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분쟁
1. 센카쿠 열도 개관(일본의 명칭 사용)
1) 센카쿠 열도의 위치

센카쿠/조어도/조어대(각 일본, 중국 및 대만명)는 일본 오키나와 서남쪽 약 400km, 중국대륙 동쪽 약 350km, 대만 북동쪽 190km 동중국해상에 위치.
2) 센카쿠 열도 지리 현황
센카쿠 열도는, 우오츠리도(魚釣島 / Uotsuri-jima), 코지마, 남 작은 섬, 구바시마, 다이쇼지마 5섬과 3개 암초들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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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釣島, 北小島, 南小島, 久場島, 大正島
<참고지도>>
island.gif
Okinawa_pref3-1.jpg
maptaiwan189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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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국가
센카쿠 열도를 점유하고 있는 일본과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과 대만이 관련되어 있다.
2. 분쟁의 원인
1) 역사적 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의 내용에 의해 요동반도와 대만 과 함께 열도를 전리품으로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아 오키나와현에 편입시키게 된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의 후속처리의 내용으로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조건을 규정한 포츠담 선언(1945.7.26)이 서명되고, 포츠담 선언 및 항복 문서의 규정을 실시하기 위하여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일본 정부에 각서를 보내게 된다. 이 각서의 내용에는 일본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는데, 《조어도》는 일본의 영토적 범위에서 제외되는 지역에 포함된다. 그러나,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강화협정(미.일간의전쟁 종결조약)에서는 《조어도》를 일본영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 이후 조어도를 포함한 섬들을 관할해오던 미국은 지난 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게된다.
2) 분쟁의 발단
1968년 10월 12일부터 11월 29일에 걸쳐, 일본, 대만, 한국의 해양 전문가가 중심이되어, 유엔의 아시아 극동 경제위원회(ECAFE)의 협력을 바탕으로, 동중국해 일대에 걸쳐서 해저의 학술 조사를 실시한 후 동중국해의 대륙붕에는 석유 자원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센카쿠 제도는 주변국들의 영유권 분쟁에 본격적으로 휘말리게 된다.
3. 분쟁 진행 과정
1)우익단체들간의 지속적인 마찰

2)국가적 차원에서 소극적 움직임
중국은 1992년 2월 남사군도, 서사군도 및 조어도/센카쿠를 포함하는 영해법을 발표하여, 일본측으로부터 거센 외교적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중국은 석유탐사, 주변해역에서 해상훈련실시를 통해 자신들의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자국의 경제발전에 차지하는 중·일관계의 비중 및 지역 안정에 대한 고려로 인해 분쟁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1997년 11월 동 도서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보류하고 체결된 양측의 새 어업협정은 이같은 중국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역시 중국과의 같은 이유로 영유권 주장 움직임을 민간인차원이나 정치인들의 발언에만 국한시키고 그 이외의 공식적인 움직임은 삼가고 있다.
이 분쟁은 2000년 들어 별다른 진행 상황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과 중국,대만등 의 극우단체는 지속적으로 상륙작전을 벌이면서 마찰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한편 대만 리등휘 전 총통은 2002년 9월 16일 일본을 방문해서 센카쿠열도는 일본 영토라 발언하면서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내에서도 엄청난 비난을 받은바 있다.
3)최근진행과정
이전과는 달리, 중국의 적극적인 움직임-센카쿠 열도 상륙시도-를 일본은 전원 체포라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진압함으로서 두 나라는 다시 분쟁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중국에서의 경제적인 활동에 대한 불이익을 우려하며 가능한 빨리 수 습하려 하고 있으나, 중국에서의 반일 감정은 높아져 가고만 있는 실정이다.
