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사는 염응택의 주도로 1945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공히 활동한 극우반공테러공작단이다. 백의사(白衣社)라는 명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반공지하공작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것이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도위원장 현준혁을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단이 백의사의 전신이고 염응택, 박고봉,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대동단의 주요 인물들이다. 백의사는 현준혁 암살사건 직후 대동단의 관련자들이 월남하여 개칭·정비한 동일 성격의 단체이다. 조직의 구성을 보면 총사령 염응택, 부사령 박진구, 고문 유진산·백창섭, 조직국장 안병석, 정보국장 김명욱, 집행국장 한승규, 비서실장 백관옥, 훈련국장 선우봉, 총무국장 정병모 등이다.
백의사는 반공·반탁·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 테러·암살·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첩보원들을 훈련시켜 북한지역에 파견하였고 파견된 요원들은 토지개혁 반대선동, 신탁통치 반대활동, 주요 지도자 및 조직·단체에 대한 정보수집, 임시정부 지지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상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협력하여 김일성 암살 시도(1946년 3월 1일), 최용건 자택 습격(1946년 3월 5일, 7일) 김책 자택 습격(1946년 3월 9일), 강양욱 자택 습격(1946년 3월 12일) 등을 감행하였다.
백의사는 남한 지역에서도 동일한 반공활동을 폈는데, 특히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경찰과 국방경비대, 노동총연맹 등에 구성원들을 가입시켜 활동하도록 하였다.
백의사는 미군 방첩대(CIC)의 지원을 받아 대북 첩보·정보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지속되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백의사의 성원 상당수가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Korea Liaison Office) 부대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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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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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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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을 맞이한 해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한 명의 정객이 암살당했다. 그는 한국의 우파의 지도자였던 송진우였다.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의 한 축을 이끌어 갔던 여운형이 총에 맞아 숨졌다. 두 사람은 해방이후 한국 정부 수립 방향을 두고 엇갈린 길을 걸어갔지만, 공교롭게도 암살로 삶을 마감 당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45년 9월 28일 북한의 현준혁 암살을 시작으로 암살과 테러는 낮이고 밤이고 일어났으며, 그 중심에는 백의사(白衣社)가 자리하고 있었다. 송진우 암살 이후 정치인들은 암살 공포증에 몸을 떨었다. 미군정 정보국장 글렌 뉴면(Glenn Newman) 대령은 당시 정치인들의 불안을 아래와 같이 썼다.
암살 위협이 한국 정치를 흔들어 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암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어제오늘 중요 정치인의 암살은 없었습니다. 송진우가 암살당했다는 기억이 생생한 현시점에서 여운형의 경호원 김문일이 테러 요원에 잡혀갔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김문일을 몇 시간에 걸쳐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여운형은 김구가 이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미군정은 남한 주요 정치인 테러에 백의사가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백의사 단원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자 않고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은 인사들을 괴롭히고 테러를 가했다. 백의사 전라지부원은 1946년 2월 8일 아침 전주에서 황경덕이라는 전주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을 총으로 살해했다. 미군정 정보처(G-2) 요원들은 즉각 조사에 들어갔으며,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적었다.
2월 8일 아침 전주에서 황경덕 (전주)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이 총격으로 피살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시체 위에는 여러 장의 문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신탁통치 찬성을 한 반역자, 조선 독립을 위해 처단하다. 백의사 전라지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보처 요원들은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초기 수사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의사 단원) 남자 3명이 7일 저녁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찾아와 (사무를 보고 있던) 다른 한 명에게 위협을 가하며 인민위원회 간부 황경덕이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들은 황경덕을 밖으로 끌고 나갔으며 곧장 캘리버25 자동권총으로 황경덕 심장을 쐈다는 것이 관련자의 진술입니다. …
백의사 단원들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특히 서울에서 그들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길거리에 “백의사는 모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 일본에 붙어 권력을 가져 축재한 사람, 동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을 처단할 것”,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반역자와 조선 독립과 자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처형할 것이며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행위는 빠짐없이 뿌리를 뽑을 것”이라고 적힌 문서를 붙이고 다녔다.
백의사를 이끈 사람은 염응택(이며 염동진)이었다. 2015년 상영된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은 역할의 실재인물이다. 염동진은 190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국립중산대학, 국민당 후원하에 운영되고 있던 낙양군관학교를 다녔다. 해방이후 북한을 거쳐 남한에 내려와 백의사를 만들었다.
문제는 염동진이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 “일본에 붙어 권력을 가져 축재한 사람”들을 처단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염동진은 1936년 3월 관동군 통화현 산성진 헌병대에 붙잡혔다. 이후 그는 밀정이 되었다. 1944년 3월까지 통화현병대에서 밀정으로 일했으며,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34차례에 걸쳐 2,418원의 활동비를 받았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일시적으로 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직업적 밀정의 길을 스스로 걸어갔던 것이다.
해방이후는 흔히들 격동의 시기라고 한다. 36년간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한국은 38선을 기점으로 둘로 쪼개어졌다. 해방이후 한국의 지도자들 앞에는 일본 잔재 청산과 함께 38선 철폐라는 시대적 과제가 놓였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정치인 암살은 한국현대사의 물꼬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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