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女流詩人 盧天命氏의 人間과 生活- 그는 왜 獨身生活을 하였던가? -]
여류시인 노천명(盧天命) 여사는 젊은 46세를 일기로 지난(1957년) 6월 16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타계(他界)의 몸이 되었다.
그가 문학에 충실했고 그의 공사(公私) 생활이 순결(純潔)! 그것으로 일관해왔다는 것은 그가 생존했을 때나 세상 떠난 오늘이나 변함 없는 정평(定評)으로 되어있다.
다만 어찌하여 그가 46세에 이르기까지 즉 세상을 떠나기까지 독신생활을 그 무엇으로서 자위(自慰)했을까? 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하나의 수수께기로 되어있다.
한편 이와 같은 수수께끼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억측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노천명 여사 자신의 개성(個性)이 자기의 사생활, 자기의 주변에는 그 언제나 ‘비밀’이라는 장막(帳幕)을 내려 가리고 있었으며 진담이든 농담이든 그 누가 사생활을 건드리기만 하면,
『사람두 왜 저렇게 싱거울까....남의 걱정이나 남의 일에 참견을 말고 자기 앞일이나 똑똑히 처리해요.』
이렇게 톡 쏘아붙이고 보면 그의 사생활이나 그의 주변에 대한 가지가지의 일들은 문자 그대로 어디까지나 억측에 불과하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러나 비밀의 장막을 뚫고 차근차근히 그의 지난날을 더듬어보면 문학소녀로서의 순진한 정서(情緖)도 있었고 청실 홍실이 얽히고 설키듯 눈물과 슬픔으로 표현되는 연정(戀情)도 있었고 고독을 시(詩)로 노래하는 가냘픈 그날그날도 있었다. 이제 고인의 그와 같은 지난날을 이곳에 옮겨보기로 한다.
= 서울로 옮겨온 시골뜨기 =
그의 고향은 산천 좋고 사람 좋다는 황해도이다. 그는 일곱 살 되던 해, 부모님의 뒤를 따라 서울로 이사해왔으며 문학하는 것을 천직(天職)으로 타고난 어린 노천명은 그때의 이 모습 저 모습들을 다음과 같이 글에 옮겼다.
「음력 이월 초순께나 되었든지 춥기는 해도 겨울은 아니고 그렇다고 봄도 채되지 않은 때였다.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여기 애들(서울 애들) 모양 다홍 제비부리 댕기도 못 드리고 검정 토막댕기를 드린 나를 보고 동네 이이들은 “시골뜨기 서울뜨기, 말라빠진 꼴뚜기” 하며 우루루 달아나곤 하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나는 그 애들의 외우는 말이 재미가 있어 웃으며 그 애들이 몰려가는데 따라가면 줄달음질들을 쳐서 골목 안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런 때마다 나는 시골 우리 동네가 그립고 박우물께 이쁜이며 새장거리 섭섭이, 필녀, 창호 이런 내 동무들이 한없이 보고 싶었다.
학교에도 아직 못 들고 어머니는 날마다 집주름을 데리고 집만 톱으려 다니시면 나는 그동안 이모 아주머니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이모 아주머니란 분은 재미있었다. 달래 그런 것이 아니라 환갑이 다된 분이 머리는 하나도 세지를 않고 그 대신 정수리가 무르 파처럼 덴 분이 함박 꽃 빛 자주 마고자를 입고 계신 것이 우습고, 또 한 가지는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온종일 잔소리로 일을 보시는 것이다.
할아범과 할멈을 번갈아 부르셔 선 무슨 분부인지 그처럼 많다. 그런데 한번은 밖에 손님이 오셔서
『이리 오너라 』
했다. 아주머니는 미닫이도 좀 안 열어보고 창경(窓鏡)으로 겨우 내다보시며,
『거기 아무도 없느냐?』
하시더니 아무 대답도 없는데
『누구신가 여쭤봐라.』
하고 분부를 하신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밖의 손님이 이 말을 듣더니,
『양지골 김 주사가 왔다구 여쭤라. 』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또 아주머니는,
『영감마님 출입하고 아니 계시다고 여쭤라.』
하신다. 할멈도 할아범도 사이에는 없는데 서로 ‘해라’를 하고 또 문도 안 열어보며 영등 박같이 또랑또랑하게 말로만 해내는 것이 나는 말할 수 없이 우스웠다.
서울은 정말 별난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별난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우리 게와 달라 무슨 장사들이
『비웃 드렁 사료- 움파 드렁 사료.』
드렁드렁하며 외치고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달음박질 뛰어나가 문밖에 가 서서 구경을 했다.(中略)
하루 아침엔 이 큰 대문 집에서 나만한 처녀아이가 나오더니 내게다 말을 부쳤다. 말씨가 예뻐서 나는 그 애가 말하는 것을 무슨 고운 것이나 보듯이 신기해서 자꾸 쳐다봤다. 그 애는 자기 집에선 성적분을 만든다는 것이며 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있다는 것이며 망령 난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 등을 말해주며 내 손을 붙들고 저의 집엘 데리고 들어갔다.
