그녀는 미국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1965년 패로우는 30살 연상인 프랭크 시나트라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아 패로우가 주목받게 된 첫 영화는 1968년의 [악마의 씨]였고, 그 후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1974년에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 부캐넌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던 미아 패로우는 우디 알렌 감독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한나와 그의 자매들] [범죄와 비행] [라디오 데이즈] [뉴욕 스토리] [우디 알렌의 부부일기] 등의 알렌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녀의 영화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
미아 패로우와 우디 알렌의 결혼 생활은 입양한 딸 순이와의 문제로 파경에 이르고 긴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는데, 알렌은 후에 입양아 순이와 결혼했다.

(순이는 우디 알렌의 법적인 딸이 아니고 미아 패로우와 전남편 안드레 프레빈의 결혼 생활 중에 입양한 딸이라고 함.)




우디 앨런 [Allen, Woody, 1935.12.1~]

자아 속에서 유머를 발견하는 미국 코미디 영화감독.

국적 미국
출생지 뉴욕 브루클린
활동분야 영화감독, 영화배우, 시나리오 작가
주요수상 제49회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애니홀 Annie Hall》(1977), 제58회 아카데미 각본상 《한나와 그 자매들 Hannah and Her Sisters》(1986)


1935년 뉴욕 출생으로 유태계이다. 뉴욕과 유태인, 출생과 관련된 이 두 가지는 이후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요소가 된다. 뉴욕대학교를 다녔으나 중퇴하고 "투나잇 쇼"의 개그작가로 일을 시작하였으며 각종 토크쇼의 각본가로 유명해졌다. 1961년에 스탠딩개그로 코미디를 하면서 더욱 유명해졌고,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면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69년 자신의 각본인 《돈을 갖고 튀어라 Take the Money and Run》로 감독에 데뷔한 후 《바나나 Bananas》(1971), 《잠자는 사람 Sleeper》(1973), 《사랑과 죽음 Love and Death》(1975) 등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작은 정신없는 슬랩스틱코미디와 엄청난 양의 대사가 쏟아지는 스타일이었으나, 《애니홀》(1977) 이후부터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시킨 도시극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영원한 뉴요커답게 뉴욕의 삶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의 특색이 되었다.

《실내 Interiors》(1978)와 《맨해튼 Manhattan》(1979)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의 정체성 찾기를 탐구한 《젤리그 Zelig》(1983), 《카이로의 자줏빛 장미 The Purple Rose of Cairo》(1985), 놀라운 연출력과 지적 분위기로 아카데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한나와 그 자매들》(1986), 《브로드웨이를 쏴라 Bullets over Broadway》(1994), 《마이티 아프로디테 Mighty Aphrodite》(1995)까지 많은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관심에서 비롯된 비슷한 주제를 다양한 변주로 보여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Everyone Says I Love You》(1996), 《Deconstructing Harry》(1997), 《Celebrity》(1998) 등이 있으며, 작가로서 코믹 에세이 모음집 《게팅 이븐》과 단편소설 모음집 《깃털 없이》도 출판하였다.

그의 코미디는 주로 고통이나 강박증에서 나오는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나 현재의 괴로움, 자신의 열등감 따위를 중요한 코믹요소로 승화시켜 웃음 뒤에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든다.

◇할리우드 배우겸 감독인 우디 알렌(왼쪽)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22일 열린 그의 신작 '멜린다-멜린다' 시사회장에 딸인 맨지의 손을 잡고 들어서고 있다. 한국인 어머니 순이 프레빈(가운데)을 쏙 빼닮은 맨지의 얼굴이 눈길을 끈다.< 보르도(프랑스)=로이터 연합>

우리들의 마음 읽기(로리타 컴플렉스)

소련 출신의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의 소설 로리타/ Lolita는 1953년에 쓰여져서 1955년 프랑스에서 첫 출간되었으나 영국에서는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으며, 미국에서도 1958년에야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던 문제작으로, 슬픈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중년 남자 험버트의 회고록식 이야기이다.
유럽인이며 무정부주의자인 그는 뜨거운 여름, 강의차 뉴잉글랜드에 들른다. 샬로트라는 미모의 미망인의 집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그녀의 딸 로리타를 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10대 소녀와 중년 남자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안 험버트는 결국, '로리타와 함께 있고자하는 일념에서 샬로트와 결혼하게 되나, 나중에 이러한 험버트의 로리타에 대한 병적 집착과 애정을 알고난 샬로트는 격분한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고 만다.

