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홍장군(洪將軍)

marineset 2023. 5. 27. 03:04

こう,しよく고 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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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 思翊
1946(昭和21)年9月26日没
朝鮮出身
日本陸軍軍人
陸軍中将
歩兵
1914(大正3)年 陸軍士官学校(26期)卒
1923(大正12)年11月 陸軍大学校(35期)卒------- 31기~35기 졸업생명부army.hwp
1939(昭和14)年9月28日 支那派遣軍御用掛
1940(昭和15)年8月1日 留守第一師団付
1941(昭和16)年3月1日 陸軍少将 第108旅団長
1942(昭和17)年4月17日 公主嶺校付
1944(昭和19)年3月2日 比島俘虜収容所長
 10月26日 陸軍中将
 12月30日 第14方面軍兵站監
戦後、連合軍から収容所長時代の責任を問われる
1946(昭和21)年9月26日 マニラで死去(法務死)

ホン・サイク
Hong

▲일본 웹사이트에서 소개하는 홍사익의 간략한 이력


[분수대] 친일파 홍사익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교도소 교수대. 일본제국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 홍사익(당시 57세)중장은 입회목사한테 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으로 판결받았다.

홍사익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시편을 듣고자 한 것은 전쟁범죄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내면을 괴롭혔던 친일행위를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홍사익에게 친일은 출생 때부터 지고 나온 원죄 같았다.

홍사익은 열여섯살 때 고종황제가 자주국방의 동량을 육성하기 위해 세웠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국권침탈 1년 전인 1909년, 일제에 의해 육군무관학교가 폐쇄됐다. 그는 고종의 명에 따라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육사 예비학교)로 적을 옮긴다.

홍사익은 한국인 유학생의 리더였다. 나라가 무너지자 유학생들 중엔 당장 학교를 때려치우고 독립운동에 나서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홍사익은 "지금은 배울 것이 많으니 실무와 실전을 경험한 뒤 기회를 보아 일을 도모하자"는 실력양성론으로 의견을 한데 모았다. 육사 동기생 가운데 이청천도 있었다. 나중에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해진 그는 3.1운동 뒤 만주로 탈출해 광복군 사령관이 됐다.

둘은 독립군과 일본군의 지휘부에 오른 뒤에도 비밀리에 교류했다. 홍사익은 월급을 쪼개 육사 출신 항일운동가들의 가족을 보살폈다. 하지만 독립군에 합류하라는 이청천의 제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사익은 지휘관으로 부임할 때마다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 지금부터 천황폐하의 명령에 의해 지휘권을 행사한다"고 했다. 일본제국의 장성이었지만 창씨개명은 끝내 거부했다.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법에 따르면 홍사익은 그 지위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조사 대상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홍사익의 행위엔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노력도 있었다. 사람에게 죄인 딱지를 붙이는 일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경우가 있더라도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 진상조사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진행됐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2004-03-03 18:38:16]
전영기 정치부 차장



◁사진설명 : 전범법정에서의 홍사익(오른쪽 끝)


 
 
 
 
 
 
 
홍사익스토리/軍事世界2004, 01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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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항복방송이 있던 당일, 洪중장과 병참감실은 바기오 지구 밀림 속에서 반기아선상(半饑餓線上)을 헤매는 중이었고, 다음 날에야 겨우 항복사실을 알았다 한다.
이제 거꾸로 미군의 포로수용소에 들어 간 洪중장은 독실인 장군 감방에서 야마시다 대장과 복도 건너 맞은쪽 방에 수용 되었다가 포로학대 죄로 교수형 집행을 당했다.

여러 달 계속된 연합국 군사재판정에서 洪중장은 미군 검사와 미군 변호사가 무슨 말을 하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무언(無言)피고'로 유명하다.

일본 장군들의 사형집행 입회인 이었던 기다야마(北山)목사의 회고록에 의하건대 "마지막에도 태도가 훌륭했던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했던 사람이 洪중장이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장군 전범들 가운데 洪중장이 마지막으로 혼자 남아있던사형수였다. 1946년 9월 26일 밤, 처형장에 나온 洪중장에게 미군헌병이 "처형 10분 전!"이라고 소리쳤고,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 말을 하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일본승려가 독경을 시작했고, 홍장군은 일어나 "사세(辭世)의 시(詩)라고 할 것까지 없지만...”이라는 전제를 한 다음 아래와 같은 詩 한 수를 읊더라 하였다.

