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143

독일의 아픈 역사... 드레스덴 광장에 오다

영·미 연합군, 독일 드레스덴 융단 폭격연합국의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가 1945년 2월 13일부터 2월 15일까지 독일 작센 주의 수도 드레스덴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이 폭격으로 드레스덴은 폐허로 변하였고, 수 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공유하기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추축국과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 등의 연합국 사이에 벌어졌던 제2차 세계 대전 전황은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전개되면서 연합군의 승리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독일군은 계속 후퇴하였고, 연합군은 지상군이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격 태세를 갖추기 전에 공중 폭격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주요 도시들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다. 옛 작센..

식민지 시절의 국적 논쟁

오피니언 중앙시평일제 강점기 한국인은 누구인가? 중앙일보입력 2024.09.06 00:30업데이트 2024.09.06 19:36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일제 강점기를 둘러싼 오늘의 역사 논란은 잘못된 역사교육과 잘못된 진영대결의 잘못된 복합 산물이다. 논란의 핵심은 한마디로 일제 강점기 한국인은 과연 누구였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또한 그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직결된다. 논란의 한 초점은 당시 한국인들의 국적이다. 국적은 곧 시민권을 말한다. 따라서 국적은 결코 형식논리가 아니다. 로마와 유대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영국과 인도, 영국과 식민지 미국, 프랑스와 알제리, 일제하 만주, 독일과 프랑스, 나치와 유대인을 보라. 즉, 시민권의 위계와 종류는 너무도 다양했다. 국적은 한장의 서..

유엔에서 온 '칙사'들

유엔에서 온 '칙사'들 [해방일기] 1947년 1월 7일 김기협 역사학자 | 기사입력 2013.01.07. 08:03:00 1947년 1월 7일 뉴욕에서 1월 2일 출발한 유엔 조선 위원단 본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월 6일 오후 도쿄에 도착했다. 원래는 도쿄에서 하룻밤 묵은 후 7일 오후 서울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도쿄에서 몇 개 나라 대표와 서기국 직원들의 합류에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려 하루 늦은 8일 오후 늦게 서울에 들어왔다. 과도 정부는 우익의 요구에 호응해 12월 중순부터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전국 환영 위원회'를 조직해 놓고 환영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환영 위원회 명예의장은 이승만, 김구, 이시영, 의장은 오세창, 위원장은 조병옥이었다. 환영위원회는 1월 5일 환영 동원 계획을 발..

낙랑클럽

고급 '사교' 조직 '낙랑클럽'을 아십니까? [해방일기] 1948년 1월 30일 김기협 역사학자 | 기사입력 2013.01.30. 12:46:00 1948년 1월 30일 작년 봄 (기파랑 펴냄)이란 책을 낸 최종고는 그 무렵 '제14회 이 승만 포럼'에서 같은 제목의 발표를 했다. 그에 관한 기사를 보고("여류 시인 모윤숙과 '낙랑클럽' 의 재발견", 2012년 4월 8일) 나는 그 책을 구해 보지 않기로 했다.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모윤숙이 활동했던 당시 해방은 됐지만 나라의 세움에 대해 근원적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 던 시절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서 유엔의 도움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과 좌익과 우익의 갈림에서 중재를 맡아 줄 사람이 없♘다. 유엔은 '조선 위..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2> 도봉산 망월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도봉산 망월사 강대국에 치여 시름하던 ‘조선의 눈물’ 현판에… 망월사는 근현대 고승들이 참나를 찾아 정진했던 조계종 종립 선원이 있었으며 구한말 혼란했던 시대상을 말 없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구한말 청나라 사신 원세개 임오군란 진압 차 조선 원정 1891년 가을 ‘망월사’ 올라 현판 쓰고 자신의 이름 남겨 10여년 간 조선 정치 좌우 청일 전쟁 직전 귀국 길에 조선인 3명 첩으로 데려가 손자는 노벨상 후보 오른 세계적 물리학자로 명성 조선 500년 수도였던 서울의 사찰은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조선 창업에 얽힌 이야기가 절 곳곳에 서려 있고, 근대화를 꿈꾸던 젊은이들의 은밀한 회합 장소도 사찰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6·25 한국전쟁의 아..

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김창룡 암살사건 (金昌龍 暗殺事件) 출생 1920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1] (현 함경남도 요덕군 흥상리) 사망 1956년 1월 30일 (향년 3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본관 수안 김씨[2] 호 옥도(玉道) 직업 군인[3] 가족 도상원(처), 김경진(아들) 김미원(장녀), 김미경(차녀), 김미영(삼녀) 경력 일본 제국 육군 관동군 헌병 오장 대한민국 육군 특무부대[4] 대장 육군 소장·중장(추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69호[5]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현대사 사건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소장이 출근 도중 암살당한 사건.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경,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도중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청일전쟁 (淸日戰爭)

목차메뉴 접기 정의 개설 역사적 배경 경과 결과 참고문헌 관련 정보 관련 항목 관련 미디어 글자 크기 의견 제시 URL 복사페이스북 공유트위터 공유 청일전쟁 근대사 사건 1894~1895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접기/펼치기내용 요약음성 재생 청일전쟁은 1894년~1895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은 청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선의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1894년 7월 경복궁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도발을 시작했다. 이어서 황해와 평양 등에서 벌어진 본격적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중국 본토를 공격하여 점령해 들어갔다. 청국은 강화회담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도 이에 응해 시모노세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뤄낸 통일민주당 [한국정당사⑨]

정진호 기자 승인 2023.08.10 14:38 댓글 0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손잡은 YS와 DJ, 통일민주당 창당 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성취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YS와 DJ가 힘을 모아 만든 통일민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사오늘 정세연 YS(김영삼 전 대통령)계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계가 모두 탈당을 선언하면서,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붕괴 수순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두 사람은 새로운 정당 창당에 나섰는데요. 그게 바로 통일민주당이었습니다. 민주당 창당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4·13 호헌조치로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전두환 정권이 민주당 창당마저 방해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폭력..

‘이민우 구상’과 또 다시 분열된 신민당 [한국정당사⑧]

‘이민우 구상’과 또 다시 분열된 신민당 [한국정당사⑧] 정진호 기자 승인 2023.07.27 20:02 댓글 0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이민우 구상에 주류 vs 비주류 갈등 격화…주류 측 탈당 후 통일민주당 창당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이민우 구상으로 인해 신한민주당은 다시 분열의 길을 걷는다. ⓒ시사오늘 정세연 제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은 여세를 몰아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국회 내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나섰고, 국회 밖에서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면서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그런데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 초대 총재 이민우가 갑작..

제12대 총선, 역사 바꾼 신민당 돌풍 [한국정당사⑦]

정진호 기자 승인 2023.07.18 19:27 댓글 0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창당 25일 만에 치른 선거서 67석 돌풍…민주화 앞당겨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신한민주당은 창당 25일 만에 치른 제12대 총선서 67석을 획득하며 원내 제1당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킨다. ⓒ시사오늘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은 제12대 총선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1985년 1월 18일에 공식 창당됐습니다. 그리고 1987년 4월 YS(김영삼 전 대통령)·DJ(김대중 전 대통령) 계파 의원 74명이 대거 탈당하면서 사실상 몰락 수순을 밟았습니다. 신민당이 실질적으로 야당 역할을 수행한 건 2년 3개월여,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했던 것도 3년 3개월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신민당은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