4. 각국의 입장
1) 대륙붕에 관한 양국의 입장
일본은 센카쿠 영유권과 관련, 중국대륙붕이 일본 영토까지 뻗어있기 때문에 그 중간선을 그어 동쪽은 일본의 관할이라는「중간선론을 주장해왔다. 이에 반해 중국은 대륙붕이 자국연안으로부터 오키나와 서쪽해상까지만 뻗어있고 센카쿠 역시 대륙붕 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유엔의 원유 매장 가능성 발표이전에는 중국측에서 별다른 영유권 주장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서 원유 때문에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2) 역사적 배경에 관한 양국의 입장
일본은 청일전쟁이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정식으로 할양받았고 또한 2차대전의 잔재를 청산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센카쿠열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분명한 일본의 영토이며 또한 중국측이 내새운 順風相送(1403), 使琉球錄(1534), 日本一鑑(1555)등의 역사서에 나타난 기록은 오히려 일본측의 영토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청일전쟁때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은 제국주의 시대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무력에 의해 강탈당한 것에 불과하며 샌프란시스코 조약 역시 미국과 일본간의 일방적인 조약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역사서의 기록에 대한 일본측의 해석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자신들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5. 추후 전망 및 영향
중국과 일본은 양국관계에 있어 역내 안정 및 경제협력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 에 동 문제로 인한 양측의 무력충돌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일본의 영유권 강화조치에 대한 민간시위가 중국정부를 겨냥한 정치적 시위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홍콩이나 대만에 비해 낮은 수준의 대일 항의나 시위만을 허용하고 있다. 홍콩이나 대만의 경우도 대체적으로 시민단체, 혹은 정당 주도의 시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부차원의 대응은 외교적 항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은 남사, 서사군도 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일국의 영유권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공식입장을 취하고 있고, 분쟁 당사국들에게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자유항행의 보장 원칙을 준수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다만 분쟁의 확대로 인해 중·일관계가 경색될 경우, 이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에 전략 적, 경제적, 지역적 파급효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특히 본 지역은 동북아 국제해상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분쟁이 격화된다면 해상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한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사군도 분쟁(Splatly Is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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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지도(영문/중문대조)map1.jpg
영문지도
1. 남사군도 개관
1) 남사군도의 위치
남중국해의 남부 해상에 있는 군도. 광둥성[廣東省]에 속하며. 동쪽은 필리핀의 팔라완섬과 보르네오, 서쪽은 베트남과의 사이에 걸쳐있는 군도.
2) 남사군도의 지리 현황
총면적 25만평방Km2 이상이며 230개 이상의 무인도, 암초, 모래톱, 산호초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섬들이 많은 암초와 식수의 부족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이 중 가장 큰 섬은 0.4평방Km2의 태평도(중국이름)도 이다. 1998년 현재 중국은 10개, 대만은 1개, 베트남은 24개, 말레이시아는 6개, 필리핀은 7개 도서를 점령하고 있다.
3) 관련 국가
중국과 대만, 그리고 아세안 5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베트남)이 관련되어있다.
2. 분쟁의 배경
1) 전통적 요인
첫째, 전략적 지리적 가치이다. 이 지역은 동아시아와 인도를 잇는 중요 요충지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초강대국의 각축장으로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말까지 약 10년간 미국과 소련 기지가 각각 필리핀과 베트남에 주둔, 배치하였다.
둘째, 수산자원의 풍부함이다. 세계 30대 어업국가 중 7 개 국가가 남중국해와 관련이 있을만큼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지고 있다.
셋째, 석유와 가스등 풍부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1995년 러시아의 지질탐사팀의 조사결과 약 6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제 2의 페르시아만 " 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채굴 기술의 발달과 이 지역의 부존자원의 경제성이 계속 확인되면서 남사군도의 중요성이 더욱 더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2) 국제환경의 변화
구소련의 붕괴와 냉전체제의 종식은 남사군도 주변국가의 국제환경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미국의 필리핀 클라크기지 철수와 소련이 베트남에 건설했던 캄람기지의 철수로 미소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였고 이는 곧 지역세력의 다극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인도차이나 공산국가들과 민주주의 국가들의 이념 대결이 종식되었고, 베트남을 견 제하기 위해 창설되었던 아세안에 베트남이 가입하면서 남사군도의 대립은 중국,베트남, 아세안 3각구도에서 중국, 아세안의 양각구도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국제 환경 변화는 남사군도 분쟁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해결책에 전환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있다.
2. 분쟁 진행 과정
1970년대 이전에는 도서 점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동 해역 및 수면 돌출물에 대한 자국 영토·영해 주장은 1960년대 수 차에 걸쳐 동 해역에서의 석유, 천연가스의 부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분쟁은 74년 1월 중국이 베트남령 서사군도를 점령 한 후 영토귀속을 발표하면서부터라 볼 수 있다. 이어 중국은 서사군도에 무장병력을 주둔시켜 남사군도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면서 진출의 당위성 확보를 위해 지역발굴을 실시하여 청나라 도자기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지역이 본래 중국령임을 선언하였다. 이에 베트남이 17세기에 처음으로 점령했다며 영유권을 주장해온 남사군도에 대해서 중국은 역시 배타적 영유권주장으로 맞서다 지난 88년 3월 남사군도 해역에서 베트남군과 충돌, 베트남해군 72명을 사망케 했다.
