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korailhs

국립철도고등학교 약사

marineset 2025. 4. 27. 09:13

 

 

 

조선총독부 철도국 철도학교 1905

 차경환  2022. 9. 8. 17:58

1. 최초의 철도종사원 양성기관은 임시군용철도감부의 철도이원양성소가 효시

근대식 주화를 찍어내던 인천전환국의 모습 이후 ‘철도이원양성소(鉄道吏員養成所)로 활용되었고, 해방 후 인천여자고등학교로 사용되다가 현재 동인천동사무소

인천 제물포에서 경의선을 건설 중이던 일본의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는 향후 철도인력이 많이 필요해질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의 동전을 주조하던 구 인천 전환국(典圜局) 자리에 1905년 3월 철도이원양성소(鐵道吏員養成所)를 설립, 5월 28일에 개소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운수과와 기차과의 2개 과 40명 생도를 모집하여 양성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 이원양성소 : 吏員養成所(りぃんようせいしょ)’는 관리양성소’를 말합니다.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 정원양성소(正員養成所) 제1회 졸업사진

통감부 철도관리국운수전신수기생양성소 (1907.4~1910.11)

임시군용철도감부의 이원양성소는 1906년 통감부에 의해 한반도 내 철도운영권이 하나로 묶이면서 경인 철도가 통감부로 이관되자 통감부 철도관리국운수전신수기생양성소로 개칭되었고, 교육 기간을 5개월로 개정했으며 통역관인 무라야마 유기치를 소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1907년 11월에는 장소도 인천에서 용산으로 이전하였고, 입소자는 15세부터 25세 미만의 중학교 2년 수업 정도의 국원(局員) 중에서 모집하였습니다. 1908년 4월 철도 야간학교를 설치하고 2년제 보통과에서 영어와 조선어교육, 전수과에서는 부기(簿記) 교육을 시행하였습니다.

철도이원양성소~철도관리국운수전신수기생양성소 시절까지인 1905년 5월부터 1910년 11월까지 5년 7개월 동안 44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2. 철도종사원교습소 (1910.11.21~1915. 5.30)

철도이원양성소는 철도의 영업 거리가 점점 늘어나면서 업무량도 증가함에 따라 종사원 양성기관의 확충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던 중 한일합방이 되고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이 되면서 1910년 11월 21일에 조선총독부 철도종사원교습소로 개칭됩니다. 이에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여 업무,운전, 전신의 3과를 설치합니다. 1912년 12월에는 원래 철도 관리국 본관 청사가 용산 철도 구락부로 이전함에 따라 원래 철도관리국 본관 청사를 개수하여 철도종사원교습소 교사로 사용합니다. 조선총독부 철도종사원교습소 시대인 1910년 12월부터 1915년 3월까지 4년 4개월간에는 258명의 졸업생을 배출합니다.

만철이 설립하여 1919년 4월1일 개교한 경성철도학교

3, 경성철도학교 (1914.4.1~1925.3.30)

조선총독부는 조선-만주간(鮮滿) 교통의 일원화와 아시아 교통의 연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조선철도의 경영권을 1917년 7월 31일부터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 위탁 경영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성부에 경성관리국을 설치하며 조선철도의 운영을 시작하였고 1917년 10월 초대 경성철도 관리국장으로 만철(滿鐵) 본사의 이사인 구보 요조(久保要藏)씨가 취임합니다. 구보요조씨는 철도업무가 날로 팽창되어 종사원 양성제도의 확장이 절실히 요구됨에 따라 교습소를 ‘경성철도학교’로 확대 개편합니다.

1차년도인 1917년의 경성철도국의 총 이익금 135만원 중에서 절반액인 65만원을 조선철도를 위한 종업원양성소 기금으로 투자하기로 하고 철도종사원 양성을 위한 학원을 건설 하기 위하여 교사신축 인가를 받아, 1918년에 부지 8,559.65평에 공사비 65만원으로 본관 건물과 기숙사를 착공, 1919년 3월에 준공합니다.

1919년 4월 1일에 개교하면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철도학교로 개편 발족하고 구보 요조 국장이 교장을 겸임합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5년제 정규실업 학교의 인가를 받아 고등소학교 졸업 자격자에서 중학 1년생을 선발하여 본과과정을 3년제로 운영하였고, 본과, 전신과, 도제과(徒弟科), 강습과와 야학부를 두고, 본과는 업무, 운전, 토목 등 3분야로 나누어 중견 종사원을 양성했고, 전신과는 전기통신사 양성, 도제과는 공장종사원 양성, 강습과는 종사원의 단기 재교육, 야학부는 용인(傭人)급의 보수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오른쪽 4개동의 긴 건물이 기숙사이고 그 왼쪽 2동이 남북식당이며 기숙사 앞의 빈 곳이 소운동장.

그 앞의 높은 건물이 도서관이고 연으은 凹자형 건물이 본교사입니다.

