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웅진 칼럼 >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들
김웅진 | profwjkim@hanmail.net
승인 2014.10.08 06:27:04
▲ 김웅진 교수
세월호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검찰의 173일간의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무리한 증축으로 좌우 불균형이 생긴 상태에서 화물적재량(1,077t)의 2배에 이르는 과적(2,142t), 선체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감축(1,375t), 차량 컨테이너 등 화물고정 부실 그리고 미숙한 조타에 따른 운항 상 미숙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규정을 무시한 총체적 부실의 결과도 결과지만 더 큰 문제는 침몰이 있기 까지 뒤에 얽혀 있는 공무원의 부조리와 좌초설, 폭침설, 충돌설, 국정원 개입설 등 국민을 현혹시킨 각종 의혹의 난무이다.
어찌된 영문인 지 이 나라는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고, 새로운 의혹을 만들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마치 북을 대변하는 듯한 말을 일삼는 같은 하늘 밑에 살면서 다른 나라 국민처럼 행동하는 부류가 다수가 존재하고 있어 이 나랑의 미래가 걱정이다.
이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집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하면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험집을 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그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과연 이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조선조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오늘에 있기까지 이 나라를 위해 참으로 많은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기에 여기 몇 분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1890년부터 1940년까지 근 반세기 동안 2대에 걸쳐 조선 땅에서 의료선교로 헌신했던 윌리엄 홀(William J. Hall 1860~1894)과 그의 아내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한국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윌리암 홀은 1891년 한국에 와 평양에서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의료봉사로 불철주야 노력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3년 만에 세상을 떴고, 이어 사랑하는 딸 에디스마저 이질로 죽게 되었다.
로제타는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며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로제타는 병원을 세웠고, 결핵치유를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보급하였으며,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교육을 최초로 시작했다. 1930년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기 까지 40여년 동안 이 땅에 젊음과 눈물 그리고 땀과 정성과 애정으로 점철된 일생을 다 쏟아냈다. 그녀는 1945년 4월 5일 85세로 별세하면서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1940년 간첩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추방되어 인도로 가게 되는 데, 1984년 아버지 윌리엄 홀이 설립한 광성고등학교 채플시간에 초청받아 마지막 강연 때 “내가 태어난 곳,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동생 에디스가 묻힌 땅, 내 조국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 조국 한국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나도 내 조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암 홀 가족 6명이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묻혀 있다.
밴플리트장군은 한국군 전투력 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6.25전쟁 중 대장의 외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는 야간 폭격기 조종사로 작전수행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공군은 장군의 아들을 찾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실종 파일럿의 정규 수색시간이 끝났다.
이때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정규 수색시간은 끝났으니 더 이상 수색이나 구조활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최전선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내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줘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외아들을 한국전선에서 잃었음에도 장군의 한국사랑은 지극했다. 임기 중 미군 참모학교 유학과 훈련프로그램을 만들어 육사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전역 후에도 한국 전쟁고아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지난 2010년 6월 16일 서울 은평구 소재 은평평화공원에서는 개장식과 함께 한 해군대위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주인공인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ow) 대위는 일제강점기에 선교사로 활동했던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국에서 지내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 미군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전역 후 부모님이 계신 한국으로 돌아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민간인 교관으로 함정운용술을 가르치고,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 국군 태동기를 이끌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민 끝에 제2의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고자 해군에 재입대했다.
그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가 왔을 때 한국에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심경을 알렸다.
쇼 대위는 맥아더장군을 보좌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서도 미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해 김포반도, 해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 등서 승리했으나 불행하게도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에서 후방 정찰에 나섰다가 적의 기관총 사격을 맞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미군에게 6.25전쟁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를 꼽으라면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와 지평리 전투를 들곤 한다. 프랑스군은 미 23연대 전투단에 프랑스대대로 배속되어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 전투의 승리에는 전설적인 인물인 몽클라르(Ralph Monclar) 대대장을 빼놓을
수 없다.
몽클라르 중령 아니 장군은 2차대전 중 17번이나 부상당했으며, 각종 무공훈장을 다 받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다.
1950년 8월 프랑스정부가 미군 2사단 산하의 파견부대 창성을 발표하자 3성 장군이었던 몽클라르 장군(58세)은 중령급인 지휘관에 지원했다.
국방차관이 “내가 알기로 미군의 대대는 중령이 지휘관인 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들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그는 전쟁 후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참전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은 반드시 참전했어야 했던 전쟁이었다”로 술회하였다고 한다.
