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同床異夢

법정 스님이 길상사에 남긴 정신/동아,문화,서울,조선,중앙

marineset 2023. 5. 30. 06:36
***법정 스님이 길상사에 남긴 정신***

<동아일보/칼럼>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50선(選)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맨 위에 올려놓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소로는 교사 목수 측량기사를 거쳐 아버지의 연필공장 일을 돕다 1845년 7월 월든 숲에 방 한 칸짜리 통나무집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자연 예찬과 문명사회 비판을 담은 ‘월든’을 썼고 마하트마 간디와 시인 예이츠를 비롯한 사상가 그리고 환경운동가들에게 두고두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소로는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그대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마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 명료해질 것이다’라고 썼다. 법정 스님은 월든 호수를 세 번이나 찾아갔고, 저서 ‘무소유’나 ‘오두막 편지’에도 월든의 흔적이 어려 있다.

무소유는 본래 인도 자이나교의 전통이다. 자이나교 승려들은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느라 몸에 실오라기도 하나 걸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한다. 비폭력 무소유 채식주의도 자이나교의 교리에서 유래했다. 간디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무소유 정신도 자이나교의 가르침과 관련이 깊다. 자이나교는 불교를 비롯한 인도의 정신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현재 신도 수는 인도 인구의 1% 정도이고 인도의 국경선 밖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불교는 자이나교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인도 국경선을 넘어 아시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無所有 종교화해 나눔의 도량

법정은 1989년 인도를 여행하며 간디가 거처하던 집을 찾아가보고 그 간소함에 감명을 받는다. ‘그의 방은 수도승의 거처보다 훨씬 간소한 데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자신 지닌 것이 너무 많아 몹시 부끄러웠다.’ 스님은 1976년에 쓴 ‘무소유’ 수필 첫머리에서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라는 간디 어록을 인용한다.


소로는 인도철학에 심취해 쌀을 주식으로 할 정도였다. 소로는 다시 인도의 간디에게 깨우침을 주었다. 법정 스님은 ‘내가 영향 받은 것이 있다면 간디와 소로의 간소한 삶’이라고 밝혔다. 위대한 사상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형성되는 가치체계라고 할 수 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아름다운 선물이다. 밤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지나가면 십자가가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도심 속에서 절은 찾아보기 어렵다. 길상사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고 추경(秋景)이 뛰어나다. 가을철이면 도심 속의 단풍 숲을 구경하기 위해 하루 5000명가량의 중생이 찾아온다.

대원각이란 이름의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조선권번 기생 출신 김영한 여사의 마음속에는 평생 두 남자가 있었다. 하나는 사랑하던 백석 시인이었고 하나는 글을 읽고 존경하게 된 스님이었다. 두 남자는 모두 글을 잘 쓰고 정신세계가 여유로운 호남아였다. 터 7000평의 대원각은 재산 가치가 1000억 원대를 호가했다. 김 여사는 법정 스님이 설립한 ‘맑고 향기롭게’ 재단에서 활동하며 10년 동안 스님에게 간청하다시피 해 대원각을 부처님께 바쳤다.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근본도량 길상사는 이렇게 태어났다. 스님은 이 재단과 함께 장학사업을 벌여 30여 권의 저서에서 나오는 인세 수십억 원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보냈다.

요정을 리모델링한 길상사는 여느 사찰처럼 일주문도 없고 눈을 부릅뜬 사천왕상도 보이지 않는다. 법고(法鼓)와 목어(木魚)도 몇 달 전에야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길상사에는 조각가 최종태 씨의 관음보살상이 있다. 최 씨는 마리아상으로 이름난 조각가다. 법정 스님은 관음보살상의 조각을 왜 최 씨에게 맡겼을까. 마리아상을 닮은 관음보살상은 법정 스님이 고 김수환 추기경, 이해인 수녀 등과 가졌던 교분과 함께 종교 화해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법정 스님처럼 다른 종교와의 화해에 관심을 쏟는다면 우리 사회에서 종교 갈등이 크게 줄어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名刹 만들어 후대에 물려줘야

삼각산에 비가 오면 끝자락 길상사에 새로운 실개천이 생긴다. 시원한 포말이 부서지는 작은 실개천이 경내를 휘감아 돌며 가슴을 파고드는 물소리를 낸다. 길상사의 사계를 카메라에 담아 ‘이토록 행복한 하루’라는 책을 펴낸 이종승 동아일보 사진부 차장은 김 여사가 이 물소리를 들으며 대원각을 시주할 결심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법정 스님이 “사리를 줍지 말라”는 유언을 해 길상사에는 스님의 부도(浮屠)도 남지 않게 됐지만 ‘무소유’ ‘종교 화해’ ‘나눔’의 정신을 잘 가꾸면 대한민국 명찰(名刹)로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맑고 향기로운 사회’ 이끈 법정스님을 추모한다***


