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모(茶母)
조선조의 여자 경찰관을 다모(茶母)라고 불렀다. 이 다모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경찰관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모(茶母)라 하면 언뜻 다방의 마담쯤으로, 아니면 포청(捕廳)에서 차를 심부름하는 사환이나 여자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기 쉽다. 조선조에서 다모(茶母)의 직책이 본래 관청의 식모 노릇을 하는 천비(賤婢)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조선조에는 포교나 포졸들이 여인들의 범죄를 수사하는 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남의 집 내정(內庭)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다모로 위장시킨 여자 경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모로 위장한 비밀 여자 형사인 셈이었다. 이렇게 위장 수단으로 쓰였던 다모가 차츰 여자 경찰관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다모의 자격 기준은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3사발을 단번에 마셔야 하며, 쌀 5말을 번쩍 들어야 했다. 또한 시아버지나 남편의 이름을 서슴없이 불러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아마 기운 세고 남성적이며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를 선발했던 것 같다.
이 다모는 포청(捕廳)외에 형조(刑曹), 의금부(義禁府)에도 있었는데 다모의 주된 임무 중의 하나는 가택수색이었다. 예전에는 남의 집 내정(內庭)은 남자들이 못 들어가는 법이지만, 다모는 여자라 아무 집이나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의 종이나 식모 등을 자유롭게 유인하여 정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모는 대개 역적 모의를 하는 집에 많이 갔다. 그들은 치마 속에 60㎝정도 되는 쇠도리깨와 죄인을 묶을 때 사용하는 오라(五羅)를 숨겨 차고 다녔다. 그러다 그들은 죄가 분명한 사람의 집이라 확증이 되면 도리깨로 들창을 부수고 들어가 죄인을 묶어서 올 수 있었다.
다모는 신분증 비슷한 통부(通符)를 꼭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 통부는 길이가 2치쯤 되고 두께가 1푼쯤 되는 단단한 나무 조각의 중간에다 포장(捕將)의 수결(手決) 즉 현재의 사인(署名)을 새기고, 그 수결이 있는 곳을 양쪽으로 쪼개어서 한 쪽은 다모가 가지고 다니었으며, 다른 한 쪽은 포장이 가지고 있었다. 다모가 죄인을 잡을 때나 꼭 신분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는 이것을 보여 신분을 확인시켰으니, 오늘날 신분증과 같은 것이었다.
이 통부는 주로 평민층을 잡을 때에만 사용했고, 양반은 감히 잡지 못했다. 양반을 잡는 데는 자주통부(自主通符)를 보였는데 이것은 대궐 안에서 임금의 명을 받은 성전관청(宣傳官廳)에서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 중대한 일이 생기면 선전관이 임금께 아뢰고 나서 포교에게 내주었다. 포교는 한번 자주통부를 받으면 다시 반환하지 않고 포교직을 그만 둘 때까지 가지고 다니었고, 그 자주통부를 받은 포교는 팔을 뽐내면서 양반도 무섭지 않은 양 거드럭거렸다.
다모는 도리깨를 가지고 범인 집의 들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만약 사람을 쳐서 죽여도 살인을 하였다고 처형당하지는 않고 다만 귀양을 가는 정도에 그쳤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다모는 오늘날 우리 여자 경찰의 효시인 셈이다. <한국대학신문> 발췌
『韓國 女子警察 50年』
경우회 여경회에서 제 37주년 경우의 날을 기해 『한국 여자경찰 50년』이란 역작을 펴내 지난 46년 5월 15일 한국여자경찰이 태어난 이래 그 걸어온 발자취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여경회에서 이번에 엮은 「한국여자경찰 50년」에는 제 1장 「여명기」를 통해 前史와 국권 상실시기의 세계여성들을, 제 2장 「해방에서 정부수립까지」에서는 여경창설, 그 조직과 임무, 그리고 활약상을, 제 3장 「뿌리내리기 11년」에서는 정부수립후의 여경과 여수·순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 혼란기의 여경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제 4장 「침체의 세월」에서는 5.16 군사혁명후 막을 내렸던 여자경찰제도를 기술하는 한편 7년 공백기 끝에 학사여경을 모집해 재도약을 위한 여경들의 활동상을, 제5장 「그 어기찬 전진」에서는 80년대 획기적인 여경활약상과 90년대의 112여자기동수사대 등 전문화되고 영역이 확대되는 역할을 보여주면서 여경의 오늘, 그리고 새천년을 준비하는 21세기 여경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 6장 「21세기를 향하여」에서는 외국의 여자경찰제도, 우리나라 여경의 발전 방향에 대해 기술하면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4. 1946.06.13 조간 2 최초의 여자 철도경찰oartPDF(2).pdf ------------------------------------------------------------------------------------ 1996년 7월 1일/여경창설 50주년 우리나라 여경은 지난 46년 7월1일 당시 경무부장인 조병옥(조병옥) 박사가 여성피의자의 신체수색 등 여성 권익보호와 청소년 업무에 여자 경찰이 필요하다고 판단、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를 둔 것이 효시. 보름 뒤인 7월16일 간부 15명、 여경 1기생 64명이 배치되고 초대 여경과장에고봉경총경이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여경시대」를 열었다.
