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식민지배 초기 타이완에 대하여 일본 본토와는 다른 식민지법을 적용하다가 1922년부터는 식민지에 대해서도 일본과 같은 법제도를 적용하면서 동화정책을 폈다. 이러한 동화정책은 법제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식민지의 "일본화"를 꾀하는 정책이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제는 총력전 체제화[5]를 진행하였고 타이완 총독부 역시 이른바 황민화 정책에 따른 동화정책을 강화하여 타이완 내에서 중국어 신문을 금지하고 타이완사람들에 대하여 일본어 사용과 창씨 개명을 강요했다. 또 일제 육군과 해군에 대한 지원병 제도를 도입해 타이완 주민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식민지배과정에서 타이완의 철도나 도로 등 기반시설과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타이완 개발은 궁극적으로는 타이완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고 타이완을 류큐(오키나와현)와 같이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정책의 영향과 잔재는 오늘날에도 타이완에 많이 남아 있다.
식민 지배 초기에 타이완 주민들은 일본 제국에 맞서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895년에는 타이완 민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등 식민지배 초기에는 일제에 대한 조직적 무장투쟁에 나섰으나, 1915년 타파니 사건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항일 무장투쟁은 약화되었다.
1930년에는 타이완 섬 중부에서 원주민족인 타이야 족에 의한 항일 봉기 사건인 우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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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차이
대만과 조선의 식민지 상황은 달랐다.
2014년 06월 18일 (수) 11:43:07 황상익 dasanforum@naver.com
제709호
일제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차이
황 상 익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대만과 한국을 비교하는 연구가 늘고 있다. 식민지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잘 알다시피 대만과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통치를 받은 쓰라린 경험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공통점이 있는 한편 다른 점도 적지 않다. 식민지시기에 대한 대만인들의 평가는 한국인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전문 연구자들도 대체로 한국인 연구자들에 비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다. 식민지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도 대만은 ‘일치(日治)시기’이고 한국은 ‘일제강점기’이다.
직접 만나 대화를 해본 몇몇 대만인 학자들은 나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우익적’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내가 민족의식 때문에 식민지시기 일제의 통치기관이나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이룬 성과들을 애써 부정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 같다. 그런 그들의 시각이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두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그에 따른 기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 기간도 지배 이전 상황도 달라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1906년부터의 통감부 시기까지 합치면 근 40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기간도 같지 않지만, 더 큰 차이는 식민지 이전의 상태이다. 한국은 조선,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독립국가였던 반면, 대만은 청나라의 변방 지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민지 이전 대만인들은 중앙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억압에 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들보다 훨씬 강했다. 그에 따라 일본이 대만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여기는 대만인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한국인은 극소수일 것이다.)
무엇보다 대만과 한국의 뚜렷하고 중요한 차이점은 식민지 이전의 근대화 경험이다. 대만은 식민지 이전 스스로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역사가 별로 없는 반면, 한국은 1870년대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보건의료와 관련해서 몇 가지만 살펴보자.
19세기 후반 서유럽 선진국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장 큰 보건의료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두창(천연두)이었다. 두창은 이환율과 치명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살아나더라도 마비와 곰보 등 심한 후유증이 남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런 한편 18세기 말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우두술로 당시로는 거의 완벽하게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질병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유럽 이외의 나라들에 근대서양 의료가 전파되는 데에 선봉 구실을 한 것이 우두술이다. 이러한 우두술이 대만에 체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반면 한국(조선)은 1870년대부터 이재하, 이현유, 지석영, 최창진 등 민간인들이 보급을 시작했고, 1885년에는 국가사업으로 채택되었다.
빚내서 세운 ‘대한의원’, 운영자도 이용자도 일본인
1899년 3월 한국과 대만에 각각 최초의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의학교’와 대만총독부가 세운 ‘대만총독부 의학교’가 그것이다. 똑같은 때에 설립되었고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학교의 성격과 설립‧운영 주체는 전혀 달랐다.