기숙사의 오른쪽에 하얗게 보이는 것이 기숙사 각 동간의 복도아며 이 복도가 본교사까지 이어집니다.

실내화로 기숙사와 교사를 왕래하며 실내생활을 한 것입니다,

보일러실과 굴뚝이 있고, 그 위 오른쪽 공터에는 1940년에 콘크리드 2층건물을 신축하여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 건물로 사용하였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본 교사는 교통부가 사용을 하고 별도로 지은 콘크리트 2층건물이 운수학교 본관이 됩니다

왼쪽과 본 교사앞의 건물은 철도직원의 관사 입니다.

한국철도대학 100년사:1905-2005

* 만철 경성도서관(滿鐵京城圖書館)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도서관

초대 경성철도관리국장인 구보 요조(久保要藏)는 경성철도학교 설립과 함께 도서관 건립도 추진했습니다. 1919년 4월 1일에는 용산에 '경성철도학교'를 세우고, 1920년 7월 21일 철도학교 옆에 66평 규모의 '만철경성도서관'을 개관합니다. 경성에 설립된 첫 도서관입니다. 1925년 4월 1일 만철에 위탁했던 한반도 철도 운영권이 조선총독부로 다시 넘어오게 됨에 따라 '만철경성도서관'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속의 '철도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신용산 지역의 만철경성도서관은 원래 남만주철도경성관리국이 설립, 경영했으나 1925년 4월에 철도경영위탁이 해제된 이후 조선총독부철도국 경영의 철도 도서관으로 개칭 됩니다. 사진에 도서관 안내판 앞에 '무도부도장' 경성철도학교 기숙사 간판과 만철경성도서관 간판이 함께 뒷편에 기숙사 보일러실 굴뚝이 보입니다

경성철도학교 부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63번지에 있었으며 본 교사인 붉은 벽돌 이층교사는 당시로써는 최신식 건물이며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건물이었습니다. 이외에도 1920년 4월에는 강당, 기숙사, 도장, 병기고 등이 포함된 교사를 연차적으로 건립하여 학교의 모든 건물의 준공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7월 21에는 만철경성도서관도 개관합니다.

총 건축면적 2,096평으로 연건평이 3,028평에 달하고 최신식 붉은벽돌 건물에 스팀 난방이 제공되는 기숙사에 전교생을 기숙시켜 조직 생활과 공동생활을 취지로 고액을 투자하여 우수한 종업원을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학생 전원에게 대여장학금 제도를 시행합니다.

그 후 1921년 4월 1일 전문학교 입학자격의 인가를 받는 등 철도종사원 자질 향상에 전력을 다하게 됩니다.

용산철도운동장(グラウンド)에서 바라본 경성철도학교 본관

4. 철도종사원양성소(1925.4,1~1943,11.30)

1925년 4월 조선철도가 滿鐵(만철)의 위탁 경영으로부터 해제되자 조선총독부는 경성 철도학교의 후신으로 1925년 4월에 조선총독부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개설하였습니다. 설치학과는 본과(업무, 운전. 토목과), 공작과, 전산과. 강습과. 야학부 등입니다. 수업연한은 본과 3년 공작과 4년, 전산과 30주. 강습과(역무 등 8종)는 1~4개월이었습니다.

생도와 강습생은 모두 관비 생으로써 기숙사에 수용되고, 본과생은 철도교양조성회로부터 월 12원의 학자 대여를 받았으며 공작과생은 소정의 급료를 받아 철도국원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양성소를 졸업생 사람들은 본과 5년, 공작과 4년, 전산과 3년 동안 철도국에 근무 해야 합니다.

5.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

1934년 당시 전국의 경제적 불황이 닥쳐오면서 당국의 인사 수급 계획상 부득이 한 조치로 1934년 4월부터 본과인 업무,운전과의 학생모집을 중지합니다. 본과생과의 모집은 중단했지만, 학교는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장기간 교육 대신 단기 강습 교육방법에 주력했습니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철도업무가 늘어나자 철도종업원을 일반에서 신규 채용해 충당했으나 직원의 자질이 낮아 업무수행이 원만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940년 12월에 경산. 부산. 함흥의 지방 철도국이 설치되면서 철도종사원이 양성소의 본관 건물은 경성지방 철도국에서 사용하고 본관 북편에 시멘트 콘크리트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본과생이 마지막으로 졸업한 1936년부터 수송량의 증가와 신규철도선로의 건설과 개량 등으로 업무량이 증가하고 또한 다수의 종업원이 만주철도와 북지(北支: 중국의 북부) 철도의 진출 등으로 기술 요원의 공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의 철도 중견 요원양성의 공백으로 업무 운영의 위기를 모면할 길이 없자 1941년 4월에 전면적으로 양성소 규정을 개정하여 교명을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로 개칭합니다. 이후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돌입하면서 철도 당국은 종업원양성에 관한 전시 긴급조치법을 제정해 본과 졸업생의 배출이 없게 됩니다.