이후 1992년 중국이 남사군도, 서사군도를 포함하는 영해법을 공포하고 외국석유회사와 남중국해 탐사계약을 체결하는 등 자국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하자, 베트남 역시 외국석유회사와 석유탐사계약을 체결하면서 이에 대응하였다. 이러한 분쟁과정 중에도 92년 남사군도 관련 분쟁국들이 참가한 분쟁예방회의를 통해 평화적 공동개발원칙, 무력불사용원칙에 합의하였고 인도네시아 주최의 남사군도 회의, 그리고 95.10월 6개국 공동 사업추진 합의등 평화적인 해결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11월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등의 남사군도 당사국들이 다른 아세안국가들과 합의한 후 남중국해 긴장고조 방지를 위한 "남중국해 행동 선언문"초안을 중국과 합의하면서 남사군도 분쟁은 비로소 어느 정도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 협약은 향후 중국과 아세안의 자유무역협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3. 추후 전망 및 영향
남사군도 분쟁은 7개국간의 복잡한 국제형 분쟁이나, 무력충돌은 중국과 베트남간에만 발생하였고, 향후 분쟁이 재현될 경우 주로 중국과 아세안간의 쌍무적 분쟁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남중국해 분쟁 방지 협의로 진정국면에 있지만 이 협약은 10년간만 유효하며, 또한 협약의 내용 남사군도를 둘러싼 분쟁국들의 이해관계과 심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분쟁지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본 협약의 모호한 내용으로 인해 향후 분쟁 재발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의 원거리 투사능력 부족과 당사국들간의 현상유지성향을 감안할 때 직접적인 무력 충돌의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한편 미국은 중국의 지역패권주의를 견제하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개입은 삼가고 있다.
(2000년 코언 국방장관의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세안국가들의 결집이 필요하다는 발언이외에는 직접적인 언급은 회피하고 있으며, 다만 99년 중국과 남사군도 지역내에서 자유로운 항해와 무력불사용원칙에 대해서만 합의한바 있다.)
남사군도 분쟁은 한국에게도 중요한 사안인데, 국제교역량의 99.7%, 원유수입의 100%를 해운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국가들은 모두 교역 및 원유도입의 해상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해상교통중심지에 위치한 남사군도의 전략적·경제적·지역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분쟁의 당사국은 아니나, 분쟁은 경제적 이익 이외에도 대중국 및 대아세안 회원국과의 관계와 연계되어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다자간 평화적 해결에 상당한 국익이 걸려 있다. 또한, 문제는 중국과 아세안 회원국간의 관계 및 지역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므로 비록 지금은 진정국면에 있지만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uuuau/40008106495 [발췌]
http://home.pusan.ac.kr:8000/~politics/bbs/download.php?id=pds3&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5&filenum=2 부산대학교 정외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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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영토분쟁 중심 '우경화 日'
[한국일보 2005-03-16 19:40]
동북 아시아에 영토 분쟁과 관련된 긴장이 전에 없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일본이 있다. 이투르프(일본명 이토로후ㆍ擇捉)섬 등 북방 4개섬 반환 문제로 해답없는 씨름을 하고 있다.
동북아 영토 분쟁은 수 십년씩 묵은 문제이다. 최근 중국 대만의 민족주의도 격렬한 양상을 띄고 있지만 갈등이 한층 고조되는 건 주로 일본 정부의 접근법 변화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예전에는 극우집단이 소동을 일으키고 정부는 뒷전에서 일을 진행시켰지만, 최근에는 정부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주변국을 자극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일본 사회의 전반적 우경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精國) 신사 참배 강행과 우파 정치인의 발언권이 확대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는 독도 영유권 강변으로 사단을 일으키고, 중국 대만과는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이ㆍ釣魚島 군도) 영유권 문제와 동중국해 춘샤오 해저가스전ㆍ오키노도리(沖ノ鳥)섬 등을 둘러싼 배타적경제수역(EEZ)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와는
최근에는 군국주의의 음울한 그림자도 읽힌다. 중국이 자국 영유권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는 일본의 오키노도리 유인화 및 EEZ 확장 시도에 대해 번번히 발목을 잡는 것도 이 때문이다. EEZ를 넓히려는 경제적 목적 이면엔 영토 확장을 위한 치밀한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청년단 기관지 ‘중국청년보’는 최근 “일본이 독도를 두고 억지를 쓰는 이유는 독도에 대한 결정이 북방 4개섬과 연동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일본과 한중러 간 ‘섬 분쟁’이 서로 연결돼 있어 일본이 하나를 돌파해 다른 문제에까지 확대 적용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일본의 최근 행보가 미일 동맹의 강화와 밀접히 맞물려 있다는데 있다. 일본이 앞으로 영유권 분쟁에서 목소리를 더 높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선 “일본 뒤에는 미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미국이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 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 센카쿠열도
석유부존 확인 후 첨예 갈등
"중국인이 발견" "오키나와 소속" 대립
대만 북동쪽 170km 지점에 5개의 섬으로 구성된 센카쿠(尖閣) 열도는 일본과 중국이 영유권을 다투는 분쟁지이다. 그 중 독도보다 큰 최대 섬인 우오쯔리지마(釣魚島ㆍ중국명 댜오위다오)가 분란의 핵심이다.