여경은 그동안 급격히 늘어 96년 6월 현재 서울 5백84명、 지방 7백40명 등 모두 1천3백24명에 이르고 있다. 93년부터는 경찰대학 출신 여경간부(졸업당시 경위)도 한 해에 3∼5명씩 배출돼 치안행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담당 영역도 처음에는 여성 피의자의 신체수색 등 소극적인 분야에 그쳤으나 지금은 교통(1백69명)、 경무(1백26명)、 형사(1백3명)、 방범(66명)、 보안(61명) 등 모든 분야에 고르게 배치돼 남자 못지 않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지난 91년 9월에는 서울경찰청 강력계에 여경들로만 구성된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돼 여성범죄를 전담하고 있다.
경찰청은 7월1일 오전 서울경찰청 2층 대강당에서 경찰간부와 여경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경창설 50주년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서 서울경찰청 민원실 정명숙(정명숙.29) 순경과 서울 청량리경찰서 교통과 조용희(조용희.28) 순경 등 2명이 1계급 특진하는 한편 여경 51명이 표창을 받는다. [발행일 : 1996-07-01 [사회] 기자/기고자 : 이동한] ------------------------------------------------------------------------------------
'경찰의 꽃’ 은 과거, 경찰의 ‘별’까지 따냈다
‘다모’에서 경무관까지 대한민국 여경 58년사 --------------------
지난해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다모>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비밀 여자경찰이었다고 하니 우리나라 여성 경찰의 역사를 500년쯤 헤아린다면 너무 과장일까.
‘순사’ 이미지 벗고 전국 4곳에 여자경찰서 세우다 =해방 후 미군정시절이던 1946년 5월15일, 여자 경찰관을 모집한다는 첫 공고문이 나간다. 그 결과 79명의 여성이 조선국립경찰학교에 입교해 2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한국 여자경찰의 주역이 된다.
이들 가운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맥결(작고) 선생과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훗날 초대 서울여성경찰서장을 역임했던양한나(작고) 선생도 있었다.
양한나(梁漢拿)1893(고종 30)∼1976.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 부산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상경하여 진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비조달의 어려움으로 부산으로 돌아가 1911년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제1회졸업생이 되었다. 마산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7년간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이때 항일맹휴를 주도하고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신학교(橫濱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쑤저우여자사범대학(蘇州女子師範大學)에 학적을 두면서 상해임시정부 경상도대의원을 지냈다. 1922년 임시정부 특사로 밀입국하던 중 잡혔으나 곧 석방되어, 이듬해 다시 상해로 건너가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귀국하여 192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유치과를 마치고 중국에 드나들며 민족운동에 계속 관여하는 한편, 사회사업에 뜻을 두고 1935년 오스트레일리아에 다녀왔으며, 1936년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총무일을 보다가 부산 YWCA를 창설하였다. 부산시 초량동에서 3·1유치원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통영·진영(進永) 등지에서 유치원을 경영하였다. 이처럼 사회복지사업 일선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하고, 부산애국부인회장으로 여성운동과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1948년 고아원으로 자매여숙을 차렸고, 전국의 정신병원을 순례하며 정신병자수용소를 차려 병을 치료하게 하는 한편 기독교 복음을 실천적으로 전파하였다. 45세에 김우영(金雨英)과 만혼을 하였으나 7년 만에 사별하였고, 4개 국어를 구사하였다. 1964년 장한어머니상, 1967년 용신봉사상을 받았다. ------------------------------------------------------------------------------------ <잠시...> 과거사 진상규명 및 친일파 재 조명 등으로 고봉경, 고황경 자매의 이름이 종종 거론된다. 불행한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의 신여성으로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였겠지만 가신분들 뒤에 남은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고, 또 다른 아픔이 남아있다. 고봉경선생은 부친 고명우박사와 함께 6.25 전쟁중에 납북되었다고 한다.[ by badoc]
고봉경/ 경운회(경기여고 동문회) 초대회장(1946~1948)
고황경/경운회 6대회장(1956~1958)/ 서울여대설립자
고황경 (1909~2001)