이때부터. 로리타와 험버트는 함께 여행을 다니며 육체적 사랑에 빠져든다. 험버트는 로리타를 변태적 성충동의 대상으로 삼고, 그로 인해 로리타는 정서적으로 황폐화하여 결국 학교도 그만 두게 되며, 마침내는 험버트로부터 도망을 치고 만다.

14세 소녀와 47세 대학교수와의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의해 1962년 처음으로 영화화되었었는데, 1999년 애드리안 라인 감독에 의해 다시 리바이벌되었는데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탐미적 영상도 살리려고 노력한 수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에 유래하여, 중년의 남자가 10대 미만 또는 10대 초반의 나이어린 여자를 사랑하거나 성행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성향을 가리켜 "로리타 컴플렉스(Lolita Complex)"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로리타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출신의 배우, 코미디언, 감독, 연주가(섹소폰), 극작가, 작가인 우디 알렌(Woody Allen, 본명; Stewart Konigsberg)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1935년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으며, New York University와 New York City College를 다녔지만 두군데 다 졸업을 하지는 못 했다.

15살 때 신문 코메티 컬럼에 꽁뜨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시절에 유명한 코메디언 보브 호프의 코메디 작가로 일했을 만큼 문재를 지녀서, 1961년에서 부터는 그리니치빌리지, 나이크클럽, 토크쑈 등에서 코메디를 했으며, 1965년 처음으로 'What's New', 'Pussy cat?'의 각본을 써서 팔았고, 동시에 그 영화의 조연도 맡아 했다.

괴짜에다 할리우드에 적대감까지 지닌 그는 77 년, 오스카상 3 개 부문에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7년, 그는 당시의 동거녀 미아 페로우의 나이어린 양녀인 순이 프레빈과 사랑에 빠져 이탤리에서 비밀결혼까지 했었는데, 그 이전에도 이미 Harlene Rosen(56-62) 및 Louise Lasser(66-69) 등과도 결혼한 적이 있으며, Diane Keaton과도 연애를 했었다.

이로 인해, 한 때 그는 미아 페로우에 의해 '아동학대' 혐의로 피소되었고, 그녀의 전 남편 프랭크 시내트라로 부터도 폭력 위협까지 받았지만 끝내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좋은 부부로서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를 일러 성도착증 환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무명(tony21kr) http://ginseng.pe.ky [발췌]




에바 가드너 Ava Gardner


(1922년 12월 24일 ~ 1990년01월 25일)

에바 가드너, 그녀의 신비로운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아주 고고한 귀족집안의 출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나오던 광채가 캘리포니아 북부 담배농사를 짓던 부모와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맨발로 들판을 뛰어 놀던 그녀의 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그녀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되고 만다.
에바 가드너는 1922년 12월 24일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서 1990년 1월 25일 영국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18세가 된 에바의 눈부신 미모는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형부의 사진을 통해 MGM의 전문가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에바의 매력을 한눈에 알아본 그들은 에바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연기에 대해 전혀 몰랐던 에바는 MGM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녀의 매력을 헐리웃식의 신비롭고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바꾸려 노력했다.
하지만 교환출연을 위해 잠시 외출했던 유니버설의 <살인자들>이라는 영화 속에서 그녀의 진짜 매력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에바가 악역의 이미지로 성공을 거두자, MGM에서는 당황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MGM에서도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과 호흡을 맞추게 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라고 불릴만큼 강한 그녀의 매력을 맘껏 발산하게 해주었다.

