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엇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이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력존엄사’는 얼핏 듣기에는 조력을 받아 존엄하게 죽는다는 의미처럼 들리지만,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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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오르는 단골 이슈 중 하나가 존엄사이다. 불치병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거나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연명의료에 의존하고 있다면, 한번쯤 안락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스위스의 안락사 조력단체를 방문하여 삶을 마감하는 한국인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알려진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나치의 경험에서 비롯된 우생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탓에, 인위적으로 삶을 중단시키는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의료를 넘어서 생명을 끝없이 연장시키는 의술이 발달할수록, 안락사에 대한 관심은 커지게 되었다.
안락사에 대한 논쟁은 입법보다 재판을 통하여 벌어진 경우가 많다. 허용 여부와 허용 정도에 대하여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안락사의 일반적 기준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존엄한 죽음을 희망하는 환자나 가족이 안락사를 허용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순간, 사회적인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70년대 중반 미국 뉴저지주에서 제기된 ‘퀸란(Quinlan) 사건’이 대표적이다.
KAREN ANN QUINLAN, 31, DIES; FOCUS OF '76 RIGHT TO DIE CASE (Published 1985)
www.nytimes.com
[오늘 속의 어제] ‘인간답게 죽을 권리’ 존엄사 첫 판결 퀸란 사건 그 후... | 한국일보
www.hankookilbo.com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퀸란의 부모는 인공호흡장치를 제거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주대법원은 자연적 원인에 따른 죽음에 대하여는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소극적 안락사(연명의료 중단)의 길을 열었다. 퀸란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9년이나 더 생존했고, 그 부모는 비영리재단과 호스피스 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다.
잘 알려진 우리나라의 김 할머니 사건도 유사한 과정을 겪었고, 연명의료결정법이라는 최소한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률을 낳았다. 2018년부터 시행된 연명의료법에 따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무려 300만 명에 이른다. 금기시하던 죽음에 대한 논의의 빗장이 풀린 것이다.
연명의료 중단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법과 의료, 윤리와 가치관, 종교와 과학이 중첩되는 어려운 영역임에 틀림 없다. 의료체계와 호스피스 및 사회안전망, 의료비 부담 시스템과 개인의 경제력, 나아가 가족관계까지 뒤얽힌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최근 세계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가 급속히 늘고 있다. 이미 안락사가 합법화된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의 일부 주 등 외에, 2020년대 들어 스페인, 포르투갈이 안락사에 관한 입법을 하였고, 호주에서는 모든 주에서 안락사를 허용하게 되었다.
2002년 법률로 적극적 안락사를 도입한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를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 이제 연간 8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안락사로 세상을 떠난다. 네덜란드 인구가 한국의 1/3인 점을 감안하면, 안락사는 보편적인 제도로 자리잡은 듯하다. 작년에는 건강이 악화된 네덜란드의 전 총리 부부가 안락사를 선택하여 함께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안락사는 생명을 논하는 것인 만큼 마땅히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히 좀 더 평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호스피스 케어를 적극 확대하는 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인하여 존엄한 죽음으로 포장된, 죽음에 대한 압박을 경계해야 한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죽어야 할 의무로 바뀌는 무서운 사회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럴지라도 존엄사 문제는 개개인의 소송에만 미룰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다. 국회가 논쟁의 한복판에서 해답을 찾을 의지가 없다면, 헌법불합치 결정을 통하여 적절한 해법을 촉구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존엄한 죽음을 바란다는 말은 존엄한 삶을 바란다는 말과 다름없다. 삶의 끝 지점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존엄한 삶을 살고 싶은 간절함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홍기태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전 사법정책연구원장) 2025-05-07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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