어느 누군들 자기 목숨 아깝지 않고, 자기 가족 사랑하지 않고, 또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유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라는 등 국가를 부정하고, 각종 핑계로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져버림은 물론 작전 수행 중 근무지를 이탈하여 술취한 모습으로 볼 상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고급 지휘관의 모습이 묘하게 대조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진정 우리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는 여기 오기까지 말없이 헌신한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
김웅진 | profwjkim@hanmail.net
승인 2014.10.08 06:27:04
▲ 김웅진 교수
세월호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검찰의 173일간의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무리한 증축으로 좌우 불균형이 생긴 상태에서 화물적재량(1,077t)의 2배에 이르는 과적(2,142t), 선체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감축(1,375t), 차량 컨테이너 등 화물고정 부실 그리고 미숙한 조타에 따른 운항 상 미숙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규정을 무시한 총체적 부실의 결과도 결과지만 더 큰 문제는 침몰이 있기 까지 뒤에 얽혀 있는 공무원의 부조리와 좌초설, 폭침설, 충돌설, 국정원 개입설 등 국민을 현혹시킨 각종 의혹의 난무이다.
어찌된 영문인 지 이 나라는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고, 새로운 의혹을 만들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마치 북을 대변하는 듯한 말을 일삼는 같은 하늘 밑에 살면서 다른 나라 국민처럼 행동하는 부류가 다수가 존재하고 있어 이 나랑의 미래가 걱정이다.
이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집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하면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험집을 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그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과연 이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조선조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오늘에 있기까지 이 나라를 위해 참으로 많은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기에 여기 몇 분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1890년부터 1940년까지 근 반세기 동안 2대에 걸쳐 조선 땅에서 의료선교로 헌신했던 윌리엄 홀(William J. Hall 1860~1894)과 그의 아내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한국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윌리암 홀은 1891년 한국에 와 평양에서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의료봉사로 불철주야 노력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3년 만에 세상을 떴고, 이어 사랑하는 딸 에디스마저 이질로 죽게 되었다.
로제타는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며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로제타는 병원을 세웠고, 결핵치유를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보급하였으며,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교육을 최초로 시작했다. 1930년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기 까지 40여년 동안 이 땅에 젊음과 눈물 그리고 땀과 정성과 애정으로 점철된 일생을 다 쏟아냈다. 그녀는 1945년 4월 5일 85세로 별세하면서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1940년 간첩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추방되어 인도로 가게 되는 데, 1984년 아버지 윌리엄 홀이 설립한 광성고등학교 채플시간에 초청받아 마지막 강연 때 “내가 태어난 곳,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동생 에디스가 묻힌 땅, 내 조국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 조국 한국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나도 내 조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암 홀 가족 6명이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묻혀 있다.
밴플리트장군은 한국군 전투력 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6.25전쟁 중 대장의 외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는 야간 폭격기 조종사로 작전수행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공군은 장군의 아들을 찾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실종 파일럿의 정규 수색시간이 끝났다.
이때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정규 수색시간은 끝났으니 더 이상 수색이나 구조활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최전선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내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줘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외아들을 한국전선에서 잃었음에도 장군의 한국사랑은 지극했다. 임기 중 미군 참모학교 유학과 훈련프로그램을 만들어 육사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전역 후에도 한국 전쟁고아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지난 2010년 6월 16일 서울 은평구 소재 은평평화공원에서는 개장식과 함께 한 해군대위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주인공인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ow) 대위는 일제강점기에 선교사로 활동했던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국에서 지내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 미군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전역 후 부모님이 계신 한국으로 돌아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민간인 교관으로 함정운용술을 가르치고,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 국군 태동기를 이끌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민 끝에 제2의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고자 해군에 재입대했다.
그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가 왔을 때 한국에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심경을 알렸다.
쇼 대위는 맥아더장군을 보좌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서도 미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해 김포반도, 해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 등서 승리했으나 불행하게도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에서 후방 정찰에 나섰다가 적의 기관총 사격을 맞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미군에게 6.25전쟁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를 꼽으라면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와 지평리 전투를 들곤 한다. 프랑스군은 미 23연대 전투단에 프랑스대대로 배속되어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 전투의 승리에는 전설적인 인물인 몽클라르(Ralph Monclar) 대대장을 빼놓을
수 없다.
몽클라르 중령 아니 장군은 2차대전 중 17번이나 부상당했으며, 각종 무공훈장을 다 받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다.
1950년 8월 프랑스정부가 미군 2사단 산하의 파견부대 창성을 발표하자 3성 장군이었던 몽클라르 장군(58세)은 중령급인 지휘관에 지원했다.
국방차관이 “내가 알기로 미군의 대대는 중령이 지휘관인 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들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그는 전쟁 후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참전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은 반드시 참전했어야 했던 전쟁이었다”로 술회하였다고 한다.
어느 누군들 자기 목숨 아깝지 않고, 자기 가족 사랑하지 않고, 또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유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라는 등 국가를 부정하고, 각종 핑계로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져버림은 물론 작전 수행 중 근무지를 이탈하여 술취한 모습으로 볼 상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고급 지휘관의 모습이 묘하게 대조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진정 우리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는 여기 오기까지 말없이 헌신한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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