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679

초기 한국 기독교가 낳은 세 명의 신여성

초기 한국 기독교가 낳은 세 명의 신여성 b 초기 한국 기독교가 낳은 세 명의 신여성 原文 교사 신마리아, 의사 박에스더, 간호사 김배세 한국교회사, 혹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매로 신마리아(Mary Shin), 박에스더(Esther Pak), 김배세(Bessie Carnahan Kim)를 꼽을 수 있다. 신마리아는 1896년 서울 정신여학교의 초대 교사가 되었고,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부터 10년간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활동했다. 김배세는 1910년 세브란스간호원양성학교를 제1회로 홀로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수간호사로 활동했다. 신, 박, 김 세 명이 각각 다른 성인데도 어떻게 한 자매일까? 이들은 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인 아버..

11일 11시 세계의 시선이 부산으로...Turn toward Busan

11일 11시 세계의 시선이 부산으로...Turn toward Busan 11일 11시 세계의 시선이 부산으로...Turn toward Busan 송고시간 | 2015/11/09 14:00 한국전 참전 용사들 묻힌 부산 유엔군묘지 향해 1분간 추모 사이렌과 묵념 1만1천 위 중 대부분 송환되고 현재 11개국 2천300기 안장 (부산=연합뉴스) 신정훈 기자 = 11월 11일 11시 정각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유엔(UM) 참전국 용사와 그 가족, 국민을 비롯해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인의 마음과 시선이 부산을 향한다. 추모 사이렌과 함께 1분간 추모 묵념이 향할 곳은 부산 남구 대연동 779번지 유엔기념공원. 13만5천㎡ 면적의 이곳에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

[기억할 오늘 : 9월 7일]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별세

[기억할 오늘 : 9월 7일]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별세 일제 만주국의 톱스타·야래향의 가수… "위안부에 사죄" 큰 울림 남기고 떠나다 [기억할 오늘 : 9월 7일] 1년 전 오늘(2014년 9월 7일) 일본의 연예인 출신 정치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ㆍ94ㆍ사진)가 별세했다. 나이 든 이들은 그를 등려군과 주현미가 불러 귀에 익은 ‘야래향(夜來香)’의 가수로 기억한다. 공전의 히트작이라는 영화 ‘지나의 밤’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추문’ 등으로 낯을 익힌 배우이기도 하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여러 편 출연했다고 한다. 또 그는 1995년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의 대국민호소문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교수 등과 더불어 16인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명부의 그는 전남편의 성을 ..

[역사 NIE] 〈19〉 마리 앙투아네트

[역사 NIE] 〈19〉 마리 앙투아네트 [역사 NIE] 〈19〉 마리 앙투아네트 [중앙일보] 입력 2014.12.10 00:03 수정 2014.12.12 15:37 | Week& 6면 지면보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남겼다고 회자되는 말이다. 이 말 한마디로 그는 민중의 아픔엔 눈꼽만큼 관심도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로 각인됐다.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분노를 사 혁명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가 특별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더러 큰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케이크 발언 역시 사실무근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프랑스 혁명을 불러온 희대의 ..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린 여인, 현앨리스의 비극적 가족사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린 여인, 현앨리스의 비극적 가족사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린 여인, 현앨리스의 비극적 가족사 등록 :2015-03-19 20:37수정 :2015-03-19 20:42 1921년 겨울 상하이의 한국유학생 모임인 화동학생연합회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맨 앞줄 가운데 보타이를 맨 청년이 박헌영, 둘째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일본 여학생 교복을 입은 여성이 현앨리스다. 돌베개 제공 냉전의 마찰면에서 산산조각난 한 가족의 초상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돌베개·2만원 한 시대를 통과한 사람의 몸과 영혼에는 그 시대의 흔적이 인장처럼 새겨진다. 격동의 시대일수록 흔적은 난폭해진다. 일제 침략과 분단이라는 잔혹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 땅에서 무자비한 시대의 폭력을 비켜간 사람..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의 꿈, 5.10 총선거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의 꿈, 5.10 총선거 1948년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 5.10 총선거 오늘의 선거역사 / 스토리 BOX 2014.05.09. 10:04 1948년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의 꿈, 5.10 총선거" 해방이 왔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일제의 압박에서는 벗어났으나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갈라졌고 그 남과 북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한때 어깨를 맞대고 독일, 일본과 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계 각지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한반도는 그 최대의 각축장 중 하나였다. 남과 북의 두 나라 군정(軍政)은 자신의 기호에 맞는 정부를 한반도에 세우기 위해 각을 세웠고 행정상 경계선일 뿐이었던 38선은 국경선처럼 높..

