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다음의 신문 기사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妓生組合成立」. 朴漢英 等 三十餘人이 發起하여 漢城內 妓生營業을 組合하여 風俗을 改良하기로 目的하고 規則을 諸定하여 警廳에 請願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년 10월 27일)
「자선연주회」. 문천군 기근을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소에서 음력 윤달 11일로 한 10일 연주회를 원각사에서 열어 다소간 기부를 바라니, 원각사의 성의 또한 감사하여 이로써 알려드리니 모든 군자는 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백.
(「慈善演奏會」. 文川郡 飢饉을 爲하여 漢城妓生組合所에서 陰 閏月 十一日로 限 十日 演奏會를 設行於圓覺社하여 多少間 寄附하올되 圓覺社 誠意 尤極 感謝하와 玆以共布이오니 僉君子는 枉臨하심을 望하옵. 漢城妓生組合所 白. 「황성신문」, 1909년 4월 1일)
「연주회 개최」. 본소에서 경성 고아원 경비에 보조하기 위하여 오는 13일 (음력 3월 4일)부터 원각사에서 연주회를 한 일주간 개최하오니 慈善하신 모든 분들은 마음에 새겨주시기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기생 연홍, 앵무, 농월 등 알림.
(「演奏會開催」. 本所에서 京城孤兒院 經費에 輔助하기 爲하여 今 十三 日 (陰 三月 四日)부터 圓覺社에서 演奏會를 限 一週間 開하오니 慈善하신 僉閣下는 光顧하심을 切望함. 漢城妓生組合所 妓生 蓮紅 鸚鵡 弄月 등 告白. 「황성신문」, 1910년 4월 12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3일)
한성기생조합은 후에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이후 1914년에 다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한성권번은 안춘민(安春敏), 엄순모(嚴淳模) 등 3인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들 몇몇의 힘으로 합자회사의 형식으로 「광교조합」이 형성되었고, 그 당시 소리와 춤으로 유명한 류개동(柳開東), 주영화(朱榮和), 장계춘(張桂春), 김용태(金用泰) 등을 선생으로 모시고 재주 있고 총명하고 얼굴 예쁜 기생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한성권번에는 퇴역 관기와 남도지방의 기생들을 포함하여 장안의 일류 기생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삼천리」 8권 8호에 실린 <명기영화사 한성권번(名妓榮華史 漢城券番)>에는 한성권번이 배출해낸 명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기사가 씌어진 때는 한성권번이 설립된 지 30여 년이 지난 때였는데, 필자는 장안의 명기(名妓), 명창(名唱)치고 한성권번의 무대를 밟지 않은 이가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한성권번에는 만년 명기도 있었고, 신예 명기도 있었다. 조목단(趙牧丹), 白牧丹 같은 이들은 40의 고개에 이르러서도 장안의 인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기생 생활을 그만 두었다가도 불과 몇 해만에 기적(妓籍)에 나타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생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이중 조목단은 「경성잡가」, 백목단은 「서도소리」를 잘하였다고 한다. 중년 명기쯤 되는 이들에는 김옥엽(金玉葉)과 李眞鳳이 있었다. 30대의 이들은 모두 평양 출신으로서 서도소리가 장기였다. 한성권번에서 조선 소리로 인기 있는 기생 하면 이들이었다고 한다. 한편 남도소리를 잘하는 기생으로는 전라도 구례 출신 김금옥(金錦玉)이있었다. 돈 잘 쓰는 전라도 부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으레 금옥의 얼굴을 대하여 그는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위의 명창들과는 달리 ‘땐스’ 잘하는 현대적인 기생들도 인기가 높았다. 그러한 기생들에는 이춘홍(李春紅), 김진옥(金玉眞), 유금도(柳錦桃), 이현정(李賢貞), 구근화(具槿花) 등이 있었다. 이들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신식 춤과 노래를 잘했으며 용모도 아름다웠다. 이중 이춘홍과 유금도는 평양 기생학교 출신이다. 많은 명기들을 배출해낸 한성권번은 1938년에는 주식회사 한성권번 부속 기생학교가 인가되었으며,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三和券番)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은 「삼천리」 8권 8호에 실린 기사 <명기영화사(한성권번)>의 전문이다.