<문화일보/사설>

‘시대의 스승’으로 추앙받아온 한국 사회의 한 어른 법정 스님 입적(入寂)은 종교의 같고 다름을 떠나 국민 모두의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말과 글을 통한 그의 가르침은 물론 삶 자체가 사회의 등불 역할을 해왔고,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그런 어른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1일 입적 직후 정진석 추기경 역시 대한불교조계종에 메시지를 보내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많은 위로와 사랑을 주셨던 법정 스님의 원적(圓寂)은 불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큰 슬픔”이라고 애도한 취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명복을 빌며 우리가 평생에 걸쳐 무소유와 소통을 화두로 삼다시피한 그의 정신과 삶을 새삼 되새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에도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1994년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설립해 2003년까지 회주(會主)를 맡아 이끌어온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맑고 향기로운 사회야말로 법정 스님의 생애를 관통하는 지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사들에게 “세상 떠들썩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또 사리를 줍는다고 재를 뒤적이는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내가 입던 승복 그대로 입혀서, 내가 즐겨 눕던 작은 대나무 침상에 뉘어 그대로 화장해달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97년 길상사 개원 법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해 불자들에게 강론을 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명동성당을 찾아 천주교 신자들에게 사랑과 신뢰의 마음을 전하면서 법문을 한 일 등도 소통을 통한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가꾸어가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음은 물론이다.

법정 스님은 생전 당부대로 장례의식 관례의 거의 모두를 생략한 채 13일 송광사 다비식을 끝으로 현생에서의 국민 곁을 떠난다. 생애 전반과 입적까지도 이 시대의 가르침으로 삼아 제대로 실천하는 과제는 모두의 몫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큰 어른의 명복을 거듭 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

<서울신문/씨줄날줄>

파리 교외 토르시라는 곳에 길상사 파리 분원이 있다. 특파원으로 있을 때 마침 길상사 파리 분원 10주년 행사가 있었다. 기념법회에 법정 스님께서 직접 참석하셨다. 아직 바깥 바람은 싸늘했지만 화창했던 날 법회와 함께 열린 수계식에서 스님으로부터 수월화(水月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수월관음의 ‘수월’이다. 스님께서는 “달빛이 물에 골고루 비치듯이 좋은 글로 세상을 맑게 비추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가슴에 고이 간직했다.
2007년 여름 법정 스님을 다시 만나 뵐 기회가 왔다. 길상사 신도인 친구가 스님께서 순천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에 내려 오신다는 기별을 받았다면서 함께 친견하러 갈 것을 권했다. 주저없이 따라나섰다. 8월16일.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코스피지수가 사상 최대의 낙폭을 기록했던 날이다.

불일암은 송광사 뒷산으로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나온다. 스님께서 직접 지으셨다는데 스님 성품처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세련됐다. 마당의 매화와 산후박나무, 웬만한 집 거실보다도 깨끗한 해우소가 일품이다. 스님이 1992년 강원도 산골로 거처를 옮기신 이후에도 일년에 서너 차례 불일암에 오셔서 휴식을 취하곤 하셨다. 처소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으시는 스님은 마당 한편에 지어진 공양간의 다실에서 우리 일행을 맞으셨다.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의 편안한 차림이셨다.

그날 스님께서는 “마음이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재물이란 많든 적든 우리가 이생에서 잠시 맡았다가 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만큼이 내 몫이고, 저 사람 몫은 저만큼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라고 하셨다. 내 몫도 아닌 것에 괜한 욕심을 부리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은은한 향이 좋다며 황차를 내주시면서 스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야.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나지.”

그날 스님은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떠나셨다. 차로 7시간 걸리는 거리를 손수 운전을 해서 가신단다. 오두막에서 일을 하다가 가슴뼈를 삐끗했는데 영 개운하게 낫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스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자연의 품에 안기셨다. 다정하게 차를 권하시던 모습, 밀짚모자를 쓰고 대나무 사잇길을 훠이훠이 걸으시던 모습, 커다란 부채를 부치며 산후박나무를 지그시 바라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법정 스님이 남긴 맑은 삶의 향기***

<조선일보/사설>

수의(壽衣)도 관(棺)도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法頂) 스님의 다비식(茶毘式)이 지난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 전통다비장에서 열렸다.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은 법정 스님이기에 운구 행렬엔 '비구(比丘) 법정'이란 위패와 영정만 앞세웠다. 전국에서 모여든 1만5000여 추모객이 그 행렬을 따라 험한 산길을 올라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했다. 다비식은 "일체의 장례식을 하지 마라"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추모사도, 추모사를 적은 깃발의 나부낌도 없이 진행됐다. 참나무 장작더미에 불을 올리는 거화(炬火)의식을 마친 추모객들은 스님은 불길 속에 계시지만 스님 가르침은 연꽃처럼 불길 속에서 다시 필 것이라는 뜻의 '화중생연(火中生蓮)'을 외쳤다.