조종무의 뉴욕한인 이야기/ 뉴욕 봉제공의 시초…성악가 김자경

조종무의 뉴욕한인 이야기/ 뉴욕 봉제공의 시초…성악가 김자경 한인사회 조종무의 뉴욕한인 이야기/ 뉴욕 봉제공의 시초…성악가 김자경 2011-08-25 (목) 1950년대 뉴욕의 한인들. 앞줄 오른쪽부터 한복입은 김자경, 의사 임길재, 시인 모윤숙, 뒷줄 오른쪽 부터 황재경 목사, 김자경의 남편 심형구 화백, 손원일 제독. 1986년 여름. 서울 자하문밖에서 문화촌 쪽으로 넘어가는 터널을 지나 오른쪽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자 김자경 오페라단 사무실이 있었다. 그때 70세라고 자신의 나이를 밝힌 김자경은 소녀같은 감상을 잃지 않고 2시간 정도 걸린 인터뷰에 자세 한번 흐트리지 않았다. 그만큼 건강도 했으려니와 30여년전 뉴욕생활에 얽힌 강한 열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1948년부터 10년동안 뉴욕에 살면서 30..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30)정뜨르 비행장(2)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30)정뜨르 비행장(2) b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30)정뜨르 비행장(2)"시산혈해의 대지에 흐르는 뼈의 노래여"입력날짜 : 2007. 12.04. 00:00:00정뜨르 서비행장은 태평양전쟁 시기인 1942년 개장되었다. 이후 미군정기와 4·3, 그리고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제주현대사 최대의 시련기를 겪으며 이 드넓은 대지는 제주 섬 주민들을 끌어다 학살하는 총소리와 비명소리만 가득한 죽음의 땅이었다.이곳은 4·3 당시 일상적으로 제주도 주민들을 끌어다 총살하는 최대의 학살터였으며, 피로 범벅된 시체더미가 산을 이룬 시산혈해(屍山血海) 땅이었던 것이다.대규모 학살 이후에도 이곳 정뜨르에는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므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부..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9)정뜨르 비행장-1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9)정뜨르 비행장-1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9)정뜨르 비행장-1 사형장 방불케 팡~팡… 4·3 최대 학살터 입력날짜 : 2007. 11.27. 00:00:00 수많은 관광객들이 들고 나는 제주국제공항은 제주의 관문이자 날로 성장하는 제주관광의 상징이다. 그러나 60년전, 4·3 당시 벌어졌던 학살의 아수라장은 수많은 유족들과 도민들에 의해 입소문으로 전해졌으며, 대부분 희생자들의 유해는 토사에 덧씌워진 채 그대로 공항 여기저기에 묻혀있다. 드러나는 학살의 실상 최근 제주자치도가 발주하고 제주4·3연구소와 제주대학교가 구성한 유해발굴단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옛 정뜨르 비행장 4·3유해발굴사업에서 다량의 유해와 유품, 총탄 등이 발굴됨으로써 4·3 당시 ..

격동기의 조선족

격동기의 조선족 (1)-- 수년전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료녕성 개주시 진둥향 박가촌(朴家村)의 주민 277명, 료녕성 본계현 산성자향 박보촌의 구재곡, 회피 등의 주민 1,234명, 하북성 청룡현의 팔도자향 탑구촌과 대장향 맹가움집촌의 박씨 성을 가진 350여명이 자기들의 선조가 350년 전 한국에서 이주해 온 한국인이고, 자기들은 한국인의 후예이기에 조선적으로 옮겨달라는 청원을 한것이다. 원래 중국에는 박씨 성이 없기에 이들 박씨 성을 가진청원 자들은 1958년 조선 적을 회복했었다. 이에 봉성현 일대에 거주하는 문씨, 김씨, 백씨들도 한국인을 증명하는 족보를 갖고 있어, 이들 또한 조선 적 회복을 신청했다. 조선 적을 회복한 사람들은 명말청초에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