중국의 자국영토 주장에 맞서 일본 정부는 이 섬의 영유권을 기정사실화 하기위해 소속을 오키나와(沖繩)현으로 하고 등대까지 세웠다. 그러나 중국을 의식해 일반인의 방문은 제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534년 중국인이 발견한 이 섬들이 1895년 청일전쟁 이후 대만과 함께 일본으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이 열도가 일찍이 오키나와 소속이었고, 중국의 1534년설은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미일 강화조약에 오키나와와 함께 자국의 영토임을 명시했고, 1955년 중국정부가 간행한 지도에도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중국이 뒤늦게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열도가 양국의 관심사가 된 것은 70년대 근해에서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사실이 확인되면서부터. 지난해 3월 중국인 7명이 이 섬에 상륙하자 일본이 해안경비대를 동원해 체포하는 강수를 두면서 양국간 긴장의 수위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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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노도리시마(沖ノ鳥島)
[http://homepage2.nifty.com/shot/okinotori.htm#oki4 일본 웹 발췌]
東小島 "Higashikojima" (east small island)
北小島"Kitakojima" (north small island)

2개의 암초를 섬으로 명명하고 관측소를 운영하고 있다.
Okinotorishima island is located about 1,700 km from Tokyo. This island is not not big. In fact, there are 2 small rocks over the sea. They are called "Higashikojima" and "Kitakojima" and coverd by concrete so we can't see the rocks directly. There also a watchhouse near the rocks.
We can't land at this island. I saw that from passenger boat "Asu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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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70cm 암초를 '영토' 우겨
日본토보다 넓은 경제수역 설정
일본정부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740km 떨어진 오키노도리라는 태평양의 조그만 암초에 1989~93년 대대적인 콘크리드 보강공사를 펼쳤다.

1543년 스페인의 산후안호가 발견했고, 일본은 1931년 이 곳을 영토에 편입시켰다. 1952년 미일강화조약에 따라 오가사와라 제도가 미국 신탁통치를 받게 되면서 함께 편입되었다가 68년 일본에 귀속됐다.
일본정부가 배로 자재를 옮기고 해상에서 작업하는 난공사를 벌이면서까지 오키노도리시마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때문이다. 일본은 77년 12해리의 영해와 200해리의 경제수역을 설정했는데, 오키노도리시마 주변 200해리를 설정하면 일본국토면적보다 큰 40만㎢로 막대한 어업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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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ile Island conflict - Dispute Between Russia and Japan over Sovereignty of Islands
The Kurile Island conflict is a dispute between Russia and Japan over the sovereignty of islands currently under Russian administration.
The disputed islands are:
1.Kunashiri Island (国後島)
2.Etorofu Island (択捉島)
3.Habomai Islands (歯舞群島)
4.Shikotan Island (色丹島)
They are called "Northern Territories" (北方領土) or "Southern Chishima" (南千島) by Japan.
The dispute results from an ambiguity over the Treaty of San Francisco. Under Article 2c),
Japan renounces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Kurile Islands, and to that portion of Sakhalin and the islands adjacent to it over which Japan acquired sovereignty as a consequence of the Treaty of Portsmouth of 5 September 1905.
The dispute is whether four of the islands currently under Russian administration were acquired by the Treaty of Portsmouth or were under Japanese control prior to this treaty. Russia had never ruled these islands before 1945
● 남쿠릴열도
日 "4개섬 반환" 러 "2개만"
전략가치 높아 평화조약 '걸림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이 됐지만 일본과 옛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아직도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관계 정상화 움직임이 남쿠릴열도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 반환 문제라는 암초에 번번이 좌초했기 때문이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동북쪽의 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이상 일본명) 4개 섬은 2차대전 연합국간 얄타협정, 1951년 미일 강화조약 등에 따라 소련 땅이 됐다. 일본은 4개 섬 모두 강점이라는 주장이지만 국제법적으론 시코탄과 하보마이만 불법 점령 문제 시비가 있다.
1956년 양국은 '평화조약 체결 뒤 하보마이 시코탄을 돌려준다'고 선언했지만, 냉전 심화로 4개 섬의 전략 가치가 높이 평가되면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냉전 해체 이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 지원을 노려 4개 섬을 모두 반환할 것처럼 운을 띄웠지만, 경제에 자신감을 되찾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개섬 반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도 4개 섬 반환에서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는 만큼, 접점을 찾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일 지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러시아 승전기념식 불참 등 양국 관계가 냉랭해지고 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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