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Rok marines

[월남참전50주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월남전 참전의 빛과 그림자

marineset 2023. 5. 26. 07:12

한국군파병 PDF약사

 
 
 

 
[월남참전50주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월남전 참전의 빛과 그림자

"내 손으로 묻은 전우들"…아직도 생생한 전장의 기억
'한강의 기적', 한국 경제성장 발판 베트남전쟁 특수
'폐지' 줍는 '국가 유공자'...국가는 우릴 버렸다
등록: 2015-08-23 07:00 수정: 2015-08-23 08:29

(서울=포커스 뉴스)올해로 월남전 참전 50주년을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베트남전쟁에 전투병력이 투입된 지 50년이 지났다.


우리군의 첫 파병은 51년 전인 1964년 9월이었지만 이들은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으로 구성된 140명의 소규모 의료지원단이었다.

다음해인 1965년 3월 베트남 지안(Di An)에 도착한 2000여명의 ‘비둘기부대’도 역시 공병부대로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는 비전투작전만을 수행했다.

이후 본격적인 전투부대 파병은 그해 10월이었다.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각각 베트남의 깜란(Cam Ranh)항과 뀌년(Quy Nhon)항에 상륙했다.
월남전 파병을 통해 유입된 막대한 외화는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8년 8개월의 긴 전쟁기간 동안 우리군이 파병한 병력은 총 32만5517명으로 이 중 5099명이 전사했고 1만1232명이 부상당했다.

베트남전쟁의 아픔과 상처는 아직도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참전자 대부분이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고 10만여명의 고엽제 환자가 호지킨병, 백혈병, 당뇨병 등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의 2세 중 일부는 유전병을 앓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 족적인 베트남전쟁. 50년 전의 기억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크나큰 빛과 어둠을 드리우고 있다.

◆ “내 손으로 묻은 전우들”...아직도 생생한 전장의 기억

“많은 전우들이 죽었고 내 손으로 묻은 애들도 여러 명이야. 전투에 나갔다 돌아오면 ‘살아 돌아왔구나’라는 안도감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어.”

김승백(68)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안보홍보국장은 죽은 전우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면서도 간간이 상념에 잠겼다.

김 국장은 “아직도 전장에서 함께한 전우의 얼굴과 열악했던 베트남의 작전환경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김 국장이 베트남으로 파병된 시기는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1967년 여름이었다.

베트남 전장은 무성한 열대 정글, 험준한 산악과 늪지대로 이뤄져 있었다. 연평균 34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는 병사들을 더욱 지치게 했다.

정글에서의 수색작업은 병사들에게 심한 스트레스였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경계태세가 계속됐다. 적은 어디에나 있었고 없기도 했다.

김 국장은 “언제 어디에서 적군이 공격해 올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며 “말라리아, 흑수병, 이질 등 풍토병은 병사들이 싸워야 하는 또 다른 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어제 내 앞에 서 있던 전우가 사라지고 신병이 그 자리를 메꾼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했다”며 “아침마다 연병장에 오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박경삼(69) 서울종합예술대학교 석좌교수도 목숨을 건 작전수행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박 석좌교수는 해병대 일반병으로 입대했지만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 촬영병 보직을 맡아 군의 작전수행상황을 영상카메라로 기록했다.

그는 “무성한 풀숲아래 숨겨진 폭풍지뢰와 부비트랩은 우리 군에게 큰 위협이었다”며 “수많은 전우가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논란에 대해서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채명신 초대 한국군 주월사령관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1명의 양민을 살릴 것을 강조했다”면서 “이 같은 신조를 지닌 한국군이 ‘학살’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밤에는 월맹, 낮엔 월남인 사람들도 있어 이 둘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면서 “여자들이 남자들을 유인해 수류탄을 던지는 일도 많아 불가피하게 민간인을 죽이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와 관련해 박태균(49)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교수는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들 중에는 한 살도 안 된 애들, 60세가 넘은 노인들과 임산부도 포함돼 있었다”며 “이들은 베트콩이라 할 수 없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체포해서 재판을 통해 처벌해야 했다”고 말했다.

또 “사선에서 싸우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있는 것과 그래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 ‘한강의 기적’, 한국 경제성장 발판 베트남전쟁 특수

우리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외화가 급증했고 경제는 성장했다.

김 국장도 베트남전쟁 특수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는 튼튼한 토양이 됐다는 사실에 뿌듯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미국 달러로 지급된 월급 중 80%를 국내로 송금시켰다”면서 “막대한 외화의 유입으로 국내 경기가 활성화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도 역시 “유입된 외화 대부분이 산업화, 사회간접자본 확충, 군 전력 강화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됐다”며 “만약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진출도 두드러졌다. 현대, 한진 등을 비롯한 건설∙용역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였다.

1966년 현대건설, 대림산업, 공영건업, 부흥건설, 삼환기업 등 5개 업체들이 베트남에 진출해 한 해에만 480만달러의 공사계약을 따냈다.

전쟁특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현대건설이었다. 현대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195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대림산업은 일본에서 11만6000달러의 공사를 도급하기도 했다.

1966년 5개 건설업체들이 베트남과 태국, 일본 등지에서 도급한 공사 계약액은 모두 1100만달러였다.

1969년에는 총 56개의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기업들은 1973년 베트남 철수와 동시에 베트남에 투입됐던 인력과 장비를 바탕으로 중동에 진출했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인 노동자들도 전쟁 효과를 누렸다.

박 교수는 “당시 기술자가 월급과 숙박비를 포함해 530~580달러를 받았다”며 “쏟아지는 외화에 개인과 기업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일반 노동자가 받는 월급보다 15배나 높은 수준이었고 파월 기술자의 월급이 장관 월급보다 많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대미 수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1969년에는 대미 섬유수출액이 1억달러를 돌파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전쟁 중 국내로 유입된 외화는 미국의 군사원조, 기업의 수입을 포함해 약 5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 ‘폐지’ 줍는 ‘국가 유공자’...국가는 우릴 버렸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어.”

박 석좌교수는 베트남전 참전자에 대한 정부의 대우가 ‘형편없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는 “베트남에 다녀온 참전자들 중 부상이나 고엽제 피해가 없는 사람들은 매달 18만원을 지급 받는다”면서 “국가유공자인데도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참전자에 대한 지원금을 3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 지켜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국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발전을 위해 우리를 월남에 보냈으면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참전자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꼬집어 말했다.

고엽제후유증, 정신질환 등에 시달리는 참전자 수도 상당하다.

올해 3월 기준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고엽제 환자는 후유증(5만885명), 후유의증(8만9147명), 2세환자(101명) 등으로 총 14만133명이다.

5만885명에 달하는 고엽제후유증 환자는 말초신경병, 당뇨병, 폐암, 버거병 등에 시달리고 있다. 후유의증 환자들도 고혈압, 악성종양 등과 같은 질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이 알려진 것은 불과 20여년 전이다.

과거 한국사회는 그들을 국제매독 등 고약한 성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엽제후유증이 알려지기 전까지 피해자 상당수는 정확한 발병 원인조차 모른 채 고통받았다.

박 교수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고 말하며 국민을 사지로 보냈으나 이에 대한 보상에 소극적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국가는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에게 모두 사과하고 충분히 보상할 때 과거의 잘못을 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재한 기자 jjh@focus.kr 고효주 기자 754817@focus.kr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