6. 중앙교통종사원 양성소(1943.12.1~1946.5.14)

1943년 12월 1일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는 중앙교통종사원양성소로 개칭하고 본과는 3년제이지만 입학자격을 중학교 2년 수료자로 하여 타 중학교 5년제로 동등했지만, 당시는 전시 학제로서 중학교가 5 학년제에서 4학년 제로 단축 변경됨에 따라 본교의 본과도 학제개편을 하여 소학교 졸업자를 입학자격으로 중학교 4년제로 변경합니다.

설치과는 업무, 운전, 토목, 기계, 전기과였으며 1945년 4월1일에 소학교 5년 졸업자를 처음으로 모집하여 교육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철도 당국은 철도 요원양성을 위해 1945년 8월16일부터 휴교상태에 있던 중앙교통종사원양성소를 1945년 10월1일부터 남아있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재개하고 전신과 학생을 신규로 모집해 교육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1946년 9월 1일 운수학교(運輸學校) 1학년으로 편입됩니다. 일제시대 철도학교는 해방 전까지 12,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일제시대 여러 차례 학제개편 및 교명 변경을 거쳤는데, 그 경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5년 05월 대한제국 시대 철도 이원 양성소로 발족

1907년 11월 교사 이전 (제물포에서 용산)

1910년 11월 철도종사원교습소로 개칭

1919년 04월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 조선의 철도를 위탁운영 하면서 경성철도학교로 변경

1925년 04월 다시 조선총독부가 직영하면서 철도종사원양성소로 변경

1941년 04월 지방 철도국이 소재한 부산과 함흥에 철도종사원양성소를 추가 설치하면서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로 변경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 개칭

1943년 12월 조선총독부 직제개정으로 철도국이 교통국으로 변경되면서 중앙교통종사원양성소로 변경

(일제시대 동안 총 1만2,195명 졸업생 배출)

1945년 10월 해방 후 상기 교명으로 개교

1946년 05월 운수학교(運輸學校) 개칭(6년제)

1949년 06월 교통학교 개칭(4년제)

※ 위 학교들은 현재 용산철도고등학교와 한국철도대학의 전신이 됩니다.

역대 학교장

철도이원양성소장 : 마쓰오카 히로시 (1905~1907)

철도관리국운수전신수기생양성소 : 무라야마 유기치 (1907~1910)

철도종사원교습소장 : 미모도 다케시게 (1910~1915)

경성철도학교장 : 구보 요조 (1919~1923)[만철 철도관리국장 겸임] / 아카이 나오키치 (1923~1925)

철도종사원양성소장 : 오카무라 겐스케 (1925~1927) / 요코야마 코우 (1927~1936) / 하기와라 사부로 (1936~1939)[조선총독부 철도국 서무과장 겸임] / 오오지마 토라키치 (1939~1941)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장 : 이노시시다 나오미치 (1941~1945) / 공석 (1945.8.~1946.6)

철도학교 로고

● 경성철도학교 : 모표의 가운데 工자는 철로의 표시이고, 좌우의 사선(斜線) 부분은 Mandetsu(만철) 첫 자의 M입니다.

● 철도종사원양성소 : 가운데 工자는 철로의 단면이고, 工의 좌측은 Choseon(조선)의 첫 자 C자이고 工의 우측의 G는 Government의 처음 자입니다. 펜을 세 방향에 균형 있게 배열하여 면학(勉學)을 상징한 것이다. 굵은 원 테두리와 세 방향의 펜을 제거하면 1925~193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로고가 됩니다..

● 중앙철도총사원양성소와 중앙교통종사원양성소 : C와 G 부분이 모두 H로 바뀐 형태다. 굵은 원 테두리와 세 방향의 펜을 제거하면 1935~194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로고입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로고

국가기록원 소장 한국철도 100년사의 철도학교 사진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소속이 바뀐 1925년 여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그리고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경성에 753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에 한해 내리는 빗물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가 불과 열흘 사이에 쏟아진 것이다. '을축년 대홍수'로 알려진 폭우와 이로 인한 홍수로 경성에서만 404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홍수의 여파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도 모두 끊겼다. 재산상의 피해도 컸는데,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피해액은 1925년 조선총독부 전체 예산의 60%에 달했다.

홍수 피해가 커서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경성부 피해 상황을 '경성부수재도'(京城府水災圖)라는 지도로 따로 제작할 정도였다. 이 지도를 보면 용산역 일대와 용산 철도 기지가 모두 '침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철도도서관도 이때 홍수 피해를 크게 입었다. <시대일보> 1925년 7월 26일 자는 2면 기사에서 철도도서관이 홍수로 침수되어 당분간 도서관 운영이 중단됨을 보도하고 있다.

참고자료 : 국립철도학교 100년 약사 / 『한국철도대학 100년사:1905-2005』 / 나무위키 한국철도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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