나더러 널을 같이 뛰자고 하는데 나는 뛸 줄도 모르고 또 무섭다고 질색을 했더니 줄을 잡혀주며 나더러 줄을 잡고 뛰라고 했다. 내가 줄을 잡고 널을 뛰어봤더니 그 애는 나더러 사내 널을 뛴다고 하며 널뛰는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 후부터 인순이는 아침만 치르면 우리 집에 와서
『얘애야, 나와 노올자.』
하고 나를 불러주었다. 인순이와 내가 차츰 정이 들려고 하는데 우리는 집을 구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서울 길을 모르는 나는 인순이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이 되어버렸다. 그 뒤에 학교엘 들어갔을 제 나는 인순이를 찾으려고 은근히 살폈으나 찾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인순이는 집이 완고해서 학교엘 넣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인순이는 내가 서울 와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지금도 내가 서울엘 처음 왔을 제 일을 생각할라치면 의례히 인순이가 생각나고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인순이는 언제나 처음 만날 때 그가 입었던 꽃 분홍 삼팔 치마에 연두 저고리를 입고 파란 짚신을 신었다. 나는 그때 인순이 이름을 알았지만 인순이는 내 이름도 채 모르고 헤어졌다. 다만 시골 애라고 알았을 따름이었다. 」
이것이 시골뜨기 어린이 노천명양이 서울에 이사해온 후의 첫 인상기(印象記)이었다.
= 즐거운 靑春 =
그는 여학교를 마치고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당시의 이화여전은 가장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인물들의 전성시대였다. 노천명 여사와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시인 모윤숙(毛允淑) 여사를 비롯한 김수임(金壽任)도 당시의 동창이었다.
교수진도 훌륭하다. 시인 변영로(卞榮魯)씨를 비롯하여 지금 북에 납치된 정지용(鄭芝溶)씨 등등....이곳에서 그는 문학소녀로서의 소질을 충분히 연마하였다. 그리하여 학교를 졸업하자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월간잡지 「여성(女性)」기자로 취직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문학소녀로서의 생활과 꿈 많은 청춘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그 날 그 날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 못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 당시 이화여전을 졸업한 모윤숙, 김수임, 박길래(朴吉來) 등 여러 재사(才士)들은 깨끗이 마련된 성모관(聖母舘) 기숙사에 들어있었으며 노천명씨는 안국동 언니 집에 조카를 데리고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늘 성모관 기숙사를 찾아와서는 모윤숙, 김수임 여러 벗들과 그때 그때를 즐기면서, 때로는 문학을 논하고 때로는 연애를 논하는 등 여성으로서 보기 드문 기혼을 토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생활은 그가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매일신보 문화부로 그 자리를 옮겼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기자 때마침 이화여전 출신으로서 그의 후배인 여류작가 조경희(趙敬姬) 여사도 단발머리 기자로서 그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 小說 「離婚」의 主人公 =
이와 같이 하루 이틀 아니 한 해 두 해 지내오는 동안에 어느 듯 그에게도 연정(戀情)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 첫 대상자가 당시 보성 전문(普成專門- 現 高大의 前身) 교수이었던 김광진(金珖鎭)이었다. 지금은 그가 길을 달리하여 소위 북한 김일성 대학 경제학 교수로 낙착되었지만 그때는 젊은 교수로서 그 인기가 당당했었다.
김광진과 노천명씨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영도사(永導寺)에서이었다. 그곳에는 공산주의자로 이강국(李康國)과 국제 여간첩(國際 女間諜)으로서 세간을 소란케 한 바 있는 김수임 그리고 김광진 등이 모여있었다. 이곳에서 노천명씨가 소개받은 사람이 바로 김광진이었다. 두 사람은 첫 인사에서 서로가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주 만날 기회도 있었거니와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서는 그들의 젊은 꿈을 주고받고 했다. 이미 세상사람들도 그들이 머지 않아 결혼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앞날을 무한히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세상 사람들의 무한한 축복에도 불구하고 원만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원만하지 못한 것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도
『웬일일까? 』
하고 의심할 만큼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만큼 그때까지의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결정적인 단계에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원인은 간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부 사람들의 억측이 없지도 않았지만 첫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미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그처럼 사랑해오던 사이에 그처럼 본처가 문제될까? 』
하고 한 두 번 머리를 갸웃둥 해보기도 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두 사람의 연정은 그 어떠한 장해물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두터웠으며 그런 까닭에 주위 사람들도
『그처럼 사랑해오던 사이에 그처럼 본처가 문제될까? 』
이렇게 되풀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장(洋裝)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올 만큼 고전미(古典美)를 사랑하고 딱딱한 봉건적(封建的) 가정미풍(家庭美風)에 젖어있는 노천명씨가 그 연정이 제아무리 깊었다고 한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한 사람(본처)을 희생할 생각은 바늘 끝만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골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지금까지 자기의 온갖 마음을 자극해왔던 분풀이로서 얼마 전까지 다정다감하게 사랑하던 김광진을 찾아가서는 마음껏 욕하고 마음껏 울었다. 이것이 세상에 나아서 처음 만난 애인과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하도 유명했었기 때문에 유진오(兪鎭午)씨가 「이혼(離婚)」이란 제목으로서 소설화한 바도 있었다.