1905년 강제적인 을사늑약 체결 후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보건의료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와 광제원(양한방 병용 병원) 그리고 황실이 세운 적십자병원을 통폐합하여 ‘대한의원’을 만들었다. 이름이 ‘대한’이라 자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허울뿐이었다. 일제가 금융 분야를 장악하기 위해 만든 은행이 ‘한국은행'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는 1년 총예산의 2퍼센트라는 거금을 일본에게 빌려서 최신식 병원 건물을 짓고 설비를 마련했다. 바로 그때 망국의 덫이 될 일본 빚을 갚으려고 민중들이 벌인 국채보상운동에서 모금한 금액의 두 배에 이르는 큰돈을 들인 것이었다.
이렇게 세운 대한의원을 운영한 주체는 물론 일제의 지휘를 받는 일본인들이었다. 대신 의학교와 광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진료했던 한국인 의사들은 대부분 축출되었다. 대한의원을 이용한 환자도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요컨대 일제를 위한 고가의 병원을 짓기 위해 일제에 더 많은 빚을 짐으로써 망국의 과정을 재촉한 셈이다. 대한의원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세워진 뒤에는 그 부속병원이 되었지만,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 강점과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한국의 근대적 발전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근대식 의료와 교육의 도입을 첫손가락에 꼽았지만 실상은 이런 것이었다. 대한의원-조선총독부의원은 많은 사례 가운데 한 가지일 따름이다.
일제식민지 대만과 조선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식민지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기와 식민지화 과정도 함께 살펴야 제대로 된 비교와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글쓴이 / 황상익 • 한국근현대의학사(전공)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국제고려학회 부회장 겸 서울지회 회장
• 저서 및 번역서 《근대의료의 풍경》 푸른역사, 2013 《황우석 사태와 한국사회》(공저) 나남출판사, 2006
헨리 지거리스트 저,《문병과 질병》한길사, 2008 이언 도슨 저,《처음 읽는 이야기 의학사》아이세움, 2008
두산백과
타이완의 역사
3세기 중엽 중국의 삼국시대 때 심형(沈瑩)이 저술한 《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에서는 타이완을 이주(夷州)로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문헌 기록으로 거의 초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주라는 명칭을 두고 타이완 섬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이견도 있다. 7세기 초 수(隋)나라 때부터 한족(漢族)이 타이완을 정찰정략(偵察征略) 시도하였으며, 타이완을 유구(流求)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유구는 현재의 오키나와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구분없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元)은 1360년 펑후섬[澎湖島]에 처음으로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지만 타이완은 관할에 두지 않았다. 명대(明代)에 이르자 해상무역과 해적활동을 하는 한족의 정착이 늘어났고 동시에 동방무역에 나선 서구의 열강도 타이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명나라는 타이완을 행정 관할에 두지 않았고 원주민과 한족,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각자의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타이완을 통치하는 기구나 세력은 없었다.
