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23일 일본 남쪽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군 해병대원 6명이 거대한 성조기를 꽂았다. 미군이 6만1000 해병대원을 투입해 요충지 이오지마를 점령한 순간이었다. 미군 6800명, 일본군 2만명이 전사한 혈전 끝에 거둔 값진 승리였다. 해병대원들이 안간힘을 다해 깃발을 꽂는 사진은 곧바로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1945년 이오지마전투 기념우표에 이어 1995년 승전 50년 우표에 등장했다.
▶대한민국 국군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승리의 감격을 누린 상징적 순간이 있다. 1950년 9월 27일 오전 6시 10분 서울 탈환에 나선 해병대가 중앙청에서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올렸다. 박정모 소위가 이끈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는 새벽 3시 중앙청 공격을 시도해 치열한 교전 끝에 동틀 무렵 중앙청 안으로 들어갔다.
▶"저항하는 적을 사살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원들 요대(腰帶)를 이은 것을 밧줄 삼아 옥상에 올라가 돌기둥 중앙에 태극기를 동여맸다." 박 소위가 부하들과 함께 태극기를 올린 이튿날 서울은 90일 만에 수복됐다. 그는 계속 최전선에 나섰고 1961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박정모 대령이 그제 84세로 세상을 떴다.
▶1950년 서울에 남았던 사학자 김성칠은 박정모가 싸웠던 9월 27일 시가전 상황을 일기에 적었다. "몇 시간을 두고 탄환이 빗발치듯 하여 방에 있어도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중에 한 알이 사랑방 벽을 뚫고 들어와 잉크병을 깨뜨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더니 내 머리 위를 지나가 무사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박정모와 부하들에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며 표창장을 보냈다.
▶국군은 태극기 게양 순간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정부는 1959년 9월 27일 중앙청에서 박정모에게 태극기 게양을 재연시키고 사진에 담았다. 미군의 이오지마 깃발 사진도 현장에서 종군기자가 연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 담긴 역사적 진실과 감격이 퇴색하진 않았다. 박정모가 유엔군에게 서울 수복의 첫발을 뺏기지 않으려고 사선(死線)을 넘어 태극기를 내건 순간엔 결코 굴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혼(魂)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