= 또 하나의 슬픈 사랑 =
다정다감한 문학소녀의 첫 연애는 그와 같이 실연(失戀)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는 이와 같은 쓸쓸한 마음의 상처를 ‘바이론’의 시로서 자위(自慰)하기 결코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아름답고 숭고한 연정을 품어보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으나 또다시 실연이라는 슬픈 상처를 간직하기가 싫어서 스스로 애정의 세계를 멀리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코 사람이란 본인의 노력이나 결심으로서 이러고 저러고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신 사실로서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번 째 대하게 되는 대상자는 이성실(李誠實)이라는 지성인이었다.
노천명씨가 이성실씨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어느 파티에서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인사를 교환하고 유쾌한 하룻밤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기게 되었다. 헌데 이것도 연분이라 파티가 끝나고 모두들 헤어질 무렵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천명씨는 마침 이성실씨와 함께 우산을 받게 되어 거리에 나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길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했다. 이성실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정서적(情緖的)인 노천명씨의 마음 구석구석을 흡족하게 자극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해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사람이 살아간다는! 사람이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듯 애정문제를 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점점 깊어갔으나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도 역시 이성실 씨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노천명씨는 전번과 같이 일단 이성실 씨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다시 만나지 않을 결심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당시 노천명씨는 안국동 집을 언니에게 내주고 누하동(樓下洞)에 집을 사기 직전 잠시 옥인동(玉仁洞) 김수임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때 이성실 씨는 밤이면 밤마다 노천명씨를 찾아와서는 눈물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노천명씨의 사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노천명씨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이성실 씨도 하는 수 없이 한동안 술에 타락한 바 있었다.
= 山念佛 외우며 戀人을 思慕 =
그는 후일담으로 사람들에게,
『노천명이라는 여자는 처음 대하기 힘이 들지 한번 마음만 맞으면 그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도 세상엔 드물 것이다....그만한 아내를 물색하기란 이 좁은 땅에서 손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었다.
사실 노천명씨의 성격은 그 주위사람들을 비롯하여 문단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몹시 까다롭다. 그러나 한번 친해지기만 하면 자기의 살이라도 베어줄 만큼 정이 두텁다. 이성실 씨와의 이별도 첫 연애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슬펐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그는 사랑이니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을 일체 단념할 결심을 했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지난 날 연인들의 모습이 떠날 사이 없이 간직되어 있었다.
이성실 씨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는 6. 25 때 북한 괴뢰에 납치되었는데 노천명씨는 이 소식을 듣자 다음과 같은 한 구절 시를 읊었다. 그 제목은 ‘산염불’인데 이것은 애인 이성실의 고향인 황해도 고유(固有)의 노래를 우선 제목으로 딴 것이다.
『山念佛』
「 산 염불 소리 겪기어 넘어가면
커단히 떠오르는 얼굴 있어
우정 산 염불 틀어놓고는
우는 밤이 있어라.
비인 주머니하고 풀 없이 다니던 일
쩌릿하니 가슴에다 못을 친다.
지금쯤 어늬
쥐도 새끼를 안 친다는 그 땅 광에서
남쪽 하늘 그리며
큰 눈 꺼벅이고 있는지
겁먹은 눈을 뜬 채 또 쓸어져버렸는지-. 」
이 얼마나 애상(愛傷)에 젖은 구절 구절인가!
= 獄中에서 읊은 詩 가지가지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번의 실연 끝에 결혼을 단념한 그에게 지금 이곳에 그 이름 석자를 밝힐 수는 없지만 여러 사람들의 프로포즈가 있엇으나 그는 깨끗이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시 결혼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 ‘부군(夫君)이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6. 25 동란이후였다.
그는 공산치하에서 무한한 고난을 겪었으며 정부가 환도하자 다시 부역자 혐의를 받고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고심했으며 그 무엇을 모색했던가? 하는 것은 긴 설명을 가하기보다도 그의 시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우리라.
『 거지가 부러워 』
「온 방안 사람이 거지를 부럽단다.
나두 거지가 부러워졌다.
빌어먹으면 어떠냐.
자유, 자유만 있다면.
저 햇볕 아래 깡통을 들고도
저들은 자유로울 것이 아니냐.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첫째로 자유,
둘째로 자유,
셋째도 자유라 하겠다.」
『面會』
「 ‘노천명이 면회’
철꺼덕 감방 문이 열린다.
이렇게 반가운 말은 다시없다.
허둥지둥 간수의 뒤를 따르니,
머리에 떠오르는 친한 얼굴들.
번번이 나타나는 이는 오직
눈물 어린 언니의 얼굴.
반갑고 미안한 생각.,
언니 앞에 머리를 숙이다.
날마다 라도 오고싶은 형무소라 한다.
애기 보다 먹이고 싶어 내놓는 음식.