1590년 동방무역을 위해 이곳 해역으로 진출한 포르투갈인이 타이완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모사(Formosa)라고 명명하였다. 1616년 일본인들이 대만을 점령하려다 풍랑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네덜란드가 타이완 남부에 정착하였는데 그들의 목적은 동방무역을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앞서 정착한 한족을 누르고, 이곳에 무역기지를 건설하였다.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지란디아 성(Zeelandia castle)을 구축하였다. 타이완이 중국과 일본의 중계무역 거점으로 전력적 가치가 높아지자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쌓았다.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 성(Santo domingo castle)을 각각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타이완에서 격퇴하고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661년 명나라가 청에 패망하자 유신 정성공(鄭成功)이 부하를 이끌고 타이난[臺南]에 상륙하여 지란디아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타이완을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1662년 정성공이 죽고 이후 아들 정경(鄭經)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독립된 국가로서 체제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1673년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난 틈을 이용해서 대륙으로 진격하여 푸젠성 일대를 점령하기도 하였지만 1680년 하문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다시 퇴각하였다. 정경이 중국 대륙 진출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사망하자 대만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내분으로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1683년 6월 청(淸)이 타이완으로 진격하자 3번째 정(鄭)씨 왕인 정극상이 청나라에서 요구한 변발을 받아들이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정(鄭)씨의 타이완 지배는 불과 3대, 22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
청나라는 1884년 프랑스와 청불전쟁(淸佛戰爭)이 일어나자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듬해 타이완을 하나의 성(省)으로 격상시키고 순무(巡撫)를 파견했다. 그러나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타이완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타이완 주민들은 타이완 순무이던 탕징쑹(唐景崧, 1841~1903)을 총통으로 추대하고 타이완민주국(臺灣民主國)을 선포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 5개월 동안 각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무력항쟁을 벌였으나 패하면서 타이완민주국은 붕괴되었다. 타이완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1945년 10월 25일 중국으로 반환되었으나 새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과 원주민인 본성인(本省人) 사이의 갈등이 촉발되어 1947년 2월 28일에는 ‘2·28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뒤 1949년에는 중국공산당과의 내전(內戰)에 패배한 국민당(國民黨)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난징(南京)에 있던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를 타이완의 타이베이(臺北) 시로 옮기면서 오늘날까지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타이완은 최고기관인 국민대회 및 총통 아래 입법원(국회), 행정원(내각),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의 5권분립제를 택하고 있다. 국민당 1당지배정치를 펴온 타이완 정부는 1949년 이래 계속 실시된 계엄령을 1987년 7월 해제하였으며, 1988년 1월 13일 총통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한 후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으며, 같은해 12월의 입법원 선거에서 야당세력이 예상외의 의석수를 차지함으로써 집권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1991년에는 타이완 수비사령부를 해체하고 진먼섬 계엄을 종식하였으며, 1992년에는 사상경찰제 및 타이완 경비사령부를 폐지하였다. 1993년 11월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 1994년 7월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던 총통직선제 개헌안 승인을 거쳐, 1996년 3월 총통 리덩후이가 최초의 직선총통이자 제9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3월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의 후보 천수이볜[陳水扁]이 롄잔을 꺾고 총통으로 선출되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민당 체제가 중단되었다. 2001년 12월 1일 제5기 입법위원 선거 결과 민진당이 제1당으로 도약하였으며 그후 2004년 3월 20일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총통이 50.12%의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이때 야당은 3월 19일의 천수이볜 총통 피격 사건으로 국가안전체제가 발동되어 군인과 경찰의 투표권이 박탈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최고법원에서 모두 기각 패소하였다.
2004년 12월 11일 실시된 제6대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국민당, 신민당, 신당)이 입법원내 과반수(113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民進黨 89석, 國民黨 79석, 親民黨 34석, 台聯 12석, 新黨 1석, 기타 10석)되고 이에 2005년 6월 7일 국민대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입법위원수 1/2 감축, 소선거구제 채택, 헌법 개정안의 국민투표 실시, 국민회의 해산 등 헌법 개정 내용이 확정되었다. 국민대회는 동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천수이볜 총통의 측근 비리혐의로 국민당, 친민당 주도 하에 타이완 정치사상 최초로 총통파면안이 입법원에 제출되었으나 2006년 6월 27일 부결되었다. 2008년 3월에는 마잉주[馬英九]가 제12대 총통에 당선되었으며, 2016년 5월에는 차이잉원[蔡英文]이 타이완 최초의 여성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정성공) - 明淸(명청) 교체기의 대만
대만의 역사는 명청 교체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당시 활발했던 동서양의 교류와 동양 삼국간의 교역을 배경으로, 정성공은 대만을 장악하고 만주족의 청제국에 대항했다.
정성공은 1624년 福建(복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명조의 지방관리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복건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군벌이었다. 당시에는 필리핀의 마닐라와 중국의 마카오 및 일본의 琉球(류구)열도간에 교역이 활발했으며, 그 중간지대인 복건과 대만 부근의 해상권은 그의 수중에 있었다.
