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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만주로!, 제국의 외교관

marineset 2025. 5. 22. 20:15

가자, 만주로!, 제국의 외교관

2025. 3. 1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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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인은 1930년대에 2차례 만주로 대거 이주한다.

1931년 9월 발발한 만주사변(제1차 중일전쟁)과 1937년 벌어진 지나사변(제2차중일전쟁)후 였다. 만주대륙을 장악한 관동군(만주주둔 일본군)이 1933년 3월에 위성국 '만주국'을 출범시킨 전후에 생겨난 후 이른바 만주특수였다.

구한말의 재난과 기아, 일본의 압제를 피해 독립운동으로 비밀리 출국과 달리, 1930년대 이동은 공개적이며 합법적으로 다수의 청년들이 지원한 것이었다.

만주국의 국가기획은 관동군 참모단에서 야심차게 기획되었다. 관동군은 신생만주국에 행정 국방 산업 교육분야에 우수인력을 획득하기 위해 각종 혜택과 지원책을 강구한다. 일본과 만주는 물론 조선 대만 몽골 심지어 러시아에서까지 인력을 초빙한다.일본 내각에서도 천황의 통수권에 속하는 관동군의 정책에는 개입할 수 없었다.

고급 행정인력을 양성하는 '대동학원'(한국의 중앙공무원 교육원격), 만주군 간부를 육성하는 '만주군관학교(사관학교)' 최고 학문을 추구하는 제국대학 수준의 ‘만주건국대학(국립대학, 학비 기숙사 장학금 등 전액 무료)'이 연이어 설치되며 조선반도에서도 우수인력을 모집하게된다.

1929년 경제공황 이후 실업과 일자리부족, 차별과 불평등으로 비탄에 빠져있던 조선의 고급인력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주사변 초기에는 하급 관리나 군인, 상인, 농민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정책적인 이주가 일어났다.

1932년 2월 말, 매일신보 부사장 박석윤(1898-1950)은 만주로 가기 위해 경성역에서 만주로 가는 국제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함에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려는 차원이었다. 경성에서 출발하여 신의주-안동(현재 단둥)- 봉천(현재 선양)-신경(현재 장춘)- 연길을 만주철도로 이동하는 경로다. 편도에만 10일 이상이 소요되는 먼 길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일생은 격랑 속에 몸을 맡긴 거친 항해자의 길이었다.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읍내의 창평소학교를 다닌 것이 거친 파도와의 첫 부딪침이었다. 창평소학교는 호남에서 이름난 신교육과 개화의 근원지였다. 동아일보 회장을 지낸 고재욱(1903-1976)의 조부 고정주 선생이 세운 이 학교에서는 큰 인물들이 배출된다. 가인 김병로(1887-1964) 대법원장, 고하 송진우(1887-1945) 한민당 대표, 인촌 김성수(1891-1955) 부통령, 모두 창평소학교 졸업생이었다. 현대인물로는 고재욱(1903-1976) 동아일보 회장, 고재필(1913-2005)보사부장관, 이한기(1917-1995)국무총리서리 등 한국 근현대사에 빛나는 인물들이다. 초등학교 단위에서는 유례없는 케이스이다.

박석윤도 창평소학교를 마친 후, 청운의 꿈을 품고 경성을 거쳐 일본 교토로 유학을 떠난다. 1917년 명문 교토제3고등학교에서 학업중, 야구라는 근대 스포츠에 빠져들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나던 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학업도 잠시 그는 동경제국대학 야구부의 대표선수 좌완투수로 활약한다,

대학 재학중, 조선인 도쿄유학생 야구단을 조직해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세 차례 모국방문 원정경기를 주도하여 실행한다. 외부 도움 없이 선수들이 비용을 갹출하여 추진한 것을 보면 박석윤의 야구 열정과 조직력 추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1922년 조선에 돌아와서도 야구 열정은 식지 않는다. 1922년 12월 7일 도쿄에 들른 미국 메이저야구 프로야구단 2진을 경성으로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개최한다. 비록 승부는 23:7로 패배하지만, 박석윤이 9회를 마지막까지 버티며 불멸의 좌완투수로 활약하며 이름을 남긴다.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취업했다. 야구팀의 감독을 맡아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일본 고시엔(갑자원)대회에 진출하여 8강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1924년 하와이 원정, 1930년 조선야구심판협회 창설위원으로 괄목할 활약을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체육인 출신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과의 정치적 관계가 해방 전후에 이어진다.

이어 육당 최남선의 여동생 최기득과 결혼하며,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기자, 정치부장으로 언론계에 진출한다. 동경제대 출신으로 최남선의 매제이며, 유명 야구선수였다.

그러나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일본인 세상이다.

박석윤은 처남 최남선처럼 식민통치를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다고 타협책으로 선회했을까?

귀신같은 사교력으로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으로 채용되며, 1925년-1927년에는 영국 켐브리지대학에 2년 연수를 다녀온다. 귀국 후 1930년에는 매일신보(서울신문의 전신) 부사장으로 수직 상승한다.

차별과 감시, 식민지 한반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스포츠맨 특유의 투지와 도전의식이 발동했다.

기회의 땅, 만주! 가자 만주로!

 

동경제대 인맥을 동원하여 1932년 일본 외무성 촉탁으로 임용된다. 외무성 촉탁은 외교부서의 전문직으로 보수, 외국여행 자유와 외교관련 활동 면책특권을 인정받는 자리다. 특별히 노출되지 않으며 매력적인 지위였다

동만주지역 항일무장 조직에 대처하는 민생단이라는 친일조직을 계획하고 공산주의자를 색출해 내는 임무였다. 1934년에는 만주국 외교부 촉탁이 된다. 친화력과 적응력이 뛰어난 박석윤은 만주국 외교부 조사처장에 승진하며 만주지역에서 조선인 최고위직에 임용된다.

1937년 제2차 중일 전쟁(지나 사변) 이후 일본의 기세는 전 중국대륙을 석권하는 듯 욱일승천했다. 1938년, 처남 최남선도 만주 건국대학교수로 초빙되었다. 박석윤은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만주국 총영사로 꿈을 이루게 된다. 식민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 '제국의 외교관'은 이렇게 탄생한것이다.

1937년부터 조선 청년들의 야망과 꿈은 만주벌판을 향해 더욱 타오르기 시작한다.

만주 용정의 광명중학을 졸업하고 경성제대를 꿈꾸던 정일권(국무총리),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육군참모총장),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야망에 불타던 박정희(대통령), 모두 만주군 군관학교로 향했다.

경성제일고보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마친 최규하(대통령), 일본 주오대 출신 고재필(보사부장관)은 만주국 '대동학원'에 입교하여 만주국 중견관리로 출발한다. 평북 영변농고 출신 강영훈(국무총리), 청주고보 출신 민기식(육군참모총장) 은 최고 대우로 학비와 생활비 걱정이 없는 '만주건국대학교'를 지원한다.

관동군이 만주국의 동량으로 육성한 조선인재들은 만주국 패망으로 조국에 귀환한다. 그리고 그들은 20년 뒤 대한민국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박석윤은 판단착오로 북한에 잔류했다. 생사의 기로에 섰다.

친일 반민족행위라는 혹독한 업보가 지는 해 그림자처럼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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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f&nNewsNumb=201708100053

 

월간조선

⊙ 계동 여운형 집터에는 칼국수 집 들어서⊙ 현대건설 주차장 앞 보헌빌딩이 건국준비위원회 있던 임용상 집 자리⊙ 조선총독부, 박석윤(전 주폴란드 만주국 총영사) 통해 건국준비위원회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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