눈물에 어려 떡도 ‘나마가시’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만 헤어지라는 간수의 말에
두고 가는 이나 떨어지는 가슴
바루 곧 핏줄이 땡긴다. 」
『 별은 窓에 』
「잘 드는 비수로 가슴 속 샅샅이 헤쳐보아도
내 마음 조국을 잊어본 일 정녕 없거늘
어인 일로 나 이제 기막힌 패를 달고 여기까지 흘러왔느냐.
단잠을 앗아간 지리한 밤들이
긴 짐승모양 징그럽게 감겨들고
밝기를 기다리는 괴로운 시시각각.
한숨과 더불어 몸 뒤척이면
철창은 바람에 울고
밤이슬 소리 없이
유리창에 눈물짓는 새벽.
별은 창마다. 」
(이상은 옥중에서 읊은 것이다.)
= 生命의 文學 =
이와 같은 시에 엿보이듯 그는 세상에 나아서 처음으로 기가 막힌 고생을 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영어(囹圄) 생활에서 한층 고독을 느꼈고 그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하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난지 부산에서는 법조계의 모 인사로부터 혼담이 있었고 서울로 환도해서도 모 권위 있는 지위에 있는 신사로부터도 혼담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혼담이 있자 그는 노파심에서,
『글세, 순조로우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 있기 보담도 더 속이 썩을 거야....』
이렇게 주저했고 끝내는 깨끗이 단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고독을 문학으로 자위하려고 했다.
『 6. 25 사변은 실로 내게서 여러 가지를 앗아가 버렸다. 수십 년을 닦아놓은 여러 가지들을-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 내 청춘까지를 앗아가 버렸음에랴- 그러면서도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문학 그것이다. 내게 남아있는 오직 하나의 행(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그의 독백(獨白)으로 미루어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문학에 애착을 가졌으며 그가 그의 일생을 문학과 더불어 일관하려 했던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제 면에 있어서 문학이 그의 인간적인 고독을 완전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 밤새 전선줄이 잉잉대고 울면 감방 안에서 나도 운다.....』
는 그의 고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 두터운 母女의 情 =
그래서 그는 당시 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었지만 부모들이 양육할 수 없다는 어린 계집아이를 양녀로 데려왔었다. 옷도 깨끗이 해 입히고 학교에도 입학시키고 그리하여 몇 달 후에는 모자(母子)의 정이 두터워졌다.
밖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면 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그 어린이뿐이었다,. 그러니 그 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도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헌데 이 어린이에게서 나쁜 버릇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즉 노천명씨가 방송국에 출근하면 학교에서 돌아온 그 어린애는 몰래 쌀을 내어 지나가는 엿 장사의 엿가락과 바꾸어먹는 고약한 일이 얼마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 두 번 묵인도 해주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역시 변함이 없었다. 이때 그는 격분할 대로 격분하여,
『내 자식이라면 때리기라도 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남이 보면 잘 먹이지나 않아서 그런 줄 알 것 아냐? 더구나 커서까지 이런 버릇이 있으면 노천명이가 불쌍한 애를 기른 것이 아니라 도둑놈을 길렀다고 비난받을 것 아냐?』
이와 같이 말하면서 그를 그의 친척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틀만에 그는
『그 애가 없이는 죽을 것만 같다.』
고 마구 눈물을 흘리면서 도로 찾아왔다.
노천명씨의 이와 같은 체면을 돌보지 않는 눈물에 감동하였음인지 그 어린애는 그 후 착한 아이로서 노천명씨가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그 옆에서 기거를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에서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생활의 주인공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착한 人情과 까다로움 =
한편 그가 천만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은 영양부족으로 인한 빈혈(貧血)에 있었다. 그는 평소에 큰 수입도 없었거니와 입는 것 먹는 것을 남달리 아끼는 성품이었다. 그 이유를,
『지금 있는 대로 먹어버리면 늙어서는 어떡하지?...』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입가에 쓸쓸한 웃음을 그리기도 했다. 의지할 곳 없는 그는 그의 만년(晩年)을 생각해서 육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계란 한 알까지도 아끼고 또 아껴왔었다.
이와 같이 자기가 먹는 것은 기가 막힐 정도로 아끼면서도 친한 사람을 대하거나 친한 사람이 찾아오면 흡족히 대접을 하고 상대방이 잘 먹지를 않으면 몹시 노여움을 탄다.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서 늘 위스키 한 병과 과실을 준비하고 있었다. 길가에서 친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침 잘 만났어요. 점심이라도 같이 합시다. 』
하고 어느 식당엘 들어간다. 그러나 상대방이 모르게 한 사람 분의 식사만을 그것도 고급을 청해놓고는,
『난 지금 막 먹었어요. 어서 혼자 드세요.』
하면서 자기는 끝까지 구경만 한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 상대방과 헤어진 다음이면 홀로 값싼 식당엘 들어가거나 집에 가서 점심을 땐다.