名妓榮華史(漢城券番)
한양 성중에 뛰어난 가희(歌姬), 미희(舞姬)는 그 누구누구던고. 이 땅 정조(情調)는 그네의백어(白魚) 같은 손에서, 흘러나오건만, 타는 이, 뜯는 이, 그 뜻을 알손가.
한성권번(漢城券番)이 한양성중에 생겨난 지도 3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한양성중(漢陽城中)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건 어떤 변(變)이 있었거나, 이래 30여년간 이러한 시끄러운 세상사는 모르는 듯이 꽃 같은 妓生만을 알뜰하게 길러내인 한성권번이다. 꽃피고 새 지저귀는 봄날이나 달 밝고 바람 소슬한 가을밤이면 유두분면(油頭紛面)에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화용월태(花容月態)에 애교를 흘리며 꾀꼴새 노래가락이 마디마디 꺾어 넘어갈 때면 허다한 長安의 풍유남아의 간장을 녹아내듯 한다하는 명기(名妓)?명창(名唱)치고 어느 누가 이 漢城券番의 무대를 밟지 않은 이 있으랴!
한성권번을 무대삼고 「가사」「시조」를 잘 부르며 가야금 거문고 잘두 타기로 장안에 소문높아 더할 나위 없는 영화(榮華)를 한몸에 누리고 있던 이 그 수를 일일이 다 헤일 수 없이 많았다. 김×선이 그러했고 박금○이 그러했다. 이렇게 한때에 서울장안의 수많은 호걸남아, 돈 잘 쓰는 풍류객들의 이 손에서 저 손 위로 무릎 위에 안기우고 품안에 꼭 껴안겨서, 밤 가는 줄도 모르는 채 춤추고 노래 부르던 名妓名唱들-이들은 그 뒤에 어찌되었노? 어떤 기생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돈 많고 인물 잘난 정든 남편 모셔놓고 밤낮으로 웃음 섞인 달콤한 가정을 이룬 이 하나요 둘이 아니며, 어떤 기생 팔자 궂어 정 들이고 못 살게 되어 님의 손목 마주잡고 漢江水 깊은 물에 풍덩실 떨어져 저 世上을 찾아간 이 또한 없지 않으리라.
인제 이들의 이름 일일이 적어보려 하였으나 아들딸 두둑이 낳아 놓고 얌전한 가정살림을 이룬 이들에게 전날의 그 시절을 되풀이시킴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며 또한 애처롭게 한 많은 눈물을 뿌려가며 娑婆世界를 등지고 서글프게 사라진 이들에겐 그 죽어간 靈魂마저 가슴속을 저리게 할까두려워, 흘러가는 붓대를 억지로 돌리려 한다. 한성권번이 있어온 지 30년 동안, 기생으로 반도 강산에 나왔다 사라진 이 그 수를 헤아리면 무릇 백도 넘고 천도 넘을 것이다. 지금에서부터 30년 전 서울 서대문 밖에 아담스럽게 꾸며 놓은 한 채 집-이 집 커다란 솟을대문 옆에는 「廣橋組合」이란 커다란 看板이 붙어 있다가 이 광교조합이 오늘의 한성권번이다. 그러면 이 한성권번은 어떤 사람 손으로 생겨서 오늘에 이르렀노? 오로지 安春敏氏?嚴淳模氏 等 수삼 인의 힘으로 되어졌다고 한다. 안춘민씨로 말하면 현재 한성권번의 취체역으로 있는 분이다. 이들 몇 분의 힘으로 合資會社의 형식으로 「광교조합」을 만들어 놓고 그 당시 소리와 춤으로 유명한 柳開東, 朱榮和, 張桂春, 金用泰 等 諸氏가 선생으로 있으면서 재주 있고 총명하고 얼굴 잘난 계집애들을 모아놓고 밤낮 매질하고 웃어가며 「妓生道」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세월은 덧없이 흘러 30여년, 趙牧丹, 白牧丹 같은 名妓들은 한번 妓籍에서 몸을 돌렸다가도 가정이 귀찮고 살림이 까다로웠던지, 또는 말 못할 야릇한 사정이 있었음인지는 몰라도 불과 몇 해만에 妓籍에나타나서 40의 고개에 이르러서도 장안의 인기를 잃지 않고 한 달 잡고도 4~500 시간을 이리저리 늙은 어른, 젊은 사나이들 앞으로 불려 다니고 있으니 「萬年名妓」로 불리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趙牧丹과白牧丹, 모두 한양의 雨露를 마셔가며 북악산 밑에서 곱다랗게 자라난 名妓들이다. 