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이 대통령의 관저 이름을 ‘경무대(景武臺)’에서 ‘청와대(靑瓦臺)’로 바꿨다. 경무대의 기와가 푸른색이어서 ‘청와대’로 개명했다지만, 진짜 이유는 경무대에서 느껴지는 부정과 부패의 이미지 때문이다.
경무대 터가 처음 역사에 기록된 것은 고려 숙종 때. 수도인 개경(開京), 평양에 설치된 서경(西京)과 함께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었다. 조선조 때는 업무에 지친 왕이 잠시 쉬던 경복궁의 후원이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방치되다가 고종이 이곳을 ‘경무대’로 칭한 후부터는 주로 과거를 보는 장소로 활용됐다. 경무대의 연원은 뒤에 버티고 있는 북악산(北岳山=玄武)에 빛(景)이 길이 빛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해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이곳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39년,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 때였다. 3명의 총독이 이곳을 거쳐갔고, 해방 후에는 하지 미(美)군정사령관의 관저로 사용되다 우리 손에 넘어온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이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등을 거치며 최고권력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청와대는 1990년 대통령관저와 춘추관이 신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존 일제가 세운 건물이 철거된 것은 1993년 10월, 김영삼 대통령 때였다.
1956년 경무대의 모습이다. 적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 위 위장망이 특이하다.
철거 전 청와대의 모습
청와대 앞길도 정권에 따라 개방과 통제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경무대 시절부터 시민들에게 출입이 허용돼온 청와대 앞길이 봉쇄된 것은 1968년 1월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면서부터였고, 전면통제가 시작된 것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때부터였다. 5공 초에 잠시 개방을 시도했으나 1983년 10월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다시 유야무야 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에 맞춰 다시 개방된 후 2004년 현재 청와대 앞길 개방시간이 연장돼 운영되고 있다.
[단독] '日帝의 아방궁'으로 불렸던 총독 관저 자리엔 美軍 병원… 만주사변 日전사자 비석 떼내고, 미군 전몰자 기념비로 사용
글·사진=박종인 기자 입력 : 2016.07.04 03:05 | 수정 : 2016.07.04 08:44
['110년 외국땅' 용산기지] [上] 용산기지 문화재 르포
조선王이 기우제 지냈던 '南壇' 남아 있어 '一誠貫之' 새겨진 日포병대 국기게양대도 日병영건물 거의 그대로 활용… 현관 입구에 일본군 '★'표시
서울 용산 삼각지에서 이태원로를 따라 국방부를 지나 이태원 쪽으로 500m만 가면 오른쪽으로 미8군 용산 기지 사우스포스트로 들어가는 게이트(문·門)가 나온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지나자 100년 넘게 숨겨졌던 용산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광활하다고 할 정도로 넓은 잔디밭에 옛 건물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기지 구획은 1906년 당시 일본의 조선 주차군(임시 주둔군)이 대한제국으로부터 부지를 구입해 기지를 건설한 이래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조선의 아방궁, 총독 관저 터
'미8군로(路)'를 따라 남하한 뒤 'X군단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자 121병원이 나왔다. 1960년대 초 경기도 부천에 있던 후생병원을 이곳으로 옮겨놨다. 병원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1904년 러·일전쟁 후 건축된 총독 관저는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다. 총독 관저는 1960년대 초 철거되고 그 자리에 121병원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 관저에서 뒤편 언덕에 있는 군사령부까지 지하 터널이 조성돼 있었다. 터널은 콘크리트를 부어 폐쇄한 상태다. 일본군 사령부 청사는 광복 후 미 7사단 사령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됐다.
국방부 청사가 보이는 헬기장 앞 교차로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분묘용 석물(石物) 2기가 서 있다. 미군 측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조각상"이라고 했지만, 석물은 일제 강점기 이전 이곳에 있던 마을 무덤들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마을 이름은 둔지미였다.