이와 같이 자기가 먹는 것은 아끼고 친한 사람에게 극진한 한 편, 마음에 들지 않거나 보기가 싫다는 사람이면 아예 말조차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이미 세상 떠난 고인의 이야기라 최대한으로 피하지만 그가 병석에 누어있었을 때 그가 과히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위병(胃病) 차 찾아간 바 그는 그 병석에서도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비위를 맞춘다거나 하는 가식(假飾) 없는 성격이엇는데 과연 이것이 요새 세상살이에 좋은 경향이었는지?.....
= 時計와 對照되던 營養不足 =
그와 같이 입고 먹는 것을 아끼던 그에게 일대(?)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 가지고 3년 간 고장 한 번 없던 팔목시계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는 황급히 시곗 방을 쫓아갔다.
『여보세요. 이 시곌 좀 봐주세요.....』
『찬지 얼마나 됐습니까?』
『3년 됐어요.』
『그동안 분해소제(分解掃除)는 한 번도 안 했군요?』
『서지 않고 잘 가니까 안 했지요.』
『서지 않고 잘 간다고 해서 안 해서는 안됩니다. 시계는 어떤 것이든 1년에 한번씩 분해소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세요? 전 몰랐어요. 그럼 분해소제 해주세요.』
이러한 대화 끝의 바로 이 순간 그는 그곳 시곗 방에서 쓸어졌다.
시곗 방 사람들은 부랴부랴 의사를 불러왔는데 의사가 들어서자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정신은 회복되었다.
그는 주사 맞을 것도 거부하고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아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빈혈증(貧血症)으로 판단되었다. 고장난 시계와 좋은 대조이었다. 그러나 그 빈혈증으로 말미암아 청량리 위생병원(衛生病院)에 입원하여 수혈(輸血)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은 젖혀놓고,
『글세 1년에 한번씩 분해소제를 해야한다는 것을 잘 가기만 한다고 3년씩이나 안 했으니 나도 둔하지......』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 자신 영양부족으로서 그 시계 방에서 졸도했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시계를 안타깝게 말하고 있었다.
= 잠 못 이룬 밤 =
그는 위생병원에 입원할 때 노천명이라는 이름을 숨기고 가명을 썼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될 때에 폐를 끼치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남들이 즐기는 봄의 낮과 밤을 병실에서 홀로 보내는 그는 깊은 사색(思索)에 잠겨 밤에 불을 끄는 것을 잊었다.
이때 예쁘게 생긴 어린 간호원(15. 6세)이 들어와서,
『아주머니, 불을 꺼야해요. 이 병원 내에서 밤에 불을 안 끄는 것은 죽은 사람 방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나갔다. 물론 어린 그가 고의적으로 죽은 사람을 인용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노천명씨는,
『저것이 왜 하필 죽은 사람의 방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할까? 』
생각하고는 그 날 밤 한 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이와 같은 조그마한 일도 하나의 일화로 남게 된다.
의사가 수혈할 때 때로는 피가 옆으로 새는 일이 있었다. 이럴 때면 그는 의례히 의사에게,
『선생님, 새지 않게 잘 넣어주세요. 돈이 필요해서 고학생들이 판 귀중한 피이고 나도 그로써 살아야하는 귀중한 피이니까요.』
이와 같이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원생활도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그는 입원비 때문에 치료에 다소 효과를 보자 곧 퇴원해버렸다.
퇴원한 후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재차 입원하려고 택시를 타고 청량리 밖까지 가다가,
『내가 정신이 나갔어. 돈 나올 데도 없으면서 입원이 무슨 입원이야.....』
하고 되돌아왔다.
그 후 그는 몇 일에 한 번씩 위생병원에 나가 수혈만을 했었다.
= 小說을 쓰겠다던 새 出發 =
한편 이것 역시 이곳에 이름 석자를 밝히지는 않지만 그와 같은 딱한 소식을 듣고 정계의 모 요인을 비롯하여 문학인들이 푼푼이 돈을 모아 그의 치료비로서 제공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 떠나기 3일 전까지는 좋은 효과를 보았으며 그는 완쾌하면 이제부터 소설을 쓰되 우선 단편 하나를 쓰겠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있었다.
간간이 바깥 산책도 했으며,
『몇 일 안 있으면 그리운 거리 거리, 그리운 얼굴들을 보겠지.』
하고 입고 나갈 옷도 말쑥이 준비해서 벽에 걸어놓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찾아가면,
『이젠 다 나았어. 글쎄 몇 달만이야?....이번에 보니 몸을 아끼고 주의해야 하겠어. 늘 말로만 외어왔지만 당하고 보니 절실해.....』
이렇게 유쾌한 표정으로서 말하던 그가 3일 후인 16일 새벽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그의 불행은 돈에 최대의 원인이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집을 팔아서라도 병을 고쳐야 해요.』
이렇게 충고하면 그는,
『그까짓 것 팔아봐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것마저 팔면 의지할 곳이 있어야지.』
하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의지할 곳이 없더라도 병을 고쳐야지. 죽으면 집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죽으면....』
이라는 불길한 말은 입 밖에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오늘 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집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큼직한 화환(花環)들도 들어오고 적지 않은 돈도 들어왔다지만 살아있을 때, 병석에 있었을 때, 그와 같은 베품이 있었더라면 그를 죽음에서 구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먼 전 날부터 대를 이어 내려오는 인정이라 어느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인 상 싶다.