법정 스님은 입적(入寂) 직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달라"고 했다.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간 스님이었지만 생전에 스님 손은 '내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데 열심이었다. 오랫동안 어려운 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기부해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스님이 실천했던 '무소유'(無所有)와 '나눔'의 정신 앞에 새삼 모든 이가 고개를 숙였다. 스님 몸은 대나무 평상에 누워 불길 속에서 사라졌지만 세속의 탐욕에 물들지 않았던 스님의 삶은 맑은 향기를 남겼다. 생선 싼 종이에선 비린내가 나고 향 싼 종이에선 향내가 나는 법이다. 스님이 실천을 통해 풍겨냈던 삶의 향내를 사회 구석구석에 배게 해서 많은 이가 그 향기를 맡고 스스로도 그런 향기를 내겠다고 노력하게 된다면, 스님의 향기는 우리의 영원한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법정의 상수도, MB의 하수도 공사***

<중앙일보/시시각각>

“법정 대종사, 불 들어갑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어금니라도 물으라는 건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면서 스님들은 그렇게 외쳤다. 법정이 어찌할 도리가 없음에도 그리 말했다. 원래는 “불 들어가니 어서 나오세요”라고 한단다. 다 버렸는데 나와서 어디로 가란 말인가. 엉뚱해서 아름다운 마지막 인사다. 관도, 열반송(涅槃頌)도, 사리도 없이 법정은 그렇게 갔다. 쇄골이 되면 머물던 산야에 뿌려진다고 한다. 장례가 텅 비니 오히려 삶이 꽉 차는가.

속세에서는 프랑스의 드골이 그렇게 갔다. 드골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1940~44) 때 저항운동으로 프랑스의 영혼을 살려냈다. 전후에는 대통령으로 프랑스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69년 국민투표에서 지자 대통령직을 버리고 시골 콜롱베로 내려갔다. 이듬해 11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공로라면 성대한 국장(國葬)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8년 전 유서를 남겨놓았다. 국장을 하지 마라, 비문(碑文)엔 이름만 새겨라, 대통령·장관·국가기관장 누구도 장례식에 오지 마라, 공식적으론 군대만 올 수 있다, 누구도 어느 곳에서도 연설하지 말고 의회는 추도사를 하지 마라, 프랑스건 외국이건 어떤 훈장도 나는 거부한다··· 드골은 요구했고 프랑스는 지켜주었다. 장례가 홀쭉하니 삶이 풍성해지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 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그저 고향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고 했다. 그러나 성대한 국민장에는 원망의 소리가 높았다. 한명숙 공동장례위원장은 “대통령님,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흐느꼈다. 현직 대통령이 있고 국민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지키다니 누가 무엇을 빼앗았다는 말인가. 국무총리를 지낸 이가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국가의 엄정한 사법질서인가 아니면 코드 그룹의 정서인가. 진보진영은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5월 23일 서거 1주년을 맞아 노무현을 초혼(招魂)하겠다고 한다. 정작 죽은 자는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 했는데…. 남은 이들의 요란한 추모가 행여 떠난 자의 삶을 깎는 건 아닐까.

법정의 무소유는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탐(貪)하지 말라는 거란다. 법정이 떠나면서 탐은 이 시대 또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70년대 야당 지도자 이철승씨는 “종교는 상수도 공사요, 정치는 하수도 공사”라고 했다. 종교는 욕망이라는 열차에서 떨어진 승객에게 치유의 생수를 흘려넣어주는 것이다. 법정은 열차를 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철로에서 멀리 있지도 않았다. 그는 30여 권의 책으로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했다. 몸은 멀리 순천과 강원도 골짝에 있었지만 정신은 사바(娑婆)와 뒹굴었다. 그는 1급 상수도 기술자였다.

속세의 욕망은 서로 부닥치고 섞여 갈등이라는 하수를 만들어 낸다. 하수구가 제대로 뚫려야 갈등이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다. 정치는 이 하수도를 뚫는 일이다. 누가 제일 먼저 이 일을 해야 하나. 욕망의 탐을 버리고 장화를 신고 삽을 들어야 할 이는 누구인가. 정치 지도자들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이명박(MB) 대통령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명박 장로는 법정을 조문함으로써 종교적 포용성을 보여주었다. 300억 재산을 기부한 것도 법정의 무소유에 영향을 받아서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1급 하수도 기술자가 되려면 그걸로는 부족하다. 권력집단에 그가 시범을 보여야 한다. 이 정권은 권력의 하수공사는 잘하지 못했다. 2년 전 ‘비주류 공천 대학살’은 권력자들의 탐 때문이 아니었나. 박근혜의 마음을 얻지 못한 건 탐 때문이 아니었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어도 안 되게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또 무슨 탐의 언어인가. MB는 공정경쟁을 버리고 이런 탐의 유혹에 빠질 것인가. 그러면 여권의 하수도 공사는 엉망이 될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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