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3년(1394)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의 집에 그토록 기다리던 맏아들이 태어났으니 바로 양녕대군으로 이름을 ‘제’라 지었다. 이때가 이방원의 나이 스물여덟, 부인 민씨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이방원 부부 사이에 이미 딸이 둘 있었다고는 하나 당시로서는 대단히 늦은 나이에 보게 된 자식이었다.
아들 셋을 연거푸 잃고서 얻은 사내아이였던지라 양녕대군을 자신의 살림집에서 기르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바로 민씨 부인의 친정집으로 보냈다. 양녕대군의 외할머니를 비롯한 민씨의 친정집에서는 행여 탈이라도 날 새라 지극정성으로 양녕대군을 돌보았고 그 덕에 외할머니와 외숙모들의 품에서 건강하게 자랐다. 특히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이후부터는 이방원의 명실상부한 적장자로서 민씨 친정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대대손손 민씨 집안의 번영과 영광을 보장받을 절호의 기회였다.
이후로 양녕대군을 왕위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듬해인 1403년 성균관에 정식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왕재교육을 받기 시작한 양녕대군은 당시만 해도 별 말썽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고 평판도 좋았던 것 같다. 양녕이 열한 살이 되던 1404년에는 드디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온 세상 사람의 선망과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조선의 세자가 된 양녕대군에게 이제 남은 일이란 얌전히 있다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세자를 엇나가게 만든 감시와 억압
왕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본격적인 왕세자교육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석린成石璘, 하륜, 권근權近, 유창劉敞, 이래李來, 조용趙庸 등과 같은 당대에 명성이 자자하던 고관대신이 그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러기에는 양녕대군의 성격이 너무 활동적이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지 1년쯤 지나자 그의 게으른 학습태도가 문제되기 시작했다. 태종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어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까지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조바심을 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 큰 문제로 치부하지 않았다.
이후로 양녕대군을 왕위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듬해인 1403년 성균관에 정식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왕재교육을 받기 시작한 양녕대군은 당시만 해도 별 말썽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고 평판도 좋았던 것 같다. 양녕이 열한 살이 되던 1404년에는 드디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온 세상 사람의 선망과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조선의 세자가 된 양녕대군에게 이제 남은 일이란 얌전히 있다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양녕대군의 불운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세자의 학업지도를 돕던 사부들은 태종의 충직한 신하였다. 학식의 고명함으로 당대에 이름 깨나 날리는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나 세자의 사부라는 벼슬을 하고 있을 뿐이지 세자의 스승이라는 자각심은 없었다. 세자의 학업성취도에 대한 태종의 지나친 관심은 사부들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었고, 이는 다시 몇 배로 증폭된 사부의 잔소리로 세자에게 가차 없이 쏟아졌다. 언제쯤 되어야 끝이 날지 기약조차 없는 왕세자 수업이 매일같이 반복?강요될 뿐이었다. 이를 감당해내야 하는 양녕대군이 오죽 괴로웠으면 동궁내관에게 “(양녕대군의 사부) 계성군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답답하다. 그가 꿈에 나타나면 영락없이 감기가 든다.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라고 하소연을 했겠는가.
부모형제가 멀쩡히 있건만 이제는 고아와 다름없게 된 외톨이 세자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양녕대군이 열여섯 살 되던 1410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자리에 참석했다가 첫눈에 반해버린 기생 봉지련鳳池蓮이었다.
결국 상사병까지 걸린 양녕은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정을 통하더니 아예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이 일은 곧 발각되었고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애꿎은 동궁내시들의 신세만 처참하게 되었다. 봉지련 역시 옥에 갇혀 처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벼락처럼 날아든 봉지련의 투옥소식에 양녕대군은 그만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식음까지 거부하며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태종은 서둘러 사태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쳤던 내시들을 불러들여 다시 양녕대군의 시중을 들게 했고 봉지련에게도 비단을 쥐어주면서 도성 밖으로 내보냈다.
속절없이 끝나버린 첫사랑이었지만 양녕대군에게 남은 상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애틋하기 그지없었지만 세상 사람 눈에는 한낱 기생과 놀아나다 들통 난 추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양녕대군에게 기생과 오입질이나 하고 다니는 난봉꾼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주는 데 한몫을 하게 되었다.
봉지련 사건만 놓고 따진다면 양녕대군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의 비행을 기록한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자문제로는 봉지련 사건이 처음이었으며 이후로 4년 뒤인 1414년까지 기생이나 여자 문제는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이 기간에 양녕대군이 일으켰다는 비행이란, 왕세자 수업인 서연書筵을 파하고 사냥을 다니거나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 사냥용 매 같은 애완동물을 길렀다는 기록 등의 지극히 가벼운 일탈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꽉 막힌 궁궐생활에서 잠시나마 마음의 휴식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간원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물론이고 그의 사부들까지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상소를 올리는 통에 양녕대군에 대한 감시체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동궁전의 담벼락을 더 높게 하고 엄하게 출입을 통제한다거나 그날의 서연 수업진도를 미리 정해놓고 제대로 따라했는지 태종에게 일일이 보고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태종이 업무를 보는 대전 옆에 세자궁을 짓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양녕대군의 입장에서는 감옥생활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억압체제가 양녕대군을 짓누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정도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하면 반발이든 도피든 꿈꾸게 마련이다. 활달한 성격의 양녕대군이 고분고분하게 구속에 잘 따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결국 양녕대군은 1414년 1월 2일 기생들을 동궁에 몰래 들여 상간을 하는 것을 필두로 갖가지 난봉행각에 들어서고 말았다.