= <實話> 1957년 9월호 =
[출처] [ 女流詩人 盧天命氏의 人間과 生活- 그는 왜 獨身生活을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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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시인 : 노천명
○ 약력 : 황해도 장연 태생. 진명학교, 이화여전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을 다닐 때부터 시 발표 시작.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기자를 지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이후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었다. 광복 뒤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25 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었다. 이화 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 발표하였다.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 등 향수어린 시들 발표하였다. 1938년 제 1 시집 《산호림》을 출간하였고, 1945년 향토적 소재를 노래한 <남사당>,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제 2 시집 《창변》을 출간하였다. 제 3 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옥중 시와 출감 후의 심정을 노래한 시들 수록하였다.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 백서》 등이 있다.
○ 여간첩 김수임, 시인 모윤숙과 노천명은 이화여전 출신의 친구이자 라이벌. 셋은 참으로 다른 개성과 인생 역정을 지녔다.
- 모윤숙 : 여걸 타입. 친일에는 걸리나 좌익에는 걸리지 않음. 힘차고 좋은 시를 많이 썼다.
- 노천명 : 고고하고 꼿꼿함. 친일과 좌익 모두에 연루되었다.
- 김수임 : 좌익에 가담, 훗날 사형되었다.
○ 한강 축제 때 이성산성에서 도당굿이 벌어졌을 때, 인간문화재 김수복 무당이 굿을 주관하였다. 굿이 끝나고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시비를 건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신대 할머니들이 몰려와 반대 시위를 하여 그 날은 시비를 못 세웠다. 얼마 후 ‘친일은 친일이고, 시는 시’라는 정신으로 시비를 세우게 되었다. 최인호 작가의 <왕도의 비밀>과 관련, 한양대 김병모 교수의 지도 아래 이성산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발굴이 시작되자 김병모 교수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였다. 전각 아래서 목 부러진 말을 발견, 원상 복구 후 기독교 신자인 김병모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자, 그의 병이 다 나았다. 그 외 기와 조각, 빗, 깨진 그릇, 숟가락 등을 발견하였다.
○ 6․25 전 노천명은 종로구 누상동에 살았다. 고향은 이북 황해도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 년 남짓 사랑에 빠진 유부남(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이 있었다. 그가 이혼을 약속하여 기다렸으나 자꾸 미루어져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는 한 기생과 함께 월북했다.
○ 6․25 때 김수임, 노천명은 비도강파, 모윤숙은 도강(渡江)파. 노천명은 모윤숙을 크게 원망했으나, 실은 노천명의 구명을 위해 모윤숙은 무진 노력하였다. 노천명은 이를 모른 채 1 년 쯤 후 사망하였다. 김수임은 결국 처형되었다.
○ <사슴>, <이름 없는 여인 되어>, <남사당>, <유월의 언덕> 등 낭송, 감상. 시인은 가도 시는 남아서 늘 우리와 이렇게 만난다.
○ 친일 문학에 대하여
- 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등이 김동환부터 이광수, 서정주, 곽종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42 명의 친일 문학인 명단을 공개하고 선배 문인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내용의 ‘문학인 선언’을 발표하였다.
- 이광수가 103 편의 시, 소설, 논설 등으로 가장 많은 친일 문학 작품 수를 기록하였다.
- 친일 여부의 판단 기준은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옹호 여부로 삼았으며, 일본어로 작품 활동, 친일 단체 참여, 창씨 개명 등은 참고만 했다고 한다.
○ 노천명의 묘지
- 고양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노천명은 본명이 노기선으로, 노기남 대주교의 사촌) 언니 노기용 씨와 나란히 묻혀 있다.
- 친일 행적 때문에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해 쉽게 찾을 수도 없다. 처녀 몸으로 혼자 살고 제자도 없으며, 친일의 혐의를 지닌 여류 시인의 비극이다.
- 1 년에 서너 명의 대학생이 찾아와 기릴 뿐.
- 이 안타까움을 피력한 이가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인 정동일.
- 노천명에 관한 자료가 너무 없다.
- 언젠가 윤동주처럼 문학 기행의 테마로 삼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 불꽃처럼 살다 간 시인 노천명
‘한국의 마리 로랑생 노천명, 아리스 메이넬의 시를 연상케 하는 시집 <산호림>.’ 이런 화려한 찬사를 받으며 1930년대 한국 시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여류 시인 노천명. 한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고독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비극적 운명의 여인 노천명. 마흔 여섯의 짧은 생애를, 돌보는 이 없는 쓸쓸한 병실에서 독신으로 마감해야 했던 고독한 여인 노천명.
그녀는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리 281번지에서 아버지 노계일과 어머니 김홍기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지주로서 인천 등지를 왕래하며 무역도 하여 넉넉한 살림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노천명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사망하여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그녀의 문학 세계에 영향을 준 쪽은 어머니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울의 양반 가문 태생으로 서예와 묵화 등을 잘 했으며, 노천명에게 <옥루몽>과 같은 동양 고전을 들려 주었다고 한다.
