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677

의학전문대학원이 ‘미운오리새끼’가 된 까닭은?

의학전문대학원이 ‘미운오리새끼’가 된 까닭은? 의학전문대학원이 ‘미운오리새끼’가 된 까닭은? 도입 10년 만에 27개서 4개 대학만 명맥유지 소속감 결여… 개업 용이한 진료과 선택 등 문제 ‘의사양성학원’전락… “한국 의학교육 10년 퇴보” 의대교수들 “제도 실패 인정하고 인재양성 대책 필요”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한 27개 대학 중 23곳이 의대로 복귀했다. 의료인들은 “교육당국이 의전원 실패를 인정하고, 의학 발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달 초 교육부가 동국대 의대 복귀를 승인했다. 이로써 의학전문대학원을 유지하고 있는 대학은 강원대 제주대 차의대 건국대 등 4곳으로 줄었다. 전국 41개 의대 중 이들 대학을 제외한 37곳이 의대로 복귀한 것이다. 2005년 경희대, 건국대 등 10개 의대가..

한국인 치과의사의 조선치과의사회 참여 개연성과 그 역사적 의미

한국인 치과의사의 조선치과의사회 참여 개연성과 그 역사적 의미 [변영남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 한국인 치과의사의 조선치과의사회 참여 개연성과 그 역사적 의미 2010.12.27 00:00:00 역사의 아픔은 있지만 조선치과의사회는 한반도에 최초로 생긴 치과의사회임이 확실하다. 일본 치과의사들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한국인 치과의사도 참여했으리라는 기록과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창립기념일을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이 배제되었고 참여자는 한명도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창립 당시 조선치과의사회는 법정단체도 아니고 단순히 친목단체였으며 회원 가입도 임의대로였다. 그 전신이 경성치과의사회이고 경성치과의사회가 중심이 돼 전국 ..

[역사로 보는 의학] 이 해 박는집

[역사로 보는 의학] 이 해 박는집 [역사로 보는 의학] 이 해 박는집 VOM 매거진 / SNUH 이야기 2015.04.15. 15:40 고종 황제, 이방인에게 입을 벌리다 ​ 1926년 6월 10일, 서울의 종로.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 사이로 순종 황제의 상여가 지나가고 있다. 서글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라 잃은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태정태세문단세…’의 마지막 임금(황제)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런데 이 사진을 보노라면 왼쪽 상단에 우스꽝스런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해 박는집’. 간판에는 의치(義齒)까지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치과병원과는 달리 보철(補綴)만 부각된 이름이다. ​ ​ ​사진. 서울 종로의 이 해 박 집(1926) - ‘이 해 박는 집’이라는 간판은 오늘..

[논 단] 土禪 함석태와 澗松 전형필

[논 단] 土禪 함석태와 澗松 전형필 [논 단] 土禪 함석태와 澗松 전형필 권훈 논설위원 기자 등록 2015.01.20 10:04:33 제621호 ‘간송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 성북동 어귀에 있는 작은 미술관 전시회를 계기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의 문화재 사랑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거장들의 걸작을 수집하였다. 전형필이 수집한 소장품의 면면을 보면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등의 작품으로 모두가 국보급이다. 지금의 간송 미술관을 탄생시킨 그의 애국심은 독립투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간송 전형필은 문화 독립 운동가라 말할 수 있다. 간송 전형필에 견줄 만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치과의사 ..

의사출신 독립운동가 50인

의사출신 독립운동가 50인 김필순·주현칙·이범교…삼일절 맞아 재조명 의협, 의사 독립운동가 발굴해 발표…“의료사에 고귀한 정신과 업적 새길 것” [라포르시안] 대한의사협회가 제97주년 삼일절을 맞아 50인의 의사 독립운동가(의학도 포함)를 발굴해 발표했다. 의협이 이번에 발표한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가 공훈심사를 통해 훈격이 확정된 이들이다. 앞서 의협과 한국의사100주년기념재단은 의사출신 독립운동가를 찾아 그들의 고귀한 애국심과 선각자로서의 족적을 기리기 위해 의사출신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연구용역을 벌여왔다. 이번에 발표한 의사 독립운동가 50인 명단에는 서재필 박사처럼 많이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김필순, 주현칙, 이범교 선생 등 활약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이들이 다수 포함됐다. ▲ 제..