趙牧丹의 「京城雜歌」 白牧丹단의 「西道소리」하면 서울 안에서 돈푼 쓸 줄 아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 거의 없을 것이다. 조목단은 42세요 백목단은 39세이다. 이 두 名妓 모두 한때에는 얼굴 잘생기고 노래 잘 부르기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조이게 한 때가 있었으나 이제 막을 수 없는 한 가닥 두 가닥 주름살이 어느 겨를에 이들의 얼굴 위에 線을 그어가고 있으니, 꽃 같은 청춘이 늙어감을 한숨져 무엇하랴! 지금엔 다만 변할 줄 모르는 靑山流水에도 옥을 구을리는 듯한 그 고운 노래가락에다 한때의 그 시절을 하소하는듯!
金玉葉, 이름 좋은 玉葉이요 얼굴 잘난 玉葉이다. 미인의 고을 평양에서 자라난 김옥엽은 어려서 평양기생학교를 다녔었다. 淸流壁에 철쭉꽃 피고 浮壁樓에 낙엽 질 때 날씬한 허리에 곱게 단장하고 大同江邊을 오락가락할 때이면 浿城의젋은이들 모두 그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이러한 김옥엽이 평양에서 자취를 감추고 봄바람에 불려 서울 장안에 날아들자 서도소리 잘하기로 김옥엽의 이름이 단번에 쫙 퍼지고 말았다. 올해 그의 나이 三十, 서울에 올라와 妓籍에 몸을 둔 지 엊그제 같은 일이언만 벌써 八年째 되어간다. ?옥엽의 愁心歌라면 오늘날 장안의 풍유객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名唱이다.
李眞鳳, 그의 나이 38에 妓籍에 다시금 나선 지가 10년이 가깝다. 옥엽과 같이 평양 태생으로 서도소리 잘하기로는 옥엽과 같이 친다. 옥엽이 가는 연회에 진봉이 따르고 진봉이 가는 좌석이면 으레히 옥엽이 나타난다. 한성권번에서 조선소리로 한 달 잡고 그 중 많이 불리는 기생이 누구냐 하면 옥엽이 아니면 진봉이다. 서로 다정스럽게 앞서고 뒤서고 하는 굉장한 인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도 40이 앞에 멀지 않았으니 아까운 노랫가락이 아까웁다. 金錦玉, 전라도 求禮 출생이다. 서울장안에서 남도소리 잘하고 가야금 잘 띄우기로는 어느 기생이냐? 하면 으레히 첫 손가락이 김금옥을 꼽게끔 되었다.
아직 妓籍에 나선 지 날이 짧아 30년밖에 안 되지만 그의 인기는 너무나 높아졌다. 가야금에 맞춰 노랫가락 할 때이면 그의 빼어난 재주에 탄복하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돈 잘 쓰는 전라도 부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으레히 금옥의 얼굴을 대한다는 것이니 그의 생활이 호강스러울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위에서는 대개 3,40의 늙은 기생으로 모두가 조선소리로 당대에 그 이름을 떨치는 이들만을 말하여 보았지마는, 오늘의 기생은 땐스 잘하고 外地 손님을 잘 대할 줄 아는 현대적인 기생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기생으로 제일 먼저 李春紅을말하게된다. 춘홍은 올해 나이 25세의 한창시절이다.