1909년 1월 27일 서울에서 4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1남 3녀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1924년 16세에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시에 있는 동지사여자전문학교와 동지사대학 법학부에서 7년간 공부를 하고 난 후 어렸을 때의 계획대로 23세에 미국으로 가서 미시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1935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법학·경제·사회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음해인 28세에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미시간 대학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7년부터는 언니 고봉경(高鳳京)과 같이 <경성자매원>을 개설하였다. 이곳에서는 소년심판소의 소년범 교도사업과 문맹소녀들에게 무료 교육을 실시하고 소녀클럽과 어머니클럽을 조직하여 의식교육을 시켰으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양육했다. 1946년말부터 47년 상반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그 지역 행정책임자 및 여성지도자들 앞에서 여성운동의 가장 시급한 문제로 과도기의 국가건설에 남녀가 균등한 실력을 발휘하여 국가건설에 이바지하는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부녀운동의 구심적인 기구로서 시도에 부녀계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50년부터 6년간은 영국에서 유엔총회 주최로 열린 한국·아시아의 국제문제에 대한 800여회의 강연회에서 유엔군의 한국전 파견 요청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한국의 전통문화인 인쇄술, 고유의 문자와 언어, 천문대·족보 등에 대해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등 영국 국민들에게 한국을 새롭게 인식시켰다. 1957년 우리나라에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귀국 다음날 강주심 등 여의사를 방문하여 가족계획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여의사들의 열렬한 찬성과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가족계획사업을 계몽하고 실천하는 전담 단체 구성의 필요성을 느껴 57년 가을 여성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6개월 동안 단체 창립의 준비를 하여 1958년 3월 17일 대한어머니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 단체의 목적은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질을 향상하고 공익사업을 펴서 복지사회건설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61년에는 여성교육의 전당인 서울여자대학을 설립, 학장에 취임한 후, 양적인 교육보다는 질적인 교육에 중심을 둔 여성교육을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참된 인간교육을 실시하여 지식편중에서 벗어난 참교육을 실천하였다. 1984년도에 고황경은 24년간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서울여자대학 학장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명예총장으로 추대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기행>,,<구라파 기행>,<한국 농촌가족의 연구>,<오늘의 기도>, <여성과 사회>, <지도자 수첩>, <뜻있는 삶>, <뜻 있는 삶>, <고황경박사 설훈집>등이 있다.
특히 영어가 유창했던 고봉경(납북 후 생사 미확인) 선생은 경무국 공안국 여자경찰과장으로 부임, 여자 경찰관 총수로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그의 계급은 감찰관(지금의 경정급)이었는데 당시 서울시내 서장들 중에 경감이 수두룩한 때라 감찰관 계급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여자 경찰관의 제복은 짚은 자주색으로 무릎 밑 20cm까지 덮는 치마와 점퍼식 상의. 이들이 법원 재판을 견학하던 날, 말로만 듣던 여자 경찰을 처음 본 시민들이 삽시간에 인산인해를 이뤄 교통 경찰관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군정은 서울·인천·대구·부산 등 4곳에 여자경찰서를 신설한다. 여자경찰서는 말 그대로 여자 경찰관들로만 구성된 경찰서. 서울여자경찰서의 경우 인원이 80명 안팎이었는데 서장과 직원은 물론 서장 전용 지프차 운전요원까지 모두 여순경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맡은 업무는 여성·노인·소년 보호, 교통정리 단속, 윤락(당시 표현)여성 선도, 미용업소 허가 등이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여경은 쇠퇴일로에 들어선다. 여자 경찰관 폐지론까지 대두돼, 이후 7년간 여경 모집도 못했던 여경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대학 졸업한 학사 여경을 시작으로 재도약=암울한 60년대를 깨뜨린 것이 바로 이옥자 전 경정이 큰 몫을 한 67년 학사 여경제도 도입이었다. 교육심리학·가정학·사회학을 전공한 학사 여자 경찰관 38명을 소년경찰전문요원으로 모집한 것. 이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내용을 보면 얼마나 화제였는지 짐작이 간다.
“…모두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온 이들은 순경을 지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취직 못하고 시집 못간 분풀이’라고 헐뜯었을 땐 밤새워 고민도 했다고. … 4주간 교육과정을 마치고 치안국 소년계에 배속돼 청소년 선도·미아보호를 전담하게 될 이들의 부드러운 마음과 손길이 사회를 어루만질 때 자라나는 새싹들은 얼마나 즐거운 바탕에서 내일을 그릴 것인가.”
현 서울 여경회 이주자 회장은 “부평경찰전문학교에서 훈련 받을 때, 중대장이었던 이정자는 가정영양학사 실력을 발휘해 우리들이 먹는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해서는 구자춘 교장에게 달려갔다. 그 다음날부터 우리에게는 특식으로 쌀밥에 돼지고기국이 나왔음은 물론이다”며 애교가 넘치는 일화를 전한다.
경찰의 ‘왕별’ 경무관 첫 탄생=학사 여경에 이어 72년부터는 여성 순경공채가 시작됐고, 경찰대학은 89년부터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그 후 매년 정원의 10%(12명)가 간부로 배출돼 경찰 내에서도 여성 파워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
1991년 9월엔 전국 8개 지방경찰청에 ‘여자형사기동대’가 설치되고, 1998년엔 남성들의 독점물이었던 경찰서장에 총경급 여자 경찰관이 임명된다. 미아리 텍사스 정화 작업에 나섰던 김강자 전 총경이 그 주인공. 이금형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 홍태옥 태백경찰서장이 뒤를 잇고 있으며 김인옥 전 방배경찰서장은 여성으로는 처음 ‘경찰의 별’ 경무관 계급장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