[권복규의 의료와 세상]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권복규의 의료와 세상]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중앙일보] 입력 2018.08.20 00:44| 종합 27면 지면보기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규 간호사는 1908년 보구녀관(普救女館) 간호원 양성소를 졸업한 이그레이스(李具禮)와 김마르타(金瑪多)이다. 보구녀관은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에 의해 1887년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으로 현 이화의료원의 전신이다. 보구녀관은 여성 진료뿐 아니라 여성 의학교육 및 간호사 양성에도 진력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도 이화학당 재학 시절 기초적인 의학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1903년에는 미국 간호사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Edmunds)가 이곳에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는..

권위와 외연의 확장-치과의사 안종서

권위와 외연의 확장-치과의사 안종서 권위와 외연의 확장-치과의사 안종서 작성자 신재의 투고일:2012. 6. 15 심사일:2012. 6. 19 수정일:2012. 7. 11 게재확정일:2012. 7. 19 권위와 외연의 확장-치과의사 안종서 신재의 치과의원(은퇴) 신재의 ABSTRACT Prestige and Expanding Scope of Korean Dentistry- Dr. Jong-Suh Ahn Shin Jae Eui Dental Clinic(Retired) Shin Jae Eui, D.D.S.,M.S.D.,Ph.D Dentists have been striving to find ways to relieve patients?pain and discomfort. The prestige of dent..

첫 소아과의사 구영숙(具永淑)

첫 소아과의사 구영숙(具永淑) 첫 소아과의사 - 구영숙 보건부장관·적십자 총재 등 역임 사회활동도 활발 의사신문 | 승인 2011.06.03 09:00 구영숙(具永淑) 구영숙(具永淑)은 1892년에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열 살 전에 고아가 된 구영숙은 평양에 가서 상점 점원을 하며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는 김원택을 알게 되었다. 그 가족의 일원으로 하여 1905년에 하와이로 떠났다. 그 이듬해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6년 간 육체노동을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공부할 기회를 찾다가 박용만 등이 네브라스카에 설립한 헤이스팅스한국소년병학교를 1912년에 입학하였다. 1915년에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마운틴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조지아주 액스포드대학 예과를 수..

최고령 의사 70년 외길인생

최고령 의사 70년 외길인생 이형준 기자 승인 2009.02.23 09:30 우리나라 최고령 현역 의사인 김응진(93) 을지병원 교수(내과)가 70년간 입었던 가운을 벗는다. 김응진 을지병원 교수 을지병원은 "김응진 교수가 건강상의 이유로 24일 마지막 진료를 끝으로 오는 25일 퇴임한다"고 23일 밝혔다. 김 교수는 지난 1939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이후 70년이라는 긴 의사 외길인생을 살았다. 지난 1981년 서울대 병원에서 정년퇴임한 뒤로 을지병원에서 28년간 주4일, 하루에 50~70명의 환자를 돌봐왔다. 국내 최고의 당뇨병 치료 의사로 평가받고 있는 김 교수는 퇴임후에만 37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해왔으며, 환자에게 '엄격한 의사'로 통한다. 그 때문인지 현재 10년 이상된 단골(?)환자만 수 백명..

발치와 기방풍속

발치와 기방풍속 조선시대 한량들은 마음에 드는 기녀의 꽃신에 술을 따라 마셨으니, 일편단심으로 너만을 사랑하겠다는 표시였다. 그러면 기생은 옷을 벗어 어깨나 허벅지에 사랑하는 낭군의 이름을 새기게 하였는데 이것을 연비(聯臂)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헤어지는 날이 오게 마련인지라, 새로운 임지로 떠나게 되거나 타향으로 옮기게 되면 사랑의 정표로 생니를 뽑아주었다. 당시 기생의 대부분은 관아에 소속된 관기라 함부로 거처를 옮겨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서 아쉬움과 애절한 사랑을 담아 이빨을 뽑아주었으니, 이를 '발치풍속'이라 했다. 그러나 절절한 사랑도 변하게 마련, 충주의 기생 금란은 벼슬아치인 전목과 이별하면서 '저 월악산이 무너질지언정 내 마음은 변치 않는다.' 고 굳게 맹세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