「기생의 고을」 평양에서 어려서부터 기생학교를 다녔었다. 춘홍은 기생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 타고난 미모와 명랑한 말소리는 수많은 젊은 사나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4,50년 전에 기생학교를 나오는 길로 서울로 올라왔었다. 노래 잘 부르고 말 잘 하기에 소문이높은 이다. 더구나 그 싱글싱글하는 미소 띤 얼굴은 미인이라는 소리를 늘 듣고 있으니 「금상첨화」는 이를 두고 한 말인가 한다. 지금 서울 장안에서 어느 기생이 그중 많이 불리우느냐 하면 첫째 한성권번의 이춘홍을 말하게 된다. 인물이 絶色이요 말 잘하고 노래 잘 부를 뿐만 아니라 땐스까지 잘하는 이춘홍은 광교다리와 다방골이 분주하게 인력거꾼은 그를 싫고 요란스럽게 달리는 것이다. 한 달 잡고 6,700시간은 늘 불려다닌다고 하니 춘홍의 인기도 무던하다.
김옥엽, 이춘홍을 말하게 되니 金玉眞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張桂春氏와 땐스 선생 金用泰氏의 귀여움을 받는 기생도 옥진이요 많고 많은 기생들 가운데서 상냥스럽고 마음씨 좋은 기생도 옥진이다. 더구나 국어를 잘하고 명랑스러운 웃음세를 가진 옥진이는 외지에서 들어오는 손님이면 으레히 한성권번의 김옥진을 부르게끔 되었다. 아직 활짝 피지 못한 한 떨기 꽃송이 방긋이 벌어지는 탐스러운 요염한 자태! 그 향그러운 향기를 따라 날아드는 蜂蝶의 떼. 옥진의 선잠을 고달프게 흔들어 놓을 것이다. 今年에 22, 서울이 고향이다. 기생으로 나선 때는 16세 되던 해 이른 봄 불과 5,6년이 되건마는 옥진이는 기생으로서의 배울 것을 다 배웠다. 柳錦桃, 어쩌면 이렇게도 꼭 같을까! 이춘홍과 나이도 25 똑같고 평양에서 기생학교도 한날 들어가 한 날에 다정스럽게 손목 잡고 나왔었다. 춤 잘추고 노래 잘부르는 류금도는 얼굴도 미인이요 거동 좋고 모양 좋으니, 당대의 名妓로서 모든 점을 갖추었다. 그 서글서글한 얼굴에 시원스러운 마음씨는 장안의 호걸남아들이 무던히 가슴을 조이는 것도 그럼직한 일이다.
李賢貞, 충청도 출생으로 나이가 스물일곱, 기생으로 나오기는 소화 6년이다. 노래 잘 부르고 땐스 잘하기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具槿花, 이름도 槿花요 생기기도 槿花같이 고결하고 아리땁다. 그가 자라난 고향조차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 水原이다. 일찍이는 얌전하고 착실한 여학생으로 집안에선 따뜻한 사랑과 선생에게 귀여움을 받던 槿花도 여러 가지 까다로운 사정으로 해서 바로 작년 여름 비로소 妓籍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래배우고 춤 배우기에 매도 맞고 욕도 얻어먹었으나 원체 총명한 근화는 한 달이 되고 달이 됨을 따라 제법 애티 활짝 벗고 지금에 와서는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일류 名妓로 그 이름이 장안의 젊은 사나이들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혀 있다. 이밖에도 일류 명기로 치는 한다하는 명기명창을 모조리 헤이자면 한이 없다. 지금에 漢城券番에는 250명의 妓生들이 아침이면 11시부터 저녁 4시까지 한데 모여 춤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며 가야금 타기에 요란스러우니, 또한 이들 가운데서는 어떤 이름 가진 명기명창이 튀어나오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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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신승훈 기자 =영화〈해어화>가 개봉하면서 기생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기생은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다. 음주가무뿐만 아니라 시 문예에 능통한 기생은 조선시대의 문화를 관통하는 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생의 삶이 한재에도 재조명되는 이유는 단순히 유희의 대상이라서가 아니라 미술, 문학, 무용 다양한 기치를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영화 <해어화>는 지난 13일 개봉했다. 한효주. 유연석. 천우회 주연의 <해어화>는 일제강점기였던 1943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해어화는 '말을 할 줄 아는 꽃‘ 이란 뜻으로 기생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녁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달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지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쾼다.