노천명이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녀는 여섯 살 때 지독한 홍역을 앓았다. 보통의 경우 1주일이면 발진이 시작되어 치유되는데, 그녀는 20일이 지나도록 고열과 혼수 상태만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 끝에 그녀는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고, 이를 하늘이 주신 명이라 생각하여, 아명 기선(基善) 대신 천명이라 이름하여 호적에도 그렇게 실었다.
이후 노천명의 생애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 체부동 이모 댁으로, 다시 창신동으로 옮겼으며 천명은 진명보통학교에 재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 5학년 때 검정고시 합격으로 1년 앞당겨 졸업하고, 진명여고에 입학하여 공부와 체육(달리기 선수였다.) 그리고 시에 재능을 인정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무엇보다 그녀가 문학에 몰두하게 된 데는 가족사적 외로움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녀는 진명여고 졸업반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언니의 도움으로 이화여전에 입학하게 되는데, 실상 그녀는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셈이었다. 그 고독 속에서 그녀는 시 습작에 몰두했으며, 당시 그 학교에 근무했던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 시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스스로의 고독과 그 고독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시 창작, 그리고 은사들로부터의 가르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애송하는 시 ‘사슴’과 같은 아름다운 시 작품들을 쓰게 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이 시는 오랫동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노천명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사슴’을 비롯한 초기작 49편을 수록한 그녀의 첫 시집 <산호림>이 출간되자 당시 우리 문단의 비평계를 대표했던 최재서는 “공소한 감정의 유희와 허영된 언어의 과장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가슴 속엔 늘 알뜰살뜰한 감정의 호수가 고여 있고 그의 언어는 이 비밀을 표시하기에 수다스럽지 않다.”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시집의 출판 기념회에서 ‘한국의 마리 로랑생’으로 추켜세워졌다. 이처럼 여류 시단의 새 별로 등장한 그녀의 ‘사슴’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향기로운 고독’의 시로, 아름다운 과거의 상실과 이상향에의 동경을 노래한 시로, 우리 가슴에 젖어 있다.
이 무렵 그녀는 지독한 사랑의 체험을 갖는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그녀는 연극에 관심을 가져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안톤 체홉의 작품 <앵화원> 공연에서 라프네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로 출연했다. 그녀는 이 공연에 구경 온 보성전문학교 김 모 교수를 만나 비극적 사랑을 하게 된다. 김 교수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다. 그런 현실적 제약을 무시한 채 노천명은 그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이 사실을 안 가족들은 그녀가 결혼할 수 있도록 혼수를 마련하여 약혼을 시켰다. 김 교수 역시 그녀를 사랑하여 본처와 이혼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갔지만 결국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노천명의 불꽃 같은 사랑은 결국 이 언저리에서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맘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라고 노래한 시 ‘장미’라든지, “무릇 여인 중/ 너는 사랑할 줄 안/ 오직 하나의 여인이었다/ 눈 속의 매화 같은 계집이여/ 칼을 쓰고도 너는 붉은 사랑을 뱉어 버리지 않았다”라고 춘향을 찬양한 시 ‘춘향’ 등에서 우리는 그녀의 불꽃 같은 사랑과 얼음 같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격랑의 역사는 그 거친 물결만큼 인간에게 아픔을 안겨 준다. 이 점에서 노천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시인의 길로 들어선 때도 일제강점기였고, 더구나 식민지 수탈 정책이 가속된 그 말기였고, 그런 시대가 지나가자 동족상잔의 비극 6. 25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두 번의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 첫째는 친일시 창작과 조선문인보국회 활동이다. 물론 노천명 혼자만이 아니라 당대의 저명한 문인들이 대거 참여한 활동이었지만, 일제의 침략 전쟁에서 전사한 한 일본인 오장의 죽음을 미화하고 찬양한 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 행위는 분명 역사의식의 결여일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의 실수는 6. 25 전쟁 때 서울 점령 후 문학가 동맹에 가입한 일이다. 9․28 수복 후 그녀는 이 사실 때문에 반역 문화인으로 지목돼 20년 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했다. 다행히 그녀와 가까웠던 문인들의 탄원으로 그녀는 이듬해 봄 출옥하게 되었다. 옥중에서 그녀는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중략)/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라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와 같은 시를 쓰면서, 자신이 공인이기 때문에 더욱 아프게 치러야 했던 역사의 심판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고독의 시인 노천명,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그 고독을 시로 승화시킨 노천명, 비극적 사랑의 슬픔을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라고 술회하던 그녀는 역사의 격랑 이후 1956년 <이화 70년사>를 집필하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마침내 그녀는 이듬해 3월 7일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길에서 쓰러졌다.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하여 500g의 수혈을 했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 괴로워했고, 하루에 두 번씩 빈혈 증세가 나타났다. 더구나 그녀는 불면 증세까지 겹쳐 수면제에 의지하여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써야 했다. 벽에다 원고지를 대고 떨리는 손으로 글을 썼다. 그것으로 병원비를 충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라 퇴원하여 집에서 정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나의 금싸라기 같은 날들이 하루하루 없어집니다/ 이것을 잠가 둘 상아 궤짝도 아무것도/ 내가 알지 못합니다.”라고 ‘추풍에 붙이는 노래’란 시에서 예감했고 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길에서 쓰러진 지 3개월여 만에 그녀는 누하동 자택에서 4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찬란한 시재의 명성과 친일 부역의 슬픈 반점을 안고 그녀는 고독의 일생을 그렇게 마감했다. 천성적으로 대쪽 같은 성격을 타고나 생애가 온통 비애의 연속이었던 노천명, 그래서 평생을 고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슴의 시인은 그렇게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우리 현대 문학사에 밝혀 놓은 시의 별빛은 영원히 우리 곁에서 찬란한 빛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계몽문화, 1997. 9. 10월호. 10~13쪽
- badoc 2016/05/24 07:59 # 수정 삭제
- 김광진
북한의 경제학자. 보성전문학교 상과 및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수.
