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143

한국 육군사관학교

한국 육군사관학교 역사속으로 by badoc 2008/04/10 10:01 badoc.egloos.com/3696750 덧글수 : 0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태릉"에서 개교하였으며 6.25전쟁으로 임시 휴교하였으나 전쟁의 와중에서도 군의 백년대계를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 1951년 10월 31일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정규사관학교로 재개교하였다. 휴전 직후인 1954년 6월 23일 현재의 위치로 복귀하여 옛 화랑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화랑대'로 명명하였다. 육사는 세계화, 정보화의 21세기를 맞아 미래지향적인 교육제도와 신세대에게 맞는 훈육 체계를 정립하고 초현대식 교육시설과 환경을 구비하여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탁월한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1998년 3월 2일에는 개교이래..

만주군관학교(滿州軍官学校)

만주군관학교(滿州軍官学校) 1939年(昭和14年)に新京市(現在の長春市)に陸軍軍官学校が設立され、将校養成を担った。満系生徒のほか、日系生徒(ここでは内地人の他に朝鮮人、台湾人も含まれる)も入学し、日満両国民が共に机を並べて練磨した。なお、第1期入学生徒中で日系生徒は172名にも上る。 地理的な近さから軍官学校生徒には朝鮮人の学生も少なくなかった。彼らの多くは第二次世界大戦後に創設された韓国軍に入隊し、日本陸軍出身者と共に韓国軍の基幹となる。また大統領となった朴正煕や国会議長・国務総理などを歴任した丁一権など、政治家として活躍した人物もいる。 一方で、朝鮮を植民地化した日本の傀儡国であった満州国の軍人が韓国軍の基幹を構成し、政治的にも影響力を行使した事を問題視する声も以前より存在している。2005年8月29日、反民族特別法によって民族問題研究所と親日人名辞典編纂委員会が発表した親..

일본 육사졸업생 명단 일부

일본 육사졸업생 명단 일부 出身者等 [編集] 陸軍兵学寮 • 明治3年12月入学、明治5年6月卒業、明治6年年5月任少尉 • 大将:安東貞美 • 明治6年12月入学、明治7年10月少尉試補、明治8年1月任少尉 • 大尉:磯林真三(殉職) • 明治7年2月入学、明治7年10月少尉試補、明治8年1月任少尉 • 大将:中村覚 • 明治7年3月入学、明治9年少尉試補、明治8年3月任工兵少尉 • 大将:鮫島重雄 • 明治7年10月入学、明治9年3月少尉試補、明治10年5月任少尉 • 大将:一戸兵衛 [編集] 士官生徒 ※士官生徒は少尉任官は一律に行われるが、卒業は兵科毎に差がある。 • 旧1期(明治8年2月入校、1877年12月22日任官、117名) • 中将:木越安綱(陸相)・石本新六(陸相)・山根武亮・小泉正保 • 少将:石田保謙・河井瓢・栗田幹・多田保房・福原信蔵 • 大尉:鈴木知康・..

日本 陸士出身 한국인들 *

日本 陸士出身 한국인들 * • 11기(1899년11월 21일졸업, 1900년6월 22일임관, 670명) • 노백린, 김관현, 어담(중장), 윤치성 노백린(盧伯麟, 1875년1월 10일~ 1926년1월 2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계원(桂園)이다,황해도송화출생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수학했다. 1895년대한제국의 일본관비 유학생으로 뽑혀서 게이오의숙과 일본육군사관학교(제 11기)를 졸업했다. 그는 1900년귀국하여 어담, 윤치성등과 함께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한국무관학교교관, 육군연성학교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노백린은 어담 등의 친일 군인들과는 달리 을사조약체결과 군대 해산, 한일 병합 조약등으로 국권이 순식간에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1907년안창호, 전덕기..

1971년 크리스마스

1971년 크리스마스 13개월간의 월남파병생활을 마치고 1971년 12월 중순경에 귀국을 하였다.포항 해병대 1사단에서 1주일 정도 대기하다가 휴가증을 받고 지역별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휴가를 떠났다. 바로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는데 서울이 휴가지인 우리는 명동에 입성하였고, 산도적모습의 귀국동기들과 명동일대 술집을 죄다 섭렵한 후 통금시간이 다 되어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갔다.아침에 깨어나서 TV를 켜니 대연각호텔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중앙우체국에 근무하는 친구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서 저녁무렵에 택시를 타고 갔는데 그 시간 까지도 화재현장근처가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아 남대문시장 못미쳐 택시에서 내려 신세계백화점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방송국에서 화재현장 관련 뉴스를..

딘 소장을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한국인

딘 소장을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한국인 딘 소장을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한국인 6.25 남침전쟁 때 길을 헤매는 딘 24사단장을 북한군에 신고하고 3000원씩 받은 두 한국인. 趙甲濟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死守하여 한국을 구한 제1공로자 워커 8군 사령관(중장)은 1951년 1월 의정부 근방에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한국군이 몰던 트럭에 받혀 죽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미군 장교 하우스맨이 말려서 재판을 받고 옥살이만 하도록 했다. 한국전선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던 미 24사단의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 공방전에서 밀려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3년간 고생했다. 그는 휴전 때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