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 할 수 있다. 기생의 유래에 다한 정설은 없으나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사제였던 무녁가 제정이 분리되면서 기생과 비슷한 신분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정해섭 동국대 교수의 <성 역사와 문화>에 따르면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列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반면에 다산 정약용 선생과 성호 이익 선생은 기생이 고려시대 생겼다고 본다. 고려 초에 팔관회와 연등회 등의 행사에 필요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해 고려여약이 제정됐는데 이 고려여악이 기생의 원조라고 기생 연구가들은 주장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기생을 일종의 제도로 정작시켜 국가가 직접 기생들을 관리, 감독했다.
특회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하계 된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 따르면 기생은 관기로써, 관가에 등록된 기생만이 기생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생은 교양 있는 지식인들로 노래, 춤, 악기, 서화에 능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장악원에 들어가 몇 년에 걸쳐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이러한 교육은 일정 나이가 지나거나 줄산 등의 이유로 은퇴한 퇴기들이 주로 맡았다. 기생은 대개 소녀 시절부터 교육을 받고, 15세가 되면 성년식을 치러 본격적인 기생의 업무에 종사하계 됐다.
기생은 보통 정년이 50세로, 20세가 넘어도 활동하는 기생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20대 중반만 되면 '노기‘로 취급받았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법적 신분으로는 양민이었지만, 직업의 특성상 생활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향유했고 사회적으로는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기생으로는 황진이를 들 수 있다. 황진이는 중종 6년(1511)에 태어나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으로 추정된다. 황진이는 19세기 풍속화를 그린 화가 신윤복에 의해 풍속화 기생 이미지를 갖추게 된다.
신라 진흥왕 때 무녀서 비롯됐다?
고려 행사에 공급된 여성이 원조?
기생은 조선시대에서 남성과 공식적으로 관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기생 출신인 황진이는 규방출신의 감동이나 어우동과 달리 음란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있었다. 시와 음악에 능했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황진이는 당대 최고의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말기에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 세 부류로 나뉘는데 그 중 일패 기생은 관에 소속된 관기로 양반기생 으로 불렸다.
이들은 임금 앞에서 노래, 춤을 하는 기생으로 예의범절 수준이 높고 남편이 있었기에 몸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등이 일패 기생을 대표한다. 이패 기생은 관아나 재상집에 출입했고 암암리에 몸을 파는 밀매음을 하기도 했다. 삼패 기생은 몸을 파는 유녀를 뜻했다.
조선시대부터 천한 백성으로 분류돼 독특한 신분구조를 형성했던 기생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사노비제가 폐지돼 외형적으로는 신분해체에 따른 천민을 면하지만 여전이 신분상의 사별을 극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00년대 초 신문이나 잡지기사, 총독부의 공식문건 등에 나타난 기생에 대한 명명과 분류를 살펴보면 기존 여악의 일원인 관기가 중심축이었던 기생 집단이 창기 또는 매춘부로 불리게 된다. 조선시대까지 예악을 담당하고 사대부의 여흥을 주도한 기생은 신분해제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전통 가무악을 전승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식민지 공창정책 하의 창기와 비숫하게 통제되는 수모를 겪계 된다.