큰아버지인 정종의 여인이었다는 기생 초궁장楚宮粧과의 스캔들, 1416년 1월에는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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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이 청주에 유배를 온 까닭
태종 이방원(1367~1422)은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와 사이에서 양녕, 효녕, 충녕 등을 포함해 4남 4녀를 얻었다. 이중 장남 양녕을 1404년 왕세자로 책봉했다. 양녕의 나이 10살 때였다. 그러나 그는 궁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왕세자 교육을 받지 않았고 궁궐이 금지한 매사냥도 곧잘 나갔다.
태종의 속을 가장 썩인 것은 여자문제였다. 그는 17살부터 기방을 들락거렸다. 그것도 난봉꾼으로 출입했다. 그는 정종의 애첩인 초궁장과 사통하고, 매형의 첩이었던 칠점생이라는 기생과도 상간했다. 양녕에게 있어 정종은 큰 아버지가 되고, 이때의 매형은 진천인물 이거이 아들인 백강이다.
난봉질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이 어리를 만나지 못하게 하자, 그녀를 장인(김한로) 어머니의 시종으로 변장시켜 궁궐로 데려와 아이를 갖게 했다. 이 사건으로 태종은 양녕을 폐위키로 결심한다. 그리고 왕세자를 잘 교육시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목메어 울었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이야기하라" 하고, 인하여 통곡(痛哭)하면서 목이 메었었다. 이어서 하교하였었다. "너는 비록 광패(狂悖)하였으나 너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 뉘우치지 않고 개전하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백관들이 지금 너의 죄를 가지고 폐하기를 청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화를 자취(自取)하였으니, 나와 너는 부자이지만 군신의 도리가 있다"'.-<태종실록>
그러나 양녕이 이 언저리에서 보인 반응은 '왜 아버지는 여러 첩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세자인 자신이 첩을 거느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가'였다. 폐위돼 경기도 광주로 유배된 양녕은 어리를 보고픈 마음에 그곳에서도 또 담장을 넘는다. 그러나 둘 사이의 사랑은 여기까지로 어리는 자결한다.
'광주에서 달려와 아뢰기를, "양녕이 지난밤 자정에 편지를 써서 봉해 놓고 담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고 하니, 상왕은 이배(李倍)와 김경(金俓)에게 임소로 돌아가서 양녕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양녕이 달아남에 있어 상하가 다 허물을 애첩 어리(於里)에게 돌리니, 어리는 근심스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날 밤에 목을 매어 죽었다'.-<세종실록>
이후부터는 의외지만 우리고장 청주가 자주 등장한다. '좌의정 이원(李原)이 계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충청도의 청주는 성(城)이 견고하고 관사(館舍)가 넓으니, 만약 양녕을 이 곳에 옮겨 둔다면 방금(防禁)이 편이하고…" 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월담이 잦은 양녕에게 한양에서 좀더 떨어진 청주로 귀양보내는 조치가 조정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청주는 유배지가 아닌, 거주지 이전에 불과했다. 동생 세종의 배려로 처첩과 노비도 동행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이런 유배유형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형제애는 그만큼 깊었다.
'사헌부에 교지를 내리기를, "나는 형제간의 지극한 정리로 차마 승낙할 수가 없었다. 청주에다 관사를 수즙(修葺)하여, 자녀와 처첩과 노비를 그전대로 모여 있게 하고, 늠봉을 넉넉히 주어서…"'.-<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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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의 동거, 3월에는 매형 이백강李伯剛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의 남편의 첩 칠점생七點生과의 염문을 일으키다가 동생 충녕의 만류로 미수에 그친 사건 등, 하나같이 비도덕적인 여자관계이다보니 양녕대군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세자로 책봉된 뒤부터 10년 넘게 지속된 비정상적인 감금 상황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탈선사고였고 결코 왕세자로서의 자질 문제로까지 비약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비운의 조선 프린스
이준호 저 |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흔히 부귀영화, 명예, 권력을 모두 지녔으리라 생각되는 조선 왕실의 제2권력, 세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흔들렸는지, 그들의 희생이 가져다준 조선의 정치적 이익 등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조선왕조의 경우,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어려서부터 강요받았던 고달픈 생활이 끼친 영향도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조 특유의 권력세습 형태인 ‘적서차별’과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떻게 조선시대 왕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는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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