2. 생애[편집]
1902년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상과대학(現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였다. 백남운의 동경상과대학 후배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31년 9월 이강국 등과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연구실 조수로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의 시간강사를 맡아 오다 1932년 유진오, 오천석과 함께 보전 상과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1939년까지 경제사, 상업학 등을 강의하였다.
재직중 각종 강연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보전학회논집' 등의 학술지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 경제평론이나 조선경제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였다. 좌익 경향이 심한 교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39년 강단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양으로 내려가 고무공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가 결성되자 무임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8월 2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합작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자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는 백남운을 통해 남한 학자들을 입북시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일설에는 이때 김일성의 경제 교사였다는 말도 있다. 무식한 김일성이 무슨 말인지나 알아 들었을까?
1949년 5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1954년 과학원 후보원사, 같은 해 10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강좌장을 맡았다. 1957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 부장교수가 되었다.
이후 1960년 11월 과학원 경제법학연구소 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방송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강좌장, 과학원 상무위원 등을 거쳐 1963년 5월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4년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장이 되었다.
1964년 6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아시아경제세미나에 북한 학자 대표 중 1인으로 파견되었다. 정치활동으로는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직책을 맡았고,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7월, 만 70세 생일에 즈음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6년 사망하여 평양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3. 학문적 업적[편집]
조선 후기와 일제 시기 경제사·운동사 및 정약용의 경제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화폐사, 재정사도 그의 연구분야였다.
맑스주의의 이론을 적용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적 상태를 해명하면서, 한국 경제사에는 노예제 단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1937년에는 '고구려 사회의 생산양식 - 국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1949년에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논문 '삼국시대의 사회구성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 1956년 5∼6월호)는 북한에서의 시기 구분 논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그가 일제시대부터 주장한 ‘노예제 결여론’은 북한 학계의 통설에서 고조선·부여·마한이 노예제 사회로 규정되면서 비판받았다.
1963년 김광순·변낙주와 함께 '조선경제사상사(상)'을 공동 집필하였다. 그 후 1973년에는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이라는 논문을 공동저술하였다.
4. 스캔들[편집]
보성전문 교수 시절, 평양에서 체호프의 ‘앵화원’이라는 연극을 관람하였다가, 거기에 출연하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 노천명에게 반하였다. 노천명은 시인 김기림의 구애도 칼같이 거절하였을 만큼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김광진의 구애에는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평양의 개운사에서 처음 만난 이래 그들의 연애는 불꽃을 튀겼고 김광진은 곧 아내를 정리하고 노천명과 재혼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을 협의하러 경성으로 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노천명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김광진의 동료 교수였던 유진오는 잔인하게도 이 스토리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써버렸다. 이에 격분한 모윤숙, 이선희 등 동료 여성 문인들이 모델을 밝히라며 유진오를 찾아가 삿대질을 하며 싸웠는데, 이러한 소동은 노천명의 수모를 세간에 더욱 더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김광진이 노천명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내와의 의리때문이 아니라, 기생 출신의 1930년대 인기 가수 왕수복때문이라는 데 있었다. 왕수복은 본디 이효석 죽기 직전의 마지막 연인이었는데, 1935년 실시된 인기투표에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을 3위로 밀어내고 톱을 차지했을 만큼 당대의 스타였다. 그녀는 미모의 기생 출신이지만 유학을 떠나 음악을 공부하여 성악가가 됐으며, 평양의 대학 교수로서 종생했던 의지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면모들은 무려 14살이나 연상이었던 김광진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1]
그 후 김광진은 보성전문 교수직을 그만두고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하며 왕수복과 같이 살았다. 남북 분단 이후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고, 왕수복은 공훈배우가 되었으며, 둘은 오래오래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2]
[1] 이걸 보고 노천명은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란 시를 지었다고 한다.
[2] 김광진은 1986년에 죽었고, 왕수복은 나이 여든에 김정일의 호의로 ‘독창회’까지 열고 2003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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