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同床異夢

화해와 용서는 인간의 특권이다

marineset 2023. 5. 30. 06:30

화해와 용서는 인간의 특권이다




전대열 칼럼 2009-08-21
한국정치평론가협회 회장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종교계의 거인들이 세상을 떴을 때 세상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듯 보인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미워하지 말라는 고인들의 뜻이 전해지면서 일반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착한 기운이 크게 감돈다. 그런데 이번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와병과 서거를 계기로 그동안 반목하고 있던 사람들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도 남았다.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문병과 조문이다.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지만 두 사람은 50년 가까운 세월을 정치무대에서 함께 뒹굴었던 은원(恩怨)이 얽힌 사이다. 국회진출에서 한 발 앞섰던 김영삼은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일정을 헤쳐 나갔다. 그러나 김대중은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입성 후에도 독재와의 투쟁으로 간난신고를 이겨나가야 했다.

정치지도자로서 최고의 목표인 대통령을 주거니 받거니 이어갔던 두 사람은 은퇴 후에도 끝까지 과거의 경쟁을 의식하여 상호 비난과 비판을 그치지 않았다. 물과 기름이었다. 두 분이 함께 만들고 공동으로 이끌었던 유일한 조직은 민추협이다. 민추협의 동지들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를 막론하고 입만 열면 제발 화해했으면 하는 바람을 공개적으로 비췄으나 끄덕도 하지 않았다. 제일 걱정은 두 분의 연세나 높다는 것이었다. “저러다가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시면 영원히 화해는 물 건너가는 게 아니냐?”하는 우려였다. 그런데 김영삼이 예상을 깨고 문병을 단행했다. 거산(巨山)다운 결단이다. 비록 두 분이 손을 맞잡고 웃는 모습을 보이진 못했지만 그런 겉모습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얽히고설켰던 실타래가 일순에 풀렸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입가에 웃! 음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후광의 서거를 계기로 민추협은 서울광장에 프래카드를 내걸고 일심 합력하여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과는 다르지만 또 한 사람의 화해가 눈길을 끌었다. ‘80년 서울의 봄을 깨고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신군부의 대표자 전두환이 세브란스를 찾아 문병과 조문을 한 일이다. 그는 김대중을 사형선고까지 했던 사람이고 광주에서 엄청난 살상을 감행한 장본인이다. 실제로 발사명령을 했는지 여부는 가려내지 못했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5.18학살의 책임자는 전두환’이라고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도 할 말이 있을 것이고 역사의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진상’이 따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주의 비극이 끝난 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어느 누구도 누리기 어려운 대통령을 꿰어 찼다. 최규하 사퇴 후 잔여임기를 포함하여 그는 8년간! 재임했다.

따라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5.18항쟁을 총칼로 억누른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여기서 필자는 탄압의 최고 책임자였던 전두환과 수난의 대표자였던 김대중이 이미 원혐을 털어버리고 넓은 아량과 국량을 보이며 화해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필자 역시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이 감옥 저 감옥을 옮겨 다니며 실형을 살았다. 지금은 파킨스라는 몹쓸 병에 걸려 안타깝기만 한 김홍일이나 박성철 한화갑 김옥두 김대현 함윤식 오대영 손주항 등도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열거하는 것은 이제 전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키고 진정으로 큰 화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은 ‘전두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는 앞서 밝힌바와 같이 김대중과는 생전과 사후를 통하여 은원을 털어냈다. 서먹서먹하거나 비굴한 태도가 아닌 당! 聆構 의젓한 모습으로 다가갔다. 평소에 소문난 그의 배짱과 특유의 유머 감각도 발휘되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광주에 갈 차례다. 광주에는 국립5.18민주묘지가 있다. 5.18 당시 시민군으로 맞싸웠던 영령을 비롯하여 그 후에 숨진 5.18민주유공자들이 묻혀있다. 그들의 유족들은 지금도 아픈 가슴을 안고 눈물로 밤을 드샌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진상을 밝히지 못하여 구천을 헤매고 있을 영령들은 쉴 곳이 없다. 이들을 천도하여 영면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전두환 당신뿐이다.

600만 명의 유태인을 아우슈비츠에서 학살한 독일의 수상은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광주학살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전두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아무 변명도 없이 광주 망월동을 찾아가 큰 절 한번 올리고 “나로 인하여 무고한 생령들이 고통을 당하신 것을 깊이 사죄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다”고 한마디 할 수는 없을까.

때마침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전 국민적 화해와 용서의 기운이 천지에 충만해 있다. 화해와 용서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전두환의 광주방문은 매우 민감한 사항이긴 하지만 정치의 유연성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매듭이 풀리지 않는 정치지도자의 멍에를 스스로 벗어나 모든 국민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넣어주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충언을 드린다.




기사입력 : 200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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