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여간첩 김수임

marineset 2023. 5. 28. 02:19
 
 
 
 
 
                                          The A to Z of Sex spio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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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반세기가 지나서 나온 ‘여간첩’ 김수임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전숙희, 정우사, 2002)


박미경 르포작가 2013-02-20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는 지난날 반공도서에 등장했던 ‘여간첩’ 김수임에 대한 변론이자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임과 이화여전 동창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 전숙희는 이 책에서 김수임이 의도적으로 이적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남로당 간부 이강국의 북한 탈출을 김수임이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지 이념과는 무관하다는 게 이 소설의 모티브(motive)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는 김수임이 ‘국방경비법 위반, 간첩 및 이적행위’로 한강 모래밭에서 사형을 당한 지 오십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왔다. 이 오십년의 세월은 김수임과 친동기처럼 지냈다고 스스로 밝힌 전숙희에게는 고통스러운 회한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김수임과 친분을 맺었던 그 많은 여성 인텔리들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용기와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김수임을 미군정 헌병사령관과 맺어준 이화여전 선배 모윤숙조차 그랬다. 당시 모윤숙은 미군 고급장교들을 상대하는 사교클럽을 만들어 후배들을 미군의 품에 안겨주었다. 정말 낯 뜨거운 여성운동사의 일부다.
그래도 전숙희는 달랐다. 결국 입을 열었다. 소설 내내 전숙희는 김수임이 간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마 그게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임의 정신세계는 “사랑밖에 난 몰라”였던 것일까. 전숙희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과연 그랬을까. 이강국을 돕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才媛) 김수임이 정말 몰랐을까.
이 소설의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김수임이 겪은 사건은 매우 드라마틱하지만, 김수임은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심성이 고운 젊은 여성이 따를 수밖에 없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보편성을 획득해야 할 존재가 치정극(癡情劇)의 비극적 히로인으로 간택된 것이다.
간첩이 코미디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시절에 “그녀는 간첩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김수임을 위한 진짜 변론이 아니다. 이강국을 도운 순간, 어차피 그녀는 간첩으로 몰릴 운명이었다. 이북을 고향으로 둔 적지 않은 실향민들이 남한 땅에서 누린 부(富)와 명예는 수많은 ‘김수임들’의 주검 위에 쌓아올린 그들만의 아성이었다. 사랑이 그녀를 쏜 게 아니다. 그녀를 쏜 것은 분단이었다.




AP “美 ‘여간첩 김수임’사건 조작 결론”

워싱턴 | 김진호특파원
입력 : 2008.08.17 18:40:07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이 여간첩이라며 처형했던 김수임 사건과 관련, 미국은 당시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고 결론지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AP통신은 16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이 해제된 김수임(처형 당시 39세)과 관련된 미국 측의 심문기록을 바탕으로 그녀가 연인관계를 이용해 정보를 얻어냈다고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존 베어드 당시 미 헌병사령관(대령)은 주요 기밀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면서 이같이 전했다. 문건에 따르면 윌리엄 라이트 미 군사고문단장은 김수임의 자백이 ‘물고문에 의한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또 김수임을 사실상 현지처로 삼아 아들까지 두었던 베어드는 그녀에게 간첩혐의가 없었음을 알면서도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은 채 한국을 떠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수임은 1950년 6월 말 체포돼 간첩혐의로 처형됐다.

통신은 또 기밀 해제된 미군의 심문기록을 토대로 월북 뒤 김일성 정권에 의해 ‘미제 스파이’ 혐의로 53년 처형된 이강국은 실제로 미 첩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것으로 미군 측은 파악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김수임과 베어드 사이에서 태어난 김원일 캘리포니아주 라시에라 대학 교수(59)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문건들과 관련자 인터뷰 결과 드러났다.

이화여전 출신의 신여성 엘리트였던 김수임의 비극은 독일유학생 출신의 유부남이었던 이강국의 애인이 된 데서 비롯됐다. 김수임은 이후 미군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당시 56세였던 미 헌병 책임자 베어드와도 연인관계를 유지했다. 베어드는 그녀에게 집을 얻어주고 들락거렸으며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고 미군 심문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수천건의 좌익분자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김수임을 체포했다. 당국이 그녀에게 씌운 혐의는 베어드가 내준 지프로 이강국의 방북을 도왔고, 미군의 철군 정보를 북측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군 철수 사실은 당시 미군 신문인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에 보도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 교수가 찾아낸 김수임 사건 담당 판사 김모씨(88)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김수임의 혐의에 대해 아무런 물증이나 증인을 제시하지 않았다. 매카시 열풍에 휩싸였던 50년대 미국에서는 김수임 사건을 옛 소련 방식의 성(性)을 이용한 첩보로 묘사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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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18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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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여간첩은 고문 조작…베어드 대령의 對남로당 정보원?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2008년 10월 호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김수임 사건 다룬 美 비밀문서 ‘베어드 파일’ 김수임 아들이 찾아내
●“기소사항 중 군사기밀유출 등 미군과 관련된 어떤 증거도 없다”
● 베어드, 김수임 구할 수 있었지만 혼자 미국으로 도망
● 이강국 “김수임 이용해 베어드를 만나 협력 약속” 진술
● 김원일 “역사와 화해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건 정부의 몫”
● 오재호 “김수임은 고문으로 들것에 실려 법정에 들어와”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1950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수임. 그 앞에는 항상 ‘미모의 여간첩’ ‘한국판 마타하리’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광복 직후 남한 최고 권력자의 하나였던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의 내연녀였다. 동시에 북한 최고 실력자의 한 명이었던 이강국(북한 초대 외무부장)의 애인이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이강국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자 베어드 대령의 차를 이용해 월북시켰는가 하면,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남한의 군사비밀을 빼돌리는 등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1950년 4월 체포돼 6월 사형당했다. ‘애인’ 이강국 역시 6·25전쟁 종전 직전 북한에서 간첩혐의로 처형당했다.