또한 기생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접어들면서 상품화 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팔도에서 꼽힌 향기(鄕妓)들 중 평양기생이 가장 많았는데 평양기생들 중 일부는 서울에서 기업(妓業)을 차리기도 했다. 이런 향기와 관기 출신들이 모여 1909년 처음으로 만든 기생조합이 한성기생조합소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설립된 조선장악전습소의 학감 하규일이 만든 기생조합은 다동조합이다. 다동 조합은 훗날 조선권번으로 개칭된다.
이 시대에 권번을 빼고는 기생을 논하기 어렵다. <한겨레음악대사전>에 따르면 권번은 직업 적인 기생을 길러내던 교육기관이자 기생들이 적을 두고 활동하던 기생조합이다. 당시 기생의 직업은 조선총독부 허가제였기 때문에 모든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어야만 기생활동을 할 수 있었다. 권번은 교육과정의 기생을 관장하고,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관리감독 함은 물론이고 손님에게 받은 화대도 관리했다.
권번에 들어오는 여성들은 남들의 추천을 받아오는 이가 제일 많았고 일부는 본인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권번에서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을 배우고 지체높은 양반의 눈에 들어 팔자를 고치려 했던 여성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권번 명기는 서도기생과 남도기생으로 나뉜다. 남도 출신은 멋을 잘 내기로 소문났고 서도기생은 애교가 맡기로 유명 했다. 기생의 학습과목은 시조, 가곡, 검무, 가야금, 거문고, 양극 한문. 시문. 사군자. 일어 ,독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전국구 명월관
구한말부터 유명
조선 후기에 평양에서 이름을 떨진 기생중에 장연홍이라는 기생이 있다. 장연홍은 1911년 평양에서 외동딸로 대어나 5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가정형편으로 인해 14세 때 평양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됐다. 기생이 된 장연홍은 수려한 외모와 춤, 노래, 모델 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이후 상해로 유학을 떠난 뒤의 행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1930년대에는 평양 기성권번 출신의 현매홍과 김옥엽이 서울로 상경해 각각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에 적을 두며 활동했다.
현매홍은 시조, 가곡, 가사에 능했고 김옥엽은 궁중무용과 서도잡가, 경기잡가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진다. 1923년 일제 강점기 강명화 자살 사건은 당대를 떠들썩하게했다. 강명화와 그녀의 연인 장병전이 집안의 결혼 반대에 부딪쳐 자살한 사건이다. 장병전과 함께 온양온천으로 여행을 떠난 강명화는 1923년 6월 쥐약을 먹고 자살한다.
강명화의 시신은 경성부로 옮겨서 명월관과 여타 기생들의 애도속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장례식장에서 울다 지쳐 실성한 장병전은 단식에 돌입했고, 강명화와 함께 살던 집인 경성부 중구 종로방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생활화다 같은 해 10월 자살했다.
이 사건은 전국 각처로 퍼져나갔고 일본, 중국에까지 소문이 확산됐다. 사후 1924년 하야가와 일본인 영화감독은 종로구 집, 경성부의 명월관, 강명화의 고향 마을 등을 직접 답사한 뒤 영화를 제작했다.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 기생 문영옥을 캐스팅한 영화 <비련의 곡>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당시 조선과 일본, 중국에서 화제가 돼 많은 관객이 몰렸고 1925년에는 익명의 작가에 의해 <강명화의 죽음>이란 소설로 탄생하계 됐다.
신현구 중앙대 교수의 <기생, 조선을 사로잡다>에 따르면 초창기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중 기생 줄신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3년 ‘월화의 명세'라는 영화에 출연한 이월화는 여장 배우가 아닌 여자로서 카메라 앞에 선 최초의 배우였다. 또한 기생 출신 이월화, 석금성. 복혜숙은 여배우계를 주름잡았다.