◇캠프 코이너와 조선 왕실 제단
사우스포스트에서 고가도로를 타고 이태원로를 가로지르면 메인포스트가 나온다. 메인포스트 북서쪽에 캠프 코이너가 있다. 전쟁기념관 북쪽이다. 캠프 코이너 동쪽에는 둔지산이 있다. 높이 65m짜리 작은 산이지만 조선 시대 왕실은 이곳에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는 남단(南壇)을 짓고 수시로 제를 올렸다. 남단 터가 있는 낮은 언덕은 군무원 사무실이 들어섰다. 남단 흔적은 사무실 마당에 남아 있다. .
마당 두 귀퉁이에 화강암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기둥으로 쓰였을 각진 화강암과 주춧돌이 둘로 나뉘어 철제 펜스 안쪽 잡초 속에 누워 있고, '문화재이니 훼손 금지'라는 영문 안내판이 서 있다. 용산 기지 역사를 연구해온 향토사학자 김천수(38)씨는 "몇 년 전 문화재청 기초 조사에서 이곳의 역사적 의미가 밝혀진 후 미군 측이 설치한 구조물"이라며 "반드시 보존되고 복원돼야 할 유적"이라고 했다.
◇日帝 전몰자 충혼비를 미군 기념비로 '재활용'
메인포스트 나이트필드 연병장 앞에 교차로가 있다. 교차로 모퉁이에는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8군 전몰자 기념비가 서 있다. 원형 7단 기단 위에 돌기둥 7개가 서 있고 한가운데에는 전몰자를 기리는 표석이 서 있다.
원래 이 기념비는 1935년 11월 일제(日帝)가 일본군 제20사단 78연대의 만주사변 전사자를 위해 세운 충혼비였다. 6·25가 끝나고 미군은 이 충혼비를 재활용해 6·25전쟁 미8군 전사자 기념비로 사용했다. 1980년 78연대 자리에 한·미연합사 청사가 들어서면서 기념비는 교차로 부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이 일본군 구조물을 재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만주사변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군대를 기리던 시설이 전몰 미군 장병 기념비로 변신한 것이다. 이렇듯 작은 기념비에도 복잡다기한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김영규 공보관은 "미군을 기리는 기념물이니 당연히 (평택으로 옮겨가는)대상"이라고 했다. 그 왼편에는 일제 때 사용했던 병영 건물들이 남아 있다. 현관 입구 지붕 아래에는 일본군 상징인 오각 별 흔적이 보였다.
메인포스트 북쪽 주유소를 지나면 '위수 감옥'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헌병대 감옥이었다. 현재 위생부대로 쓰이고 있다. 미군 막사 몇 동을 제외하면 옛 건물은 일제 당시 그대로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이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재판을 받았고, 붉은 벽돌로 세운 육중한 담장에선 6·25 때 생긴 총탄 구멍을 셀 수 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동행한 미군 공보실 직원이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라고 했지만,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그대로 각인돼 있다.
◇군사 고문단 청사와 78연대 문기둥
나이트필드 연병장 뒤편은 한·미연합사 건물이다. 연합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큰 건물은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이다. 일본군 장교 숙소였던 이 건물은 1946년 한국 신탁통치안을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숙소로 사용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 6월 29일 미군이 철수한 후 건물은 미 군사 고문단 청사로 사용됐다. 지금은 그 후신인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이 쓰고 있다.
. 군사업무단과 연합사 사령부 사이로 만초천이 흐른다. 남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흐르는 개울이다. 구불구불한 자연 하천인 만초천은 일본이 기지를 만들면서 직선화됐다. 죽은 천(川)이었지만 2011년 서울시에서 하수 처리 시설을 만들면서 맑은 물로 돌아왔다. 만초천을 건너 연합사 건물로 가는 다리는 일제 강점기 때 그대로다. 1908년 일제는 이곳에 6사단을 만들면서 다리와 철문을 세웠다. 정문 문기둥과 작은 옆문 문기둥, 그리고 다리는 일부 사라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100년 전과 동일하다.
취재를 마칠 무렵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에게 미군 헌병대가 다가와 신원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기지 내 누군가가 기자 일행을 신고한 것이다. 용산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