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기행
세 여인의 애환이 녹아 있는 그 곳 낙선재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승인 2016.05.16 00:40:18
naksunjae.docx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기행<원문>

창덕궁 낙선재로 가는 중문 숙장문(사진=헤럴드저널)
창덕궁은 우리나라 궁궐 중에서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궁궐로 관람객도 제한적으로 입장시키는 궁궐이다. 숙장문을 지나 오르다 보면 후원 입구 오른쪽에 조선의 전통 양반가옥이 나타난다. 이곳이 낙선재이다.
구중심처 궁궐에서도 찬란한 영광을 누리는 왕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사의 질곡 속에서 소용돌이에 휩쓸려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국모였던 여인들도 있다. 국기가 기울어 나라 잃은 슬픔 속에 일제의 강압으로 궁궐을 떠나야 했던 덕혜옹주, 마지막 까지 일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치마폭으로 국새를 감싸 안았던 슬픈 국모 순정효황후 윤비도 낙선재 여인의 한 사람 이었다. 봄이 깊어가는 오월 낙선재 찾아 이곳에서 살다 간 슬픈 여인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낙선재 내부 전경(사진=헤럴드저널)
낙선재는 궁궐의 특이한 반가(班家) 건축물
낙선재(보물 제1764호)는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궁궐 내부의 사대부 주택형식의 반가 건축물이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다. 이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자리 잡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중희당과 수강재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세자의 훈육을 위한 공간으로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56년(영조 32)에 화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조 대에도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고종 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가끔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다.

낙선재 본당 현판으로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진다(사진=헤럴드저널)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양반 가옥의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정면에서 왼쪽 한 칸은 앞으로 돌출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툇마루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각종 창호의 전통적인 무늬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인데 일제강점기 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정면은 나무판을 세로로 세워 만든 판벽이고 좌우 벽은 궁장을 쌓는 것처럼 돌과 벽돌로 장식했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야 한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낙선재는 궁궐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아름답고 조선 후기 건축의 장인(匠人)들이 섬세한 기능을 엿볼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있다.

낙선재와 인접한 수강제 현판
낙선재와 얽힌 세 여인 이야기 그 첫 번째 여인은 대한제국황실 마지막 국모 순정효황후 윤비이다. 순종의 계비로서 한일합방에서 5.16까지 격동의 근현대사를 체험하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국모였다. 마지막 국모의 슬픈 사연은 이렇다. 윤비는 1894년 8월 20일 윤택영의 딸로 태어났으며 친일파였던 윤덕영이 숙부가 된다. 순종은 첫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 씨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1906년 13세의 어린 윤씨를 계비로 맞이했는데, 이때 순종의 나이 33세였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자 윤 씨는 황태자빈에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3년 후인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하려 하자 윤비는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는 단호함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친가 숙부인 친일파 윤덕영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말았다. 윤비와 슬하에 자녀가 없던 순종은 고독한 생활을 하였는데 오락도 별로 즐기지 않아 간간히 궁녀들을 불러 강목(綱目), 명현전기(名賢傳記) 등을 낭독케 하고 조용히 들으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순종은 20년이나 어린 윤비를 무척 귀히 여겨 같이 비원을 산책하거나 곡마단을 연경당으로 초청하여 즐기기도 하였다. 윤비는 한일합병 후 낙선재에 머물기도 했다. 비는 가정교사에게 영어, 일어, 피아노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자유로운 몸은 아니었다. 일제의 감시 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다. |

중희당의 측면 모습
이방자 여사…비운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는 고종과 엄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비이다. 영친왕 이은과 일본에 의해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여사는 1901년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일본 가쿠슈원(學習院)을 졸업한 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융합정책에 따라 대한제국의 황태자인 이은과 강제로 정략혼인을 하였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남편 영친왕은 형식상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이라 불리었으나 환국하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 억류를 당해야 했다. 광복 후 국교 단절과 국내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영친왕 이은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영친왕과 함께 전부터 구상하여 왔던 장애인사업을 추진하여 1963년부터 1982년까지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직을 맡았으며, 1966년 1월 사단법인 자행회(慈行會)를 설립하여 정신박약아들의 재활을 돕는 복지사업에 헌신하였다. 한편, 1967년 11월 YMCA에서 빈민돕기사업을 하던 재단법인 보린원(保隣園)을 인수하여 농아와 소아마비아를 위한 훈련원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였다. '명휘(明暉)'는 영왕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었다. 1970년 영친왕이 오랜 지병인 뇌혈전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편의 유업을 꾸준히 이어갔다. 이 여사는 영친왕비로서 이곳 낙선재에서 줄곧 머물다가 새 정부의 요청으로 거처를 민가로 옮겨야 했다. |

낙선재의 정문 장락문 풍경(사진=헤럴드저널)
일제 강압으로 정략결혼 후 병으로 평생 보낸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불렀다. 양씨는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 받는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 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유일한 외동딸이었다. 1916년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할 수 있었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 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다. 3월 28일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도쿄로 이동했다. 3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강제 송환됐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야 참석이 허락되었다. 낙선재 옆으로 무성하게 자라는 장송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영면하였으나 덕혜옹주는 귀국하고도 복상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낙선재에서 치료를 받으며 잠시 병세가 나아졌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로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마음의 상처가 매우 커서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일본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외동딸이었던 24세의 정혜가 1956년에 결혼을 했지만 순탄하지 못해 이혼했다. 그 후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했지만, 귀국 20년이 지난 1982년에서야 호적이 만들어 졌다.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방자 여사의 간호에도 끝내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
이렇게 창덕궁의 낙선재에는 기쁨보다 슬픔으로 일생을 마감한 세 여인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답사를 마치고 장락문을 나서니 철쭉 꽃잎이 시들어 가고 있다. 왼쪽 상량정 아래 소나무만 오월의 하늘 아래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낙선재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오르면 후원과 창경궁으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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