신 교수는 언론을 통해 “당시 기생들은 당당한 엔터테이너로서 여성예술사와 문화사회사 을 새롭게 구축한 선구자였다”면서 “그 무렵 기생은 한쪽에서 보면 봉건적인 유물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로는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로 대우받았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역대 최고는 황진이
최고 미녀는 장연홍
역대 최고는 황진이 최고 미녀는 장연홍
명월관은 1900년대 기생들이 활약한 공간으로 유명하다. 명월관은 청풍명월에서 따온 이름으로 명사들을 초청해 대접한 요릿집이다. 안순환은 명월관을 개업해 궁중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했고, 궁중 나인이 담근 술을 팔아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융희 3년(1909)에 관기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은 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이나 인물,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됐다.
1910년대 초반에는 조선 왕조의 왕족들, 대한제국의 고관, 친일파들이 이곳을 찾았다. 1910년 후반에는 망국대부의 자제들과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주로 명월관 찾았는데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나라를 지기지 못한 울분을 여기에서 푼 것으로 알려진다.
1920년대 초반에는 일본 유학생들과 상해의 애국지사들이 찾았다. 또한 1919년 3•1운동은 기생들이 사회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여성운동과 독립운동 에 투신하는 기생인 사상기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1919년 3월19일 진주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10일 뒤에는 수원 권번 기생 30 여 명이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기도 했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김향화는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기도했다. 1920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언론인과 문인들이 명월관을 찾았다.
이때 기생들은 일본 유학을 가거나 근대식 학업으로 신여성으로 살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기생폐업을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1930년대에는 사업가들이 주로 찾았는데 이때부터는 서화와 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신하계 행동하던 명기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1940년 대 후반은 미군들이 주로 찾아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는데 이를 마지막으로 기생과 명월관은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중•일 기생
3국의 다른 인식
송지성•김세이 한양대 교수의 <한•일 기녀의 문화 이미지 분석에 관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다. 게이샤는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뉜다.
이들은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 진다. 이전에 게이샤는 남자였지만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고, 소녀들은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 ‘예술을 행하는 사람’ 이란 뜻으로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문적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5년의 수련과정을 거치며 견습 게이사는 마이코라고 부른다. 게이샤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떠올리는 흰 화장과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의 기모노 차림 은 마이코의 모습이다. 완전한 게이샤는 단순한 색상의 기모노를 입고 화장도 특별한 때에만 하얗게 칠한다. 근대에 와서 게이샤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되었고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기생은 서비스 유형과 방식, 기생업의 경영관리 등에서 다원화 형태를 보이는 것이 특징 이다. 미모가 뛰어나고 가무만 제공하는 예기, 몸을 파는 것을 주로 업으로 하는 색기, 가무와 여색, 성적 서비스를 대상으로 하는 기녀로 나누어진다. 또한 중국의 많은 기생들이 문학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고대 대부분 시대의 시, 사의 정수는 모두 기녀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 • 일 기녀의 문화 이미지 분석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3국의 성별에 따른 기생에 대한 관점은 상이하다. 우리나라 남성은 기생을 유회의 대상, 창기로 본 반면 일본과 중국은 각각 예술가와 점유, 소유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여성에게는 우리나라의 경우 시기, 질투,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일본은 예술가로 봤다는 분석이다.
현대판 기생집
강남 요정 영업
1970-1980년대 정,재계 인사들의 비밀회합 장소로 인기를 끌었던 요정은 현대식 유흥주점이 늘면서 쇠퇴를 거듭했다. 현재는 강남 역삼동 등에 소수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요정은 한 사람 당 35만-40만원 가량을 받고 식사와 함께 3-4시간의 유흥을 제공한다.
20-30여종의 코스 요리가 제공돼 한복을 입은 도우미들이 춤과 노래, 가야금 연주 등을 선보이는 이른바 현대판 기생이다. 이들의 성접대는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옥 등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외국인 바이어를 상대로 공격적인 영업을 별이기도 한다. <shs@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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