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거래 : 성욕과 권력의 역사 (2)
성교육전문가·심리학박사
2013년 11월 05일(화) 00:00
역사학자이면서 민속학자인 이능화는 우리 문화권의 풍속에 관한 서적인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化史)’를 1927년에 내놓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으로 취급받은 유녀들의 자료를 모았는데, 여기에서 ‘해어화’란 ‘말을 이해할 줄 아는 꽃’이란 뜻으로 기생을 지칭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 ‘갈보(蝎甫) 종류 총괄’에서는 조선시대에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기생을 망라하고 있다. 갈보의 갈은 중국말에서 온 것으로 밤에 나와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를 뜻하는 것으로, 지배층의 성적 위안부였던 기생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을 등급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최상급인 일패는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선발되어 가무를 배워 관청의 연회와 사회 교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생(妓生)이었다. 중간급의 이패는 기생 출신으로 가무를 하며 은근히 몸을 파는 은근자(慇懃者)인데, 이들을 속되게 은근짜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하급의 삼패는 잡가를 하면서 몸을 파는 탑앙모리(搭仰謀利), 사찰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각지로 돌아다니며 묘기와 몸을 파는 여사당패(女社堂牌),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色酒家)였는데 작부(酌婦)라고도 하였다.
본래 기생은 관기와 민기, 약방기생과 상방기생 등을 통칭하는 말로 성매매를 본업으로 하기보다는 궁중의 약 제조나 가무를 맡아 보았는데, 후에 사대부나 무인들을 상대하는 위안부로 역할이 바뀌게 된다. 성 풍속이 문란해지자, 태종은 기생 제도를 폐지하라는 왕명을 내렸지만 문신이었던 하륜이 “창기를 없앤다면 관리들이 여염집 담을 넘게 되어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며 반대해 시행되지 못했다.
세종 때에도 기생 제도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문신이었던 허조가 “주, 읍의 창기는 모두 조정이나 왕실의 물건이니 취(取)해도 무방한데 만약 이것을 엄하게 금지하면 관리들이 옳지 못하게 사가의 여인을 탈취하여, 지혜와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이 죄에 빠지는 일이 많을 것”이라며 반대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아테네에 솔론이 최초의 공창제도인 축첩제도를 마련하자 아테네 시민들이 그 타당성에 찬사를 보낸 것과 15세기 조선의 관료들이 기생 제도의 당위성으로 내세운 논리가 너무나 닮아있지 않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차별이 심한 사회에서는 남성의 성욕을 정당화하고 여성을 성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에도 기생 제도는 존속하였으나 국가에서 공인한 공창제도는 없었다. 한국의 성매매가 제도화된 것은 17세기 이래 공창제도를 택해온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에 수립한 무가(武家) 정권 때 요시와라(吉原) 지역에 유곽을 설치한 것이 공창제도의 효시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성매매 여성을 거대한 새장에 가둬두고 무사들에게 공인된 성적 놀이터를 제공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의 성매매 제도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작해서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에는 일본인 거류지에 차례로 유곽이 개설되어 성적 향락의 문화가 일반 대중의 삶까지 파고들게 된다. 특히 1909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생계를 위해 지방 기생들이 서울로 상경해 요정이라는 고급 요릿집에서 성을 팔기에 이른다. 과거에는 양반만 상대할 수 있었던 기생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선택할 수 있게 되자 그간의 신분제를 뛰어넘는 한풀이 수단으로 기생 수요가 폭증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16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공창제도를 한국에 도입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성 의식이 만연하게 되었는데, “전답 좋은 것은 철로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는 속요가 떠돌 정도로 성매매 여성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 당시 미국 ‘시카고트리뷴’이 “일본이 한국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인종차별적인 윤락가를 만든 것으로 일본인들이 한국에 사회악을 전달했다.”라고 보도한 것처럼, 일본의 한국 지배 정책의 일환인 성매매 육성 산업은 그 목적을 초과 달성하게 되었다.
성매매가 기승을 부리고 여성이 기계처럼 상품화되자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공창 폐지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해방 이후 여성 단체에서 미군정에 공창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운동을 펼치게 되자, 미군정은 1946년에 ‘부녀자의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를 공포하며 1948년에 이르러 공창제 폐지를 시행하는 법령을 공고한다. 그러나 공창만 폐지됐을 뿐 성매매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성매매를 바라보는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성매매 정책의 부재로 인해서 오히려 미군을 상대로 한 사창 소굴만 더욱 번성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여성은 국가 및 개인의 성적 학대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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