사라진 재판기록

이처럼 그는 반공의식을 고취시킬 대표적 사례였을 뿐 아니라 삼각관계, 죽음, 비극적인 사랑 등 극적인 요소가 많아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단골 소재로 인구에 회자됐다.

1950년 미국잡지 ‘코로넷(Coronet)’에서는 그를 ‘남한 사교계의 여왕은 빨갱이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하며 ‘미국을 배신한 한국인 팜파탈’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드라마로 여러 편 제작될 정도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주연한 드라마에서는 ‘아시아의 마타하리’로 묘사됐다. 워싱턴의 칼럼니스트 드류 피어슨은 ‘그의 간첩행위가 6·25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도화선이 됐다’며 6·25전쟁을 유발시킨 장본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나는 속았다’(1963),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 TV드라마 ‘제1공화국-여간첩 김수임’(1981), 실화소설 ‘특별수사본부-여간첩 김수임’(1980) 등을 통해 주로 ‘붉은 여간첩’ ‘한국판 마타하리’로 그려졌다. 또한 가택수색을 하러 온 수사관들에게 술상을 차려주는가 하면, 미리 몸단장을 할 수 있도록 사형 전날 알려달라고 당부했다는 ‘요부’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하면서 김수임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사랑에 목숨까지 바친 ‘순수한 여인’, 사랑 때문에 간첩행위까지 했으나 결국엔 사랑마저 이용하는 공산주의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가엾은 여인’으로 그려졌다. 배우 윤석화가 김수임 역을 맡은 연극 ‘나, 김수임’(1997), 김수임의 대학후배 전숙희씨의 실화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2002), 드라마 ‘서울 1945’(2006) 등이 그것이다.

학계 일각에선 ‘남북대립 상황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과 미군정의 과도기에 벌어진 정치게임의 희생양’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자료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규정상 영구보존해야 하는 판결문 등 재판기록마저 행방불명이다. 앞뒤의 사건기록과 판결문은 다 남아 있는데 김수임 사건 기록만 사라졌다. 따라서 언제 사형이 집행됐는지조차 공식기록이 없다.

그런데 최근 미국 AP통신에서 그의 죽음과 관련 새로운 시각을 보도했다. 비밀 해제된 ‘베어드 조사보고서(이하 베어드 파일)’ 등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1950년대 기밀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는 것. 사건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베어드 파일’은 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문서다. 미 육군성은 1950년 8월2일부터 김수임의 자백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베어드 대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조사했다. 그가 정부(情婦)인 김수임에게 주한미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여부와 그녀의 공산주의 활동을 보호, 지원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핵심이었다. 3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친 뒤 3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게 ‘베어드 파일’이다.

기사에 따르면 김수임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한 사람은 바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59·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신학) 교수였다. 김 교수는 10년 넘게 어머니 김수임을 연구했는데, 그가 찾아낸 자료만 ‘베어드 파일’ 등 1000여 쪽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김 교수의 곁에는 김수임을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화하려는 조명화(63) 감독이 있었다. 조 감독 역시 6년째 김수임을 연구 중이라 서로 자료와 정보를 교환해왔다.

김원일 교수가 발굴한 베어드 파일 등 미국의 기밀문서들과 김수임 사건 재판 보도 기사, 북한의 이강국 재판기록,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김수임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했다.

파란만장한 삶

출생에서 죽음까지 김수임의 삶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1911년 개성에서 빈농의 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고 각각 재혼해 가계(家系)가 복잡하다. 어머니가 다른 이복(異腹)동생도, 아버지가 다른 이부(異父)동생도 있다. 가난으로 11세 때 민며느리로 팔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총명한 머리로 이화여전 영문과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렇다고 외모까지 출중한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어드 파일엔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찍은 2장의 사진을 첨부한 뒤 “알려진 것(대단한 미인)과 실제 외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메모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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