정성공이 출생했던 17세기경은 서양과의 빈번한 접촉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교류가 매우 번성했다. 이미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으며, 당시의 해양대국인 스페인은 동북아시아와의 교역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 하나의 해양대국인 포르투갈도 이미 중국의 마카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교역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부산을 떨었다.
일본도 전국시대에 이미 일부 다이묘(大名(대명))들이 국제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통일을 성사시킨 토쿠카와(德天(덕천))정권 아래서도 비록 쇄국령은 실시됐지만, 나가사키(長崎(장기))와 류쿠열도의 히라도(平戶(평호))에서만은 해외접촉이 계속 허용됐다. 이리하여 필리핀, 중국 및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교역이 16세기 후반부터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일찍부터 상혼이 발달했던 중국인들이 놓칠 리 없었다.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그들은 사무역을 활발히 전개 했으며, 이들의 사무역이란 결국 국가에 의go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불법적인 밀무역일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지역의 삼각무역 체계에서 대만이라는 섬이 차지하는 지정학적 비중은 매우컸다. 서양인들은 일찍부터 대만에 눈독을 들였고, 해양대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가 17세기 초반 결국 이 섬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서양인들은 타이완이라는 칭호보다 포르투갈어로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포모사(Formosa)라는 명칭을 오랫동안 사용해왔으며, 현재도 그렇게 표기한 서양책들이 많다.
정성공이 태어났을 때 명조는 이미 망해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 마침내 李自成(이자성)(1606-1645)이 이끄는 농민군이 수도 북경을 함락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만주에서 일어난 청제국이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혼란에 빠진 중국에 대한 정복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드디어 이자성의 농민군을 격파하고 북경을 장악한 청조는 남쪽으로 피신한 망명정부인 남명정권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정성공의 아버지는 명의 유신으로 망명정권과 함께 청에 대항했다. 이때 그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남명정권의 수도인남경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남경의 망명정권이 붕괴하자 그는 다시 복권으로 돌아왔다. 이때 또 다른 망명정권이 福州(복주)에 세워졌고, 이들 부자는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특히 정성공이 抗淸(항청)에 적극적 의지를 표명하자 이에 감복한 망명정권의 황제는 그에게 주씨의 성을 내렸다.
마침내 청군은 명의 망명정부를 직접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망명권권희 황제는 무기력하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때 정성공의 아버지는 청에 투항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최후까지 만주족에 저항했다.
당시 22세에 불과했던 정성공은 청조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을 모았다. 그의 군대는 복건은 물론 江蘇(강소)와 浙江(절강) 일때까지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처한 저항궁은 곧 한계를 느꼈다. 결국 장기적인 항전을 위해 그는 대만으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미 대만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돼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됐다. 마침내 그는 1661년 2만5천명(일설에는 4만명)을 이끌로 대만수복 전투를 개시해 약 1년만에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승리로 끝맺었다. 이제 대만은 39년의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고 다시 중국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다.
대만을 장악한 후 이를 근거지로 청조에 대항하던 정성공은 1662년 사망했다. 정성공의 아들에 의해 계승된 정권은 대만에서 웅거하며 계속 저항전을 폈다. 특히 三藩(삼번)의 난에 대만정권은 적극 동조하여, 한때마나 복건의 일부를 공격하여 장악하기도 했다. 정권은 다시 정성공의 손자에게로 넘어갔지만, 곧 이어 내부분열에 시달렸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청정부는 막대한 뇌물을 이용하여 내부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드디어 3대동안 지속됐던 대만정권은 1683년 손을 들고 말았다.
대만이 청에 복속된 후, 200여년간 본격적인 농업이민이 전개됐다. 그들은 주로 복건지역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복건지역의 농민들이었다. 대만에는 이들 복건 출신 외에도 廣東(광동)에서 건너온 客家(객가) 사람들이 전체 주민의 약 10% 가량을 차지했다. 이들 이주민들은 대만의 황무지를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
출처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http://www.startour.pe.kr/local/china/china_infom_1_1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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