존 포드, 조지 쿠커 등 거장과 함께 활동했던 그녀는 미키 루니, 아티 쇼,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쟁쟁한 스타와의 화려한 결혼을 거치면서 헐리우드에 대해 실망을 느끼게 된다. 50년대 후반 스페인으로 이주한 에바는 이후 영화출연작들의 부진함과 그녀의 연기력의 한계 등으로 인해 차츰 잊혀져 가다가, 자서전 `에바 나의 이야기`집필 중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화려한 외출을 마친 그녀는 맨발로 뛰어놀던 그녀의 고향에 잠들게 되었고 그녀를 추억하고픈 사람들은 지금도 에바 가드너 기념박물관을 찾고 있을 것이다.



<프랭크 시내트라 이야기 계속...>

뉴저지 호보켄에서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난 (1915.12.12, 본명: Francis Albert Sinatra) 프랭크는 역시 전설적인 싱어이자 배우인 빙 크로스비(1903∼1977)의 노래를 좋아하며 싱어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보켄 지방 밴드 포어의 멤버를 거쳐 뉴저지의 주점 루스틱 캐빈의 급사장겸 사회자이자 싱어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첫 부인 낸시 바바라와 결혼한(1939. 2. 4) 해 6월에는 해리 제임스 밴드의 창단 멤버이자 싱어가 되었다. 그리고 7월에 "From The Botton Of My Heart"와 "Melanchoy Mood" 같은 곡을 발표했다.
1940년 1월에는 토미 돌시 밴드의 싱어로 스카웃 되며 더욱 주가를 높였다. 그 해 6월 8일에는 프랭크처럼 싱어이자 배우가 되는 딸 낸시 시나트라가 태어났다.

프랭크의 45년 히트곡인 "Nancy"는 바로 딸에 대한 노래이다. 프랭크가 출연한 주요 영화는 빙 크로스비,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주연한 56년의 "상류사회"를 비롯하여 "닻을 올려라" "아가씨와 건달들" "황금의 팔" "포옹" "밤의 표범" "달려오는 사람들" "하이 호우프" "캉캉" "오우션과 11인의 전우" "황야의 세 상사" "시카고 7인" 등이다.
48년 6월 20일에는 차녀 크리스틴 시나트라가 태어났다. 하지만 1950년 10월 프랭크는 부인 낸시 바바라와 이혼에 이르고 말았다.

69년에 프랭크는 저 유명한 팝의 고전 "My Way"를 발표했다. 이 곡은 원래 67년에 발표된 샹송 "Comme D' Habitude"(평상처럼)으로, 작곡하고 노래한 오리지널 아티스트인 클로드 프랑소와는 파리의 자택에서 감전 사고로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사망(1978.3.11)한 사연이 있다. 샹송 "Comme D' Habitude"가 어떻게 "My Way"로 리메이크 되었을까?
68년에 프랭크는 연예계 은퇴를 발표했고, 이에 가장 놀란 사람은 프랭크를 누구보다 존경하던 싱어/송라이터인 폴 앵카였다. 그래서 폴 앵카는 자신이 좋아하던 샹송 "Comme D' Habitude"의 멜로디에다 영어가사를 붙혀 프랭크에게 선사했다.
Comme D' Habitude

프랭크도 이 곡에 크게 만족하여 은퇴 직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한 것이다. 프랭크의 수많은 히트곡 중 "My Way"는 그의 자전적인 곡이다. 이 곡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히트한 팝 음악의 고전이자 삶의 송가가 되었다.
황혼기에 접어든 한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숨김 없이 표현한 가사로 된 이 곡을 선사한 폴 앵카는 "My Way"는 프랭크가 노래해야만 빛을 발하는 곡"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은퇴 직전에 있던 프랭크의 곡으로 "My Way"는 적격이었다. 비록 이 곡은 69년 싱글 차트 27위까지 진입하는데 그쳤으나 싱글 차트와는 관계없이 아직까지도 세계적으로 가장 애청되는, 팝 팬이라면 모르는 이 없는 프랭크의 대표 히트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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