"구질구질하게 생각해 보아도 넋두리리라
패전이 죄라고 체념하는 것이 좋으리라

옛날부터 억울한 죽음이 많았으니
나 또한 그 속에 끼었을 뿐이로다"

시를 읊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洪중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간이 되어 헌병이 다가오자 그는 침착하게 일어나서 "기다야마君, 자네는 젊으니 몸을 소중히 하게. 그리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라고 작별인사를 하더라 하였다.

보름 먼저 처형당한 야마시다 대장은 그때 이 마지막10분에 무너져 "나도 도죠(東條) 녀석에게 배반당했다!"고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더라는 말도 이 목사의 회고록에 써 있다 한다.
http://blog.empas.com/kybkang9/4804657
退愚 李匡鍾 (Casey) 에서 펌




狂氣의 犧牲洋 ‘朝鮮人 戰犯’
일본 패전 뒤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자는 도조 히데키 등 모두 7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 가운데 B·C급 전범으로 교수형과 총살형에 처해진 사람의 수는 모두 23명에 이른다. 어떻게 한국인 전범이 일본인 전범보다 더 많이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A급 전범은 ‘연합국 정부들의 공동결정에 의해 처벌해야 할 중대범죄인’으로 연합군 점령사령부의 통제 아래 재판과 처벌이 집행됐다. 반면 ‘특정 지역에서 통상적인 전쟁 범죄를 저지른’ B·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일본군 항복 이후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 49곳에서 현지 점령군에 의해 진행됐다.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2만5천명, 기소된 자는 5700명이며 그 가운데 984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기소된 사람 가운데 한국인이 148명 끼어 있었으며, 그중 2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조선인 전범 148명 가운데 군인은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이던 홍사익 중장(사형)과 두명의 지원병(유기징역) 등 모두 세명뿐이었다. 나머지 145명 가운데 중국에 통역으로 징용된 16명(사형 8명, 유기징역 8명)을 제외하면 129명 전원이 타이 자바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역 포로수용소의 감시요원으로 모집된 군속들이었다.

1941년 12월8일 진주만 공격으로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후 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까지 연합군 포로 42만명을 사로잡았다. 전선은 버마(미얀마)와 인도 북부까지 확대됐다. 일본군은 처음엔 해로로 군수물자를 수송했으나 42년 9월 미드웨이 패전 이후 해로가 차단당하자 새로운 보급로로 철도 건설을 택했다. 정글과 산악지대와 급류를 관통하는 악명높은 ‘타이멘 철도 건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42년 7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3개월 동안 무려 415km에 이르는 철도를 건설한 일은 일본군의 광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여기에 싱가포르와 자바에서 사로잡은 연합군 포로 5만5천명과 아시아에서 끌고 온 징용 노동자 30만명을 투입했다. 의약품과 식량이 절대부족한 극한상황에서의 강제노역은 연합군 포로 20%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철도 침목 하나당 한 사람이 희생당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일제는 이 죽음의 노역장에 조선인을 감시자로 보냈다. 포로를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일은 당연히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다. 일제는 이를 전혀 무시했고, 조선인 군속은 물론 일본군에도 제네바 협정이 있다는 사실조차 교육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인칙유> <전진훈> 따위의 군사교범에서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욕됨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문구로 자살을 강요했다. 일본군은 포로로 잡힌 연합군 병사들을 ‘비열한 인간’으로 보았다. 이들을 강제 노역과 굶주림과 질병에 몰아넣어 죽음을 강요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은 이런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 전범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온 우쓰미 아이코(58) 교수는 한국인 군속을 포로 감시원으로 끌고 간 또다른 이유로, “조선인에게 백인 포로를 보여줌으로써 황민화 정책과 내선일체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연합군쪽은 B·C급 전범 재판에서 한국인 군속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했다는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서류상 국적은 ‘일본’이었고 창씨개명으로 이름조차 일본식이었기 때문이다.

패전 후 일본 정부는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해 철저한 발뺌으로 일관해왔다. 이들은 강제 징용당한 피해자이면서 일본군 신분으로 연합군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자국인 전범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연금을 주면서도 이들의 보상과 사과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인 전범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고 아시아의 평화로운 이웃으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풀고 지나가야 할 매듭이다.


이상수 기자
leess@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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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전회고록42>창군과 다양한 인적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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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전 (李在田)
출생 : 1927년 4월 29일 (*사망 2004년 6월 12일)
직업 : 전 군인
소속 : 전 합동참모본부 중장 대간첩대책본부장 겸임

전쟁기념관장. 육사 8기로 6·25 참전. 휴전 이후 합참본부장, 대통령 경호실 차장 역임. 전역 후 한자(漢字)진흥회를 설립해 한자 가르치기 운동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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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이 창군(創軍) 과정에서 독립군(광복군)·중국군·일본군·민간인 출신 등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적 자원을 수용했는데도 출신별로 심각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이범석 국방부장관 같은 광복군 원로들이 군 수뇌부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범석 장군처럼 창군의 정통성을 가진 원로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인적 자원을 한데 묶어 건군의 기초를 잘 다진 덕분이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수반이자 광복군 통수권자인 김구(金九)국무위원회 주석(主席)이 서울로 귀환하기 전인 1945년 9월3일 임정(臨政) 특파사무국(特派事務局)을 통해 공표한 `임정의 당면정책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의 제13항은 `적군(敵軍)에게 피박(被迫) 출전(出戰)한 한적군인(韓籍軍人)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맹군(盟軍)과 협상 진행할 것'이라고 돼 있다.

사실 그 당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적 자원 가운데 가장 잘 훈련된 군대는 일본군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한국인으로 일본군 최고위 장교에 올랐던 홍사익(洪思翊)중장을 구명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범재판에 회부돼 교수형을 선고받은 홍사익 장군을 특별사면해주도록 미 군정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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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관련기사]

1.1966.02.18 조간 3 <램프안팎>눈물흘린 「왕년의 전범」일본 향우군이사장 오자와씨 내한. 고일본군중장 洪思翊씨 아들이 마중 oartPDF(2).pdf
2.1947.06.18 조간 2 홍사익사형 470618.pdf
"홍사익 사형" 재일본 조선인공관으로부터 외무처에 보고된바에 의하면, 일본군인으로 육군중장 홍사익은 작년 8월 12일 '마니라'의 전범재판법정에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동 9월 16일 형이 집행되었는데 금번 일본외무성 중앙연락사무국으로부터 그의 유품 팔목시계1, 저금통장1, 골뿌리1, 안경1, 수첩1을 외무처에 보내왔음으로 지난 14일 조선은행 조사부에 근무중인 그의 아들 홍국선 군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3.1946.04.20 조간 2 洪思翊(홍사익) 중장, 교수형 선언 460420.pdf
19일 '마니라'발 '유피'통신에 의하면 전쟁중 비율빈 마니라 연합군부로수용소 소장이엿든 조선출신 일본육군중장 홍사익은 18일 마니라 군법회의에서 부로학대살해죄로 교수형의 선고를 바덧다한다.
4.1946.02.18 조간 1 洪思翊(홍사익) 구출운동 이박사 관계없다 460218.pdf
이화장에서는 홍사익중장 석방운동에 이승만박사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16일에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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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홍사익 장군은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1905년 15세 나이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무관학교가 폐쇄돼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육군사관학교(26기)에 이어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일본군의 육군대학 졸업자는 주장(主將)까지 진급하는 것이 관례인데 한국인으로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일본 육사29기)과 홍사익 장군 두 명만이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올라갔고 만주군에서는 정일권(丁一權)장군(군영·대장 예편·작고)만이 육군대학 과정을 거쳤다.

1941년 육군소장으로 진급해 북지(北支)파견군 여단장 등을 역임한 홍사익 장군은 일본의 패전을 1년 앞둔 1944년 남방총군(南方總軍)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장으로 필리핀 전선에 부임, 뒤이어 중장으로 진급해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포로수용소 책임자로서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잔학행위에 책임을 지고 전범 법정에 서야 했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태평양전쟁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필리핀 현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한국인으로 최고 계급에 올랐으면서도 일제가 한국인에게 강요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국내에서는 건군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일부 인사들이 맥아더 사령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구명운동을 폈고, 일본에서도 패전 직전 작전권이 없는 보급지휘관이었던 그가 A급 전범으로 처단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없지 않았다.

홍사익 장군과 일본 육사 동기이면서 국군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이가 바로 이응준(李應俊) 장군이다. 이 밖에 한국인으로 일본군 고급장교에 오른 사람 중 국군 창군에 참여한 일본 육사 출신은 신태영·유승렬(26기)장군과 김석원(27기)장군 등이 있다. 이종찬·채병덕은 49기이고 박정희·이한림은 54기에 해당된다.

이처럼 기수에 격차가 나는 것은 일본 육사가 한동안 한국인 입학을 허용하지 않다가 17년 만에 재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창군 초기에는 일본 육사 출신의 경우 부자(父子·신태영-신응균, 유승렬-유재흥)뿐만 아니라 장인·사위(이응준-이형근)가 함께 근무하면서 아들이 아버지보다 계급이 높은 과도기적 현상을 낳기도 했다.

<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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